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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ref>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ref>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ref>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ref>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f>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ref>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가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ref>인민당 제외</ref>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f>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ref>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새로 구성된 독일의 새 내각은 전국자유당의 루돌프 폰 베니그센을 수상으로하는 자유주의 거국내각이었다.<ref>베니그센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반사회주의법을 반대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물론 그건 사상으로서의 자유를 인정했을 뿐, 사회주의와 친하게 지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ref> 하지만 베니그센은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있어서 같이 내각을 구성하던 사사건건 자유사상가당의 루돌프 버차우와 충돌했다. 특히 1891년에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오만 정권을 완전히 끝장내며,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로부터 경영권을 정부로 돌린 이후 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갈등의 원인은 바로 식민지 주민들도 투표권을 가지는 지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변질되며, 백인이 열등한 인종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버차우는 의원 이전에 과학자였으며, 그는 대표적인 반다윈주의, 반인종주의 사상가였다. 결국 1891년 9월 버차우가 식민지 주민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내각을 불신임 하겠다는 최후 통첩에 베니그센이 영국식 자치령을 만들어 크게 서아프리카, 서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자치령을 세우고 각 주민들의 투표로 의회를 구성하며, 독일에서 총독을 파견하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버차우가 받아들이며 '''루돌프 타협'''<ref>루돌프 폰 베니그센-루돌프 버차우</ref>이 성사된다.
한 차례의 큰 갈등이 마무리된 이후 베니그센은 버차우의 급진적인 행동이 당내에서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일반 대중들이 아프리카 식민지의 사실상 방류를 심각히 원하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사회진화론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지지 받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892년 8월 자유사상가당의 대표적 반사회주의자인 유겐 리히터와 접촉하고 그를 대표로 추대하면서 버차우를 당내 비주류로 만들어버린다. 버차우는 흔히 '''동지의 배신'''이라고 회자되는 이 사건을 통해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으며, 1892년 9월 의원직을 사퇴한다.
그리고 1893년 열린 모두가 주목하던 9차 제국의회 선거는 식민지 이탈을 주도했던 자유주의 연립정당들의 지지율이 대폭 감소하고, 보수주의 우익 정당들이 10%p이상 더 득표하며 세력을 늘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결과는 단연 사회민주당 40.33%, 397석 중 160석 석권이라는 것이다. 특히 자유사상가당에서 있었던 동지의 배신 이후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인민당으로 옮겨가며, 인민당도 큰 성과를 거둬 9.76%, 38석을 얻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인민당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은 정당이라는 것이었고,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이 때 새로운 수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이었다.
베벨은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엥겔스에게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엥겔스가 전 세계에 이를 타진하자 만국의 당국의 감시를 피해 숨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9월 3일 오전 제국의회에서 사회연금법을 통과시킨 베벨은 내일 함부르크에서 예정되어있던 제2인터네셔널 총평의회장으로 이동 중이었으나, 알프레드 폰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이끄는 슐레스비히의 4군단이 사문화된 반사회주의법을 근거로 그를 체포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였다.


== 각주 ==
== 각주 ==

2021년 4월 29일 (목) 05:19 판

Order of Might는 1960년을 배경으로 미국과 유럽 간에 벌어지는 냉전을 다루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다.

리반님과 함께 현재 구상 단계에 있다.

구상

모니터링 독일 제국은 1888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와 제국의 통일을 주도한 비스마르크 간의 충돌로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자유주의 사상에 심취한 상태였으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시민의 권리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민의를 대표하는 제국의회를 무시하며 정책을 진행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특히 그가 발의한 1878년의 반사회주의법은 프리드리히 3세가 보기에 시대에 뒤쳐진 반동주의적 인물이라고 보이기에 충분했다.

즉위와 동시에 프리드리히 3세는 비스마르크를 불러 사퇴를 종용했으며, 결국 1888년 7월, 황제의 명령을 받은 비스마르크가 모든 인민에 대한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어떠한 검열도 금지한다는 제국 인민의 권리법, 제국인권법을 발의하고 수상직을 사퇴하며 본격적인 독일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1]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완전 비례대표제를 의회에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며 의원들을 압박했다. 보수당과 제국당은 법안을 재고해달라며 애원했지만 중앙당과 전국자유당이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 시키면서 새 선거법이 제정되었다.[2]

급진적으로 이루어진 개혁과 함께,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과 함께 세계적으로 벌어진 제2인터네셔널이 발족하면서 불과 1년 전 해체되었던 독일의 사회민주당이 이곳에 가입한다. 당시 인터네셔널에서는 독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이는 독일이 당시 열강 가운데서 유일하게 사회주의 운동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등이 사회민주당의 휘하에 존재하고, 평의회를 개최해 사회민주당의 당론을 의결하고 이를 따르는 제1인터네셔널과 같은 체제를 독일 내에서 구축했기 때문이다.[3]

그리고 1890년 2월 2일, 프리드리히 3세의 사상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8차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득표율 35.27%로 대약진하며 397석 중 무려 140석이라는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특히 좌익자유주의 정당인 자유사상가당과 인민당을 합치면 무려 210석 즉 과반을 확보해 연립여당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정당의 정권 창출을 볼 수 없었던 좌우익 자유주의 정당[4]과 중앙당이 연합하여 거국내각을 구성한다. 프리드리히 3세는 선거에서 최고로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민의를 왜곡한다고 생각해 제국 신문의 투고란에 황제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무엇 인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투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5]

이 선거는 또 당시 각 세계의 노조와 사회주의 정당의 친목단체 정도로만 운영되던 제2인터네셔널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제2인터네셔널의 목표인 합법적 수단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이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 선거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은 사회민주당은 독일을 중심으로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를 다시 구성할 것을 세계에 타진하였고, 1891년 12월 25일 독일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자 연합 대회()에서 총평의회 의장을 선출하였는데, 그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70이 넘은 엥겔스는 노구를 이끌고 단상에 서서 다시 한 번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운동을 역설했다.

새로 구성된 독일의 새 내각은 전국자유당의 루돌프 폰 베니그센을 수상으로하는 자유주의 거국내각이었다.[6] 하지만 베니그센은 아프리카 식민지 정책이나, 대외정책에 있어서 같이 내각을 구성하던 사사건건 자유사상가당의 루돌프 버차우와 충돌했다. 특히 1891년에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오만 정권을 완전히 끝장내며, 독일 동아프리카 회사로부터 경영권을 정부로 돌린 이후 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갈등의 원인은 바로 식민지 주민들도 투표권을 가지는 지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당시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변질되며, 백인이 열등한 인종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상이 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버차우는 의원 이전에 과학자였으며, 그는 대표적인 반다윈주의, 반인종주의 사상가였다. 결국 1891년 9월 버차우가 식민지 주민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 내각을 불신임 하겠다는 최후 통첩에 베니그센이 영국식 자치령을 만들어 크게 서아프리카, 서남아프리카, 동아프리카 자치령을 세우고 각 주민들의 투표로 의회를 구성하며, 독일에서 총독을 파견하는게 어떻냐는 제안을 버차우가 받아들이며 루돌프 타협[7]이 성사된다.

한 차례의 큰 갈등이 마무리된 이후 베니그센은 버차우의 급진적인 행동이 당내에서 지지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일반 대중들이 아프리카 식민지의 사실상 방류를 심각히 원하지 않고 있었던데다가, 사회진화론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지지 받는 이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892년 8월 자유사상가당의 대표적 반사회주의자인 유겐 리히터와 접촉하고 그를 대표로 추대하면서 버차우를 당내 비주류로 만들어버린다. 버차우는 흔히 동지의 배신이라고 회자되는 이 사건을 통해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었으며, 1892년 9월 의원직을 사퇴한다.

그리고 1893년 열린 모두가 주목하던 9차 제국의회 선거는 식민지 이탈을 주도했던 자유주의 연립정당들의 지지율이 대폭 감소하고, 보수주의 우익 정당들이 10%p이상 더 득표하며 세력을 늘렸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결과는 단연 사회민주당 40.33%, 397석 중 160석 석권이라는 것이다. 특히 자유사상가당에서 있었던 동지의 배신 이후 적지 않은 의원들이 인민당으로 옮겨가며, 인민당도 큰 성과를 거둬 9.76%, 38석을 얻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 인민당이 사회주의적 성향이 짙은 정당이라는 것이었고,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이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이 때 새로운 수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아우구스트 페르디난트 베벨이었다.

베벨은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엥겔스에게 제2인터네셔널의 총평의회 소집을 요청했고, 엥겔스가 전 세계에 이를 타진하자 만국의 당국의 감시를 피해 숨어 있던 사회주의자들이 독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9월 3일 오전 제국의회에서 사회연금법을 통과시킨 베벨은 내일 함부르크에서 예정되어있던 제2인터네셔널 총평의회장으로 이동 중이었으나, 알프레드 폰 발더제(Alfred von Waldersee)가 이끄는 슐레스비히의 4군단이 사문화된 반사회주의법을 근거로 그를 체포하고 베를린으로 진격하였다.

각주

  1. 비스마르크는 황제의 사퇴 종용으로 불려간 후 곧 수상직을 잃을 것을 직감하고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가기 위해 1888년 4월,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반사회주의법을 통해 해체해버린다. 오히려 이 조치가 프리드리히 3세의 사퇴 압박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2. 보수당과 제국당은 어쩔 수 없는 처사였는데, 지금까지는 소선거구에 결선투표제였기 때문에 득표율이 높게 책정됨과 동시에 의석을 일부 지역에서 고정적으로 얻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물론 평의회에서 결정되어서 따랐을 뿐, 당시 주류인 라인철강노조를 제외하고는 평의회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낸 노조는 별로 없었다. 또한 노조들의 성향도 제각각이어서 애초에 평의회 위에 사회민주당이 있는 게 아니라 평의회 아래에 사회민주당이 있어야한다는 파벌도 존재했을 만큼 내부 잡음도 많았다. 다만 1888년의 베를린의 여름이라 불리는 새 시대 앞에 모두 잠시 이권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4. 인민당 제외
  5.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3세는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과 자신의 왕권의 정당성 중 선출된 권력의 정당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결국 선출된 권력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1890년의 선거 이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로서의 정치적 발언을 되도록 자제하였으며, 신문에 투고하고 가끔 기자들의 익명의 취재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정치 개입의 끝이었다.
  6. 베니그센은 과거 비스마르크가 제정한 반사회주의법을 반대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물론 그건 사상으로서의 자유를 인정했을 뿐, 사회주의와 친하게 지내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7. 루돌프 폰 베니그센-루돌프 버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