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천녕 황왕 歷代 天寧 皇王 864-12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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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천녕 황왕 43대 탐라군왕 달고원무대왕 達暠元武大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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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달고왕(達暠王), 원무대왕(元武大王)[1] | ||
별호 | 성흥즉태왕(成興卽太王)[2] | ||
연호 | 탁평(啄評, 864~868)[3], 철금(哲今, 868~875) | ||
생몰연도 | 848~875 (28세) | ||
성씨 | 장(張) | ||
휘 | 회(澮), 회(獪)[4][5] | ||
출생지 | 탐라(耽羅) 성주현(星主縣) | ||
사망지 | 천녕(天寧) 영월성(映月城) | ||
탐라군왕 耽羅君王(857-875) | |||
천녕황왕 天寧皇王(864-875) | |||
달고왕(達暠王, 848 ~ 875)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건국자이다. 아버지를 도와 구주 정벌 전쟁(九州征伐戰爭)에 나섰다. 857년,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에서 익평왕이 전사하자, 군권을 차지한 정영(鄭瑛)을 독려하였다. 864년에 지역 호족들을 규합하여 하익성 전투(下益城戰鬪)에서 일본 조정군을 격파하고 구주 전역을 차지하였다. 이후 천녕(天寧)이라는 국호를 내세워 독립 왕국을 건설하였다.
개요
“ 一年 冬十月, 群臣上言 國名理 不定爲 臣等以爲 天者廣光意伊厼,
寧者平安日新意是乎 國號定爲爲尼 王從之
(일년 동십월, 군신상언 국명이 부정위 신등이위 천자광광의이며,
녕자평안일신의시호 국호정위위니 왕종지)[1]” — 《대야서기(大野書記)》 향전(鄕傳) 中
“ 왕(달고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인자하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허나 제 명에 못 죽었으니(不得其死) 이를 어찌하리까.” — 서제거(徐悌據) 「충위비문(忠委碑文)」 전문 中
10살에 즉위하여 28살에 사망한 청년 군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벌 전쟁을 완수하고 측근들을 통해 매우 불안정한 지역 호족 연맹체[2]에서 나름대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다자이후(大宰府) 일대를 직할지로 운영하여 토지 기반을 마련코자 했고, 각 호족들에게는 향직(鄕職)을 내려 민심을 수습과 권력층을 회유코자 했고, 때로는 상수리 제도(上守吏制度)를 통해 호족들을 억압하기도 했다.
재위 기간
구주 정벌 완수 이후인 864년부터는 호족 사회가 부담하던 연공 부담을 최대한 억제했으며, 정략결혼(政略結婚)과 사성(賜姓)을 통해 지역적 연고가 없던 왕실과 호족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또, 남부와 중부에는 별도의 지방관을 파견치 않도록 하여 호족 사회의 지방 기득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상수리 제도의 활용으로 호족들의 반기를 철저히 억누르는 모습을 보이는 등 회유책과 강경책을 적절히 이용했다.
지방 행정 체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기존 율령국(律令國)을 바탕으로 신라(新羅)의 영향을 받아 전국을 9주 3소경으로 재조직하여 편성하였다. 각 호족들은 장원의 크기와 영향력에 따라 군수(郡守)·현령(縣令)으로 임명하였다. 말년에는 이들의 행정력을 어느정도 통제하기 위해 외사정(外司正)을 파견하기도 했다.
865년, 일본 조정에서 잃어버린 구주를 회복하기 위해 세토 내해(瀬戸內海)로 수상 함대들을 배치하였고 달고왕 역시 300여 척에 달하는 교관선과 6,000명에 달하는 수병들을 통해 방어하게 되었다. 이들은 풍주(豊州)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를 뇌호 해전(瀬戸海戰)이라고 불렀다. 이 전투에서 초기에는 일본 조정군이 우세했으나 10번에 걸친 싸움 끝에 수상 운용 능력이 뛰어났던 천녕군이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고, 전쟁 수행 의지가 꺾인 세이와 덴노(清和天皇)는 달고왕을 형식상 좌왕(左王)의 작위를 제수하는 것으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이후 867년에 달고왕은 세이와 덴노에게 형식상으로 조공(朝貢)하였는데, 일본 조정이 재차 무력 탈환을 염두한 것으로서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세토 내해(瀬戸内海)와 근접했던 복성주(福成州)와 대분주(大分州)에는 각각 일전성(日田城)과 저축성(杵築城)을 축성하고 교관선(交關船)을 통한 해안 경비를 강화하는 등 군사 충돌을 대비하기도 했다. 내부적으로는 호족들의 반기 소요를 막기 위해 노병(弩兵)들을 양성하고 이들을 친위대로 활용했다.
870년에는 각각 신라의 경문왕(景文王)과 당나라(唐國)의 의종(懿宗)에게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국제 사회에 엄연한 일원임을 증명하고 일본 조정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일이었으리라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