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세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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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타 전투
Batalla de la Meseta
에스페란토 내전의 일부
Bundesarchiv Bild 183-2006-1204-500, Spanien, Schlacht um Guadalajara.jpg
메세타 외곽에서 반군과의 교전을 준비하는
공화국 제19혼성여단 병사들
날짜1934년 1월 31일 ~ 1936년 9월 15일
장소에스페란토 공화국, 메세타 시
결과 공화국의 승리
교전국
에스페란토 국가전선 에스페란토 국가전선 에스페란토 공화국 에스페란토 제2공화국
지휘관
에스페란토 국가전선 에밀리오 데 라파엘White flag icon.png
에스페란토 국가전선 라파엘 데 올리바레스
에스페란토 공화국 아마도 데 리에고 디아즈
에스페란토 공화국 카를레스 데 이나고 칼데론
에스페란토 공화국 엔리케 라포르타
병력
56,000명 45,000명
피해 규모
21,000명 사망
4,378명 부상
8,600명 사망
4,900명 부상

메세타 전투(스페인어: Batalla de la Meseta)는 1934년 1월 31일부터 1936년 9월 15일까지 에스페란토의 수도인 메세타를 두고 좌파 공화국 정부와 우파 반란군(국가전선) 사이에 있었던 공방전이다. 이 전투에서 공화국이 반란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면서 내전의 판세가 급격히 공화국 쪽으로 기울게 된다.

내전 발발 이전 상황

제2공화정이 성립되기 이전의 에스페란토는 왕정의 무능과 정치적 부패 등으로 정세가 크게 혼란해져 있었다. 제1공화정부터 에스페란토 내전 시점까지 무려 40여 차례의 쿠데타와 60여 차례의 정치적 위기가 있었고, 특히 극도로 군벌화된 군부는 걸핏하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런 상황에서 라파엘 데 올리바레스(Rafael de Olivares) 장군을 필두로 한 군부가 분리주의자들의 테러, 20%가 넘는 실업률 등을 이유로 다시 한번 쿠데타를 일으켰고, 군부에 의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국왕 카를로스 9세는 데 올리바레스 장군을 승인했다.

그에 따라 코르테스(의회)가 해산되었고, 기존에 활동하던 정치인들과 정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와중, 대공황의 여파로 쿠데타 이전보다 경제가 어려워진데다, 데 올리바레스 장군의 갖가지 실책으로 결국 공화주의자들은 물론 국왕과 군부까지 데 올리바레스 장군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데 올리바레스 장군이 사임하고, 데 올리바레스의 쿠데타를 승인한 카를로스 9세를 공화주의자들이 공격하기 시작하자, 당시 육군 총참모장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리가 코민(Francisco Prega Comyn) 장군은 정치적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 국왕을 구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총선을 요구했고, 결국 국왕은 총선을 실시할 것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20년 4월에 열린 1차 전국 총선에서 공화주의자들이 대승을 거두면서 국왕의 퇴위를 주장했고, 국왕 역시 퇴위에 동의하면서 에스페란토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집권여당이 된 급진당 내각은 군벌화된 군부의 숙군과 지방 토호들을 향한 농지개혁을 실시했으나, 보수 세력의 급격한 반발만 초래했다. 결국 군부 내 우파 성향 장성들은 급진당 내각을 타도한 뒤, 구국내각을 구성해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를 부활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론을 구워삶아 보수와 군부 진영만이 정의고, 생디칼리스트들과 공화주의자 진영은 악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려고 시도했다.

이런 군부의 폭주에 불안을 느낀 디에고 데 이네스트리자스(Diego de Inéstrizas) 총리는 군부의 숙군을 서둘렀으나, 이를 사전에 감지한 우파 장성들은 군부 독재자였던 라파엘 데 올리바레스 장군을 영도자로 삼아 수도인 메세타와 주요 도시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934년 1월 20일, 오전 12시)

전투 개전 이전, 공화국 정부의 대응

¡Defendemos la Democracia!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할 것입니다!)

- 에스페란토 제2공화국 대통령, 비센테 아귀레(Vicente Juan Aguirre), 1월 20일의 대국민 연설에서.

개전 시각이나 첫 교전이 일어난 시간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참전 용사들의 증언이 엇갈리고, 쿠데타군의 의도적인 정보망 사보타주 때문에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오전 3시 21분에 이르러, 공화국 정부는 쿠데타군과 정부군이 동시다발적인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시간 30분 후,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끝마친 공화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공화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방송을 내보낸 뒤, 반토막난 육군 병력과 온전한 해군 병력을 규합하여 혼성여단(Brigada Mixta)으로 재구성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반란군들의 공세를 차단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메세타 콤포스텔라 대학
Universidad Compostela de Meseta

이때, 공화국 정부는 최전방이 된 메세타를 방어하기 위해 메세타 지역에 배치된 모든 부대를 지휘하는 메세타 방어사령부를 급편하고, 아마도 데 리에고 디아즈 소장에게 사령관 직책을, 아리아스 테헤로(Arias Tejero) 대령에게 참모장 직책을 맡긴다. 사령부 인원은 메세타 지역에 배치된 국가 헌병들과 잔존 육군 병력, 해군 병력을 차출해서 구성했다.

방어사령관에 착임한 아마도 데 리에고 장군은 도시 외곽의 평원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그 사이에 메세타 도심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방어계획을 수립했는데, 참모장인 테헤로 대령은 지연전 이후 도시 외곽에 가까운 메세타 콤포스텔라 대학(Universidad Compostela de Meseta)으로 반군을 유도하자는 제안을 했다.

곧 테헤로 대령의 제안은 받아들여져, 테헤로의 제안에 따라 2개 기병여단이 메세타 콤포스텔라 대학에 급파되었고, 콤포스텔라 대학 캠퍼스 건물들은 민병대와 군인들이 대거 동원되어 참호와 대전차진지, 바리케이드와 토치카로 요새화했다. 그리고 CNT(전국노동자동맹)에서 공화국과의 협조를 결정, 민병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전투 개전 이전, 국가전선(반란군)의 공세 계획

에밀리오 데 라파엘
Emilio de Rafael
Es necesario difundir el miedo. Sin ningún tipo de remordimiento o vacilación.
(공포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양심의 가책이나 주저함이 없이 말이다.)

- 에스페란토 국가전선 전선 사령관, 에밀리오 데 라파엘(Emilio de Rafael)

1933년 11월에 최초 작성된 반란군의 쿠데타 계획은 에밀리오 데 라파엘 소장이 말한대로 선전과 선동을 통해 반군(국가전선)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고, 그를 통하여 적군의 내부 혼란을 부추긴 뒤에 혼란에 빠진 각 도시들과 지역을 점령해나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 파악을 빠르게 끝마친 공화국 정부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지지를 호소하고, 병력의 결원을 채우는 등 빠르게 조치를 취하자 쿠데타 계획은 크게 꼬이게 된다.

이에 반란군은 반군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키려면 그에 걸맞는, 가령 수도 함락과 같은 전과를 세워야한다고 판단한다. 결국 반란군은 에밀리오 데 라파엘 장군의 주도 하에 메세타 공격을 결정하였으며 그에 따라 3개 흉갑기병여단이 포함된 56,000여 명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이때, 에밀리오 데 라파엘 장군은 사전정찰 결과를 토대로 군단 사령부 예비병력을 포함한 주공 전력을 메세타 콤포스텔라 대학과 메세타 외곽 방향으로, 조공 전력으로는 유브라데 교 방향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공화국 측 부대 배치[1]

메세타 방어 사령부

  • 총사령부 (사령관 : 아마도 데 리에고 디아즈 소장)
    • 제31기병여단
    • 제49기병여단
    • CNT 제1민병대
    • 제5포병연대
    • 제3국가헌병연대
  • 제2보병사단 (사단장 : 클레토 마르셀로(Cletus Marcelo) 준장)

콤포스텔라 대학 지구

  • 콤포스텔라 대학 주둔본부 (사령관 : 호세 바라하스(José Barajas) 준장)
    • 제7기병여단 : 캠퍼스 외곽 지역 방어
      • 제2독립흉갑기병대대 : 메세타 방어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에 따라 콤포스텔라 대학 지구로 긴급배치
      • 제9독립흉갑기병대대 : 1차 콤포스텔라 전투 이후 메세타 방어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에 따라 시 외곽 지구로 재배치
    • 제31기병여단 : 캠퍼스 방어
    • CNT 제2민병대 : 선무공작 및 캠퍼스 방어

정부구역 지구

  • 정부구역 방어 사령부 (사령관 : 아르투로 데 콤파니스(Arturo de Companys) 준장)
    • 혼성수도여단 : 코르테스(의회) 반경 4km 지역 방어
    • 제11보병여단 : 메세타 시청 반경 5km 지역 방어
    • 제4포병연대 : 유브라데 교 지구 및 콤포스텔라 대학 지구 화력 지원
    • 제20포병연대 : 시 외곽 지구 화력 지원
    • CNT 제5민병대 : 센타우로 교도소 등 교정시설 방어
    • 제104혼성여단 : 중대 단위로 시내 병원에 배치
    • 제1국가헌병연대

시 외곽 지구

  • 시 외곽 지구 주둔본부(사령관 : 엔리케 라포르타(Enrique Laporta) 준장)
    • 제19혼성여단
    • 제11기병여단
      • 제9독립흉갑기병대대 : 메세타 방어사령부가 하달한 작전명령에 따라 시 외곽 지구로 재배치
    • 제3공병단 : 외곽 지역 지뢰지대 구축
    • CNT 제9민병대 : 선무공작 및 외곽지대 방어
    • CNT 제11민병대

유브라데 교량 지구

  • 유브라데 교각 통제소(소장 : 카를레스 데 이나고 칼데론(Carles de Ignago Calderón) 총경)
    • 제2공병단 : 유사 시 교각 폭파 임무
    • 제8공병단 : 유사 시 교각 폭파 임무
    • 제8독립포병대대 : 유브라데 교 방어 지원
    • 제2국가헌병연대
    • CNT 제4민병대

국민전선(반란군) 측 부대 배치[2]

철십자 군단 사령부

  • 총사령부 (사령관 : 에밀리오 데 라파엘 소장)
    • 제51산악연대
    • 제81흉갑기병여단
    • 제59보병여단
    • 제30보병여단
  • 제9보병사단 (사단장 : 후스토 호세 캄포라(Justo Jose Campora) 준장)

유브라데 교량 지구

  • 유브라데 지구 사령부 (사령관 : 로베르토 비뇨네(Leopoldo Vignone) 준장)
    • 제1근위보병연대
    • 제51보병연대
    • 제35흉갑기병여단
    • 제39흉갑기병여단
    • 제25포병여단
    • 제85기병여단
      • 올리바레스 제2여단 (여단장 : 에바리스토 데 페냐(Evaristo de Peña) 대령)

외곽 지구

  • 메세타 지구 사령부 (사령관 : 페르난도 데 사파테로(Fernando de Zapatero) 준장)
    • 제9포병여단
    • 제8공병단
    • 제69보병연대
    • 제45흉갑기병여단
    • 제101기병여단
    • 제105보병연대
      • 올리바레스 제4여단 (여단장 : 호아킨 트루히요(Joaquín Trujillo) 대령)

전투 전개

콤포스텔라 대학에서의 초전(1차 콤포스텔라 대학 전투)

Si no podemos guardarnos, seremos víctimas.
(우리가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희생자가 될 뿐.)

- 공화국 육군 소장, 아마도 데 리에고 디아즈(Amado de Liego Diaz)

1934년 1월 31일, 오전 9시 30분. 국가전선 올리바레스 제4여단이 콤포스텔라 대학의 CNT 정문 감시탑을 공격하면서 전투의 막이 올랐다. 공격을 받은 CNT 민병대는 서둘러 콤포스텔라 대학 인문관으로 후퇴했고, 곧 이어 공화국 제4포병연대가 CNT 정문 감시탑 쪽으로 포격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국가전선의 주공인 제45흉갑기병여단이 전차대를 앞세워 메세타 외곽 지역의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중간에 매복한 공화국 제19혼성여단의 대전차포들이 활약했던데다가 공화국군이 사전에 설치한 지뢰지대에 걸리면서, 국가전선 제45흉갑기병여단은 돌파 시도는 실패했고, 콤포스텔라 대학을 공략하던 올리바레스 제4여단 역시 민병대의 강력한 저항과 공화국 제4포병연대의 화력지원에 패퇴한다.

이 때문에 시의 외곽지대가 완전히 요새화되었다고 지레짐작한 현장 지휘관이었던 페르난도 데 사파테로는 콤포스텔라 대학 쪽에는 제한적인 공세를 명령한 라파엘의 의지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있는 콤포스텔라 대학 지구으로의 전면공세를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외곽 방면에 대한 국가전선의 공세는 주춤해졌고, 이를 간파한 리에고는 적의 공격이 소원해진 틈을 타 즉시 가용할 수 있는 잉여 전력을 시 외곽 방위선에 집중시켜 방위선을 강화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사파테로는 분노한 라파엘에 의해 경질되었고, 라파엘은 재차 시 외곽지역의 방위선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라파엘의 명령에 따라 2월 16일, 드디어 시 외곽지역을 향한 공세는 시작되었다. 제9포병여단의 지원을 받는 제45흉갑기병여단과 제101기병여단으로 구성된 양익이 메세타 시 외곽 방어선으로 향하는 남부 3번 국도를 통해서 전면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제105보병연대와 올리바레스 제4여단이 콤포스텔라 대학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때 라파엘은 제105보병연대와 올리바레스 제4여단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공화국의 민병 부대를 붙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국가전선군의 남부 3번 국도 공세는 그새 구축된 방어선을 등에 업은 제19혼성여단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공세가 저지되었다.

한편, 라파엘이 조공 공세를 개시하기로 한 콤포스텔라 대학 쪽에서는 호세 바라하스 준장이 이끄는 공화국 혼성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정규군과 민병대가 마구잡이로 혼합된 부대였지만 공화정을 수호하겠다는 연대감으로 뭉쳐있었다.

그러나 정문과 인문관 근처에 구축한 방어시설이 앞선 2차례의 공세 때 무력화되자, 혼성군은 일단 공학관 근처까지 철퇴하여 방어 태세를 정돈하였다.

유브라데 교량 전투

콤포스텔라 방어선 상실, 그리고 탈환(2차 콤포스텔라 대학 전투)

메세타 외곽 전차전

전투의 종결

전투 이후

더 보기

  1. Ministerio de Defensa Nacional (1950).《Anuario militar de 1934》
  2. Prof. Alfonso Díaz I Cornet (1958).《Caballos y Balan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