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한치시기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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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몽고한치시기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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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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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몽고주
夢姑州 | Korean east Mongolia state
대한 제국의 식민지
국기 휘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몽골 출병 이전 해방 이후
환계군벌 몽골 인민공화국
상징
국가
애국가
(愛國歌)
지리
최대도시
다르항시
위치
동몽골
국가
대한제국
면적
약 52,3126㎢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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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140만
공용어
한국어, 몽골어, 중국어, 러시아어, 만주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만주 문자, 키릴 문자, 몽골 문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중국인 등
국교
국체유학
종교 분포
몽골 신앙, 기독교, 유학, 불교, 티베트 불교, 이슬람교 등
군대
한국몽고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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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유교 파시즘 · 군사독재
국가 원수
대한제국 대황제
통치 수반
몽고주 도독
통치기관
몽고도독부
연호
성덕 (1934~1944)
통화
대한제국 원 (圓)

개요

몽고주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대한 제국의 외지였다.

설명

국제사회 진출 이래 한국은 늘상 외만주, 몽골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대외확장정책 자체가 만주를 식민화 내지 속국화하고, 몽골을 복속시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었기 때문. 대청제국을 식민화 한 데 이어 이미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였던 1915년에 몽골 점령을 시도한 적도 있었으나, 당시에는 일시적인 점령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영국의 압박과 청도 반환 문제,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에 대한 간섭에서 비롯된 역량 미비로 인해 조기 철수로 끝을 맺은 상태였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 파시즘 성향의 김차암 내각이 집권하자, 한국은 전보다 왕성한 대외팽창의지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첫번째 계획으로 선정된 것이 바로 몽골 출병이었다. 그렇게 대한제국군은 몽고 출병으로 예케 몽골 울루스라는 괴뢰국을 건국한 뒤 만주에 가까운 동남부 지방 일부를 할양받고, 여기에 설립했던 식민지가 바로 몽고주이다.

초기에는 몽고 총독부가 설치되어 통치를 맡았으며, 이후 1937년에 몽고 도독부로 격하되어 도독제도로 전환되었다. 그러는 한편, 당시 지하자원은 많았지만 낙후된 인프라를 가지고 있던 예케 몽골 울루스 및 몽고주로 진출하여 자원 채굴에 필요한 기계, 부품등을 생산한 뒤 납품하는 방식으로 대기업들은 큰 돈을 거머쥘 수 있었고, 덕분에 한동안 몽골 일대는 남만주의 거대한 농지, 북만주의 공업지대에 이어 한국에게 있어서 중요한 공장지대로서 거듭났다.

그러나, 몽고주에서의 빈부격차를 극과 극을 달렸다. 개발 지수와 인구수야 한국의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 부는 모두 한국인과 소수의 부유한 몽골 귀족들에게 돌아갔을 뿐이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가난에 시달리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이는 훗날 동몽골 일대 노년세대에서 반한감정이 생기는 여파를 가져오기도 했다.

거기다가, 몽고주에 산적했던 공장들에서는 근로기준법이 본토 이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시 몽고주의 공장을 둘러보던 사람에 따르면, 평균적인 노동시간이 하루 14시간으로 미친듯이 길었다고.

게다가 문화적인 동화정책 또한 일어났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몽고주의 빠른 동화를 위해 내몽융합(内蒙融合)이라는 구호 아래 동화정책을 추진했고,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로 1936년에 개교한 야공제국대학이 있다. 그러나 문화를 한국식으로 바꾸고 동화를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몽골인을 대상으로 한 차별은 그대로였고, 학교에서는 역사 교육 당시 고려가 몽골에게 지배당한 시대를 '몽골이 고려의 문화에 감탄하여 스스로 부인을 자처했던 시대'로 외곡해서 가르쳤다.

멸망

초기엔 제 2차 동아시아전쟁 중국 전선과 몽골 전선에서 군수물자 보급기지로서 유용하게 사용됬던 몽고주였으나, 한국이 점점 전황이 악화되기 시작하며 몽고주의 상황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동시베리아 전쟁에서 한국이 몽골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소련과 몽골 인민공화국측에게 만몽 공세로 빼앗기기 시작했고, 뒤이어 1945년 한국이 내전 끝에 민주화를 맞고 연합국에게 칭제건원 이전에 관할했던 영토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투항하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식민지였던 몽고주 또한 몽골 인민공화국에게 점거되었고, 당시 몽고주의 도독이였던 신태영이 항복 문서를 전달, 얼마 후 한국군과 몽고주에 거주중이던 한국인들이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몽고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기타

박정희 전 육군대신이 군생활 초기에 복무했던 지역이 바로 이 일대였다고 한다. 이후 당시 러시아 차르국령이었던 이르츠쿠르 일대로 전출되면서 몽고주에서의 생활은 끝났다는 듯.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