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공동자치령 (아침해의 원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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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  
아침해의 원유관
아침해의 원유관은 임진왜란 축소로 인해 뒤바뀐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세계관입니다.
청화대에 이화문이 꽂혀있는 이 세계의 국가, 사회, 정치 및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연해주 공동자치령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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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식민지 · 자치령 및 조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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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지역 명칭 담당기관
북만주 만주 만주총독부
동몽골 제국 몽고주 몽고도독부
프리모예 연해주 자치령 연해총관부
해당지역 명칭 기관
칭다오 청도 청도행정부
* 자치령은 1920년대 괴뢰국으로 [1]승격
괴뢰국 · 군정청
연해주 공동자치령
沿海州共同自治令 | Primoje Joint Self-Governing Territory
대한 제국, 일본 제국의 식민지
휘장[2]
공민충정
(公民忠情)
합병 이전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러시아 차르국
상징
한국의 상징
이화문
일본의 상징
국화문장
국가
애국가
(愛國歌)
기미가요
(君が代)
지리
최대도시
해삼위(海参崴)
위치
프리모예 지방
국가
대한제국
대일본제국
면적
약 164,673km²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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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
약 240만 명
공용어
한국어
만주어
러시아어
일본어
공용 문자
한글, 한자, 키릴 문자, 가나 문자
민족
한국인, 러시아인, 만주인, 일본인 등
국교
없음
종교 분포
기독교, 유학, 신토, 불교 등등
군대
해삼위군, 우로지요군
정치 ·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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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공동통치령, 행정부 정치
국가 원수
대한제국 대황제, 대일본제국 천황
통치 수반
연해총관부 총관, 연해주청 장관
통치기관
연해주청, 연해총관부
연호
융희

메이지→다이쇼

통화
대한제국 원 (圓), 일본제국 엔(円)

개요

연해주 공동자치령대한제국, 일본제국의 합의 아래 프리모예 지방에 설치되어, 1904년부터 1920년까지 유지되었던 식민지 내지 자치령이다.

자치령이 되기 이전

본래 연해주는 만주에 있던 후금의 영토확장으로 처음 개척된 곳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 여진족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러시아, 한국 등의 세력등이 연해주에 눈을 대는 일이 종종 발생했었다. 결국 1689년에 러시아가 전쟁을 통해 이곳을 점령한 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흡수하면서 연해주는 러시아령이 되었으나, 19세기 말에 들어 극동에서 한국일본이 신흥 열강으로 부상했고,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을 위시한 러시아의 극동 영토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연해주를 두고 일어날 3개국의 대립은 기정사실이 되가는 상황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한 한국은 만주, 그리고 연해주를 제국의 이익선으로 보기 시작했으나, 만주는 몰라도 연해주의 장악에는 끝발이 모자란 상태였다. 그러던 도중 1896년쯤부터 러시아의 대청제국 보호국화가 시작되자, 러시아와 전쟁을 치뤄서라도 대청제국을 속국화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가속되었고 결국 일본, 영국과의 동맹 체결 끝에 1904년 한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군과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점거로 연해주의 요충지 확보에 성공, 이후 조약으로 양국이 공동관할하는 자치령 형식, 실질적으로는 식민지로서 할양받았다.

사실상 당시엔 블라디보스토크 외에는 쓸만한 도시가 연해주에 없었던지라 개발이 시급했으며, 한국과 일본 정부는 이 일대에 거주하던 만주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동원하여 기타 도시들을 개척하게 했고,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각각 대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모집한 이민자들을 거주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유교 문화, 신토 및 불교 문화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유입됐으며, 거리에는 성당과 함께 토리이와 홍살문이 보이기도 하는 등, 기존 블라디보스토크와 문화적 차이가 눈에 띄게 보이기 시작했다.

통치기관의 경우 각각 연해총관부(沿海摠管府)와 연해주청(沿海州庁)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통치했으며, 이 두 총관부에서 합의하는 바에 따라 지역에 대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다만 덕분에 군인 출신들이 총관부와 청을 다 채울때는 상대적으로 합의가 잘 이루어지지 못해서[3] 행정력이 평상시보다 약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1913년 민주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자 전보다 잦게 문관 출신 장관이 파견되는 등 유의미한 변화가 보이는 상태였다. 대표적으로 실시된 4개년 설원 개발계획의 경우 블라디보스토크 말고도 우수리스크, 폴키노, 달네렌체스크 등을 성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는 뒤이어 연해주 지방에서의 경제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외지로 취급받던 연해주에서 산업화가 진행되며 빈부격차가 커질 조짐이 보이게 만든 계획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0년 적백내전이 시작되면서 백군이 질 위기에 빠지자 한국과 일본은 저들을 이용해 이 기회에 아예 연해주에 영구히 발을 붙일 수단, 즉 괴뢰국의 건국을 고려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폐된 로마노프 황가의 자제들을 구한다는 '금관작전'을 기획했고, 이 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하면서 러시아 황실과 백군 인사들이 연해주로 건너오게 되었다.

그해 말, 이 지방에 러시아 백군 잔당들과 구조된 로마노프 황가의 일원들을 규합한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이 건국되고, 총관부와 청이 트란스 아무르 공화국 통감부로 격하되면서 공식적으로 연해주 자치령은 폐지됐다.


  1. 연해주 자치령에서 극동 공화국으로, 극동 공화국에서 러시아 차르국으로 변환.
  2. 이후 이 휘장은 러시아 차르국의 2개국 통감부에서 이어서 사용된다.
  3. 예시로 아카지 모토지로와 이근택이 동시에 재임한 기간. 이 시기 동안에는 군인들 사이의 자존심 다툼에서 시작된 것이 이내 파벌싸움으로 번졌고, 서로 양측의 정보를 캐내려고만 해서 사실상 행정 업무가 못 진행될 수준이었다고 한다....결국 내각에서 이근택과 아카지를 갈구고 새로운 인물들을 보내면서 군인 총관시대와 군인 청장시대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