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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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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Mugyo
系統(계통) 朝鮮(아사달)系統(계통)宗敎(종교)
類型(유형) 多神敎(다신교)
創始(창시) 自然發生(자연발생)(샤머니즘、애니미즘、토테미즘)
地域(지역) 聖都(성도) 東原道(새벌도)東原府(새벌부)(百濟神宮(백제신궁))
主要(주요)信仰(신앙)地域(지역) 朝鮮(아사달)全域(전역)

槪要(개요)

巫敎(무교)朝鮮(아사달)民族宗敎(민족종교)로、佛敎(불교)共厂(함께)朝鮮(아사달)文化(문화)精神世界(정신세계)構築(구축)하는데至大(지대)影響(영향)及卩(미친)多神敎(다신교)이다。

定義(정의)

神話(신화)

 仔細자세內容내용아사달 신화 文書문서參考참고하십시오。

神祠(신사)


Shrine
伽倻津神祠(가야나루신사)(모습)
  • 일본의 신사(神社)와는 한자가 다르다.

歷史(역사)

무교의 기원은 시대를 특정할 수 없는 선사 시대까지 올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못 해도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그 이전의 원시 신앙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러한 자연적인 토속종교에 불과했던 무교가 확립된 것은 원삼국 시대를 거치며 삼국시대의 각국 정권을 중심으로 중앙 정권이 확립되면서 이루어졌다. 각국은 '신궁'이라는 종교 시설에서 군주를 중심으로 토착 신을 숭배하였으며, 삼국이 중앙집권화를 이루고 사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신화를 정리하여 중심 신화를 만들어내었고, 이 중심 신화에 편입되지 못한 신이나 신화는 지방의 지역 신앙으로 남게 되었다. 허나 다신교의 특성상, 중심 신화의 신을 제외하고도 중국, 인도로부터 건너온 이들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들이 많다.

현재 여러 신들 중 창세오신과 개천삼주를 가장 고위의 신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사에서 이들을 모시지는 않는다. 특히 지역으로 갈수록 현 무교의 중심신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지방색이라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어 만주 지역에서는 여진족의 신앙이 무교에 포함된 경우가 있으며, 제주도같은 경우 제주무교라고 일컬어지는 종교로 따로 분류가 될 정도로 본토와 상이하다.

삼국이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이 소홀히 여겨지면서 그 격이 하락하였고, 자연히 무교의 신과 무교를 불교의 부처/보살과 불교보다 하위에 놓았다. 일본서기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일본 사신이 '백제가 너무 불교에 빠져 건방지신(建邦之神)에 대한 제사를 소흘히 했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면서 불교의 부처님/보살/명왕/신중을 토속신앙의 신들처럼 신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신불일체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무교의 신이 기존의 불교의 팔부신중처럼 불법을 수호하는 하위 존재로 여겨지다 결국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가르침(불교)을 통해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로 격하되는 과정이 더 심해진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왕씨 시대 말기에 다다르고서는 아예 무교의 신들은 부처/보살의 화신인 명왕의 한 부류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무교와 불교가 섞인 현상을 일컬어 '무불습합'이라고 한다. 그러나 광덕 시대에 무불 판연령(巫佛判然令)이 내려지며 근대 이후 무교와 불교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교의 토속신을 만물의 근원적인 존재, 부처/보살은 그 중 일부라는 관념이 생겨나 무교 측에서 주요 이론으로 삼아 불교에 맞서 우위를 점하고 눌러버리려 시도하였으나, 불교는 여전히 무교와 함께 아사달국의 대표 종교로 흥성하였다. 고도로 정교하고 철학적인 불교의 교리는 구체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무교가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고, 왕씨 정권이 성립하면서 무교를 옹호해주던 황실은 허수아비 수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원속국기를 지나 건도 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 내부의 폐단과 부패, 황권 재확립 등이 맞물려 신토의 철학 이론이 정립되었으나 그것도 따지고 보면 불교, 도교, 기타 중국 설화 등에서 이리저리 따 온 흔적이 역력했다. 예시로 한국의 창세신 중 한 명인 마고할마이신의 '마고' 자체가 어원이 중국에 있다.

그러나 이씨 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의 폐단에 맞선 이방원의 억불(抑佛) 정책에 따라 미륵사, 황룡사, 불국사 등의 대사찰을 포함해 전국 사찰의 대개혁이 벌어졌고, 이를 계기로 불교는 주춤하며 무교와 성리학(주자학)이 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사달의 무교계에서는 성리학을 받아들였으며, 이 과정에서 무교와 성리학이 융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장 한성의 사대문의 명칭만 보아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近代(근대)

광덕 유신 이후 아사달국이 국민국가로 발전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그리하였듯이 폭력적인 표준화와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비주류 무교에 대한 탄압도 그 일환으로써 이루어졌다.

자연적이지 않은 인위적이고 정책적인 정부 차원의 국가무교 장려는 '신사합사 정책'이라고 부르는 강제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국가무교 사상에 부합되지 않는 신사들은 강제로 통합, 폐쇄시켜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아사달 전역에서 신사 수만여 곳이 폐쇄당한다. 신관이 폐쇄를 거부할 경우, 경찰력을 동원해 신관을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시골 마을에서 대대로 주민들의 신앙을 받아온 오래된 신사 같은 경우는, 폐쇄에 반발해 주민들이 산이나 숲 깊숙한 곳에 임시 사당을 짓고 비밀리에 참배하는 형태로 반발했다. 아사달에서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을 가다가 뜬금없이 황폐화된 작은 사당이 튀어나온다면 바로 이런 경우.

단순히 폐지할 수 없는 큰 신사들은 강제로 신을 바꾸거나 신의 족보를 바꾸기도 하였다. 아사달 중심 신앙 족보에 포함된 지역 토착 신들에 관해서는 백년에 가까운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면서 그냥 익숙해져 자리잡은 경우가 더 많지만 현재까지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시골에서 음지로 들어간 신사들은 국가무교가 몰락하면서 다시 양지로 나오기도 했고, 사찰과 연계된 신사는 그 모습을 되찾은 경우도 있지만, 패전 이후 후유증으로, 혹은 젊은 세대가 잊어버려서 버려지는 신사도 많았다. 이때 숨겨진 신사들은 시골 청년들이 징병을 피하는 대피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징병통지서에 불응하거나 직접 통지서를 갖고 징병대상자를 끌고 가려고 군사경찰이 마을에 나타나면 주민들이 대상자를 은폐된 신사에 숨겨두면서 징병을 피했다. 신사가 먹고 자는 숙소 역할을 해서 장기간 숨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사합사 정책은 아사달 패망 이전에 지식인들이 성토하여 폐지되긴 했다. '지역전통을 단절시키고 지방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 그 정도로 큰 반감을 샀던 정책이다. 하지만 합사만 중단했을 뿐 이미 훼손이 저질러진 곳들을 복권하지는 않았다. 복권은 전후 국가무교 해체 후에나 이뤄졌다.

이런 맥락에서 전후 복권된 신사의 신도들 중에는, 신사본청과 백제 신궁 등으로 대표되는 주류 무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전몰자나 위인을 모시는 신사에 대해서 사람을 신으로 모신 연혁도 기껏 백 년 좀 넘는 신사와는 역사와 격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