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국의 역사
元高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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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연국
大燕國 / Northern Rigo Dynasty
?년~?년
?년 건국
?년 반도 재통일
?년 천도
위치 원고
별칭 북연(北燕), 죽연(竹燕)
수도 두경(?~?)
심경(?~?)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차우만 | 죽문(竹文)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언어/문자 대륙 천호어/대륙 천호 문자
성립 이전 북하
남양
천도 이후 남연

개요

원고 반도의 두번째 통일 왕조이다

역사

연나라에 의해 원고 반도는 200여년만에 통일되었으나, 그동안 벌어진 남북의 문화적 차이를 메꾸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연 태조 죽문신양은 산북과 산남 권역을 나누어 다른 방식으로 통치했다. 먼저, 산북 지방은 이미 중앙통치체제가 완성되었기에 기득권 무신들을 제거하고 역성혁명에 참가한 청년 무인,몰락 문신,중인을 곧바로 등용하여 중앙정부의 변혁을 시행했고, 남당 시대의 호족 정치에서부터 파생된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한 산남은 바로 중앙에서 통제하기엔 무리가 있었으므로 기존의 산남을 다스리던 무신들에게 계도사 관직을 하사하고 적침의 위험이 높은 국경 지대에 일명 '10계'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해 그곳을 다스리도록 했다.

실제로 이 정책으로 인해 북부 또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산남 무신들 또한 간접 통치에 만족하며 점점 산북 정부와 동화되어 갔고, 이로써 2대 정종 때는 사실상 정치적으로는 산북과 산남이 재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아직 원고 반도는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정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수도인 연산에서부터 중원(현재의 키비코바)를 거쳐 산남의 중심지인 산구까지 이어지는 국도를 건설하여 산남과 산북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도록 유도했고, 실제로 연산에서 산구로 가는 시간이 대폭 단축되면서 각 지방의 특산품 거래가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국도의 거점 거점마다 시장이 형성되고 이 시장은 문화 교류의 허브로 성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원고 반도의 문화적 정체성 회복은 대성공으로 끝나게 되었다.

한편 시장의 형성은 중인들에게도 큰 이득을 주었다. 중인들은 기본적으로 북하 시절부터 쌓아놓은 부가 있어 상당한 자본을 가지고 있었고, 이 자본을 통해 상인을 매수하고 시장 거래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풍조가 지속되면서 점점 여러 시장을 장악한 대부호들이 나타났고, 이들을 마치 기업과 같이 몇몇 제품군에서 엄청난 경쟁력을 지니고 다른 경쟁 업체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이는 추후 평범하게 장사하려는 평민들이 위축되고 중인들만이 시장을 독과점하여 행패를 부리거나, 그 와중에 중인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의 품질은 안 좋지만 그들 말고 다른 상인들은 거의 다 장사를 접어 결국 중인의 것을 살 수밖에 없는, 크나큰 문제를 불러오게 된다.

결국 3대 성종은 어쩔 수 없이 중인의 활동을 제약하기로 한다. 국상법이 반포되어 독과점과 담합을 금지시켰고 일반 상인의 이익을 대폭 증가시켰다. 이에 따라 중인들의 이익이 크게 줄어들게 되자 중인들은 자신들의 자본을 가지고 무러 정부를 협박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성종은 아랑곳 않고 오히려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에 리고치야 내부의 중인들은 자본을 이용하여 몰락한 북하 무인의 잔당세력을 고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 또한 적발되고 마침내 극대노한 성종에게 대부분의 중인들이 형벌을 받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편 이를 통해 그들의 사유재산이 모두 국가 소유로 넘어가게 되며 여러 국가사업에 쓸 만한 자본이 고스란히 국고에 들어왔고, 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자본을 여러 과학적인 발전과 법전 편찬, 성 축조 등 각지에 활용하여 북연의 문화적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4대 문종 때는 과거제를 실시하고 시대에 맞춘 여러 정부부서들을 설치하는 등 제도적으로도 큰 변혁이 있었다.

이렇게 4대 문종때에도 충분히 전성기를 이룬 북연이었지만 본격적인 전성기는 6대 선종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종은 기존의 중앙군을 보완하여 '청인군'을 조직하고 남북조시대의 분열 이래로 익주 경계를 지속적으로 침범하던 북바이당을 복속하고 랴오 고원에도 군사를 파병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당시 고원 북부를 다스리던 경운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는 원고인들이 랴오인을 복속시킨 거의 유일한 사례 중 하나이다. 7대 태종은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아 파주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대외활동을 지속했고, 북항부와 내항부 등의 항구도시를 발전시켜 만목 멸망 이후 끊긴 대외 교류망을 다시 활성화시켰다. 즉 6대 선종과 7대 태종의 치세는 영토 확장과 대외 활동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성종부터 태종까지 4대에 걸쳐 이룩된 북연의 전성기는 13대 명종의 치세까지 지속되었다.

북연의 전성기 때에는 남북조시대 이후 색이 바랜 양치 사상을 복원하는 작업도 벌어졌다. 문종조의 학자 건성근은 전국을 답사하며 남북조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하던 여러 양치 사상들을 접하였고, 최종적으로 당대까지의 양치 사상을 모두 결합한 율론을 작성하기에 이른다. 이 율론은 만목 때 쓰여진 양론서인 곽양서(곽중염 저)에 비해 법치주의 사상이 가미된 편이었는데, 이는 당시 한창 문종이 주도하던 법전 편찬 정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율론으로 대표되는 북연 초중기의 법치주의적 풍조를 율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지 사상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변화도 꽤 컸는데, 만목 시대때부터 이어지던 24군 체제를 없애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13주 체제를 완성시킨 것도 바로 이때였다[1]. 각 도에는 80호를 기준으로 하나의 건리를 구성하고, 리 내에서 10호씩 묶어 그중에서 한명씩 건장을 선출, 총 1리당 8명의 건장을 두어 지방을 다스리는 80건제가 도입되었으며, 각 리에는 규범인 건령이 반포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양교의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했다.

앞서 말했듯이 국도의 건설로 문화 교류가 확산됨에 따라, 백성들 사이에서 공통된 서민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서민문화는 중인들의 몰락 이후 백성들에게 경제적 자유가 생기며 더욱 확산되기 시작했으며, 원고국의 전통극인 '하키라제마' 또한 이 시기에 성립되었다. 문학으로는 정형화되지는 자유형식의 '향시'가 발달했으며 나무와 새를 주로 그리는 회화 양식 '조수도'가 유행하기도 했다. 한편 내항부, 북항부 등의 국제적인 항구도시는 국도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륙의 국도 주변 대도시들과는 사뭇 다른 서민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천호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에우랍수스에서 온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그들의 문화가 원고국의 전통문화와 융합되었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하키라제마의 극 전개 방식이 내륙과 많이 다른다거나, 마가다의 전통 무술인 사무드레가 전래되어 배 위에서 진행되는 씨름 경기인 '무살'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향시에 음악적인 요소가 더욱 가미된다거나, 의복도 달라지는 등 항구도시의 사람들은 내륙인들과 다소 이질적인 모습을 보였다. 9대 중종 때 각 항구마다 상인들이 묵을 수 있는 조류지가 설치되면서 항구 사람들만의 독창적인 문화는 더욱 발전해갔다.

한편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던 북연은 13대 명종부터 멸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11대 현종 때 그 씨앗은 뿌려졌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집권층의 분열이었다. 선종~태종 치세의 전성기를 주도한 무인들은 자연스럽게 문인에 비해 막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고, 아예 별개의 세력이었던 10계의 계도사들과도 힘을 합치며 북연에는 거대한 무인 권력층이 형성되었다. 또한 자연스럽게 10계 내부에서는 여러 부정이 행해지기 시작했고 국방력이 급격히 약해지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문인들이 현종 치세부터 무인에 대항할 여러 해결책을 몰색하기 시작하면서 두 지배층간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12대 순종 때는 문인의 대표 세력이자 정대석의 후손인 정경한이 10계를 자기 멋대로 주무르며 국방을 소홀히 하는 계도사들을 규탄하는 '교계문'이란 글을 써 정부에 올리는 사건이 있었고, 이에 몇몇 젊은 무인이 정경한의 집을 둘러싸고 농성하는 사건인 '분교위정'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명종의 즉위식 때는 분교위정 당시 제대로 복수하지 못한 것을 마음에 두고 있던 무인들이 아예 정경한의 아들 정숙영을 즉위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성문을 막으려고 시도한 사건도 있었다.

이렇게 두 세력의 갈등이 깊어지던 와중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광주 전투 패배였다. 명종 치세 말기 당시 랴오 고원의 상황은 혼란스러운 분열기가 끝나고 통일국가인 타루카트가 수립되었을 때였다. 타루카트의 황제 이신 게르는 아직 덜 통합된 랴오 고원의 타 부족들을 충성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마침 랴오인들의 오랜 숙적인 북연은 중앙정부의 갈등과 계도사들의 부패로 약해져 있었고, 이에 이신 게르는 그들의 지배를 받던 같은 랴오계 국가인 경운국을 해방하기 위해 타루카트의 지배 하에 있던 여러 부족들을 이끌고 북연을 침공하게 된다. 랴오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쓰지 않은 채 정치싸움에만 집중하던 중앙 무인들과 계도사들은 침공이 시작되고 나서야 급하게 전투태세를 취하였으나 이전에 비해 더욱 발전한 랴오인들의 기마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결국 경운국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된다.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무인들은 명망높던 이시문 장군을 내세워 역습을 시도하였으나, 미리 광주에서 대비하고 있던 랴오군에 의해 비참하게 패배하니 이것이 바로 광주 전투였다. 광주 전투 이후 경운국은 공식적으로 북연에게서 독립하였으며, 무인들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이틈을 놓치지 않았던 문인들은 즉시 무인들을 비난하였으며 10계의 권한을 축소하고, 지휘에 실패한 장군들을 엄벌하라는 상소문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마침 명종 또한 그의 즉위식 때 무인들이 벌인 짓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명종의 치세 동안 중앙싸움에서 무인들이 알게 모르게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일들이 많았던 터라 명종도 문인의 편에 설 의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결국 백명의 신하들이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리는 백신소까지 올라오자 마침내 명종은 백신소를 윤허하라 명하며 무인들에 대한 제약을 걸기 시작했다. 10계 중 3계가 문인 출신 계도사의 관리를 받기 시작했고 군내 사조직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또한 군대만을 대상으로 한 사찰관을 파견하여 그들의 부정 여부를 세세히 감독하기 시작했으니 이를 명종의 령이라 한다.[2] 명종의 령에 분노한 무인들은 아예 정변을 일으킬 음모까지 계획했으나 당장은 패전으로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사찰관의 감사가 매우 빡빡했기 때문에 무언가를 꾸밀 환경이 아니었고, 무인들은 시간이 지나 무인들을 향한 제약이 느슨해지고 무인들의 힘이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그래서 정변을 일으킬 수 있을 때까지, 몇년이든 몇십년이든 기다리기로 약조했다. 그리고 이 음모는 마침내 16대 고종대에 와서야 터지게 되었다.

  1. 물론 이때는 13주가 아니라 13도였고 열도나 대도시 같은 경우 분리되지 않고 그대로 도에 종속되는 등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다. 경부주 체제는 원고국 때 완성되었으며, 2개의 도는 제헌 때 생겨났다.
  2. 전통적으로 원고인들의 역사 서술에서 특정 군주가 행한 명령 중 가장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을 보통 '○○의 령'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