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제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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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위대한 이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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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제국 제5·7대 총리
아놀도 파르미리
Arnoldo Parmili
출생 1923년 6월 15일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 주 빈치
사망 2012년 6월 19일 (향년 89세)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루카
국적 이탈리아
임기 이탈리아 총리 (1기)
1969년 1월 13일 ~ 1977년 1월 10일
법무부장관 겸 이탈리아 부총리
1977년 1월 11일 ~ 1980년 4월 15일
이탈리아 총리 (2기)
1980년 4월 16일 ~ 1983년 7월 6일
수훈 이탈리아 왕관 기사훈장 3등급
Commendatore dell'Ordine della Corona d'It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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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자녀 3명
학력 피렌체 황립대학교 (법학 / 중퇴)
종교 유대교
소속 정당 사회당
약력 이탈리아 사회당 중앙서기위원장
이탈리아 사회당 부당수
이탈리아 사회당 당수
이탈리아 제국 제5대 총리
법무부장관
이탈리아 제국 부총리
이탈리아 제국 제7대 총리

개요

이탈리아의 정치인. 제5대 총리와 제7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1년) 동안 집권한 총리이다. 집권 기간 도중 이탈리아의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하였으며, 68 혁명 당시의 의제들을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83년 키프로스 전쟁의 패전 책임으로 사임하였다.

생애

1923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빈치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1]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이탈리아 본토를 침공하자 시칠리아 섬으로 도피하였으며, 1942년 이탈리아 왕국군에 징병되어 1945년까지 군에서 복무하였다.

전후 그는 피렌체 대학교의 법학과에 진학하였으나 흥미를 보이지 못하고 학생 운동을 전전하다가 대학에서 중퇴하였다. 이 당시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에 소속된 젊은 공산주의자였지만, 1948년 베를린 봉쇄 당시 소련의 결정을 비판하며 공산당을 탈당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청년 조직인 이탈리아 사회당 청년 동맹에서 인지도를 쌓은 그는 1954년 이탈리아 사회당의 토스카나 주 서기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2년 뒤에는 중앙당 서기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리비아 독립 전쟁에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하고 리비아의 민주적 독립을 지지하면서 인지도를 넓혀갔다. 1964년 전당 대회에서 아놀도 파르미리는 전체 득표의 72.1%의 찬성으로 야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야당 당수로서

야당 당수로서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견제하는 한편 다른 중도파 야당과는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회당의 전국화 정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66년 더레스 강령을 통하여 사회당의 마르크스주의 포기 및 개량 수정사회주의로의 이념 전향 역시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1968년 8월 12일 로마에서 베트남전 참전 반대 시위대와의 행진.
이 시위는 후일 "8월 12일 평화의 제전"이라고 불리게 된다.

1966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공산당에게 표를 많이 빼앗겨 의석을 잃으면서 위기에 처했지만, 도리어 공산당과의 연립내각 수립 의지를 보이면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공투를 이끌어냈다. 1968년 68 혁명 때에는 청년층의 많은 지지를 받았고, 스스로도 혁명에 동참하였다. 1969년 치뤄진 조기 총선에서 사회당이 186석, 공산당이 134석으로 과반인 315석을 넘긴 320석을 차지해, 아놀도 파르미리는 1969년 전후 최초의 진보 성향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총리 1기

이탈리아 제국의 GDP 대비 복지 지출 비용은 1966년 15.4%에 불과했으나 아놀도 파르미리 총리의 취임 이후 이를 두배로 늘려 1976년에는 30.2%에 달하였다. 우파로부터는 퍼주기식 복지, 민심 달래기용 복지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이 당시 아놀도 파르미리 총리가 추구한 복지 정책은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이탈리아 사회를 부양한 정책들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복지 정책으로는 의료 공영화가 있다. 이탈리아는 1960년대까지 단일 의료 시스템의 부재로 인하여 의료 비용이 천정부지였고 각 지역마다 다른 건보 혜택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아놀도 파르미리 총리는 이를 제국 정부 차원에서 하나의 의료 보험과 관리 체계를 도입하여 단일화된 의료복지 시스템을 구축했다. 리비아 독립 전쟁과 2차 세계 대전 뿐만 아니라 상이 군인 전원에게 의료 비용을 받지 않게 하였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군인들도 그의 의료 복지 개혁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점진적으로 대학교를 국유화, 평준화하면서 학생들에게 학비를 덜어주는 대신 대학교의 문턱을 높여 엘리트들만이 대학교에 갈 수 있게 하였다.

1973년 이탈리아 총선을 앞두고 일어난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독립주의자들의 테러인 알리탈리아 6322편 인질 사건 대처에 실패하여 지지율이 추락하였다. 이로 인하여 총선 참패가 예상되었지만, 정작 의석은 다소 줄었지만 재선에 성공하였고 이때는 공산당 뿐만 아니라 다른 야당들과 연합하여 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1974년 일어난 유가 파동에는 적절한 경제적 해법을 제시하는데 실패하면서 자신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노동자들에게 외면을 받게 된데다가, 이탈리아 공산당과 연립정권을 수립하고 있던 아놀도 총리는 공산당이 주도한 대규모 파업 사건인 불만의 금요일 사건으로 인해 중도층의 지지 역시 잃었다. 결국 1977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극좌와 중도우파의 격돌에서 애매한 위치를 취했다가 전후 최저 의석인 147석을 얻는 참패를 당하였다.

3년간의 야당 생활

비록 공산당에 불과 7석이 앞서는 최악의 결과를 얻었지만, 공산당과 사회당을 제외하면 기독교민주당이 마땅한 연정 파트너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기독교민주당과 이탈리아 사회당의 거국내각이 출범하여 아놀도 파르미리가 법무부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총리로서 기독교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보좌하여 중도층의 지지를 회복하였고 반대로 이탈리아 공산당을 공격하여 사회당과 기민당의 중도 공투를 내세웠다.

공산당과의 절연에 기회주의자, 보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1980년 이탈리아 총선에서는 중도층의 지지를 회복하여 의석을 201석으로 늘리는데 성공, 기독교민주당과의 제2차 대연정 내각을 출범시키고 자신은 총리직에 복귀하였다.

총리 2기

총리 2기 당시에는 1기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82년 그리스 왕국과 연합하여 지중해 내에서 터키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키프로스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이탈리아-그리스 군이 우세하면서 북키프로스 정부가 축출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도리어 터키군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전쟁에서 패전하였다. 게다가 리비아 독립 전쟁베트남 전쟁 등의 국면에서 반전(反戰)을 내세운 총리가 터키에 대해서는 결정을 뒤집었다며 그를 비판하는 여론도 컸다. 1983년 2월 12일 이탈리아 공산당이 키프로스 전쟁을 이유로 연정 해소를 선언하면서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후임으로 안토니오 루마치 부당수가 취임하였다.

총리 퇴임 이후

평가

여담

  • 후임이자 친구였던 안토니오 루마치 총리가 박학다식한 지식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화법을 구사하였다면, 그는 상대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스타일의 화법을 즐겨 사용하였다. 선거 토론에서 루마치 총리가 한마리의 호랑이 같다면 파르미리 총리는 사람을 부드럽게 휘감는 뱀 같다는 느낌을 준다.
  1. 이 지역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고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