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의 특례황족
大韓國 特例皇族
전주이씨 특례황족
全州李氏 特例皇族


흥선친왕가
興宣親王家


이친왕가
李親王家


덕흥친왕가
德興親王家


역대 도정궁 덕흥친왕
제16대 덕흥천위친왕 이인용 제17대 덕흥친왕 이해찬 제17대 덕흥친왕세녀 이현주
이해찬
李海瓚
지위
덕흥친왕
재위 2004년 5월 23일 ~ (현재)
전임자 덕흥천위친왕 이인용
덕흥친왕세자
재위 1970년 7월 10일 ~ 2004년 5월 22일
청평대군
재위 1952년 7월 10일 ~ 1990년 7월 10일
이름
해찬 (海瓚)
신상정보
출생일 1952년 7월 10일(1952-07-10) (71세)
출생지 대한국 대한국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왕조 전주이씨 특례황족
대한국 황실
가문 전주 이씨
부친 덕흥천위친왕 이인용 (부)
모친 덕흥천위내친왕 박양순 (모)
배우자 덕흥친왕비 김정옥
자녀 1녀(덕흥친왕세녀 이현주)
학력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

이해찬(李海瓚, 1952년 7월 10일 ~ )는 대한국전주이씨 특례황족이자 정치인이다. 참여내각에서 제3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더불어민주당 대표이며, 당내 최다선인 7선 국회의원이다.

형제들을 제치고 왕세자가 되었으며 2004년 5월 23일 부친의 양위로 후임 덕흥친왕으로 즉위하였다. 공식칭호는 "대한국의 고귀하고 존엄하신 덕흥친왕 이해찬 전하"이다. 하지만 정치인 신분이기 때문에 공식칭호는 잘 쓰이지 않는다.

생애

생애 초기

이해찬은 1952년 7월 10일에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특례황족이었던 아버지 덕흥친왕 이인용과 어머니 덕흥친왕비 박양순의 3남으로 태어나 청평대군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았으며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고향은 충주이다. 그의 본관은 전주이며, 조선 14대 왕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14대손이다. 아버지 이인용은 일본 유학을 다녀왔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해방 이후 청양면장을 지냈으며 4.19 혁명 때까지 재직하였다.

1965년에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1968년 덕수중학교를 졸업했다.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71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하고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신 선포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청양에 내려왔는데 아버지가 "나라가 이모양인데 학생들이 데모도 하지 않느냐"며 질책을 받고 바로 상경하여 학생운동 써클에 가입했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는 직접 막노동을 하며 생계와 학비를 마련해 나갔으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되어 1년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이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니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으며 엠네스티 한국지부 상근자로 일하다 평소 관심이 많던 출판일을 익히려고 범우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1978년 사회학과 학술모임에서 만나 사귀어 오던 김정옥과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하였다. 출판사 '한마당'과 '평민서당'을 설립했으나 불온서적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등록을 취소당하여 돌베개 출판사를 설립하고 사회과학 서적을 주로 출판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해찬은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총무국장에 선출되었다. 군사 독재 내각은 그를 요시찰 인물로 삼아 감시했으나 굴하지 않고 반독재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입학하고 14년만인 1985년 8월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

정치 입문

정계 입문 초기

1987년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내고,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울 관악구에서 평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된 이후 연속 5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개혁정치모임 이사에 선출되었다.

이해찬은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노무현,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다. 1988년 5.18 광주청문회 당시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간사에 선출되었다. 당시 5공 관련자들을 집중추궁하여 청문회 스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그 해 이해찬은 평민당 원내부총무에 선출되었다.

야당 개혁론

국회 진출 이후 이해찬은 한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성실하게 등원하였다. 한때 그는 여러 신문에서 의정활동 수위권 의원[1]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1년초부터 그는 정치 개혁론을 주장했고,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야당부터 쇄신해야 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이해찬은 『신동아』 1991년 7월호에 광역의회 선거를 앞두고 "이 야당으로는 정권 교체 못한다"는 글을 기고했다.[2] 이해찬은 그 글에서 김대중에 대해 비판하였다.[2] 그는 입당 때부터 큰 책임감을 느끼며 추진한 야권통합운동과 당내 민주화가 좌절되면서 1991년 6월 탈당했다가 야권이 통합된 뒤 다시 입당했다. 이 일로 김대중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항의와 비난이 가해졌다. 그러나 김대중은 나중에 이해찬을 다시 받아들였다.

김영삼 내각 시절

이해찬은 1992년 민주당 당무기획실장, 1993년 민주당 환경특별위 위원장을 지냈다. 1994년에는 안기부의 사찰과 야당인사 탄압에 관련된 비밀장부를 발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3]

1995년 7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이해찬은 민주당 조순 서울시장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도 했다. 조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자 1995년 7월 그는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에 발탁되었다. 5개월만인 1995년 12월 당의 부름을 받아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사퇴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았다.

1995년 9월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해찬은 입당하여, 1996년 5월부터 1997년 5월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자민련과의 정책공조를 이끌었고, 1997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총리대신선거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선출되었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회창을 39만여 표의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총리대신에 당선되자 12월 그는 총리대신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 임명되었다.

1998년 2월까지 이해찬은 15대 대선기획본부 부본부장과 총리대신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각주

  1. 허원순, 《대통령으로 산다는 것》 (한국경제신문사, 2006) 211페이지
  2. 2.0 2.1 인물과사상사 편집부, 인물과 사상 2005년 8월호 (인물과사상사 펴냄, 2005) 112페이지
  3. 월간말 1994년도 1월호(통권 91호) pp192~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