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日本国 | Japan
일장기
공식명칭 日本国
(일본국)
보통명사 일본
국가 기미가요
공식 언어 일본어
수도 도쿄
정부형태 의원내각제
입헌군주국
국가원수 아키히토 (1989 - )
정부수반 오카다 가쓰야 (2020 - )
통화 일본 엔 (¥)
성립 1952년 4월 28일
면적 약 377,975km²
인구 약 1억 3,400만 명

일본(日本, Japan)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제를 받았으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주권국의 지위를 되찾았다.

역사

GHQ(1945-1952)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함께 열도에 진주한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일본을 전체를 통솔했다. 맥아더는 쇼와 천황의 인간 선언을 통해 일본인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던 국가 신토의 근간을 부정했다. GHQ는 일본이 전후 어떻게 재건되어야 하는지, 국제사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전권을 부여 받았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일본이 다시는 태평양을 건널 수 없게 하라는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가장 먼저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부의 책임이라도 존재하는 인물들에 대한 공직 추방령을 내렸다. 이들에 대한 추방령은 현대 일본에서 과거 군국주의적 사고를 완전히 척결하는 시발점이었다. 3,35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다만 이 때의 추방령으로 50년대 일본의 자립이 어려워졌다는 말이 많다.[1]

맥아더는 현대 일본의 기틀을 구성하는 세 가지 법률을 설계했다. 산업분리법역내균형법, 그리고 평화유지법이다. 이 중 산분법을 제외한 역내균형과 평화유지는 일본 헌법 조항으로 삽입되었다. 산분법은 한 기업 또는 집단이 여러 산업분야에 걸쳐서 사업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률이다. 이 법을 근거로 일본의 주요 재벌기업들과 일반적인 중견기업까지 모든 기업이 수 만개의 법인으로 변하면서 일본의 기술력과 조직력은 크게 후퇴하였다.

산분법이 특히 가혹했던 이유는 분할 대상을 민간 기업 뿐만 아니라 국영 제작소 또는 공영 사업 등도 대상으로 보아 일본이 1800년대 후반부터 산업화를 통해 얻은 인적, 물적 체계를 완전히 혁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법률은 외국 회사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이 미일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하며 산업분리법과 관련한 선결조항을 일부 개정해 외국기업이 대상에서 제외될 때까지 일본 사회는 수요는 넘치지만 공급이 항상 모자란 대 혼란기를 거쳐야했다.

위의 산업분리는 그나마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완화되다가 이윽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역내균형 조항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로 지적 받고 있다. GHQ는 일본을 홋카이도, 토호쿠, 미나미칸토, 키타칸토, 호쿠리쿠, 신에쓰, 토카이, 킨키, 키타큐슈, 미나미큐슈, 츄코쿠, 시코쿠의 12지방으로 정의했고 각 지방에는 일본 전체 인구의 10%의 이상이 거주할 수 없도록 못박았다. 1947년부터 시작된 대이주는 1950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대이주 정책은 굉장히 무분별했는데, 집조차 지어주지 않은 상태로 집터와 한 가구당 최소 1에이커[2]의 토지를 지도에 줄을 대고 분배했다.[3][4][5]

대이주는 난개발을 불러왔다. 특히 산분법의 시행으로 건설사들이 모두 쪼개져 마을단위 건축사무소가 주택 건설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나무를 베어 집을 제작하는 등 환경파괴 문제도 심각했다. 대이주 시절 말고도 역내균형의 문제점은 많은데, 인구가 어느 한 지방으로 모이지 못하면서 산업화의 가장 기초인 노동집약적 산업이 발생하기 어려워졌다. 이 조항은 산분법이 폐지되고 나서도 현재까지 계속해서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의 생산성을 떨어트리고 인프라 비용의 증가로 기반시설 구축을 어렵게 해 70년대 말과 90년대 말 경제위기의 큰 타격을 입힌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런 맥아더의 가혹한 조치에도 미국 정치권은 일본의 상황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본은 이제 세계 무대의 뒤로 들어간 나라였고, 태평양 전쟁의 영웅 맥아더는 당장 위협적인 소련에 의해 일본이 공산화되지 않도록 할 "비장의 계획"이 있다고 언론에 발표했기 때문이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가 일본에서 국가원수 수준의 지위를 누리면서 미국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를 원했고, 후임인 아이젠하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일본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무려 17년에 달하는 "푸른 눈의 쇼군" 시대를 맞이하였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함께 신 헌법을 의결했으며,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1952년 헌법 또한 효력이 발생했다.

아태사무국 간섭기(1952-1961)

일본은 분명 주권국이 되었지만, 트루먼은 맥아더가 미국으로 돌아와 정치에 뛰어들 것을 우려했다. 그가 1951년 잠깐 뉴욕으로 귀환했을 때 70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그의 전역을 축하했고 맥아더의 인기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직속으로 아시아태평양사무국을 세워 맥아더를 국장으로 임명했다. 맥아더는 처음에는 그 직위를 거절하려 했지만, 자신의 인기가 금방 식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6] 얼마 안가 수락했다. 처음 아태사무국은 그저 아시아태평양에 있어서 미국의 사활이익을 적절한 방법을 통해 지켜내는 특무기관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총리인 카타야마 테츠가 경제 안정과 정권 유지를 위한 조언을 요청하면서 아태사무국의 실질적인 권한이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카타야마는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총리로 재임했으며, 이 기간 맥아더와 카타야마의 관계는 신뢰 수준이 아니라 강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는 듯 보였다.

1953년 들어선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도 맥아더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맥아더는 이 기간 일본이 식량을 자급자족하는 수준을 넘어서 식습관이 비슷한 사우스코리아까지 커버할 수 있기를 원했다.[7] 이 시기 맥아더는 아태사무국 일본지부 내에 농업담당과를 설치해 벼의 품종개량을 모색했다. 또 자유와 평등 이념의 내재화를 위한 교육담당과도 설치되었고, 사회문화적으로 미국화를 추구하기 위한 분과, 경제적으로 안보조약이나 헌법을 위반하지 않고 번영하기 위한 분과, 전쟁 위협 등에서 안전하기 위해 주일미군을 어느 곳에 배치해야 하는 지 등을 논의하는 분과와 같은 일본 전체에 걸쳐서 정책의 개발을 담당했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태사무국의 일본지부는 비대화되었으며, 아태사무국이 위치한 카스미가세키쵸에는 매일 일본 관료들이 드나들며 정책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특히 맥아더 국장이 한 마디를 던지면 사실상 그 사업이 실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사무국 정문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치몬"이 일본판 로비스트로 활약하게 되었다.

카타야마는 이런 맥아더의 내정간섭에 가까운 행위에 별로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는데, 맥아더는 카타야마가 원하는 정책은 대부분 그대로 실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카타야마의 역점 사업인 탄광 국유화 역시 맥아더가 한 번에 정리해주면서 사이는 더욱 좋아졌다. 특히 맥아더는 수상으로써의 카타야마의 권위를 존중해주었고, 언론 앞에서는 항상 선을 지켰다.[8]

이런 관계는 1960년 맥아더가 조언한 학제개편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며 아태사무국의 부서 중 일본담당 부서를 대폭 축소하고, 인도차이나 부서를 세 배 이상 확장하기로 결정되면서 국장인 맥아더가 계속해서 일본에만 신경을 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직후 맥아더에게 일본 도쿄에 설치된 아태사무국 일본지부를 철수하고 미국으로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9] 맥아더는 이를 수용해 본토로 돌아왔으며, 인도차이나 정세에 관한 367쪽의 보고서를 제출한 후 아태사무국 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국장자리는 임명되지 않았으며, 기능이 CIA와 펜타곤으로 합쳐지면서 맥아더는 아태사무국의 유일한 국장으로 남게 되었다.[10]

안보조약 갱신과 농업기지화(1961-1969)

카타야마는 총선을 2개월 앞둔 1961년 3월 사회당 대표직을 사임했다. 당시 사회당은 친맥아더파와 주권파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친맥아더파는 말 그대로 카타야마와 맥아더 관계를 지지하는 의원들로 구성된 파벌이었고, 주권파는 적어도 맥아더와 함께 지내는 건 안된다는 파벌이었다.[11] 사회당 전국대회는 친맥아더파인 요시다 시게루를 대표로 확정했다. 맥아더파의 승리는 이미 일본에서 떠난 맥아더가 죽기 전까지 일본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한 원인 중 하나이다.

요시다 내각의 출범 이후 사회당은 안보조약을 갱신했다. 기존의 미일안전보장기본조약은 10년 주기로 갱신하는 내용이 존재했었다. 요시다는 조약 만료시점이 다가오자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했으며, 25년 주기로 조약 갱신하도록 내용을 변경했다. 또 기존의 산업분리조항을 변경하지 않겠다는 요시다 선언을 발표했다. 이 때 발표된 내용이 바로 3불 선언으로 불리는 것으로써, 1980년대의 안보투쟁을 격화시킨 재건기의 외교지침이었다. 3불 선언은 "안보조약 개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안보조약을 파기하지 않는다", "안보조약의 효력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다.

요시다는 이 선언으로 반대자들에게 미국의 개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당시 미국은 아시아개발예산을 따로 편성해 남베트남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요시다의 노력 덕분에 이 개발 예산에서 일부를 일본이 매년 타갈 수 있게 되었다. 요시다는 어차피 산업 발전이 완전히 막힌 상황이라면,[12] 산업의 기초가되는 농업이 탄탄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존의 맥아더 집무실이 위치한 카스미가세키의 구 아태사무국 건물을 일본의 권역별 개발 현황을 총망라하는 개발본부로 변경했다. 개발본부 산하로 12개 권역의 지역개발본부를 두어 역내균형조항과 산업분리조항을 어기지 않기 위한 업무를 담당케 했다.

어느 한 권역만 뒤쳐진다면, 다른 권역의 인구비율이 오르기 때문에 이 시기 전국토를 골고루 개발하기 위한 정책이 수립되었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주거이전의 자유는 계속해서 제한되었다. 농업에 국력을 집중시킨 일본의 생산성은 비약적이었다. 일본에서의 쌀 수확량은 사우스코리아를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였고, 1966년에는 필리핀의 수입수요를 모두 감당하고도 남아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7년 요시다가 건강문제로 수상직을 사퇴하자, 요시다의 제자인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로 올랐다. 사토는 베트남 전쟁이 미국 내에서 반전주의를 촉발시킨 것을 보고 미국에 사우스코리아 내의 군수산업단지를 일본으로 옮겨 반전주의를 경감시키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보낸다. 당시 사우스코리아는 미국 내에서 찬전여론이 가장 높은 주였는데, 이 때문에 많은 반전운동가들이 사우스코리아로 날아가 전쟁반대 시위를 하는 탓에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편히 사우스코리아를 방문하지도 못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은 40% 수준에 안착되었는데, 이 때도 존슨 대통령을 80% 넘게 지지하는 주는 사우스코리아 밖에 없었다.[13]

성공적인 산업투자?(1969-1979)

오일쇼크과 안보투쟁(1979-1987)

기업화 정책과 결실(1987-1997)

동남아시아 금융위기와 신세기 대불황(1997-2014)

자유의 공장으로(2014-)

경제

사회

정치

외교

각주

  1. 일단 과거 관료 경력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쫓겨났기 때문에 단절현상이 발생했기 때문.
  2. 약 1,800평
  3. 맥아더는 천황을 정치적으로 계속 활용했다. 이 대이주 정책의 발표 역시 천황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4. 한편 이러한 토지분배는 일본사에서 전무후무한 개혁이었는데, 일본은 맥아더가 이런 토지정책을 실시하기 직전까지도 전근대적인 소작농 체제가 유지되고 있던 봉건사회였다. 지금에 와서야 일본 내에서 대이주와 역내균형이 크게 비판 받지만 당시 일본 대다수의 농민들은 맥아더의 조치를 쌍수들고 환영했다. 이들이 바로 현재 일본의 친미 정당인 사회당의 핵심지지기반이 되었다.
  5. 반대로 지주, 공장 근로자, 경영자, 지식인들은 반미 성향이 짙어 졌다. 지주, 경영자는 현대 자유당의 핵심지지기반이고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당의 지지기반이다.
  6. 아무래도 유럽 전선에서 승리를 이끈 아이젠하워보다는 인기가 떨어진게 사실이다.
  7. 맥아더가 사우스코리아를 편애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면적이 좁은 사우스코리아에 싼 가격으로 식량을 공급해 미국임에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았던 사우스코리아의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 였다. 이와 별개로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각각의 이유로 사우스코리아의 빈곤 문제를 고심하고 있던 차였다.
  8. 맥아더는 당시를 기준으로 이미지 관리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다. 이미지 관리는 그가 아태사무국장이라는 애매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에도, 약 10년 동안 강한 권한을 쥐고 행할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9. 당시 맥아더는 본부보다 일본지부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태사무국 일본지부가 위치한 곳이 현재의 카스미가세키이다. 일본에서 흔히 정계를 가리키는 이 단어는 맥아더 집무실을 의미하던 단어였다.
  10. 애초에 탄생 자체가 맥아더를 위한 영전이기도 했다.
  11. 주권파와 친맥아더파를 나누는 것은 단지 맥아더의 영향력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사회당 전체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인 친미, 친농촌, 반공, 안보조약지지의 의견은 다르지 않았다. 또 맥아더가 실시한 정책에도 따로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다만 맥아더를 일본 정계에서 축출해야한다는 것에만 동의하는 것이다.
  12. 언젠가 안보조약이 개정된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수 년 내에는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13. 다른 주들은 평균적으로 30%에서 40% 초반이었다. 민주당 강세 지역에서나 50%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