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Vietnam War
기간 1955년 11월 1일 - 1981년 9월 30일 / (9466일)
장소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남중국해, 태국만
결과 북베트남, 베트콩,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패배
영향 미국의 인도차이나 전역 승리
[ 상세 정보 ]
교전국 북베트남
베트콩
파텟 라오
캄보디아 망명정부 1970~
중국
소련
남베트남
미합중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라오스
캄보디아 ~1970
크메르 공화국 1970~
태국
필리핀
지도자 호치민 †
레주언
똔득탕
호앙반타이
마오쩌둥 †
화궈펑
덩샤오핑
니키타 흐루시초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응오딘지엠
즈엉반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지휘관
병력 북베트남군 28만 명
베트콩 80만 명
중국군 17만 명
캄보디아군 12만 명
소련군 3,000명
남베트남군 140만 명
미군 66만 명[1]
크메르군 20만 명
라오스군 72,000명
태국군 22,000명
호주군 7,500명
필리핀군 2,061명
뉴질랜드군 500명
피해

베트남 전쟁(Vietnam War) 또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은 1955년 11월 1일부터 1981년 9월 30일 하노이의 함락까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북베트남은 소련, 중국과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지원했으며, 남베트남은 미국과 반공산권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은 냉전 시기 최초로 벌어진 대리 전쟁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은 26년 간 진행되었으며, 미국은 1973년에 잠시 철수했다가 1978년 다시 개입하였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해 라오스 내전캄보디아 내전이 격화되었으며, 1981년 세 나라 모두가 자유 국가가 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다.[2]

이 전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과 베트남 좌익 혁명운동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기인했다. 1954년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 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도맡았다. 북베트남의 지휘 아래 남베트남 공동전선인 베트콩은 남쪽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또한 1958년 라오스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를 침공하여 남베트남에의 침투를 위한 호치민 트레일을 건설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59년 천 명 미만의 주둔 규모를 1964년 23,000명으로 확대했다.

1964년 8월 통킨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과 충돌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통킨만 결의안을 의결해,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베트남에 미군 주둔을 늘릴 수 있게 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존슨은 처음으로 전투 부대 파견을 명령했으며, 주둔 병력 규모를 184,000명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북위 17도 선을 넘어 계속 진격했으며, 넓어진 전선을 감당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미국과 베트남 공화국군은 공중 우세와 압도적 화력을 바탕으로 북베트남의 전선을 초토화하며 전진했다. 또 미국은 대규모 전략폭격을 통해 북베트남 후방의 군사 시설들을 무력화 시켰다.

1968년 진행된 테트 공세는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지지를 축소시켰다. 테트 공세는 실패로 끝났지만, 사람들은 멸망이 눈 앞인 북베트남이 대규모 게릴라 작전을 진행하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 미국은 1965년 라오스, 1969년 캄보디아의 북베트남 보급로에 직접적인 폭격을 시작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후 베트남화 정책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승리가 코앞인 미군을 단계적으로 본토로 철수 시키는 계획이었다. 군 장성들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승리라고 닉슨에게 간언했지만, 닉슨은 더 이상의 미군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 1972년 초 미군 대부분은 베트남 전역에서 철수했다. 1973년 1월 파리 휴전 협정을 통해 미군은 전부 철수했다. 하지만 휴전은 금세 깨졌고,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통제하던 풀리를 급습하며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잘 버텼으며, 특히 크메르와 라오스 전역까지 진출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 역량이 쌓인 상황이었다. 1976년 전황이 나아지지 않는 상태에서 내부 결속력을 다지려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나, 크메르 루주 정권 등 반군 세력이 민간인을 상대로 한 대학살은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어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지미 카터의 승리를 견인했다. 카터는 1978년 미군을 재 파병했고, 이것은 긴 전쟁의 끝을 알렸다.

두 해가 지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고 4월 30일 남베트남과 미군이 하노이에 입성했다. 중국의 새 지도자 덩샤오핑은 어차피 질 베트남 전쟁으로 더 이상 미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고, 이는 미중간의 급격한 화해를 불러와 결국 5개월 만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며 베트남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엄청난 인적 비용을 유발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싸운 세계 각 국의 군대를 합치면 4백만 명이 동원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과 소비에트 사이의 관계는 점차 회복되었다. 통일 베트남은 1985년 전국에서 총선거를 치렀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닉슨 때 국제 무대에서 추락한 미국의 위상을 회복했다.

배경

전쟁에서 미군과 베트남 공화국군이 베트남 인민군, 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인도차이나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침공했을 때, 호치민의 지도 하에 주요 전선이었던 베트남은 미국, 소련, 중국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맞서 싸웠다. 9월 2일 일본이 항복에 서명한 후,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20일 후 프랑스군은 지방의 베트남 정부를 전복시키고 프랑스 정부의 행정력이 회복되었다고 선언했다. 프랑스는 점진적으로 인도차이나의 지배권을 다시 찾아갔다. 독립 협상에 실패한 베트남은 프랑스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갈등이 냉전과 얽히게 되었다.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은 하노이에 기반을 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다음달 미국과 영국은 전 황제 바오 다이가 이끄는 사이공의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정부가 합법적인 베트남 정부라고 선언했다.

중국의 군사참모들은 1950년 7월 베트남에 파견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군의 지도는 게릴라 중심의 북베트남군을 점차 정규군으로 변형시켰다. 1950년 9월, 미국은 프랑스의 원조 요청을 승인하고, 인도차이나 전략을 조언하고, 남베트남 군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MAAG를 창설했다. 1954년까지 미국은 프랑스의 군사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10억 달러를 지출했고, 당시 인도차이나 전쟁의 80% 비용을 부담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미국의 항공모함은 통킨만으로 향했고, 미국은 정찰비행을 실시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전술핵무기 사용을 논의했지만, 심각하게 고려되는 대상은 아니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미군의 파병을 주장했지만,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미국의 개입을 고심했으며 영국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했고, 영국은 참전을 거부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정보당국은 프랑스의 승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의 프랑스 주둔군이 항복했다. 제네바 회의에서 프랑스는 베트남과 평화협상에 돌입했고,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전간기

제네바 회의, 1954년.

1954년 제네바 회의에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분할되었다. 호치민은 남베트남에서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했지만, 남베트남에 전쟁 명분을 쥐어줄 수 있다며 동맹국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민간인들은 300일 동안 두 임시 정부 사이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1956년 4월 프랑스군의 마지막 병사가 남베트남을 떠났고, 중국 역시 거의 동시에 북베트남으로부터 철수를 완료했다.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북베트남은 임대료 인하와 토지분배를 포함한 다양한 농업 개혁을 시행했고, 반대를 최소화하기 위해 심각한 정치적 억압을 자행했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10만 여명이 처형당했다. 1956년 개혁이 끝난 후 하노이의 지도자들은 이 정책이 과했음을 인정하고, 많은 양의 토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한편 남베트남은 바오다이를 황제로,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하는 내각제 국가가 들어섰다. 제네바 협약에서 결정된 총선거의 시행을 앞두고 소련은 북베트남 지역에서의 선거 개최를 거부했다.

1957년 국제 감독 및 통제위원회는 지금 상황에서 공정하고 편향되지 않은 선거는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남북베트남이 휴전협정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1955년 4월부터 6월까지 응오딘지엠은 불교 종교 단체에 복종을 요구하고, 복종의 대가로 종교의 자유를 줄 것을 제안했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군사 작전으로 종교 근거지와 종교인들을 반역으로 처형하겠다고 협박했고 종교단체들은 모두 응오딘지엠과 남베트남 정부에 충성을 다짐했다.

1955년 10월 23일, 베트남은 국민투표를 통해 베트남 공화국의 설립을 선포했다. 한 나라가 공산주의로 돌아서면, 주변 국가들이 모두 뒤따를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의해 제안되었다. 당시 미국 상원의원인 존 F. 케네디는 연설에서 "버마, 태국, 인도, 일본,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반드시 안보가 위협 받을 나라 중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미국 정계에서 도미노 이론은 정설로 취급되었다.

전개

응오딘지엠 시대(1954-1963)

초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응오딘지엠 대통령 그리고 덜레스 국무장관, 1957년.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응오딘지엠은 광적인 반공산주의자였고, 민족주의자였으며, 보수주의자였다.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불교 신자였고, 성모 마리아를 숭상하려는 응오딘지엠의 행동에 놀랐다. 1955년 여름부터 응오딘지엠은 공산주의자를 체포, 투옥, 고문 또는 처형하는 "베트남 매카시즘" 정책을 실행했다. 남베트남 법원은 1956년 8월,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한 반역으로 기소된 모든 피고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 시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1957년 11월까지 65,000명이 투옥했고 최소 2,148명을 처형했다고 주장했다.

1956년 10월 응오딘지엠은 1.8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가구의 토지를 압류해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이로써 남베트남 각 가정은 최소 1.8에이커 수준의 농경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1957년까지 농지개혁은 강압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응오딘지엠의 핵심 지지기반인 지주들의 반발을 샀지만, 항의는 군으로 억압했다. 지주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1958년 초에는 1.8에이커 이상 토지를 보유했던 가구에 일정 수준의 보상금을 쥐어주었다.

1957년 5월, 응오딘지엠은 열흘 동안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약속했고, 뉴욕시에서 응오딘지엠의 명예를 위한 퍼레이드가 열렸다. 응오딘지엠은 공개적으로 찬사를 받았지만, 후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은 그 말고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그를 계속해서 지지해야 했다고 인정했다.

남부의 반란

호치민 트레일의 존재로 북베트남의 패배가 임박했을 때까지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54년과 1957년 사이에 응오딘지엠 정부는 시골에서 조직화된 불온한 움직임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농지개혁으로 농민들이 공산화에 대한 유인이 떨어졌던 것이 주효했다. 그럼에도 1957년 4월, 반란군은 "반역자 근절"이라고 불리는 암살 작전을 시작했다. 7월 한 술집에서 17명의 무고한 시민이 공격으로 사망했고, 9월에는 주지사가 가족과 함께 고속도로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응오딘지엠은 1958년 초 이런 정치적 폭력을 조직적인 작전으로 규정하고, 테러범들을 반역죄로 사형시킬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다.

1960년 9월, 북베트남 남부 본부는 남베트남에서 정부에 대항한 조직적인 봉기를 명령했고, 12월 반 남베트남 반란군을 하나의 조직으로 규합해 베트콩을 창설했다. 하지만 초기 그 규모는 크지 못했는데, 응오딘지엠의 토지개혁이 비공산주의자들의 베트공 참여 유인을 현격히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가 마릴린 B. 영은 남베트남의 상황에 대해 "55%는 정부를 지지했고, 25%는 중립을 유지했으며, 20%는 베트콩을 지지했다"고 주장했다.

북베트남의 개입

1956년 3월, 남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뢰두엔은 하노이에 있는 정치국의 다른 구성원에게 "남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대규모 반란 작전 계획을 제시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남베트남과의 싸움에 회의적이었으며, 뢰두엔의 계획은 거부되었다. 그럼에도 북베트남 지도부는 1956년 12월 남부 반란 작전 계획을 단독으로 승인했다. 이 조치는 곧바로 라오스 중앙위원회에 전달되었다. 당시 인도차이나 공산주의 세력은 단일 지휘구조 아래에 있었다. 1958년 5월, 북베트남군은 라오스 남부의 체포네에 있는 수송 허브를 통해 남베트남과 라오스 사이의 비무장지대로 이동했다.

북베트남 공산당은 1959년 1월, 남베트남에 대한 인민 전쟁을 승인했다. 그리고 5월에는 호치민 트레일을 보강하기 위한 자금 집행이 승인되었다. 7월 28일, 북베트남군과 파텟 라오군이 라오스를 침공하여 국경을 따라 라오스군과 싸웠다. 1960년 4월 북베트남은 성인 남성에게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약 4만 명의 공산군이 남쪽에 침투했다.

케네디의 애매한 태도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3월 23일 기자회견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은 현직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꺾었다. 아이젠하워는 인수인계를 통해 케네디에게 라오스와 베트남에 대해 경고했지만, 케네디에게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가 더 중요했다. 불과 16개월 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전 세계 TV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냉전이 본격적인 핵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이었고, 미국은 데프콘 2를 발령했다.

케네디는 트루먼과 아이젠하워가 시행하던 냉전 외교 정책을 그대로 시행했다. 1961년 미국은 4월 돼지만 침공의 실패, 5월 라오스 내전에서 친서방 정부와 공산주의 반군의 협상 시작, 8월 베를린 장벽의 건설,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로 대외에서 냉전 리더쉽이 약화되던 상황이었다. 케네디는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한 번 더 막지 못하면, 미국에 대한 신뢰가 회복 불가능 할 것이라고 믿었다. 케네디는 연필로 인도차이나를 가로지르는 북위 20도 선을 그었으며 이 안에서 공산주의가 활동할 수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베트남에 대한 케네디의 정책은 응오딘지엠과 남베트남군이 미군의 서포트가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스스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케네디는 미군의 추가적인 배치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열악했다. 미군의 도움이 있었지만, 부패와 정치적 인사는 막을 수 없었다. 당시 미국 전략의 핵심은 남베트남군이었지만, 베트콩을 상대하는 남베트남군 수뇌부의 무능은 위기의 핵심이었다.

케네디 대통령과 맥나마라 국방장관

케네디의 고문 맥스웰 테일러와 월트 로스토프는 베트남에 발생한 대홍수를 구조하는 요원으로 위장해 남베트남에 미군을 파견할 것을 권고했다. 케네디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남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증가시키고 응오딘지엠에게 군 내부의 부정축재자들을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1962년 4월,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케네디에게 지금 남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으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에서의 실패를 다시 맛볼 것이라며 경고했다. 아이젠하워는 베트남에 900명의 고문을 배치했고, 1963년 11월까지 케네디는 베트남에 16,000명의 미군을 배치했다.

향촌방위정책은 1961년 후반 시작되었다. 이는 미국과 남베트남의 합동 정책으로 농촌 인구가 모여 사는 마을을 요새화하려는 것이었다. 1962년 초 실시된 정책은 베트콩과 일반 농민들의 분리를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로써 대부분의 농촌 공동체는 농민들에게 베트콩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제공했으며, 중앙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준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정책은 계속해서 진행되다가 닉슨이 집권한 1969년 지출이 중단되었으며, 1973년 미국의 철수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62년 7월 23일, 중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소련, 미국을 포함한 14개국이 라오스의 중립성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에 서명했다.

존슨의 개입(1963-1969)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22일 암살되었다. 린든 B. 존슨 부통령은 재직 시절 베트남 정책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존슨은 즉시 전쟁에 집중했다. 존슨은 취임한 지 이틀 만에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힘과 결단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자신이 남베트남의 악화된 정황을 물려받았음을 알고 있었지만 남베트남에서 물러서면 동남아시아가 전부 공산화 될 것이라는 도미노 이론을 고수했다.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케네디의 군 내 인사 및 부패 개입을 통해 군대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63년 초부터 군기강확립국을 설치하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 부정축재를 조사했다. 군 내의 대표적인 부정축재자를 처형함으로써 공포감을 조성하고, 자진해서 부정을 고발하는 자는 부정을 면해주기로 하여 장교단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존슨은 결국 북베트남이 존재하는 한 남베트남에 미국이 끊임 없는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통킨만 사건

1964년 8월 2일, USS 매독스는 북베트남 해안을 따라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던 중 통킨만에서 따라오던 어뢰정 몇 척이 자신들을 공격했다고 보고했다. 이틀 후 같은 지역의 USS 터너 조이와 매독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이 보고되었다. 두 번째 공격은 공격 이후 1시간 26분 만에 백악관으로 전해졌고, 소집 명령을 받고 국방부로 복귀한 맥나마라 장관은 8월 4일 "북베트남이 지금까지 취한 공격의 성격과 수법을 볼 때 이것은 남베트남과 미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행위"라고 대통령에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미국에 대한 침공과 도전에 지금 강경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 서방을 얕잡아 본 소련이 인도차이나 전역을 시작으로 더 큰 정쟁을 벌여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고, 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지금 바로 미군을 투입하여 북베트남을 지도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존슨은 7일 가결된 통킨만 결의안을 통해 베트남 문제를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으로 확대할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존슨은 결의안 통과 즉시 막대한 항공 전력과 해상 전력의 출격을 지시했다. 지상군 역시 남베트남에 즉각적으로 파견했다.[3]

1965년 2월 7일 펠리이쿠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이 발생한 후, 미국은 북베트남에 직접적인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롤링 썬더 작전과 아크라이트 작전은 북베트남에서의 공중 폭격 및 지상 지원 작전을 확대했다. 소련은 북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폭격에 거칠게 반발했지만, 당시 미국 사회는 전면전을 불사한다는 여론이 업도적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1965년 3월부터 1968년 11월 까지, 롤링썬더 작전은 백만 톤의 미사일, 로켓, 폭탄으로 북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라오스 폭격

폭격은 북베트남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배럴 롤 작전과 같은 작전들은 베트콩의 근거지와 후방 보급지를 목표로 삼았다. 여기에는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통과하는 호치민 트레일도 포함되었다. 겉으로 중립을 표방하던 라오스는 이미 내전 중인 상태였고, 미국의 지원을 받는 라오스 정부가 파텟 라오와 북베트남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1965년부터 1973년 사이에 미국은 라오스에 2백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한 2백 10만 톤과 거의 같은 수준의 양이었고 이 때문에 라오스는 인구 규모에 비해 역사상 가장 심한 폭격을 받은 나라가 되었다.

결국 북베트남과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들을 막으려는 목표는 달성되었다. 커티스 르메이 미국 공군참모총장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전쟁을 회상하며 "그들을 석기시대로 돌려보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쟁에 임했다고 밝혔다.

1964년 공세

통킨만 결의안 이후 하노이는 미군의 도착 전에 남베트남을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북베트남은 베트콩 군대의 제식을 AK-47 소총 등으로 표준화했으며, 베트콩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편입해 사단을 창설했다. 1959년 초 약 천 명에 불과하던 베트콩은 1964년 70만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4] 같은 기간 동안 베트남에 배치된 미군은 1961년 2천 명, 1964년 초 1만 6천 명이었다. 베트콩은 지휘체계에 편입되면서 남베트남 정부를 무력화하고, 농촌 지역을 점령하고 유지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하지만 베트콩은 도시를 공격할 만큼 강력한 수준이 아니었다. 1964년 12월, 남베트남 군대는 요충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했다.

미군의 지상전 주도

1965년 3월 8일, 3천 5백 명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 다낭에 상륙했고, 이는 미군의 본격적인 지상전 개입을 시사했다. 미국 여론은 압도적으로 배치를 지지했고, 응오딘지엠 대통령은 5월 미군에 작전통제권을 넘겼다. 1965년 3월 3천 5백명의 지상 병력은 12월까지 20만 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존슨은 이전에 케네디가 설정한 미국의 심리적 방어선인 북위 20도까지 미군이 진격할 것을 요구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과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를 착실히 이행해 베트남 주둔 미군의 공격적인 전술 사용을 허가했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특히 미군 지휘체계에 포함된 남베트남군을 이용해 베트콩을 섬멸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 제안은 존슨에 의해 승인되었다. 남베트남은 내부에 존재하는 베트콩 소굴 정리와 호치민 트레일의 파괴와 점령을 1순위로 행동했고, 미군은 북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폭격과 진격을 맡았다. 미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1966년에는 남베트남 내부로 진출한 북베트남군을 대부분 북위 17도선 바깥으로 몰아냈으며, 1967년 초에는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위 17도선을 넘어 북진했다. 중국은 미군의 북진에 굉장히 당황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미국과 직접적으로 붙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공군 일부를 북베트남군에 편입시켜 도움을 주는 선으로 그쳤다.

1967년 9월에 미군은 하노이 근방 100km 까지 진격했으며, 북베트남의 몰락은 거의 사실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전황을 상세히 보도하는 것을 꺼려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북베트남이 전쟁에서 압도적으로 지고있다 정도만 알고 있었으며, 전쟁의 판도나 자세한 미군의 전략은 언론에 노출되지 않았다. 이것은 후의 테트 공세 때문에 정부가 시민과 언론을 상대로 거짓말을 해왔다는 부정적인 인상을 씌우게 한 보도 정책이었다.

1967년 12월 하노이 60km까지 점령한 미군의 보고를 들은 존슨은 전쟁의 끝이 보인다고 선언했다. 하노이 역시 이대로 한 방 없이는 전쟁에서 패배했음을 직감했으며, 전세를 뒤집기 위해 호치민 트레일과 땅굴, 남베트남의 정글지대에 숨어있던 베트콩을 이용한 전방위적 총 공세를 계획하게 된다. 당시 북베트남은 탄약, 식량 모두 불안정한 상황으로 총 공세라는 것은 사실상 명운을 건 도박을 의미했다.

테트 공세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은 베트콩에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포함한 주요 군사 시설, 본부, 정부 건물에 대한 총 공세를 명령했다. 이 공세는 남베트남 전역의 100곳 이상의 도시가 공격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미군과 남베트남은 첫 공세에 굉장히 당황했는데, 공세의 규모나 강도가 현재 북베트남이나 잔존 베트콩이 내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세가 가능했던 이유는 북베트남의 패배가 확실시되자 소련과 중국이 더 이상의 지원은 없다는 조건으로 전쟁에서 확실히 손을 털고 나가기 위해 무기와 탄약을 공급해줬기 때문이다. 특히나 67년 12월 존슨 대통령의 사실상 승리 선언으로 남베트남과 미군의 경계가 개전 초기보다 상당히 허술해진 경향도 있었고, 테트 공세가 시작된 1월은 베트남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시민, 군인, 정치인 할 것 없이 모두 긴장의 끈을 놓았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은 아직 살아있던 마지막 호치민 트레일을 통해 베트콩에 무기와 작전을 하달했고, 이는 보기 좋게 미군의 허를 찔렀다.

하지만 테트 공세의 대부분은 미군과 주둔 남베트남군의 간단한 전투로 격퇴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공세 3일 이내로 100여 곳의 도시 중 90% 이상에서 다시 통제권을 회복했으며, 일주일 이내로 99%를 수복했다. 3주가 지나자 테트 공세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주 사이공 미국대사관이 불과 몇 시간이지만 베트콩에게 점거당한 사진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된 것이다.

이 사진이 보도되며 미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였으며, 전쟁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다는 존슨 행정부의 발표를 시민들이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는데, 실제로 이기고 있는 전쟁을 국민들이 지고 있다고 인식함으로써 반전여론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 시점 존슨 대통령의 지지율은 52%에서 40%로 떨어졌으며 전쟁에 대한 찬성 여론은 48%에서 34%로 급락했다. 대중들은 테트 공세로 인해 존슨 행정부의 발표를 불신하게 되었다.

1968년 5월 10일, 파리에서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평화회담이 시작되었다. 존슨이 하노이와 중국접경지역 폭격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협상은 다섯 달 동안 정체되었다. 동시에 하노이는 살기 위해서는 지금 "협상"해야 한다고 깨달았고, 화전양면전술을 통해 평화 회담과 전투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존슨의 지지율이 39%로 30% 대를 기록하자 존슨은 재선 출마를 거부했다. 베트남에 더 많은 미군을 파견해야한다는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해임하고 크레이튼 에이브람스 장군을 사령관으로 교체한 것 역시 대중들에게는 존슨이 전쟁의 실패를 인정했다고 받아들여졌다.

베트남 전쟁은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핵심 정치적 이슈였고, 이 선거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획기적인 계획이 있다고 주장한 리처드 닉슨의 승리로 끝났다.

닉슨의 철수(1969-1973)

베트남화 정책

닉슨은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병력 철수를 시작했다. 남베트남이 온전히 스스로 방어할 수 있게 자립을 도와주는 정책은 "베트남화" 정책으로 소개되었다. 1969년 9월 호치민은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테트 공세의 실패는 하노이의 전쟁 전략 변화를 가져왔고, 남베트남 공세보다 북베트남 유지로 전략이 변경되었다.

1970년부터 미군은 전투가 벌어지던 국경 지대를 남베트남군으로 교체하고 후방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1970년 미군의 사상자는 1969년 미군 사상자의 절반도 되지 않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군이 재배치되는 동안 닉슨 대통령은 1965년 남베트남으로부터 얻은 작전통제권을 1970년 9월 다시 남베트남에 돌려줬다. 닉슨은 15만 명의 미군을 추가로 철수할 것을 발표했고,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규모를 36만 5천 명으로 줄였다. 1971년, 호주와 뉴질랜드가 병력을 철수시켰고 미군의 수는 29만 7천 명으로 더욱 축소되었으며, 1972년 2월까지 이 규모를 25만 2천 명으로 축소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1971년 3월에는 남베트남에 배치된 최초의 전투부대인 제5특수부대가 철수했다.

하이퐁 포위

미군이 철수를 시작하기 전인 1969년, 닉슨은 남베트남이 미군이 빠져도 버틸 수 있는 결정적인 한방을 원했다. 미군이 남베트남의 자립을 도와주는 것으로는 모자람은 닉슨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닉슨은 미군이 나가고 자신의 두 번째 임기 내에 남베트남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확실히 제압하지 못하도록할 비장의 수가 필요했다.

당시 채프먼 해병대 사령관은 하이퐁 주변의 하롱베이의 섬을 점령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하이퐁에 인접한 가장 큰 섬인 깟바 섬을 점령할 경우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섬을 요새화하고 곡사포대와 해안포대를 설치해 하이퐁을 타격할 수 있음과 동시에 북베트남의 애초에 거의 존재하지 않던 해상능력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닉슨은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 함대를 움직여 베트남에 존재하는 모든 섬의 통제권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1969년 4월 실시된 포위 작전은 7월에 마무리되었으며, 9월부터 요새화를 시작해 72년 12월 완공했다. 깟바 요새의 완공은 남베트남으로 하여금 파리 평화협정에 동의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캄보디아 폭격

노로돔 시아누크는 1955년부터 캄보디아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시아누크 트레일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69년 3월 닉슨은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을 따라 공산주의 근거지를 상대로 메뉴 작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비밀 폭격 작전을 시작했다. 미국의 캄보디아 침입은 닉슨이 공약한 개입 완화에 반대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반전 시위를 촉발시켰다. 미국은 결국 캄보디아의 반란을 주도해 크메르 공화국을 세워 이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부활절 공세와 파리 평화협정

베트남화 정책은 남베트남에 대한 북베트남의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에 의해 1972년 시험 받았다. 베트남 인민군은 북위 20도 선에 머물던 남베트남군을 습격했다. 베트남 전쟁은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다루어졌다. 닉슨의 반대자인 에드먼드 무스키는 베트남에서의 즉각 철수 운동을 벌였다.[5]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북베트남의 레주언과 비밀 협상을 계속했고, 1972년 10월 합의에 도달했다.

닉슨 행정부는 미국이 전쟁에서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남베트남을 설득시키기 위해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해 동의를 이끌어냈다. 1973년 1월 15일 미군의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으며, 27일 파리 평화협정이 서명되었다. 이것은 공식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종식시키고, 남북베트남 사이의 휴전을 불러왔으며, 북위 20도 선 이남의 남베트남 육지 점령지를 유지하고, 베트남 인근의 모든 섬에 대한 통제권을 남베트남에 넘김과 동시에, 남북베트남 사이에서 투표나 외교적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제했다. 또한 포로 교환이 적혀있었다. 미군의 완전한 철수에는 60일이 걸렸으며, 1973년 3월 베트남의 모든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였다.

버티는 남베트남(1973-1978)

잠깐의 정체

1월 28일 휴전을 앞두고 양측은 단 한 뼘의 영토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전투는 휴전 이후 완전히 중단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에 다시 음지로 들어가서 힘을 비축할 것을 권고했다. 닉슨은 북베트남이 따로 공세에 나서지 않는 것을 보고 베트남 문제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해 말 키신저에게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혁명정부는 휴전 조건이 당장 멸망해서 전쟁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또한 미국의 폭격이 중단되면서 호치민 트레일의 복구 작업과 물자 조달이 재개되었다. 물류의 정상화는 1975-76년 건기에 계획된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침공을 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차례의 충돌로 55명의 남베트남 병사가 사망한 후, 즈엉반민 대통령은 1974년 1월 4일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파리 평화협정은 백지화 되었다고 발표했다. 1973년에서 1974년 불과 11개월 사이에 남베트남에서는 2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1974년 8월 9일, 제럴드 포드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후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반전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는 남베트남에 대한 재정 지원을 연간 20억 달러에서 14억 달러로 삭감했다. 의회는 또한 1975년까지 단계적으로 재정 지원을 축소할 것을 의결했으며, 1976년 재정 지원을 완전히 끝내는 것을 결의했다.

1974년 북베트남은 호치민 트레일 개량을 거듭해 고속도로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과거 산악 등반 수준의 보급량을 한참 뛰어넘은 보급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레주언은 남베트남에 대한 광범위한 공세는 미국의 개입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신 제한된 공세를 펼쳐 미국의 반응을 떠보기로 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은 푹롱을 공격했다. 공격은 비록 실패했지만, 미국이 따로 개입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6]

275 작전과 호치민 작전

1975년 3월 10일, 덩 장군은 탱크와 중포의 지원을 통해 북부 고원지대에 대한 제한된 공세인 275 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남베트남 최전방은 유가 상승으로 상대적으로 넓은 북부에서 싸우는 것이 전체 작전에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주둔 병력을 남기고 2차 방어선으로 철수한 상황이었다. 3월 11일 275 작전은 성공적으로 끝나 남베트남이 통제하던 북부 지역을 일부 북베트남이 회복하게 되었다. 하노이는 빠른 진격 속도에 놀랐고, 정치국은 이제 북위 17도선까지 밀고 내려갈 것을 지시했다. 장군들은 몬순이 시작되기까지 2달이나 남은 시점이어서, 좋은 날씨가 이어지는 이 상황을 이용해 빠르게 치고 나가야한다고 주장했다.

1975년 3월 15일, 정치국은 똥 장군에게 사이공에 대한 최종 공세를 개시하라고 명령했다. 호치민 작전으로 불리는 이 공세는 북베트남의 모든 군인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 소속의 잔존 베트콩 수 만명이 함께 진행한 대규모 공세였다. 특히 크메르루주와 파텟라오 등 인도차이나 전선 전부에서 함께 이루어진 공세였기 때문에 호치민 작전은 인도차이나 공세라고도 불린다. 공세로 수세에 몰린 크메르 공화국과 라오스 정부, 베트남 공화국의 수반은 사이공에 모여 "인도차이나의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고 삼국의 국경 내에서 일어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배격하는 것을 무조건 협력하기로 하는 사실상 동맹 조약을 체결한다.

1975년 5월 2일 남베트남은 북위 18도 선까지 밀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캄보디아 전역에 남베트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동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어 양면전선에 큰 압박을 느꼈다. 크메르 루주는 점령지의 마을 주민들까지 후퇴 시 강제로 같이 후퇴시키면서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고, 1976년 통제지역을 절반 정도 잃었을 때 내부 기강 확립을 위해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다.[7] 이 학살은 크메르 공화국과 남베트남의 통보로 순식간에 미국 사회로 전해졌으며, 인도차이나의 자유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부채감이 극에 달했을 때 도덕주의 외교를 지지한 무명의 지미 카터가 민주당 경선에서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으며, 결국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까지 압승하게 된다.

카터의 재개입(1978-1981)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인도차이나 문제에 개입할 것을 시사하는 카터, 1977년 5월 22일.

카터는 당선 직후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태스크포스를 설치했으며, 1977년 취임 직후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에게 인도차이나 개입 방안 마련을 지시했다. 브라운은 처음에 의회가 동의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카터에게 말했는데, 카터는 "의회는 여론을 따른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카터는 개입을 준비하기 위한 여론전을 준비했다. 그는 1977년 5월 노트르담 연설에서 미국이 떠난 인도차이나에서 백만 명의 자유인이 학살당한 킬링필드와 도덕적 설득의 한계를 언급하며 미국이 세계에 지고있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부당한 외부의 간섭을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북베트남을 향해 즉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경고했고, 이 연설 이후 베트남 전쟁에 재개입해야한다는 여론이 급증했다.

카터는 여론을 등에 업고 베트남 전쟁 재개입에 예산을 할당하도록 의회를 압박했다. 이 때 카터를 의회에서 지지한 그룹이 바로 사우스코리아 출신의 하원의원들이었다. 의회 내에서 항상 민주당 거수기라는 비판을 받는 그룹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재개입에 있어서는 다른 어떤 그룹보다 빠르게 카터 대통령을 지지하고 모든 것을 돕겠다고 천명했다.[8] 카터는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의 수가 민주당 내에서 대략 170명을 넘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해당 내용을 공식적인 민주당의 정책으로 의결하길 원했다. 카터는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들을 지원하고 의회 내에서 세력화하도록 배려했다. 이들이 형성한 것이 현재 온건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청견연합이다.[9]

1977년 말이 되자 의회는 카터의 별다른 언급이 없더라도 여론에 의해 빠른 파병을 재촉받았다. 당시 워싱턴프레스의 여론조사에서 파병을 지지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2배를 넘었었다. 결국 197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병 예산이 할당되었으며, 1978년 해병대를 시작으로 미군의 대대적인 파병이 시작되었다.[10] 1978년 4월 도착한 지상군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특히 이번 지상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자유화 뿐만아니라 크메르와 라오스의 내전 정리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18도선 수준에서 유지되는 베트남전선 대신 크메르 전선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크메르 루주는 미군이 도착한 그 순간까지도 미국 시민들의 공분을 샀던 반인륜적 대학살인 킬링필드를 지속하고 있었다. 미국에 처음 이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인 1975년 사망자 수는 30만 명 수준이었지만, 미군이 크메르 루주를 분쇄하기 위해 마주한 1978년 희생자 수는 300만 명을 넘었다. 미군이 진격하는 곳곳은 크메르 루주가 후퇴하며 쌓아놓은 시체의 산이었다. 이 때의 참상은 실시간으로 종군기자들을 통해 미국 본토와 전세계에 알려졌으며, 결정적으로 소련이 크메르 루주에 대한 얼마되지 않는 지원마저 끊는 계기가 되었다.[11][12]

크메르 루주는 1978년 9월 크메르 전역에서 쫓겨났다. 라오스에는 미군의 폭격이 재개입 직후부터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라오스를 지나 버마로 많은 크메르 루주 지도부나 군인들이 망명을 요구했다. 당시 미얀마의 네윈 대통령은 무너지는 경제로 지지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미얀마에서도 킬링필드의 잔혹함은 많이 알려진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적 반인륜 전쟁범죄자들이 미얀마에 망명신청을 하자 사절을 보내 받아주는 척 하며, 버마 국경을 넘자 체포해 버마의 군사법원에 세워 모두 처형했다.[13] 미군이나 크메르 입장에선 탐탁치 않은 결과였지만, 미얀마로 넘어가 크메르에 대한 게릴라 공작을 실시할 수 없는 것에 일단 안심하고 라오스 전역과 북베트남 전역으로 이동했다.

1979년 라오스 전역은 쑥대밭이었다. 재개입 직후부터 무수한 폭격으로 대부분의 도로망은 유실되었으며, 미군의 진격 또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베트남 전선에 비해 라오스 전선은 굉장히 느린 속도로 진격하였다. 미군은 79년 4월부터 인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메르 공화국군과 남베트남군을 중심으로 라오스 전역에 배치하고 진격시켰다. 미군은 후방 전술지원을 도맡았으며, 주 전장인 베트남으로 전투부대 대부분이 이동하게 된다. 이 결정이 전쟁을 카터의 임기 내로 끝내지 못하는 역할을 한다. 베트남 전역에서 하노이까지 30km도 남지 않았던 1980년 10월까지 라오스 전역의 진전은 너무나 느렸다. 결국 임기 내 전쟁의 완수를 목표로 걸었던 카터의 공약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1980년 대선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카터는 결국 레이건에 아쉽게 패배했다. 당선된 레이건에게 남은 것은 소라게의 껍데기를 모두 치운 후 남아있는 음식을 먹은 일 뿐이었다.

레이건의 승리(1981)

취임식에서 진격을 명령하는 레이건 대통령

레이건은 카터-레이건 인수위원회에서 미군의 진격을 멈추라고 지시했고, 미군은 하노이를 앞에 둔 채 멈춰섰다. 취임식에서 레이건은 진격을 명령하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화려하게 임기를 시작했다. 그의 진격 명령으로부터 일주일만에 하노이가 함락되었으며, 3개월 후에 라오스가 항복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남베트남, 크메르 공화국, 라오스 정부 등 자유세계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9월 덩샤오핑 등 주변국 정상들이 참여해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전쟁이 끝났음을 선언하고, 사이공 협정이 체결되면서 1955년부터 26년간 진행된 인도차이나 전역이 마무리된다.

반전운동

1차 반전운동(1964-1973)

2차 반전운동(1978-1981)

참전국

친사이공

친하노이

중립

무기

무선 통신

미국의 무제한 폭격

여파

자유의 방파제, 인도차이나

미국에 미친 영향

전쟁에 대한 견해

전쟁 비용

고엽제

사상자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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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1968-1969년에 걸쳐 전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둔했던 미군의 최대 병력이다. 전쟁기간 전체에 있어서 파병된 미군의 연인원은 무려 400만 명이다. 닉슨의 철수 선언으로 1969년부터 1973년 초까지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켰지만 남베트남은 무너지지 않았으며, 베트콩과 크메르 루주의 민간인 학살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카터가 1978년 다시 파병을 결정하면서 미군의 재개입 3년 만에 인도차이나 전역은 평정되었다.
  2. 중국 국경으로부터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해당 국가들과 중국 사이의 일방적인 비무장 지대로 설정되었다.
  3. 한편 북베트남은 미국의 통킨만 결의안 소식을 듣고 남베트남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진행했다. 미국이 남베트남에 도착한 후엔 베트남 통일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4. 물론 북베트남에서 보낸 지원군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실제 남베트남 사람들로 구성된 수는 약 25만 명으로 추정된다.
  5. 당시 공화당은 코리아 게이트 때문에 사우스코리아의 지지를 반 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사우스코리아는 찬전 여론이 강한 주였기 때문에 무스키의 지지세가 낮아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사우스코리아는 무스키의 정책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닉슨이 집권 초 베트남 전쟁에 사용되던 군수품 생산 기지를 사우스코리아에서 본토로 옮겼기 때문이다.
  6. 반전 성향의 민주당 의회는 물론이고 포드 대통령도 남베트남에 대한 추가 지원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7. 소위 킬링 필드라는 대학살로, 캄보디아인과 포로, 반공주의자, 크메르 루주를 지지하지 않는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사냥한 사건으로 1976년 4월부터 9월까지 30만 명이 죽었다.
  8. 사우스코리아는 특히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한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베트남 파병 미군의 30%는 사우스코리아 출신이었다.
  9. 현대 미국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진보주의자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10. 이 때 경유지로 선택된 것이 사우스코리아였고, 이 당시 사우스코리아에서는 2차 모병운동이 일어나 수 십만 명이 군에 자진 입대했다. 사우스코리아는 1963년 이후 2차 군수산업 호황기를 맞았고 이 때의 자금이 현재 사우스코리아 주 번영의 기반이 되었다.
  11. 중국과 소련 모두 북베트남에 대한 지지는 이미 철회한 상태였지만, 라오스와 크메르는 별개로 지원 중이었다.
  12. 애초에 소련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졌지만, 소련 내부의 문제였기 때문에 외부로 그 참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메르 루주는 퇴각하면서 닥치는대로 학살했기 때문에 참상이 실시간으로 서방에 전해져 공분을 샀다. 공산권 국가들에서도 크메르 루주에 대한 이미지가 추락해 소련이 더욱이 지원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13. 버마는 국제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며 버마가 인도차이나의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물론 서방의 반응은 냉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