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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色戦線探索作戦
적색전선 색출 작전

개요

共産主義者とは社会の悪にすぎない。 帝国の存続のために彼らは消えなければならない。 私はこの瞬間から彼らを大日本帝国の国民として、天皇陛下の臣民として扱わない。
공산주의자란 사회의 악일 뿐이다. 제국의 존속을 위해서 그들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이 순간부터 그들을 대일본제국의 국민으로,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고토다 마사하루, 당시 내무성 국가공안위원장


1975년(쇼와 50년) 2월 13일부터 시작된, 일본의 공산주의자 대숙청.

1974년 통과된 치안유지법 개정안으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공산주의자 약 18,500명이 체포되고 사형이나 그에 준하는 중형을 선고받았으며, 10,000여명이 형무소에서 전향서를 쓰는 등 피바람이 불어 일본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불린다.

배경

당시 일본에서는 미국-일본-독일 3각의 치열한 냉전 체제 속 정부의 강경 기조에 철저한 공산주의 탄압과 반공 정책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이들은 숨어들었더라도 결코 제국 체제의 붕괴라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1950년대와 60년대는 그들에게 있어선 긴 암약의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의 본고장 소련의 붕괴는 "대적"이 없어지는 효과를 낳아 아무래도 시간이 갈수록 정부로 하여금 경계를 누그러뜨리게 했다.

일본 사회는 그들의 존자를 까맣게 잊을 지경이었다. 모두가 일상을 살아가던 즈음에, 이들은 서서히 행동을 개시했다.

1969년에는 일본항공 민항기가 납치되고, 1972년엔 나가노현에서 강성 공산주의자 집단 적군파아사마 산장 사건을 벌여 인질 30명이 사망하는 등 수면 위로 올라오는 조짐을 보였다. 1970년대 들어 학생단체의 데모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이에 당장 냉전 속에 국제적으로 일본의 권위도 서지 않을 뿐더러 사회의 동요까지 겹치게 되는 상황에 정부는 칼을 뽑아들게 되니, 1975년 1월 내각은 이 작전을 내무성과 경찰에 일임하고 승인하였다.

진행

東京をはじめとする主要都市では、容共勢力の暴動に対する警察の強硬な鎮圧が行われています。 国会前で学生たちは池田総理大臣閣下の辞任を求めてデモを行い、極度に不安な相場にあります。 しかし、こういう時こそ国民は動揺することなく団結し、共産の亡霊を追い払う時です。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용공세력들의 폭동에 대한 경찰의 강경한 진압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국회 앞에서 학생들은 사토 총리대신 각하의 사임을 요구하며 데모를 벌여 극도로 불안한 시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국민은 동요하지 않고 단결하여 공산의 망령을 몰아낼 때입니다.
1975년 2월 17일, NHK 보도


1975년 2월 13일, 대일본제국 경찰청은 공식적으로 치안유지법에 의거해 "사유재산과 천황제를 부정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엄단하며 검거 및 처벌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는 사실상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잡아들이겠다는 선언이었고, 청천벽력같은 상황에 전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양지로 나와 데모를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도 민항기 납치와 아사마 산장 사건에서 그 추악함을 알게 된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았다. 발포해도 좋다는 경찰청의 고시에 따라 2월에만 경찰의 발포로 300명 내외가 사망하고 3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1975년 2월 21일부로 내지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1]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공산주의자 사냥"을 시작했다. 아무리 이들이 지하에 암약했더라도 동료들이 경찰에 정보를 불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잡히거나 전국을 떠도는 수밖에는 없었기에 대부분 와해되었다.

경찰과 군은 고문 등의 수단으로 검거자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아지트"를 대부분 소탕하고 특히 악명높은 적군파의 수장 시오미 타카야 또한 체포되며 사실상 공산 조직은 일망타진되었다.

1975년 5월 9일, 계엄령은 해제되었고 공산주의자 총 18,500명 가량을 체포하고 대부분을 치안유지법 위반, 일부는 내란죄를 적용해 구속기소하며 일단락되었다. 이후 냐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인원도 무려 578명에 달했다.

일부는 전향서를 작성하고 감형을 받았으며, 이때 전향서 작성 과정에서는 기미가요를 외워서 복창하게 하고 틀리면 물고문을 하는 등 가혹행위가 가해졌다고 알려진다. 대표적으로 현재는 자민당 소속 중의원인 혼다 아루사토도 이때 전향했는데, 고문의 흔적으로 다리를 전다.

이 사건 이래로 공산 세력과 운동권이 몰락해 일본에서 사회주의적 요소 자체가 중대한 범죄로 받아들여졌으며, 일본은 세계적으로도 좌파가 득세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 외지의 계엄선포권은 현지 총독에 있었고 이는 지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