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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질서의 황혼 주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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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국가 및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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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주 몽강 북중국
남중국 아무르[1] 티베트 동투르키스탄
극동 필리핀 광동 라오스
캄푸치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베트남
  1. 중앙아시아로 분류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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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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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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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大日本帝国 | Empire of Japan
언어별 명칭
중국어 日本, 日本帝國[1], 日本帝国[2]
ㄉㄚˋ ㄖˋ ㄅㄣˇ ㄉㄧˋ ㄍㄨㄛˊ
영어 Empire of Japan, Empire of Nippon, Great Japanese Empire
황실 문장
국기 정부 문장
八紘一宇
팔굉일우
(1926 - 1991)
天皇陛下万歳
천황 폐하 만세
(1991 - )[3]
상징물
국가 기미가요 (君が代)
국조 일본 꿩
국화 국화, 벚꽃
역사
진무 덴노의 즉위 기원전 660년 2월 11일
대정봉환 1867년 11월 9일
대일본제국 헌법 시행 1890년 11월 29일
일청전쟁 승리 1895년 4월 17일
일러전쟁 승리, 조센 보호 1905년 11월 17일
지나 출병 1937년 7월 7일
대동아전쟁 개전 1941년 12월 8일
대동아전쟁 승전 1945년 8월 15일
지나사변 승전 1947년 5월 3일
야스다 위기 1963년 3월 25일
쇼와 버블경제 1981년 ~ 1986년
아시아 혁명 1988년 6월 25일
대일본제국 붕괴 1989년 12월 26일
헤이세이 유신, 신헌법 시행 1991년 12월 15일
일미태평양평화조약 1997년 2월 12일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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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도쿄도 (東京都)
북위 35° 41′ 22″ 동경 139° 41′ 30″
최대도시
면적 724,268km2[4] | 세계 39위
접경국 만주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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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35,496,243명 | 세계 6위
인구 밀도 320.16명/km2
민족 구성 일본인 96.42%
중국인 1.78%
만주인 0.52%
태국인 0.32%
다이완 원주민 0.26%
몽강인 0.04%
기타 0.46%
출산율 1.27명 (2023년)
기대수명 84세 (2023년)
공용어 일본어
지역어 조선어, 대만어, 아이누어, 류큐어[5]
공용문자 가나, 한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불교 34.2%
국가신토 2.2%
기독교 2.1%[6]
기타 2.6%
무종교 58.9%
군대 대일본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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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양원제, 양당제, 의원내각제, 단일국가
민주주의 지수 7.57점 | 결함있는 민주주의
(168개국중 28위, 아시아 2위)
국성 일본 황실[7]
천황 (국가 원수) 나루히토
내각총리대신
(정부 수반)
기시다 후미오
정부
요인
부총리 마쓰모토 다케아키
참의원 의장 오쓰지 히데히사
중의원 의장 가네다 가라요시
입법부 일본 국회 (참의원·중의원)
집권 여당
연립 여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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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PPP)
$16조 6,597억 2,787만 | 세계 2위
1인당 $71,819 | 세계 15위
GDP
(명목)
$12조 5,137억 9,536만 | 세계 2위
1인당 $53,138 | 세계 16위
국부 $156조 5,933억 4,922만 | 세계 1위
수출
입액
수출 $1조 9,943억 5,330만 | 세계 2위
수입 $2조 3,263억 2,699만 | 세계 1위
외환보유액 $4조 3,672억 1,280만
신용 등급 무디스 Aaa
S&P AA+
Fitch AAA
통화 화폐 일본 엔(¥, 円)
ISO 4217 JPY
국가
예산
1년 세입 $3조 5,362억 2,810만
1년 세출 $4조 2,245억 7,750만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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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 SI단위
통행 방향 우측통행
연호 레이와(令和)
시간대 GMT+09:00 (JST)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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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가입 1991년
수교국 192개국
ccTLD
.jp
국가 코드
392, JPN, JP
국제 전화 코드
+81
위치

개요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국호는 대일본제국이며 대체로 "일본"으로 불린다. 세계 2위의 GDP, 아시아에서는 1위의 GDP를 가진다.

상세

일본의 역사를 보자면 매우 복잡하다. 본래 일본은 그 영향권이 혼슈와 규슈 등지에 지나지 않는 소국이었다. 그러나 센코쿠 시대가 끝난 뒤 16세기 조센 반도로 출정했던 분로쿠-게이초의 역을 계기로 일본이 섬에 갇힌 나라가 아니며 바다 너머 국력을 투사할수 있음을 알렸다.

1868년 메이지 유신과 왕정복고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아시아의 전통적 중화질서를 깬 채 일청전쟁, 일러전쟁을 이겼으며 조선(반도)와 대만을 병탄했다.

일본의 절정은 1930년대 중국 침략을 시작으로(지나사변), 서양 열강들을 격파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어 마침내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대동아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으며, 태평양의 미국 영토들을 모조리 침탈하고 샌프란시스코마저 조약항으로 확보한 등 초강대국에 등극, 대일본제국미국, 대게르만국 두 열강과 함께 냉전 동안 세계 3대 강국이었다.

일본은 독일의 아인하이츠팍트, 미국의 자유 국가 기구에 대응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선언하고 이 국가들을 사실상의 식민지로 거느리며 번영을 누렸다.

1960년대에 고도 성장을 거듭한 끝에 1968년 미국과 독일을 제치고 세계 GDP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였으며, 1970년대에 가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1973년 인도에서 군을 철수해 권위가 실추, 1970년대 말 석유파동을 시작으로 일본 경제가 흔들리고, 1987년 독일에서 유럽 혁명이 발생해 대게르만국이 붕괴하자 대동아공영권 내에서도 반향이 일어 1988년 중국에서 봉기가 벌어지고 필리핀에서 친미세력의 내전 등 아시아 혁명이 시작되며, 신질서의 붕괴가 다가왔다.

1989년 10월 결국 일본은 중국에서 철수하였고, 이어서 다른 공영권 국가들도 무너져 내려 1989년엔 공영권 소속국 국가가 만주국과 몽강국만 남은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은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을 비롯한 반일 연합에 평화를 제의함으로서 초강대국의 자리를 내려놓았다.(대일본제국 붕괴)

이어 1990년 2월에는 최종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의 내정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쿄 조약을 맺으면서 이제 2차 대전 전의 영토에 자잘한 땅이 몇개 붙어있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공영권이 완전히 붕괴하고 경제도 무너져 내리면서 일본은 바야흐로 대혼란에 들어갔다. 결국 1991년 쇼와 덴노에게 황위를 승계한 아키히토가 스스로 친정을 선포하고, 이어서 가네무라 슌에이 총리가 덴노에게 대규모 유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90년과 1991년 연이어 자유선거가 치러지고, 1991년 12월 25일 헤이세이 유신이 선포되며, 신헌법이 시행됨은 물론 민주화가 단행되었다. 이 외에도 단계적 모병제, 신자체의 전면 확대, 군사정치 종료, 신적강하 등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에서는 1991년을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몰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거대하고 강대한 국가였다. 미국과 타협을 이뤄 1997년 일미태평양평화조약을 체결해 미국과 50년 이상 이어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아시아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가 되었다. 이어 탈냉전 후 창설된 UN에 1991년 가입했고 상임이사국이 됐다. 참고로 상임이사국 배정은 냉전의 승자 미국, 그리고 구 국제연맹의 상임이사국 독일과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총 5개국에 배정됐다.

냉전 패배 직후 199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불황기를 보내야 했지만, 2002년부터 경제 성장률 10년연속 -에서 탈출하여 무난한 성장을 했다. 그 와중에도 세계 GDP 2위만큼은 지켰다.

민주주의, 기술, 경제, 그리고 국민의 삶의 질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구축하고 있는 강대국이며, 실질적으로 G2로 불릴만큼 초강대국의 면모도 보인다. 일본의 통화인 일본 엔만 하더라도 세계 통화 거래량의 15~20%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이다.[8] UN을 비롯한 여러가지 국제 조약과 기구에 가입되어있으며, 비 서구권 국가중 유일한 G7의 회원국이자,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주도국, 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APCO) 의장국, 아시아개발은행(ADB) 설립국 등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이다.

상징

국호

일본의 공식적인 국호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 だいにほんていこく)이다. 이 국호는 1890년 1차 헌법 제정 당시 확정된 것이다. 다만 1936년 전까진 공식 국호 외에 다양하게 쓰였고 1936년에 대외적 국호를 정하였다.

약칭으로는 일본(日本)이 주로 사용된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인 아스카 시대에는 왜국(倭國)이 공식적인 명칭이었으며, 701년의 다이호 율령 반포 당시 왜국의 명칭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는 야마토(大和)라는 명칭도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일본의 별칭(別稱)이다.

국제적으로는 일본국(日本國)의 중국식 발음이었던 지펀구를 마르코 폴로가 라틴 문자로 옮긴 Zipangu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보통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국제적 국호는 Empire of Japan이며 Tai Nippon Taikoku라고 발음 그대로 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Japan 또는 Nippon이 쓰인다. 일본은 1954년에 서구 국가들[9]만을 고유 국명으로 부르는 것은 인종적 편견이라며 중국에서 유래된 Japan 대신 Nippon을 일본의 영문 영칭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였고 현재도 공식 입장이나 지금도 정해진 명칭은 없고 Japan이 여전히 우세하다. 다만 일본인이 자국을 영어로 소개할 땐 십중팔구 Nippon을 쓴다.

중국어에서는 르번(日本)또는 르번띠궈(日本帝國, 日本帝国/ 일본제국)로 발음된다. 따르번띠궈(大日本帝国/ 대일본제국)라고 정식 국명을 부르는 경우는 잘 없다.

참고로 "니혼(にほん)"과 "닛폰(にっぼん)" 중 어느 명칭을 쓸지 논란이 있는 편이다. 대체로 일상 생활과 대중매체에서는 "니혼"이 쓰이나, 정부와 자민당 등 공적인 자리에서는 "닛폰"을 주로 쓴다. 사실 어느 쪽도 상관이 없으나, 닛폰이 조금 더 강력한 인상을 주고 있다.

국기

일본국의 법정 국기
일장기 | 히노마루
日章旗 | 日の丸
빨간색 (#AF001F) 하얀색 (#FFFFFF)
国旗きは、日章旗とする。
국기는 일장기로 한다.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제1조


일본의 공식적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는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서 수천년간 사용되어온 깃발이었다. 공식적인 국기로 채택된 것은 메이지 3년(1870년) 2월 27일의 일이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때부터 일장기와 디자인이 유사한 니시키노미하타가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일본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일장기가 사용되어온 기간은 가늠할 수 없이 길다. 공식적인 명칭인 일장기보다도 히노마루(日の丸)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깃발이다.

속 일본기에 따르면, 701년 몬무 덴노가 태양을 나타낸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태양 상징 깃발을 사용한 사례이지만, 흰색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는 아니었다. 다만 바탕에 원 하나라는 디자인은 고대나 현대에나 같았고, 이 깃발은 일본의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사용되었다. 늦어도 16세기 이전에는 빨간색 동그라미에 하얀 바탕이 디자인이 되는 현대 모양의 일장기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에도 시대 때부터 상선에 흰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상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장기는 국제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히노마루의 국기 지위가 성문법으로서 명시된 것은 대동아전쟁 직후인 1949년의 일이다. 이 법은 헤이세이 유신 이후에도 계승하여 현재에 이른다.

한편, 대동아전쟁 중이던 1941년부터 일본기독교회가 제시한 양식에 따라 전 일본 국민의 일장기에 대한 국민의례가 시작되었으며. 1949년 학교와 관공서에서의 국민의례가 법제화되었다. 국민의례는 일장기에 대해 기미가요 제창, 신사참배 형식의 묵념으로 이루어진다.

학교나 관공서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할 시 징계를 받고 심하면 파면된다. 이 때문에 헤이세이 유신 이후 국민의례가 일본국 헌법에 위배된다며 여러 차례 소송이 걸렸으나 모두 만장일치로 헌법에 합치한다는 결정이 나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욱일기 역시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며 군기(軍旗)로 사용된다. 하지만 욱일기 역시 일장기에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기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


(きみ) () (임금의 치세)[10]
国歌は、君が代とする。
국가는 기미가요로 한다.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 제2조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이다. <기미가요>는 국가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우며, 단 11마디의 단가로만 되어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적인 요소가 들어가있는 것도 특징이다.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나왔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와카집>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써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일본에는 자국을 상징할만한 국가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프란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에 현재의 곡조를 붙여 곡을 완성하였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냉전 시대에는 기미가요는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였다. 약 40년간의 대동아공영권 지배 기간 동안 동남아와 중국에서 자국의 국가보다도 더 불렸던 곡으로서, 현재도 많은 아시아의 장노년층에선 기미가요를 부를수 있다고 한다.

1937년 만들어진 국민가 바다에 가면 (海ゆかば)[[1]]이 준국가로 쓰인다. 너무 단조로운 기미가요의 음정이나 가사 때문에 사실상 황실 찬가에 가까워서 조금 더 천황에 대한 충성에 중점을 둔 준국가를 만들 필요성이 있었고, 이는 1957년 일본 내무성이 바다에 가면 작곡 20주년을 맞아 제2의 국가로 공인하고 1959년 문부과학성에서 각급학교 음악 교과의 필수곡으로 지정하였다.

다만 1949년의 국기 및 국가에 대한 법률에는 명시되지 않았기에 사실상 기미가요의 우선권이 인정되었다. 대체로 국가 제창이라 함은 기미가요만 부르거나 기미가요 선창 후에 바다에 가면을 부르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마저도 아베 신조 내각 이래로는 기미가요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 현재는 대부분의 경우 기미가요만 제창한다.

역사

메이지 유신 이전

701년 율령국 확립과 국호 일본의 정립, 헤이안 시대, 나라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 센고쿠 시대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다. 이 시기 도요토미가 조센 반도를 정벌한 분로쿠-게이초의 역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명장 리노이에 슌진의 활약으로 보급로가 끊긴데다 명국까지 참전하자 조선 정복은 좌절, 이후에 도요토미는 죽었고 그의 정권은 무너졌다. 1600년 오가사와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 시기 조센에는 여전히 조선 왕조 시기였다.

에도 막부는 1638년 기독교도들이 벌인 시마바라의 난 이후 약 200년간 네덜란드를 상대로하는 나가사키 무역를 제외한 모든 항구에서 무역을 금하며 쇄국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청국의 패배에 대한 사실은 이미 알려져있었다.

그러던 중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에도(도쿄)만까지 쿠로후네(흑선)을 몰고와 통상을 요구한 쿠로후네 사건 이후로 1854년 미국과 통상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하여 서양 각국과도 통상을 맺었고, 일본은 급격히 근대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858년에는 더욱 불평등 성격이 강해졌다. 막부의 무능은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하여 천황을 받들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토바쿠(討幕)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게 된 대정봉환이 있었고,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이제 막부가 아닌 일본 제국으로서 재탄생하였다. 막부의 잔존세력이 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1869년까지 토벌되었다.(보신전쟁)

지리

2024년 제국 내무성에서 발행된 대일본제국전도

일본은 열도, 반도, 대만 섬 크게 3개의 큰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게 이 3개 지역이라는 것이지 다이렌, 난요군도 등 태평양 영토까지 일본의 영토는 파편화되어 퍼져있다. 이 영토들을 모두 더한 국토 총면적은 724,268km2로서 세계 39위에 위치하여 나름대로 큰 국토를 가진다.

지방

일본 각 지방 지도

일본은 크게 열도에 간토, 주부, 도호쿠, 홋카이도, 간사이, 주코쿠, 시코쿠, 규슈 등 8개 지방이 있고, 반도에 게이키, 게이쇼, 주세이, 코겐, 코난, 간쿄, 헤이안, 고카이등 8개, 그리고 다이완 지방까지 하여 총 17개 지방으로 구분된다.

가장 부유하고 큰 권역은 간토이며, 2번째는 원래 오사카가 포함된 간사이였으나 1970년대 이후로는 게이조부를 위시한 게이키 지방이 제2 도시권이다.

이 외에 일본에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오오야시마(大八洲)라고도 한다. 이는 일본을 이루는 8개 섬(주)를 의미하며, 과거 고사기에는 커다란 혼슈(本州), 규슈(九州), 시코쿠(四国)와 함께 아와지(淡路), 이키(壱岐), 쓰시마(対馬), 오키(隠岐), 사도(佐渡)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혼슈(本州), 규슈(九州), 시코쿠(四国), 홋카이도(北海道), 오키나와(沖縄), 조센(朝鮮), 타이완(台灣), 가라후토(樺太)를 의미한다.

자연

혼슈

크게 열도, 반도, 다이완 섬으로 이루어져있지만, 부속 도서까지 포함할 시 그야말로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섬들이 일본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다. 영토중 확실하게 대륙의 일부라고 할만한 것은 반도로 딸려있는 반도의 일부 지역에 불과하며 그 외의 영토는 모두 섬으로 이뤄져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섬나라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영토는 온대기후에 걸쳐있지만, 영토가 넓은만큼 기후도 그만큼 다양하다. 반도 북쪽과 북방영토, 가라후토 섬 그리고 홋카이도 일대는 냉대 기후에 속한다. 반도의 게이조부 역시 냉대기후에 걸쳐있다. 반면 대만 섬은 태풍이 자주 몰아치고 연중 습하고 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열대 기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고, 산과 강이 많아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대만섬과 히가시니혼 지역은 환태평양 화산대를 끼고 있어 지진이 빈발한 반면, 반도와 케이한신 지역의 경우 지진 활동이 적은 편이고 반도는 햐쿠토산정도를 빼면 활화산도 딱히 없다.

인구

본토인 열도에 총 128,652,263명이, 반도에 78,721,371명이, 대만 섬에 21,584,393명이, 미크로네시아 등 태평양 영토와 다이렌(관동주)에 5,788,216명이 거주하여 총 235,496,243명의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인도, 남중국, 북중국, 미국,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6위의 수치이며, 선진국 중 미국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미국과 일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선진국인 독일도 1억 명 턱걸이 수준이다. 즉 중국과 인도가 워낙 넘사벽을 자랑해서 그렇지 일본은 인구 대국이기도 하다. 2억 3500만의 인구를 가지고도 4만 달러가 넘는 국민소득을 자랑하고 양질의 생활을 국민에 제공하는 미국과 함께 유이한 나라다. 또한 인구 상위 10개국 중 미국과 함께 유이한 선진국이다.

일본 열도는 규슈, 시코쿠, 혼슈, 홋카이도 등 4개의 섬으로 나뉘지만, 인구의 절대다수가 혼슈 섬에서 거주하고 있다. 인구상으로 가장 밀집된 곳은 혼슈 섬의 간토 평야, 긴키 일대의 케이한신 권역[11], 반도의 게이키[12] 권역, 그리고 대만섬의 다이호쿠부이다.

1가구 주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보니 간토 평야, 게이키 지방과 같은 곳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스프롤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20개중 19개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의 대도시들은 그 규모와 인구 수에 있어서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만큼 중소도시와 지방의 형편이 어려운데다가 대도시의 집값이 비싸 최근에는 오히려 지방 도시로 이주하는 인구수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다만 인구학적인 면에서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일본의 인구는 2007년에 2억 3,836만 4325명으로 정점을 찍었으며, 현재까지 8년간 2,868,082명이 감소한 수치이다. 거기다 이 인구조차도 가용 인원이 그리 많지가 않아서, 1970년대부터 저출산이 시작된[13]일본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이 22.4%에 달함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초고령 사회이다.

출산율의 경우 1.27명으로 인구 유지선(2.1명)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물론 선진국의 공통된 경향이나 일본은 매우 심하다. 더군다나 다른 선진국들은 보수적인 독일 정도를 제외한다면 적극적인 이민을 통해 인구를 유지하나 일본은 매우 폐쇄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사회이다 보니 이민도 철저히 제한적으로만 받는다. 당장 1950년에 전에 본토에 편입된 반도인과 대만인이 사회 통념상 완전한 일본인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도 80년대에 쇼와 버블경제로 피차 지갑사정이 넉넉해지며 이질감이 옅어진 후의 일이다.[14]

인구 밀도는 320.16명으로서 34.76명에 불과한 미국의 약 9배가 넘어 밀집도가 상당하다. 거기다 대부분의 인구가 도쿄, 게이조, 오사카 등 주요도시에 모여사는 특성상 실질 밀집도는 더욱 높은 수준.

영토 분쟁

2개의 영토 분쟁을 겪는 중이다. 일본이 실효 지배하는 지역은 볼드체, 상대국이 실효 지배하는 지역은 그냥 표시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분쟁지역이 아닌 상대국의 일방적 주장 지역으로 본다.

행정구역

대일본제국
도도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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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자치단체 개념으로 도도부현(都道府県 (とどうふけん))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중 도(都)는 도쿄도, 도(道)는 홋카이도, 가라후토도가 있고 대부분의 광역지자체들은 부나 현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도(都)

도쿄도












일본 유일의 도(都)인 도쿄도는 일본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이며 나아가 세계 최대의 도시이다. 약 1,410만명이 거주하며 광역인구는 4,400만명이다. 최대 도시이자 수도라는 점에서 도라는 특별 지위를 받았고 다른 도는 현재까지는 없다. 전쟁 중이었던 1943년 7월 1일 도쿄도제가 실시되면서 도쿄부를 도쿄도로 개편하였다. 당시 도쿄도 수장의 명칭은 '도쿄부 장관'이었다. 현재 도의 지자체 수장은 도지사이다. 도쿄도지사는 다른 현지사나 부지사와 마찬가지로, 직접선거로 4년에 한번씩 뽑으며 재선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도쿄도의회 선거 역시 4년 주기로 치뤄진다.

본래 직할시였으나, 1947년 23구를 설치하고, 1992년 도쿄도지사를 직선으로 선출하면서 광역자치단체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도쿄도의 특별구는 다른 정령지정도시의 행정구와는 달리 시에 속해있지 않다는 특징이 있고 각각의 특별구는 시정촌과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도쿄는 23구부로 이루어진 정사각형 모양의 도심지역과, 시와 정으로 구성된 배후 도시인 타마가 합쳐진 가로로 길쭉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보통 도쿄라고 하면 23구부만을 이야가하지만, 1,500만 도쿄도민중 1/3 가량인 480만명 가량이 타마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도(道)

홋카이도
가라후토도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도를 지칭하는 행정구역단위이다. 도는 7세기 율령제 반포 이후 설치되어 1871년 이후 서서히 용도폐기되었다. 홋카이도는 위의 행정구역의 명명 방식에 따라 역사적으로 가장 최근에 이름이 붙은 지역인데, 이제 이 행정단위를 쓰는 곳은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도가 유이하다.

홋카이도는 본토와는 정반대로 3현(하코다테현, 삿포로현, 네무로현)을 거쳐 1886년 홋카이도청(北海道廳/北海道庁)이 설치되었다. 이후 1943년 가라후토를 홋카이도에 편입하나 소련에게서 점령한 북사할린을 편입해 가라후토가 대폭 커진 뒤에 1955년에 가라후토 섬은 가라후토도로 독립해 2번째 도가 됐고 치시마 열도는 홋카이도 관할로 확정됐다.

땅이 넓어서 출장소 개념으로 14개의 진흥국(振興局)과 1개[15]지청(支庁)이 설치되어 있다. 이들 진흥국 및 지청 중 두 곳에는 시가 없다.

홋카이도의 수장은 홋카이도지사로 마찬가지로 직선직이다.

가라후토도의 경우 도요하라시가 최대 도시이며, 인구 약 139만 명이 거주한다. 수장은 마찬가지로 가라후토도지사로 직선제이다.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는 두 지역 합해도 700만 명 미만이라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 도(道)하면 변방에 설치되는 행정구역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어느정도 맞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는 일본의 북방으로서 냉대 기후에 속하는 지역이라 겨울철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미국, 중국 등 외국에서도 자주 방문해오며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 1.2위를 홋카이도와 가라후토가 다툴 정도이다.

특히 일본 최북단인 가라후토는 불곰, 순록, 사향노루, 스라소니, 여우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볼수 없는 이색적인 동물들이 많이 서식한다. 이러한 동물들은 일본 정부에서 특별히 지정하여 관리 중이다.

부(府)

게이조부
오사카부













부는 현의 가장 큰 도시를 현의 개념으로 승격시킨것과 비슷하지만, 도(都)와는 달리 산하에 자치구를 둘 수 없다. 현재는 오사카부, 교토부, 게이조부, 후산부, 다이호쿠부 등 총 5개의 도시가 부로 설치되어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홋카이도 하코다테, 나가사키현, 가나가와현, 나라현, 에치고, 카이에도 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후 1869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거치면서 교토, 오사카, 도쿄만이 부로 남게 되었으며, 1943년 개편을 통하여 도쿄가 도쿄도로 승격되었고, 1952년 반도와 대만 내지편입 이후 배려 차원에서 최종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게이조와 다이호쿠가 부로 승격되고, 1958년에는 후산도 부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16]

예전에는 부가 도(都)와 마찬가지로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받았지만, 점차적으로 부지사의 직할 권한이 없어져서 현재는 현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영어 명칭도 현과 같은 Prefecture를 쓴다. 부는 산하에 시정촌은 있을 수 있어도 자치구를 둘 수는 없다. 설치 초기에는 부지사가 해당 부의 중심 도시를 관할했기 때문에 적어도 그 당시에는 광역시와 비슷했다. 헤이세이 유신 이후 지방자치제가 도입되어 각 도지사, 부지사, 현지사 등을 직선하게 되었고, 통일지방선거가 법제화됐다.

따라서 일부 부는 도(都)로의 승격을 노리고 있다. 2011년 게이조도 전환 주민투표, 2015년 오사카도 전환 주민투표 문서를 참조. 참고로 양측 모두 부결되어, 도로의 전환을 추진했던 부지사가 정치적인 타격을 입었다. 지역주의 활동이 활발한 게이조부, 오사카부와 달리 다이호쿠와 교토는 도로의 승격 움직임이 거의 없다.

현(県)

1871년 폐번치현을 통해 에도 시대의 각 번(藩)들을 행정구역화한 것이다. 이 때문에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현의 개수가 302개에 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러개의 현이 합쳐지고, 또 분리됐으며, 이후 반도와 대만에도 현이 설치되는 과정을 거쳐 현재는 현의 개수가 80개로 줄어든 상태이다.

여담으로 현의 이름은 현청이 소재한 도시의 이름이나, 예전에 현청이 소재했던 도시의 이름을 따온 경우가 매우 많다. 오키나와현 정도만이 이 경우에 속하지 않는다

특례청(特例庁)

내지 행정구역 중 혼자 도도부현에 들어가지 않으며, 이 행정구역 분류는 남양청다이렌청이 해당된다. 근거 법령은 1962년 제정된 특수법이다.

남양은 과거 일본이 1차 대전 후 받은 남양 군도에 괌, 웨이크섬 등이 얹어진 지역이며 본래 외지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이주해 갔음에따라 일본인 비중이 압도적이 되면서 1962년 남양청을 개편하고 내지로 편입하였다.

그러나 당장 내지편입을 했음에도 인구가 당시 약 10만 명이 조금 안되는 수치였으며, 단독 현을 구성할 요건이 안되었다. 게다가 특례로 현을 설치하더라도 너무 광범위하게 현이 퍼지므로 그것도 효율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래서 복안으로 나온게 내지에 편입하되 기존의 청(庁) 체제를 유지한 채로 준내지(準内地)로 두자는 것. 이것이 받아들여져 1962년 남양청이 특례청으로 개칭되고 내지의 특례 행정구역으로서 편입되었다. 여담으로 도쿄도 도서부로 편입하려고도 했으나 도쿄도가 격렬히 반대했다.

남양은 현재도 인구가 약 42만 명으로 가장 인구가 적은 53만 명의 돗토리현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구 비중은 일본인 63.2%, 원주민 36.8%이다. 중의원 선거구의 경우 인구비율로 보면 2석 배정이 가능하지만 특수법에 의거하여 1석만을 할당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남양 선거구라는 중의원 선거구이다. 현 중의원은 토가네 신이치로 의원.

이 때문에 남양은 내지인 듯 내지 아닌 느낌을 주고 있다. 애초에 도도부현이 미설치되어있는 시점에서 다른 내지와는 조금 다르다.

다이렌청은 본래 중국의 뤼순으로, 1898년 러시아 제국이 조차했다가 일러전쟁 이후 관동주(関東州)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 조차권이 넘어갔다. 조차지 시절의 본국은 1932년까진 중화민국이었고, 이후엔 만주국이 되었다. 본래 1997년까지가 조차 기한이었으나 1948년에 일본의 강요로 만주국이 다이렌을 공식적으로 포기해 영구적인 일본령이 되었다.

1962년 남양과 함께 특례지역 형태로 내지에 편입되었다. 인구수 745만 명으로 약 15석의 중의원 의석이 배정 가능하지만 특례지역이라는 명목으로 중의원 3석만 선출하고 있다.

기초자치단체: 시정촌

시정촌(市町村)이라고 하여 도도부현 산하의 기초자치제도 역시 실시되고 있다. "시정촌"이란 이름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도쿄도의 23개 특별구도 시정촌과 같은 단계의 지자체이기 때문에 묶어서 시구정촌이라고도 부른다.

현의 휘하에는 시(市, し)와 군(郡, ぐん)을 둔다. 인구가 5만 명 이상이면 시, 그 미만이면 군이며, 한번 시로 승격될 경우 아무리 인구가 감소하더라도 군으로 격하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인구 감소가 시작된 후엔 5만 명이 안되는 시들도 몇개 생기고 점점 늘고 있다.

시의 아래에는 정(町, ちょう), 촌(村, そん)을 둔다. 이러한 시정촌은 일본의 최소행정단위이다.

다만 도쿄도와 5개 부 휘하의 시의 경우는 다르다. 이들 휘하에는 구가 설치된다. 그러나 도쿄시를 제외하면 게이조시, 오사카시, 후산시, 다이호쿠시, 교토시의 모든 구는 자치구가 아니다. 휘하에 구릏 설치하고 정(町)과 촌(村)의 설치는 동일하다.

메이지 시대 이전에는 상공업자가 모여사는 마을을 정(町), 농민이 사는 마을을 촌(村)이라고 불렀다. 메이지 시대 초중기에 정촌을 폐지하고 대구소구제 등을 시행하다가 폐지하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현재의 시정촌제는 1888년 도입되었으며 시정촌 대통합 작업 후인 1899년 실시되었다. 1888년 이전에도 정촌은 존재했지만 이때의 정촌은 말그대로 '마을' 단위로 설정되었는데, 이른바 메이지 대합병 과정을 거친 1889년부터는 마을 여러 개를 묶어서 시정촌을 구성하게 되었다. 이후 1951년 승전 이후 칙령을 통해 현재의 시정촌 제도를 확립했다.

인구가 5만명 이상이면 시로 승격된다. 시는 다시 특례시(特例市), 중핵시(中核市), 정령지정도시(政令指定都市)로 나뉜다. 인구가 25만 명 이상이면 특례시, 50만 명 이상이면 중핵시, 70만명 이상일시 정령지정도시로 지정된다.

외지 (폐지)

대일본제국
외지1945-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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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外地, がいち)라는 행정구역 분류는 공식적으로 1895년부터 1997년까지 존재했었던, 일본 정부가 직접 통치하는 내지(内地)에 상반되는 천황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식민지를 의미했다.

1895년 대만 섬을 획득하고, 1905년 다이렌과 미나미가라후토를, 1910년 반도를 얻게 되면서 그 범위가 늘어났다. 이에 1918년 "공통법"이라는 것을 제정해 외지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하였다.

1945년에 광동과 산동 등의 추가 외지를 얻었고, 1952년엔 내외일체로 반도와 대만은 내지로 편입했다. 이때 냉전 시기의 일본은 중국 대륙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광활한 식민지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대일본제국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 일본 본국도 경제도 위기에 봉착하였다. 결국 외지는 순차적으로 포기되었으며 1990년에 광동을 독립시키고 산동을 중국에 반환했으며, 동시에 말레이, 뉴기니, 그 부속지인 쇼난(이후 싱가포르로 환원)까지 포기하여 1990년에 사실상 외지는 대부분 사라졌다.

태평양 방면의 하와이, 상항 등은 남아 있다가 1997년 일미태평양평화조약으로 이들도 포기하면서 최종적으로 외지 자체가 폐지됐다.

정치

일본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에 기반한다. 헤이세이 3년 제정된 헌법에서 천황을 "국가원수이자 국방군의 통수권자"로 규정한 바 국가원수는 천황이며, 정부수반은 내각총리대신이다.

현재 천황은 전임 아키히토가 2019년 일본 역사상 최초로 생전 퇴위함으로서 양위를 받은 나루히토이며, 연호로는 레이와(令和)를 쓰고 있다.

총리대신은 2021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부총리로는 마쓰모토 다케아키가 있다.

국회는 중의원참의원이 양원제이다. 1890년 개설된 일본 제국의회는 133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헤이세이 유신 이전 제국 시대까지는 참의원 대신 귀족원이 존재하였다.이는 화족들을 위한 명예직에 가까웠었다. 그러나 냉전 후 유신의 과정에서 신적강하를 통해 화족를 폐지하면서, 자연스럽게 귀족원도 사라지고 대신 1991년 참의원이 개설되었다.

정당정치의 경우, 일본은 오랫동안 익찬 체제라고 하여 1940년부터 1990년 정당 자유화에 이르기가지 50년간 다른 모든 정당을 합병한 군부 관제 정당인 대정익찬회가 일당 통치를 벌였다. 즉 군부독재 체제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대동아전쟁에서의 승전으로 군부의 발언권이 더욱 증대되기도 했다.

헤이세이 유신을 전후하여 익찬회가 해체되고 각 정당이 허용되면서, 난립하기도 했으나 곧 통폐합되어 1990년에는 보수적/구군부 위주의 일본자유당(日本自由党), 리버럴/민주적 성향의 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 보수적/구 관료 위주의 일본국민당(日本国民党) 등 크게 3개의 세력으로 분화됐다.

대체로 일본자유당과 일본사회당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체제가 이어지다가, 1997년 11월 22일 국가위기 상황에서의 안정을 명분으로 자유-국민을 위시한 범 보수 세력이 대통합해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을 창당하며 급격히 보수 일방적 우위 체제로 전환되어 2024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를 97년 체제라고 한다.

당시 사회당을 비롯한 야권에서는 '익찬회가 간판만 바꾸어 되돌아왔다"고 비판하기도 했었다.

한편,야권은 2009년 사회당 내란 사태로 사회당이 사실상 강제 해체 및 몰락하면서, 여러번의 이합집산을 거쳤으나 현재는 입헌민주당으로 정리되었다.

천황


대일본제국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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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대 제123대 제124대 제125대 제126대
메이지 다이쇼 쇼와 아키히토 나루히토
신대 통치 · 야마타이 국왕 · 북조 천황 · 추존 및 비정통 천황


나루히토 천황
万世一系の天皇は、大日本帝国の国家元首として、内閣及び政府を統率し、その地位は、主権を有する国民の総意から生じる。
만세일계의 천황은 대일본제국의 국가원수로서, 내각 및 정부를 통솔하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에 따라 천황은 일본의 국가원수이다. 현재의 천황은 제126대 천황인 나루히토이며, 황위 계승자는 나루히토의 동생인 후미히토 친왕, 2순위 계승자는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 히사히토 친왕이다.

일본 천황은 다른 국가의 국왕과 달리 유일하게 황제(Emperor)이라는 작위로 호칭되고 있다. 가문의 역사에 있어서도 다른 가문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적통성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황실은 약 2,600년간 한번도 끊김이 없이 이어져왔으며, 이를 만세일계라고 부른다.

막부가 바뀌고, 막부 체제에서 제국 체제로, 제국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이양되는 과정에서도 천황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보존되었으며 천황의 자리를 탈취하기보다는 보존하는 세력이 더욱 정통성을 가진다고 인식되었다. 1991년 헤이세이 유신 당시 아무도 천황의 의지를 거역하지 못한 것에서 알수 있다. 그만큼 일본의 천황은 일본의 구심점이자, 일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국민적으로 공화주의 조직이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17] 천황은 일본 국민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 쇼와 천황 이후 아키히토 천황, 나루히토 천황 그리고 현재의 황위 계승자인 후미히토 친왕까지 황실 구성원들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한데다가,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국민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제국 시기에는 군부의 거수기 역할만을 하는 감이 없지는 않았다.

천황은 신화시대까지 합해 126명이 있으나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제국의 천황은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헤이세이 - 레이와까지 총 5대에 걸쳐 이어져있다.

참고로 일본의 천황은 남성 황족만이 자격이 있다.

내각총리대신


대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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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제1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토 히로부미 구로다 기요타카 야마가타 아리토모 마쓰카타 마사요시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이토 히로부미 마쓰카타 마사요시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게노부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히로부미 가쓰다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제13대 제14대
가쓰다 다로 사이온지 긴모치
다이쇼 시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사이온지 긴모치 가쓰라 다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오쿠마 시게노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라 다카시 다카하시 고레키요 가토 도모사부로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야마모토 곤노효에 기요우라 게이고 가토 다카아키 와카쓰키 레이지로
쇼와 시대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다나카 기이치 하마구치 오사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이누카이 쓰요시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히로타 고키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하야시 센주로 고노에 후미마로 히라누마 기이치로 아베 노부유키
제37대 제38-39대 제40-42대 제43-44대
요나이 미쓰마사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기도 고이치
제43-44대 제46-49대 제50-52대 제53-54대
하토야마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 이노 히로야 다카기 소키치
제55-56대 제57-59대 제60-61대 제62-64대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제65-66대 제67-69대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무라 슌에이
헤이세이 시대
제67-69대 제70-71대 제72대 제73-74대
가네무라 슌에이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모리 요시로
제75-76대 제77대 제78대 제79대
아소 다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간 나오토
제80대 제81-83대
쓰키야마 아키히로 아베 신조
레이와 시대
제81-83대 제84대 제85-86대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인세이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아즈치모모야마 · 에도 · 내무경

원로 · 부총리


일본의 정부수반이자 행정부를 대표하는 행정부 수장이다.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르면 행정권이 속하는 내각의 수장으로 정의되어 있다. 내각총리대신은 행정 각부를 임명하며 천황을 대신하는 사실상의 국가원수로서 국정 전반을 통솔한다. 총리는 중의원/참의원에서 선출하며 자격에 중의원이어야한다는 조건은 없지만 관례상 중의원 다수당의 대표나 총재가 총리로 선출된다. 중의원/참의원에서 총리 지명 투표를 거치고 천황의 임명장을 얻어 총리 대신으로 지명된다.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다른 사람을 총리로 임명하였을 때에는 보통 중의원이 우선권을 가진다.

세계구급 강대국의 정부 수반인만큼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총리가 여럿 있어왔다. 대표적으로 아베 신조, 기시 노부스케, 다나카 가쿠에이, 가네무라 슌에이 등. 현 내각총리대신은 자민당 소속의 기시다 후미오이며 2021년 10월 취임하였다.

총리의 호칭은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각하(閣下)이며, 공식 존칭은 내각총리대신 각하(内閣総理大臣閣下), 대체로는 처음에만 모두 말하고 그 뒤에는 총리 각하(総理閣下)또는 그냥 각하(閣下)로 부른다.[18]

행정각부

대일본제국 국가행정조직
大日本帝国国家行政組織
1부 19성 33외국 [ 펼치기 · 접기 ]
공정거래위원회
국가공안위원회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카지노관리위원회
국세청
금융청
소비자청
대본영
국가보훈청
방위장비청
공해등조정위원회
국가공안위원회
검찰청 문화청
스포츠청
중앙노동청
자원에너지청
특허청
중소기업청
해상보안청
해경청
우주개발청
시종청 국외자원청
임야청
수산청
운수안전위원회
관광청
기상청
출입국재류관리청
공안심사위원회
공안조사청
원자력규제위원회
중앙성청 파일:플로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심볼.svg 내각총리대신 직속 기관 독립 중앙 행정 기구



대일본제국 내각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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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성청이라고 불리며 현재는 총 19개의 성(省)이 설치되어있다. 성의 대신은 주로 의원으로 구성되며 의원이 아닌 사람도 대신에 오를 수 있으나 그 수는 전체 대신의 1/2를 넘지 않게 한다. 이 조항은 아직도 건재한 군부가 일본의 정치에 종종 개입하는 원인이다. 비의원 대신의 경우 대부분 군인 출신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쟁성, 육군성, 해군성,공군성의 경우 무조건 현역 군 장성만 기용된다. 즉 일본 국방군은 아직 군 문민통제를 이루지 못했다.

중앙성청 이외에도 총리의 재량에 따라 특명담당대신들을 기용할 수 있는데, 현재 기시다 내각에서는 13명이 특명담당대신으로 임명되어있다. 이들은 중앙성청에서 다루는 것중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책임진다.

행정각부의 수가 많고 특명대신도 있는만큼 대신직 자체는 권한이 크지 않으며 오히려 권력 투쟁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경우가 잦다. 실무는 거의 대부분 관료가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외무성과 대장성, 상공성의 힘이 강력하다하나, 경제 및 외교 관련 부처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단지 발언권만 강할 뿐 업무 자체는 관료가 전부 다 하고 대신은 도장만 찍는 역할만 한다.

국회와 선거

일본 제국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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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내각 (2021.10.21 - )
여당

자유민주당
 219석 362석 

공명당
 21석 35석 
야당

입헌민주당
 82석 134석 

일본유신회
 13석 48석 

시민 리그
 13석 30석 

국민의힘
 11석 13석 

남방의당
 3석 8석 

레이와 신센구미
 5석 3석 

차세대당
 3석 3석 

그린스 재팬
 0석 1석 
무소속  14석 11석 
공석  0석 2석 
재적 384석 · 650석
좌측은 참의원 의석 수, 우측은 중의원 의석 수
일본의 주요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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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최근선거 다음선거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11회
2022년 7월 10일
12회
2025년 7월 28일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6회 · 7회 · 8회 · 9회 · 10회 · 1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50회
2021년 10월 31일
51회
2025년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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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1890년이래로 아직도 쓰고 있는 제국의회(帝国議会, ていこくぎかい). 다만 헤이세이 시대 이래로는 헌법상 명칭 제국의회보다도 국회(国会)가 주로 쓰인다. 본래 귀족원과 중의원으로 나뉘어져있었으나, 1991년 헤이세이 유신 당시 화족이 폐지됨으로 귀족원을 폐지하고 이후 민의에 의해 선출되는 상원인 참의원이 설치되었다. 총 384석을 운영 중이다.

한편 중의원은 한 선거구에서 한명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와 정당 득표에 따라 의석을 정하는 불구속 명부 비례대표제로 이뤄진다. 총 의석은 650석에 달한다. 소선거구제 지역구 547석, 비례대표 103석을 선출하고 있다. 개원 시부터 1971년까지는 중대선거구제를, 1973년부터 1987년까지는 중선거구제를 실시했으나 바뀌었다.

중의원에서 2/3의 동의를 받은 법률은 참의원의 동의 없이 통과가 가능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라도 참의원은 60일동안 법안을 계류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또한 예산 결산은 중의원에서 하지만 인사권의 대부분은 참의원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인식에 비하면 참의원이 가지는 권한이 상당히 강력한 편이다. 그러나 법상에서는 중의원 우위권을 인정하기에 중의원과 참의원간 권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대체로 중의원이 유리하며 중의원과 참의원이 다른 총리를 지명했을 때에는 중의원에서 선출된 총리가 총리직을 맡는다.

본래 일본 열도 내부에서만 선거가 치러졌으나 1946년 대동아전쟁 직후 반도에 23석, 대만에 5석의 중의원 의석이 배정되며 처음으로 전국 단위의 선거가 치러졌고, 1952년에는 최종적으로 모든 지역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선거구를 획정하게 함으로서 보통 선거가 이뤄지게 된다.

선거권의 경우, 1890년 최초의 선거에서는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 성인 남성으로 한정되었으나, 이것이 점차로 확대되어 1925년에는 25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성에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1946년에는 반도와 대만 성인 남성에 제한적 선거권이, 1952년에는 전면적으로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1940년부터 1990년의 일본 총선은 사실상 대정익찬회 찬반 투표였던 바 큰 의미는 없었다.

여성 투표권은 1972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의 제국 자유화 선언 당시 부여됐다. 25세 이상의 성인으로 투표권이 일괄 확대되었다.

이것이 1991년까지 이어지나, 1991년 11월 유신을 위한 총선(39회 중원선)에서부터 개정되어서 5살 내려가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녀로 확대되었다.[19]2002년에 19세가 되었고, 2020년에 18세까지 내려오며 최종적으로 현재는 18세 이상의 모든 성인 남녀가 선거권을 행사한다.[20]

선거 방식이 후보자와 정당을 직접 쓰는 자서식 투표제를 적용하고 있다. 또 일본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미국 대통령 선거, 독일 대통령 선거와 함께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3대 선거의 하나이다.

정당

보수 대통합을 통해 탄생한 자유민주당이 1997년부터 2008~2009년을 제외한 기간동안 26년간 집권 중이고, 제1야당이자 원내 2당인 입헌민주당, 이어서 시민 리그, 국민의힘 등 야당들이 있다.[21]

1940년부터 1989년까지 대정익찬회가 일당 통치를 이어갔으나 현재는 다시 여러 정당들로 분화됐다.

자민당 내에선 파벌이 발전되어있고 이합집산도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자민당 자체가 구 익찬회의 보수-중도 성향 인사들을 모두 모아놓은 정당이라 당내 파벌을 합친 것 이상의 권력을 가지는 군대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군사 파벌이 당 내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일단 한번 당수가 되면 산하 참모들만 자주 바뀌고 당수는 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한 경우에는 아예 당수는 바지사장이고 군사 파벌이 알아서 다 해먹기도 한다. 참고로 이는 총리도 마찬가지라 총리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내부적으로 국무대신을 교체해가며 권력 투쟁을 해가는 경우가 많다.

자민당 외에 입헌민주당의 경우 군사 파벌이 정리됐기에 큰 영향력이 없다.

이 외에 공산당의 경우 1925년 이후 금지 당했고 1990년 정당 자유화 및 치안유지법 폐지 이후 일시적으로 돌아왔다가 1992년에 "공산당은 천황제를 부정하며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아 헌법에 정면으로 대응된다. 또한 지나와 연계하여 일본 체제 전복을 추구하는 반국가단체이다."라는 검찰의 발표 이후 정식 반국가단체로 지정되어 재차 강제 해산당했다. 다만 현재도 시민단체의 형식으로 각처에 분포한다고 알려지며, 내무성 국가공안위원회와 일본 경찰이 집중적으로 감시 중이다. 여담으로, 치안유지법은 1993년에 국가보안법으로 계승되었다.

현재 존재하는 원내정당들의 정치 스탠스는 다음과 같다.

관료제

일본은 나쁘게 평가하면 딱딱하고 고리타분한 관료제의 국가, 좋게 평가하면 자국보다도 자국을 잘 아는 국가로 정평이 나 있는 일사불란한 관료조직을 가진 국가이다.

지방 정치

일본의 지방 정치는 중앙 정치와 철저하게 분리되어있다. 중앙 정치인이 직을 버리고 지방 정치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겨질 정도이다. 일본에서는 반대로 지방 정치를 하다가 중앙 정치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중앙 정치가 지방 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게이조 지역주의 정당인 시민 리그나 시가현지사였던 가다 유키코 정도.

정당의 공천이 지방 정치에서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지방 선거에서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정당 당적을 포기하는 대신 여러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출마하는 경우가 잦다. 주로 자유민주당, 공명당 추천 후보와, 사회당 추천 후보가 맞붙고 좌파 시민단체 추천 후보가 제3지대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관료와 군대의 영향력이 지대히 미치고 있는 중앙 정치와 달리 일본의 지방 정치는 총평 등 노동조합과 지역 유지들, 그리고 지역 기업들이 더 큰 영향력을 미친다. 물론 이것도 지역별로는 달라서 대도시의 경우 조직력에 구애받기보다는 중앙 정치에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철저히 분리된 지방정치는 일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예로부터 봉건제 국가이던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에도 구 번벌들이 서로 파벌을 형성해 있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상대적으로 지방분권이 세밀한 일본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반도의 경우는 다르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약 15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통일적인 그들만의 국가를 유지해왔던지라, 지금은 조국만 일본으로 바뀌었을 뿐 열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중앙정치와 지방정치가 연동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고 해도 게이조, 후산, 헤이조, 간코 등 대도시에서는 열도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열도식의 중앙 - 지방 분리가 나름 존재한다. 그러나 소도시와 농촌으로 갈수록 중앙정치가 지방정치에 개입을 점점 하며 현지사/현의원 -> 중의원 루트를 타는 일도 상당히 흔하다.

대만은 사실상 열도의 영향을 받아 중앙정치와 지방정치가 똑같이 분리되어 있다.

선거가 매우 다양하다보니 현지사나 현의회를 뽑는 선거가 아니면 보통 투표율이 4~50%대로 낮은 편이다. 중의원, 참의원, 현지사 선거가 보통 투표율 7~80%대, 못해도 60%대를 기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직력이 강하게 미치는 지역 정치에 대해 일본인들이 큰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맹점 때문에 부라쿠민 해방 조직, 소수민족 원주민 등 소수자, 시민단체와 결합하여 중앙 정치보다 더 큰 발언권을 가지기도 한다. 실제로 자민당이 극도로 유세한 일부 시골의 경우 더욱 심하다.

군사

대일본제국군
大日本帝国軍 (だいにっぽんていこくぐん)
Japanese Imperial Forces
일본 육군 일본 해군 일본 공군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군(大日本帝国軍), 일본군은 1871년 창설된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군대이다. 육군, 해군 공군과 공군 산하의 전략미사일군과 항공우주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1호 시대에는 일청전쟁, 일러전쟁, 지나사변,대동아전쟁등에서 승승장구하며 냉전 시대에는 일본 제국군이 세계 최대의 군대로 존재했다.

군의 통수권자는 헌법에따라 천황이다. 참고로 기존에는 헌법에서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라는 조항을 근거로 들어 공군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60년대 육해군 합의에 따라 1966년 헌법 수정 이후 헌법 조항이 "천황은 제국군을 통수한다"로 개정되며 1967년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를 통합해 일본 공군이 창설된다.

참고로 제국 시절엔 일정한 명칭이 없다가 1948년 대일본제국군(大日本帝國軍)이라는 정식 명칭을 정하여 지금도 쓰인다. 그전에는 일본군(日本軍), 황군(皇軍), 제국군(帝國軍) 등 여러 명칭이 있었다. 냉전 시기 일본의 방송에서는 제국군(帝國軍)또는 국군(國軍)을 약칭으로 사용했다.

전성기인 1960-80년대에 일본의 군사력은 육군력이 독일에 이은 2위, 해군력이 세계 1위라는 엄청난 군사력을 자랑했다. 당시 일본군은 대동아공영권의 각처, 시베리아에서 태평양, 인도 벵골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주둔군을 두었었다.

1985년 일본군의 규모는 상비군 370만 명에 달했었다. 예비군은 1000만 명이 넘던 시기였다.

하지만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아시아 혁명 저지 실패로 일본군은 건국이래 불패신화를 종식했고[22], 일본 제국이 아시아의 패권을 잃게 되며 덩달아 일본군도 과거의 위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제국 해체 이후 유신 때 대규모 군 개편이 있었다. 먼저 경제 불황에 따라 군축이 불가피하였다. 징병제의 복무 기간은 유신 당시 36개월에서 18개월로 감축, 1998년에는 병역법 개정을 통하여 지원자만 복무하는 모병제로 하되 한번 입대할 경우 2년을 의무 복무하도록 했다.

그렇기에 현재는 모병제다. 다만 최근 병역법 개정 및 징병제 부활이 논의 중이다. 그러나 정말로 이미 20년 넘게 중단된 징병을 재개할 경우 엄청난 국민적인 반감, 특히 10-20대 남성들의 심각한 반발이 예상되므로 쉽게 결정할수가 없다. 실제로 2022년 하나시 야스히로 법무대신이 "징병은 언제든지 재개될수 있다. 청년들은 국가가 명령한다면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뭇매를 맞고 사임했다.

하지만 전시라면 다를 것이다. 실제로 국토방위긴급계획예비병력대장(国土防衛緊急計画予備兵力隊長)이라는 전쟁성 문서에서 18세에서 40세의 일본 남성들의 명단을 확보해 놓고 유사시 징집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국방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육군력이 미군과 독일군에 이은 3위, 해군력 1위, 공군력 2위이며 냉전 시기에 만든 각종 미사일 전력은 매우 막강하다. 특히 해군력의 경우 냉전 이후 군비를 줄였음에도 여전히 미 해군에게 질적, 양적으로 압도한다. 수천 발의 핵탄두도 보유 중이다. 1990년에 미국, 독일과 일미독전략무기제한조약을 체결했고 이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하여 핵탄두 수량을 종전의 70% 정도로 줄였으나 여전히 세계 1위의 미사일 전력 보유 국가이다.이는 모두 일본 전략미사일군에서 관리한다.

상비군 병력은 64만 5천명을 유지 중으로, 미국을 제외하면 모병제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운용한다. 병력 수 면에서는 남북 중국에 이은 동아시아 3위이지만 그 질적인 면에서 육해공 모두 여전히 동아시아 최대 강군이다.[23]

냉전 시대까지는 거의 항상 실전에 투입될 정도였으나, 90년대 이후에는 그렇지 않다. 유신 이후의 실전경험이라 해 봤자 미군의 동맹군으로 일부 병력을 파견한 2004년 이라크 전쟁 정도가 끝이다.

해외 주둔군의 경우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 소속국들에 대한 방위 공약에 따라 유사시에는 일본군이 파병된다.

군사 정치

일본은 군사 정치가 매우 강력한 국가이며 현재까지도 군은 일본 정치의 중추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 지속되는 승리는 군부의 발언권을 크게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급기야 대동아전쟁 중인 1940년에 도조 히데키가 이끄는 군부의 주도로 여러 정당들을 합병해 대정익찬회를 설립하고 대동아전쟁 승전을 거쳐 약 50년간 총리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운 채 군부 정권을 유지했다.

1989년에 익찬 정치가 끝이 나고, 1991년 헤이세이 유신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자, 군은 공식적으로는 정치에 개입할 수가 없게 됐다. 다만 이는 현역 군인도 각료에 오르던 제국 시절보다 나아진 것일 뿐 상당수 요직은 전직 군 장성들이 차지했다. 그마저도 전쟁, 육군, 해군, 공군 4개 성은 현역 군인이 오를수 있게 했다.

모병제의 실시가 군을 억누를 것이라는 기대도 빗나갔다. 모병제 실시는 군이 오히려 더욱 소수정예화,엘리트 조직화되어 정치 개입을 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7년 자유민주당의 창당으로 구 군부 인사들이 대거 거대 여당에 섞여 들어갔다. 이렇게 생겨난 자민당 내에서 최대 파벌인 "익찬계"는 사실상 군부가 현재까지도 정치에 개입하는 주요 루트이다.

2012년 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 2021년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 등 대부분이 익찬계의 입김에 따라 총리에 올랐으니 그 영향력은 가히 어마어마하다.

그 외에 육군성, 해군성 등 국가 안보 및 외교에 관련된 부서 대부분을 군부가 꿰차고 있으므로 내각 요인중 상당수가 군 출신이다. 실제로 현 기시다 내각의 대신 32명중 무려 25%에 달하는 8명이 전현직 군 장성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에서 군이 여전히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

명목 기준 경제력 순위
순위 국가 GDP
1 미국 28,781,083
2 일본 12,513,799
3 독일 7,874,246
4 남중국 6,383,394
5 이탈리아 3,718,954
6 인도 3,323,213
7 북중국 2,834,516
8 광동국 2,681,193
9 스페인 2,351,391
10 영국 2,321,439
11 캐나다 2,242,182
12 브라질 2,031,391
13 멕시코 2,017,025
14 호주 1,790,348
15 만주국 1,760,947
16 베너룩스 1,642,513
17 인도네시아 1,475,690
18 터키 1,113,561
19 사우디아라비아 1,106,015
20 스위스 938,458
21 프랑스 832,219

2024년 기준, 세계 GDP 순위 2위, 국부 1위, 외환보유액 1위, 수출 2위, 수입 3위의 경제 대국이며, 국민소득 54,500달러로 세계 15위의 선진국이다. 2억 명이 넘는 인구와 높은 소득으로 유지되는 거대한 내수시장이 특징이며 무역의존도가 낮은 편이다. 도쿄에서 다이호쿠, 게이조, 헤이조, 안로쿠강, 다이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매트로폴리스는 제국 경제의 끊임없는 번영을 상징한다.

석유의 경우 일본도 가라후토에 유전이 있기 때문에 산유국이다. 1970년대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으며 2019년 하루 25만 배럴의 석유를 홋카이도에 공급했다. 가라후토 유전 참고. 다만 그럼에도 가라후토의 석유로 일본 전체 수요에는 턱없이 모자라 석유는 수입의존도가 높다.

1968년부터 1994년까지 1위, 1995년부터 미국에 밀려 2위가 됐다. 즉 25년간 세계 경제력 정상에 있었다. 특히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쇼와 버블경제 시기엔 일본의 국력은 엄청났다. 당시 43,000달러를 기록한 1인당 소득은 독일의 25,000달러, 미국 21,000달러 등을 압도하고 세계 1위의 1인당 소득을 자랑했다. 도쿄의 땅값은 뉴욕의 300배를 찍고 세계 50대 부자의 42명이 일본인이었다. 일본차는 독일 최고 자동차 가격의 30배를 직었다. 1985년 총 GDP가 당시 독일의 2.3배, 미국의 1.7배였다.

이 쇼와 버블경제는 일본인들에게 향수의 시절로 남아 있으며, 일본이 가장 영광있던 시기다. 90년대 경제백서에서 알려진 사실이지만, 1978년 2차 석유파동 때부터 일본 경제가 위축됐고 정부가 이를 감추기 위해 투기를 조장하며 국가의 경제력을 "영끌"해 조성한 것이 버블이었음이 드러났다. 즉 80년대에 이미 껍데기만 화려했던 셈.

그러나 1986년을 기점으로 유럽 혁명으로 일본경제도 타격을 입어 버블경제가 끝나고, 이어서 1988년의 아시아 혁명과 1989년 대일본제국 붕괴 등 여러 타격을 거쳤다.

이어 1990년 공영권이 해체나고, 각처에서 들어오던 자원줄이 끊기면서 공영권에서 원자재를 사와 공산품을 팔아치우는 식으로 부양해오던 일본 경제는 무참히 파탄나기 시작했다. 1994년에 26년 만에 세계 GDP 1위 자리에서 밀려났다. 또한 재벌들이 식민지에서 복귀해 오고, 히키아게샤들이 돌아오며 실업자가 폭증했다.

살인 사건이나 자살사고가 일본전국에서 속출했다. 또한 일본에서 공무원이 비정상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이때 회사들이 죄다 망하며 일자리의 안정성이 급격히 폭락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일본 4대 재벌의 하나인 야스다가 이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부도했다.

이 시기가 바로 잃어버린 10년, 경우에 따라 잃어버린 20년이나 잃어버린 30년으로도 불리는 일본의 경제 불황기이다. 그러나 일본은 40년간 공영권을 지배하며 얻어낸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하여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사회 혼란을 진정시키고 경제 추락을 멈췄다.

2002년 마침내 일본의 아소 다로 총리가 "고질 불황의 탈피"를 선언하고 1990년부터 2002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지칭하며 끝났다. 그러나 급격한 추락이 중단됐을 뿐, 이후에 다시금 진취적인 성장을 하지는 못하고 있어 사실상 "잃어버린 30년"으로 취급되고 있다.

2002년 이후의 일본 경제는 "정체기"라는 말로 대표된다. 90년대의 추락과 이후 약간의 회복 후엔 연도별로 1~2% 내외의 +- 성장을 반복해오며 전체 GDP에는 큰 차이가 없는 형국이 20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 즉 일본 경제는 진취적인 성장의 동력을 상실한 반은 죽은 경제이다.

그러나 정체기라 한들 일본의 쇼와 호황이 너무나 대단했기에, 현재까지 세계 2위의 경제력을 고수하며 국민소득 또한 80년대에 5만 달러를 넘던 넘사벽 수준에는 못 미쳐도 54000달러라면 이미 중진국의 기준(1만달러), 선진국의 기준(2만달러)를 훌쩍 넘는 고소득 국가 축에 든다. 실제로 1인당 GDP 상위 20개국중 하나로 세계 15위이다.

지역별 소득을 보면 대체로 일본열도 > 조센반도 > 다이완 순이었으나, 70년대 이후로는 조센과 다이완의 소득수준이 너무 올라가서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요약하자면, 일본은 예전의 유산으로서 여전한 강력한 경제력을 유지 중이며, 가까운 시일 내에는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렇듯 거대한 일본 경제의 이면에는 양극화와 빈부격차가 있다. 일본에서 중산층이 가장 두터웠던 시기는 7-80년대, 즉 쇼와 말엽이었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패자가 된 일본은 이전까지의 버블경제와 고도성장세가 깨져버리면서 중산층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히키코모리라고 불리는 일본의 은둔자 문제도 90년대 실직한 사람들이 그 시초였고, 지금에 와서는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빚만 있거나 하루하루 빠듯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도심의 마천루 숲과는 별개로 당장 도사의 거주지역만 진입해도 도심과 비교되는 스산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고 할 정도로 겉으로 보이는 경제와 실제 국민생활의 괴리가 크다고 꼽힌다.

교통

전세계에서 가장 대중교통이 발달한 국가로 손꼽힌다. 수십년에 걸친 일본 정부의 노력 끝에 현재 일본 전역에서는 왠만한 오지가 아니면 전 지역에 JR이 운영하는 전철이 상시 운행중이며 도심 지역은 해당 도시 지역 주민들도 햇갈릴정도로 촘촘하게 짜여진 지하철과 도시철도 노선으로 짜여져있다. 철도가 아니더라도 버스와 같은 다른 대중교통 시설과 전철의 연계가 잘 되어있으므로 자가용이 없어도 사는데 별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대중교통 인프라가 훌륭히 갖춰져있다.

이 외에 세계 최초, 최대의 자기부상 고속열차인 신칸센이 일본 전역을 뒤덮어서 운영 중이다.

반도열도는 1960년 건설된 해저 터널로 연결되어있다.(일본해해저터널).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해저터널에 해당한다. 이로 인해 이동하는데 어떠한 불편함도 없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시모노세키, 구마모토, 기탸큐슈 등지에서 무라야마, 우루산 등으로 향하는 항만편이 상시 운항중이고 도쿄에서 비행기 국내선을 타고 후산으로 갈수도 있다. 한편 대만과 일본 본토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를 타고 가거나 혹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하지만, 도쿄와 다이호쿠는 비행기로 3시간, 게이조는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어 큰 불편은 없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운송은 항만으로밖에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일본 정부는 아베 신조 내각 시절부터 오키나와현을 거치는 초거대규모의 지하 터널을 계획중에 있다. 사실 이 계획은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시절부터 기획되어왔으나 현실성 문제로 실패했고 현재 기술로도 건설에 최소 60년은 걸릴거라는 예상이 나오기 때문에 실제로 계획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사회

언어

일본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인중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는 인구는 거의 없다. 일본어는 류큐어와 함께 일본어족에 속하지만 류큐어는 사실상 소멸된 언어이므로 일본어를 고립어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일본어는 세계에서 6위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서, 세계인구의 3.7%가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한다. 더해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구 동태평양 제도 등에서도 옛 일본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이며, 구 공영권 출신국들에도 일본어는 폭넓게 보급되어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 내에서는 그 위상이 공용어 급이고, 유엔에서도 일본어를 링구아 프랑카(서로 다른 언어의 화자끼리 의사소통을 위해 정한 언어. )로 평가하며 세계 6대 언어로 친다.[24]

지역어로는 대만어, 조선어, 아이누어, 류큐어 등이 있지만 전부 사어이다. 일본은 1930년대 부터 유례없이 강경한 동화정책을 펼쳐 왔다. 창씨개명을 시켰고, 1946년에는 이를 강제하고는 각자의 본래 이름을 아예 폐기시켰다. 다만 이들 4개 언어의 경우 정부의 공인 지역어이므로 일본 내에서 사용하여도 무방하나 단지 전후시대엔 암묵적 탄압이 가해졌을 뿐이다. 이들 4개 언어에 대해 내무성이 제작한 교본이 존재하며 학술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반도 학자들이 조선어 복원 활동을 하고 있으나 큰 반향을 얻지 못한다.

이에 따라 사실상 일본 내에서는 모든 국민이 100% 일본어를 쓰고 있다 봐도 무방하며, 현재 대만어 화자가 약 300명, 조선어 화자가 반도 전체에 해봐야 50,000명 미만 정도로 거의 사멸했다.

다만 법적으로 공용어가 일본어라고 정해진 바는 없어서[25]명목상 재판소를 제외한 공식 석상에서 조선어나 대만어를 써도 법적인 문제는 없다.[26]그러나 현재까진 사례는 없다.

하지만 일본 내무성 문부과학성이 일본어를 국어(国語)로 칭하고 있기에 '관습적 공용어'라고 할수 있다.

문자

가타카나와 히라가나로 이루어진 일본의 고유 문자인 가나, 그리고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한자의 경우 1960년대까지 구체자를 썼으나 너무 쓰기 어렵다는 이유로 197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획 수를 줄이는 신체자로의 개혁을 실시하고 1972년에 상용한자표와 신자체 2136자를 발표해 현재에 이른다. 당초 일본제국의 국명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구체자로 썼으나 헤이세이 유신 이후로 완전히 신자체로 통합 되었다.

한편 1972년 이전까지는 공문서와 외래어에는 가타가나, 나머지 경우는 히라가나를 썼다. 이는 가타가나가 더욱 권위있는 인상을 풍긴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것 또한 평소에는 히라가나로 된 글을 읽던 일본인들이 가타가나로 된 공문서를 빠르게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문제 때문에 1972년 문자 개혁의 일환으로 가타가나는 외래어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축소되고 공문서나 사문서, 또는 민간 가릴것 없이 히라가나를 쓰게 되었다.

다만 황실은 유신후에도 여전히 공식적으로 구체자를 사용하고, 야스쿠니 신사 같은 전통이 깊은 지명 등 구체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과거에는 만요가나라고 하여 중국의 한자를 일본어의 발음으로 반영하여 사용하였으나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를 변형하여 가나를 만들었다. 히라가나는 일본어의 독음을 표기할 때, 가타카나는 외래어를 사용할 때 표기한다.

교육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리고 대체로 4년제인 대학까지 소 - 중 - 고 - 대 교육체제를 실시 중이다. 전문학교의 경우는 2년제를 실시한다.

1946년 이전까지는 일본 제국 학제는 오늘날처럼 소-중-고-대 방식의 단선형 학제가 아니었고 학교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또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상급학교 진학코스는 초등교육(소학교) 6년, 중등교육(구제중학교) 5년, 고등교육(구제고등학교) 또는 구제대학 예과 3년, 구제대학 학부 3년이었다. 이외에 의학부 등 특정 학부는 4년 코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46년 대동아전쟁 승전에 맞춰 교육체제 일신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난잡하던 것을 전국 표준으로 통일시켰으며,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총 12년의 교육 과정을 확정했다. 또한 당시에는 식민지이던 조센과 다이완에도 대대적으로 의무교육이 실시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며 고등학교 입시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이 1946년의 학제가 사실상 현재까지 큰 변동 없이 유지 중이다. 또한 1946년부터 열도, 반도, 대만의 교육과정을 완전히 하나로 합치면서 국사(国史) 과목은 일본사를 중심으로 조센사를 곁들여 포함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당연히 조산계 국민들에 대한 배려 차원이었다. 다만 언급되는 조선사라 해 봤자 만주국 정당화를 위한 고구려의 만주 정복사, 백제와 일본의 교류, 임나일본부, 여몽연합군이 태풍으로 물러간 일 정도이다. 대만의 경우 딱히 다루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 대학 진학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인식은 굉장히 약한 편이다. 고등학교부터 취업과 진학 중 택일하도록 하는 서구식 시스템이 정착되어있으며, 2023년 일본의 4년제 대학 진학률은 54% 정도이다. 다만 전문학교까지 포함한다면 80% 가까이로 올라간다.

대학 진학자를 대상으로 하여서는 2020년까지는 대학입학자선발 대학입시센터시험(大学入学者選抜大学入試センター試験)이라는 통일 대입시험을 봤고 2021년부터는 대학입학공통테스트(大学入学共通テスト)로 개편되었다.

다만 이들 테스트는 사실상 최소한의 학력을 측정하는 것일 뿐, 대학별로 실시하는 2차 시험인 본고사가 진짜 게임판이라고 할수 있다. 다만 사립대학의 경우는 굳이 국가 주관의 공통대입시험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는 본고사만 치면 된다.

일본의 가장 우수한 대학은 제국대학, 그 중에서도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게이조제국대학 등 3개를 꼽고 있고, 사립 중에서도 와세다대학, 게이오대학, 메이지대학, 엔세이대학 등이 있다.

노벨상 수상자의 경우 총 36명으로, 미국 (411명), 독일 (137명), 영국 (103명)에 이어 세계 5위이다. 참고로 아시아의 노벨상 수상자는 총 38명, 그중 2009년 물리상을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가오쿤(高錕), 2015년 의학상을 수상한 중국의 투유유(屠呦呦) 단 2명 빼고 전원 일본 뿐이다.

일본의 학교는 집단주의 경향이 강한 편이며, 특히나 90년대까지 병영국가였던 탓에 군사주의의 잔재가 상당히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다른 선진국에선 실시하지 않는 아침 조회 , 집단 체육 등이다.


대학

일본의 최고 수준의 명문대는 단연 1886년 제국대학령으로부터 그 기원이 있는 제국대학(帝国大学)이다. 이들 대학은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통칭 제대(帝大, ていだい)

다음은 일본의 제국대학 일람으로 총 14개가 존재한다. 지역별로 열도 8개, 반도 4개, 대만 1개, 다이렌 1개가 분포한다.

치안

일본의 치안은 세계적으로 1위로 꼽히며, 가장 안전한 나라로 평가된다. 하지만 겉으로는 안전해 보여도 야쿠자가 성행하요 도쿄 등 주요 도시의 번화가 일부가 야쿠자에게 장악되어 있기도 하는 등 야쿠자 문제가 일본 치안의 골칫거리이다. 치안은 일본 경찰이 담당한다. 경찰은 사실상 구제국 시대의 경찰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내무성 국가공안위원회 산하로 일본 경보청을 둔다. 본래 경보국이던 것이 1947년 사법 체계 개편과 맞물러 경찰의 위상을 승격시키는 차원에서 청으로 격상되었다.

일본의 경찰은 경보청의 직접 지휘를 받으며 경무청장관, 나아가 내무대신에 복종하는 중앙경찰과 각 도도부현의 지휘를 받고 도도부현지사에 복종하는 지방경찰로 나뉜다. 지방경찰의 경우 도쿄에는 경시청이, 각 도도부현에는 경찰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중앙 경보청 아래로 도쿄의 경시청, 2개 도의 경찰본부, 5개 부의 경찰본부, 80개 현의 경찰본부까지 88개의 지방경찰 조직을 둔다. 경시청 다음으로는 게이조경찰본부의 규모가 2번째로 크다.

이 외에 공안사건은 특별고등형사(특고)가 주로 담당하고 있다. 특고의 경우 구제국 시대엔 반정부 인사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으나 어쩐지 현재도 존속 중이다.

계급은 최하위 계급인 순사에사부터 최상위이자 경무청장관에 해당하는 경무국장까지 9개로 나뉜다.

일본의 경찰은 권위가 매우 강력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구제국 시기부터 내려온 것으로, 자국민에게도 상당히 권위적이지만 외국인에게는 더욱 배타성이 심하다고 평가받는다.

더해서 일본 경찰은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다만 총기의 사용에 대하여는 기본적인 조건과 규정이 존재하기에 마음대로 발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질범 등 중범죄자가 저항할 경우 발포한 사례도 존재한다. 본래는 검(일본도)도 소지했으나 폐지되었다.

특히 불심검문, 고압적 태도 등 때문에 일본 국민들도 경찰과 마주하기를 꺼리는 편이다.

사법

모든 사법권은 최고재판소 및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설치되는 하급재판소에 속한다.
대일본제국 형법 제76조 중


가장 최고 사법기관으로 최고재판소가 있고 그 아래 20개의 고등재판소와 125개의 지방재판소, 추가로 1000여 개의 간이재판소를 갖추고 있다. 독립한 행정법원이나 헌법재판기관이 없어 민사·형사·행정·헌법 사건이 모두 재판소의 관할이다. 대개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민·형사재판권, 행정재판권, 헌법재판권을 서로 다른 기관이 행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그 예외인 것.

1947년까지는 최고사법기관에 대심원을 두었으나, 1947년 사법체계 개편으로 사법성이 철폐되고 대심원은 최고재판소로 확대 개편하여 사법성의 업무, 즉 하급 법원 관리감독까지 포괄하도록 하면서 일본 최고 사법기관으로 격상시켰다. 1991년엔 2호 헌법에서 최고재판소의 지위를 명문화했다.

군인의 경우 일본 고등군사재판소에서 열리는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는다. 군인도 3심은 최고재판소가 관할한다.

재판은 3심제이며, 제1심은 가벼운 민·형사사건의 경우 간이재판소가, 중대한 민·형사사건의 경우 지방재판소가 담당한다. 항소심(제2심) 관할은 다소 복잡한데, 간이재판소에 제소되었던 가벼운 민사사건의 경우 지방재판소가, 가벼운 형사사건의 경우 고등재판소가 관할하고, 지방재판소에 제소되었던 중대한 민·형사사건은 고등재판소가 관할한다. 상고심(제3심)은 대부분 최고재판소가 담당하나, 간이재판소에 제소되었던 가벼운 민사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고등재판소가 담당한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은 최고재판소장관(1명)과 최고재판소판사(14명) 총 15명이다. 최고재판소장관은 내각의 지명으로 천황이 임명하고, 최고재판소판사는 내각이 임명한다. 관례적으로 최고재판소장관의 정년이 다가오면 장관이 스스로 법조계의 의견을 물어 적임자를 내각에 추천하기 때문에 어찌보면 후임 최고재판소장관을 지명하는건 전임 최고재판소장관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고재판소판사의 경우 관례적으로 법관, 검찰관, 변호사 등 출신의 비율을 정해놓고 있으며, 각각의 조직이 후보자를 정해 내각에 제시하고 있으나 어떤 과정으로 후보자를 결정하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임명 직후 실시되는 중의원 선거와 동시에 그 임명의 적합여부에 관한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의 임기는 따로 없으며, 정년은 70세이다. 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제외한 나머지 재판관들은 10년 이상의 법조경력을 갖춘 자 중에서 최고재판소가 지명하여 내각이 임명하는데, 이들의 임기는 10년이고 연임이 가능하며, 65세가 되면 은퇴한다. 한편, 간이재판소 소속 판사는 반드시 법조인일 필요는 없어서 보통 재판소 행정직원 중에서 선발되는 경우가 많다.

재판소법(裁判所法)에 따르면 최고재판소 재판관을 제외한 나머지 재판관들의 지명, 행정직원의 채용 및 인사, 재판소 내부 규율 제정 등 사법행정 관련 사무는 최고재판소가 최고재판소 재판관 전원(15명)으로 구성되는 재판관회의의 의결을 얻어 행한다. 실무상 이 과정에서 최고재판소장관과 사무총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다. 고등재판소와 지방재판소 등 하급재판소마다 그 소속재판관 전원으로 구성된 재판관회의를 각각 두어 해당 재판소의 내부 행정사무를 처리한다.

다음은 일본의 최고재판소 휘하 고등재판소의 목록이다.

  • 최고재판소
  • 도쿄고등재판소 (東京高等裁判所)
  • 삿포로고등재판소 (札幌高等裁判所)
  • 센다이고등재판소 (仙台高等裁判所)
  • 나고야고등재판소 (名古屋高等裁判所)
  • 오사카고등재판소 (大阪高等裁判所)
  • 히로시마고등재판소 (広島高等裁判所)
  • 마츠야마고등재판소 (松山高等裁判所)
  • 후쿠오카고등재판소 (福岡高等裁判所)
  • 도요하라고등재판소 (豊原高等裁判所)
  • 게이조고등재판소 (京城高等裁判所)
  • 후산고등재판소 (釜山高等裁判所)
  • 다이큐고등재판소 (大邱高等裁判所)
  • 다이덴고등재판소 (大田高等裁判所)
  • 코슈고등재판소 (光州高等裁判所)
  • 헤이조고등재판소 (平城高等裁判所)
  • 간코고등재판소 (咸興高等裁判所)
  • 모토야마고등재판소 (元山高等裁判所)
  • 다이호쿠고등재판소 (台北高等裁判所)
  • 다이난고등재판소 (台南高等裁判所)
  • 다카오고등재판소 (高雄高等裁判所)


여담으로 일본은 공용어를 정하지 않으나 재판소법은 일본어를 공용어로서 명시한다.

일본의 사법체계는 이례적으로 엄격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과거 제국 시기부터 엄벌주의를 채택해온 일본은 지금도 그것이 유지 중이며, 사형제도 유지하고 미국, 독일과 함께 선진국 중에서는 사형을 가장 적극 집행한다.

2명 이상을 살해할 시 무조건 사형, 1명이라도 범행 죄질에 따라 사형, 이 외에 형법에 정하는 바[27]로 사형 등 상당히 엄한 기준을 적용해 연간 수십 명이 사형 선고를 받는 편이다.

죄수는 형무소에서 수감하는데, 일본은 범죄자 인권은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예산만 할당하며, 간수의 권위도 강력하다. 일본의 국민정서 역시 범죄자에게는 인권이 없으므로 죽지만 않게 통제하면 된다는 응보주의가 아주 강하다. 이 때문에 일본 형무소는 인권침해로 비판받기도 한다.

또한 일본은 대부분 선진국이 실시하는 피의자 신상공개제도라는 것이 없다. 이유는 그냥 다 공개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피의자의 신상을 신속히 공개하고, 언론에서 이를 취재, 보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해서 중대범죄 및 흉악범죄는 발생 직후 피의자의 실명은 물론, 집주소를 포함한 정보를 상세하게 공개하는 것이 기본이다.

다만 이로 인해 일본의 치안은 매우 좋기로 정평이 나있다. 일본은 연일 세계에서 가정 안정한 나라 1위로 꼽힌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도쿄에서는 여자가 밤길을 혼자 걸을수 있다."라는 말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이다. 이 때문에 나치 트라우마로 지나치게 교화주의에 기울어 있는 서유럽 국가들이 오히려 유약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만 이런 엄격한 사법체계 하에서 엔자이라고 하여 누명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더군다나 엔자이로 사형을 당한 사례도 여럿 있을 정도다. 일본은 유죄 판결율이 높고 무죄 재심율을 매우 낮다.

여담으로, 황실에 대한 불경죄가 유지되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다. 천황이 신성불가침한 존재이고, 공식적으로는 신으로 여겨질 정도로[28] 그 권위가 강력하다.

그렇다 보니 구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불경죄가 현 형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황족에게 위해를 입힐 경우 일반 살인죄와는 다르게 무조건 사형만이 규정되며, 그 외에도 여러 불경죄 조항들이 형법에 존재한다. 물론 1991년 이후로는 크게 완화되었으므로 대부분이 벌금형이나 단기 징역형 정도가 최고형이긴 하나 사회적으로는 매장되는 경우가 많다.

종교

일본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이다. 헌법 20조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는 어떠한 특정 종교도 후원하지 않으며 종교 공휴일도 없다. 이 때문에 그 흔한 석가탄신일, 크리스마스조차 일본에서는 그냥 평일이다. 그정도로 정부가 종교에 대한 중립을 지키고 있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일본의 종교를 정의하기가 힘들다. 일본의 종교별 신자 비율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어렵다. 일본인 특유의 특정 종교에 매이지 않는 국민성 때문이기도 하고, 애초에 상당수는 종교에 관심 자체가 없거나 협소한 무교이다.(2023년 기준 56.9%)

다만,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말할수 있는 것은 불교와 신토이다. 쇼토쿠 태자 때 중국에서 들어와 공인된 불교는 일본에서 현지화되었다. "불교가 일본을 불교화시킨게 아니라, 일본이 불교를 일본화시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식 불교는 중국의 그것과 사실상 크게 다르다.

반도와 대만 불교도 원래 중국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로 일본화되었다.

일본인은 비록 불교에 우호적이지만, 그렇다고 중국, 베트남처럼 불교에 독실하게 믿는 경우는 잘 없다. 일례로 일본인의 90%가 불교의 가르침을 신뢰했지만, 정작 불교 신자는 많이 잡아도 30%를 조금 넘는다.

이는 일본에서는 불교가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규범이나 가르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커 일본에선 장례식을 절에서 거행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가 태어나도 신사와 함께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절이다.

다음으로는 신토를 꼽을수가 있다. 신토 역시 집계되는 신자 비중은(국가신토) 2% 남짓이지만 그 영향은 매우 크다. 먼저 일본 전국에 있는 신사는 일본인들이 인생을 살면서 수없이 방문하는 필수코스로 볼수 있다.

일본인의 대부분은 신토를 종교가 아닌 일본 전통문화의 일부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실 명목상 불교 신자와 신토 신자를 더하면 일본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치가 나온다. 그렇기에 이 두 종교는 사실상 일본에서 통상적인 전통이나 가르침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확실히 정의 가능한 종교는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일본 인구의 2.1%를 차지하고 약 557만 명의 신자가 있다. 그러나 이중 470만여명의 인구가 반도에 거주하고 있다. 열도에서는 63만 명, 다이완은 20만 여명이 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도 또한 일선합방 이래로 일본식불교와 신토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온지라 반도에서도 일본 열도와 같이 특정 종교에 귀속되지 않는 경향이 강해졌다. 반도에 사는 국민들도 여느 일본인처럼 신사를 방문하고, 절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아이를 데려간다.

또한, 일본 사회가 알게 모르게 기독교인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 있는지라 많은 반도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포기하여 신자는 계속 줄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도의 많은 기리시탄들은 현재까지 버터왔고, 기독교가 열도와 대만에서 사멸한 이후에도 일본 기독교의 보루로 남아있다. 헤이안 지방의 헤이조시의 경우, 아예 동아시아의 기독교 성지로 불릴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일본 열도의 종교문화에 동화되어 불교나 신토 역시 배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정

일본의 가족 제도는 기본적으로 이에제도(家制度)에 기반한다. 호주(戸主)를 중심으로 그와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일가(一家)에 속하게 하여 호주에게 이에(家)의 통솔권한을 부여한 제도이다. 에도 시대에 발달한 무사 계급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호주제를 고수하는 국가이다.

호주 자격은 혼인신고를 하면 호적이 등재될때 남성 배우자가 부여받는다. 남성 배우자가 사망할 경우 장남에게 승계되며, 이때 장남의 나이는 상관이 없다. 남성 배우자가 사망했고 아들도 없는 경우에만 비로소 처에게 호주가 승계된다.

또한 민법 제750조에 의거하며 부부동성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법적으로 아내와 남편이 서로의 성을 따를수 있으나 99%의 경우 아내가 남편 쪽으로 입가한다.

혼인을 하고자 하는 자는 아래 사항을 신고서에 기재하여 그 뜻을 신고하여야 한다.

1. 부(父)또는 처(妻)의 씨

2. 그 밖에 법무성령으로 정하는 사항.

일본 호적법 제74조


호주제에 대한 여성단체들의 문제제기가 여러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일본 사법부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당장 여성들도 호주제에 대해 딱히 문제를 느끼지 않아 폐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없다.

공휴일

(祝日, しゅくじつ/축일)라고 부른다. 일본의 축일은 다음과 같다. 총 16일이고 대체휴일 제도는 2000년부터 모든 공휴일에 대하여 적용된다.


  • 1월 1일 간탄: 새해 첫낱
  • 1월 15일 성년의날(成人の日)
  •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 건국 기념일
  • 2월 23일 천장절(天長節): 천황의 생일. 현재는 나루히토 덴노의 생일이다.
  • 3월 20일 춘분의 날(春分の日)
  • 4월 29일 쇼와의 날(昭和の日): 1989년까지 천장철이었고, 1999년 쇼와 덴노에 대한 경의 차원에서 쇼와의 날이 되었다.
  • 5월 3일 육군기념일(陸軍記念日): 지나사변에서 일본군이 충칭을 공식 함락한 1947년 5월 3일. 1948년 제정되었다.
  • 5월 4일 녹색의 날(みどりの日)
  • 5월 5일 어린이날(子供の日)
  • 6월 7일 해군기념일(海軍記念日):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날.
  • 6월 15일 헌법기념일(憲法記念日): 2호 헌법이 공포된 날.
  • 7월 20일 바다의 날(海の日): 해양민족 일본의 건승을 기원하자는 의미에서 제정. 1869년 7월 20일 메이지 덴노의 도쿄 시찰에서 비롯됐다.
  • 8월 15일 전승기념일(戦勝記念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공식 항복을 받은 아카기 조약이 조인된 날. 1948년 제정되었다.
  • 9월 22일 추분의날(秋分の日)
  • 11월 3일 메이지의 날(明治の日): 메이지 덴노의 생일.
  • 12월 15일 문화의 날(文化の日): 문화진흥을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2호 헌법의 시행일이다. 헌법기념일의 연장선.


5월 초에는 5월 3일 육군기념일, 5월 4일 녹색의 날,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3일에 걸쳐 휴일이 있기 때문에 "골든 위크"로 불린다.

본래는 1946년 대동아공영권이 창설됐던 10월 10일 또한 동아공영의 날(東亜共栄の日)이라는 이름의 공휴일이었으나 1992년에 공영권 해체 이후 제외되어, 10월에는 더이상 휴일이 없게 되었다.

민족

야마토 민족

주류 민족은 야마토 민족이다. 일본이 확장을 거듭했음에 따라서 야마토 민족의 범위도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본래 야마토 민족은 일본 혼슈지방에 살던 야요이인들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만, 조선 등등을 차례로 병합한 뒤에 이들 주민들 역시 야마토 민족으로 주장했다.

현재 일본 정부가 정하는 "야마토민족"은 열도에 사는 모든 민족, 그리고 반도인, 대만의 한족계 주민, 아이누족, 가라후토 원주민, 그리고 귀화한 광동인 및 말레이인 등 구 식민지 국가들 출신자들을 의미한다. 오늘날 일본 인구의 96.4%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유전학적으로 보면 일본인, 조선인, 대만인의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뉜 다민족 국가이지만, 일본은 대부분의 타민족들을 모두 일본인으로 취급해 강력하게 동화시켰다. 일본은 열도, 반도, 대만 등 일본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이 구분 없이 일본인이라는 입장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은 인구의 95% 이상이 야마토 민족인 야마토 민족 단일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열도, 반도, 대만 간의 미묘한 지역감정등이 존재한다.

소수민족

그 외에 정부가 공인한 소수 민족들도 존재한다. 총 3개로 먼저 대만 원주민, 그리고 2차대전 때 사할린에 거주하다가 일본 통치로 들어오거나 러시아의 군벌 쟁패 혼란상 속에 망명해온 러시아계 주민, 태평양 제도의 원주민들(딱히 구분은 않고 모두 "태평양 원주민"으로 퉁친다.)이 있다. 이들 말고도 공인을 못 받은 소수민족들도 많다. 아이누족이 공인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존은 이들은 야마토 민족이라는 입장이다.

재일외국인

대일본제국 붕괴 이후에 1991년 발표된 정령 제747호와 지나인특별등록령에 의해 일본 국적이 아닌채로 영구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다. 자이니치(在日)라고 흔히 불린다.

사실 핵심은 재일 중국인이고 재일 만주인, 재일 태국인까지 크게 3개로 나뉜다. 공식적으로는 재일 몽강인까지 있으나 이들은 그 수가 너무 적어 존재감이 미미하다. 본래 정령 제747호에서 영주를 허용한건 만주, 태국, 몽강인 뿐이었으나 중국인이 포함되게 된 계기는 해당 문서 참조.

광동인, 말레이인, 뉴기니인은 그냥 일본인에 들어간다. 정령 발표 당시 이들은 복수국적으로 정했었기 때문이다.

서양계 일본인

서양 혈통의 일본 국민을 의미한다.

이들의 시초는 단연 제2차 세계대전이다. 대체로 2차대전 때 아시아 식민지에 거주하다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점령에 노출되어 일본측에 확보된 이들,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포로 후손들이다. 당시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일본의 포로만을 반환받고, 연합군 포로는 그대로 자국에 억류했기 때문이다. 더해서 샌프란시스코(쇼코)에 거주하던 미국인 중 일본 내지로 넘어왔던 이들도 있다.

여담으로 말이 서양계지 사실상 영국인과 미국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홍콩, 말레이, 뉴기니 등 영국이 지배하던 영토가 일본의 직접 통치령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인은 하와이와 미국령 태평양 제도에 거주하던 미국인, 태평양 전쟁의 미군 포로들이 있다.

2차대전 동안 이들은 일본에 협력하거나 최소한 조용히 지냈다. 본국에 돌아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고국은 독일에 의해 박살나버리고, 1951년에는 일본과 독일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귀국 길이 막혀버렸다. 미군 포로들 역시 1948년부터 귀국이 허용됐음에도 계속 지내다 보니 당시 미국의 패전 직후 어려운 경제사정 때문에 안 돌아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일본은 서양인들에 대해서는 아시아 피지배 민족과 같은 악행을 자행하지 않고 나름 신사적으로 대했기에, 귀국을 굳이 하지 않고 일본령이 된 곳에서 계속 눌어앉는 경우가 많아졌다.

일본은 이들에게 다른 외지인과 같이 국적을 부여하게 되었다. 심지어 연합군 포로들에게는 내지인의 국적까지 줄 정도로 나름 잘 대해줬다.

어쨌든 당시 독일의 괴뢰국으로 전락한 본국보다는 세계 3대 강국으로 올라선 대일본제국 국민이라는 것이 더욱 메리트가 있었다. 어차피 귀국도 어렵고, 그다지 할 메리트도 없던 상황에 이들은 상당수가 일본에 적응하기로 생각을 바꿔먹었으며, 일본어를 배웠다.

포로 출신자들은 일본 내지에서 살았고, 식민지 출신자들은 외지에 살았다. 그리고 외지의 서양인들도 내지로 도항하여 사업을 하거나 유학을 하는 등의 이유로 많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회사를 크게 차려 일본인과 결혼해 자식을 낳고 일본인을 역으로 채용하는 서양계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또 서양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도 다른 아시아인보다 매우 괜찮았고 오히려 일본인들이 잘 대해줬기에 적응도 빨랐다. 당시 서양계 남성 절반 정도는 일본 여성과 결혼할 정도로 혼혈도 잦았다.

서양계들은 일본에 자국 음식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피쉬앤칩스가 변형된 이기리스사카나(イギリス魚)등. 미국인들은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를 주로 전파하였고 이는 현재 일본식 패스트푸드로 변형되어 일본인들이 즐기는 음식이다. 물론 90년대 이후엔 일본에도 맥도날드가 입점했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일본이 많은 식민지를 포기하면서 외지에 살던 서양계들은 혼란에 빠졌다. 말레이나 뉴기니 등에 거주하던 서양계들은 일본 정부가 구제하여 가족과 함께 내지로 불러들여서 내지로 들어와 계속 일본인으로 살수 있었다.

현재 세대를 거치면서, 이들은 일본인과 혼혈을 하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어 당연히 영어는 모르고 일본어만을 할줄 안다. 생활 양식이나 문화도 완전히 일본인화가 되었다.

2024년 현재, 일본 내에서 서양계이거나 서양계 혈통의 혼혈인 인구는 약 32만 명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0.2% 정도로 많지는 않으나 살면서 몇 번을 마주칠수 있는 수준의 수는 된다.

현재도 서양계 혈통에 대한 일본에서의 인식은 매우 양호하다. 서양 피가 섞인 사람은 특별하거나 우아하다는 인식이 있으며 일본의 애니메이션에서도 서양 혼혈 히로인이 꼭 1명씩은 등장할 정도로 그 이미지가 좋다.

문화

일본 아니메J-POP으로 대표되는 문화 초강대국이다. 1970년대부터 여러 뮤지션들이 등장하고 X-JAPAN같은 락 밴드도 있었다. 1980년대에는 일본 문화가 세계를 장악하디시피 했다.

그러나 아니메의 경우는 1917년 처음 만들어졌지만 1972년 제국 자유화 이전까지 군국주의적인 색채가 매우 강했어서 세계에 그다지 소구력이 없었다. 하지만 자유화를 기점으로 성장을 시작, 공영권 붕괴와 민주화 이후부터 일본의 아니메 사업이 빛을 봐서 급성장하여 에반게리온 등 명작 아니메들이 속출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60%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군국주의 애니메이션만 만들어온 일본이 20세기 초반부터 자유사회 하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온 미국을 따라잡고 압도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J-POP은 이미 세계를 장악한지 오래이며, 특히 1980년대는 J-POP의 전성기라고 이야기할만 했다. 일본 아이돌 엔터테인먼트 또한 매우 수준이 높고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90년대 이후엔 미국 팝송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더욱 세계적으로 대중화되었다.

일본 영화일본 드라마 또한 저명한 것이 많다. 국제영화제에서 수십 차례 대상을 수상한 것이 일본이며, 이는 미국 다음에 위치하는 수준이다. 미국의 할리우드와 일본 다이호마루(大保丸) 사가 세계 영화시장의 양대 거두라고 할 정도이다. 서구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면, 다이호마루에서 활동하는 것은 동양 배우들의 목표라고 할수 있다.

외교

일본은 대체로 독일과 함께 제2세계를 형성한다.

일본의 유신 이후의 외교노선은 용미 / 반중으로 요약되며, 미국과는 전략적으로 협력하고 챙겨갈 것은 챙기자는 입장을 취한다.

사실 일본의 외교는 전반적으로 무난하며, 적성국이라 할만한 국가는 과거의 일본 지배로 인헤 일본을 혐오하는 중국 , 그 중에서도 남중국 정도이다. 여담으로 영국, 프랑스 등과도 2차대전 때문에 껄끄럽기는 하나 일본이 식민지를 공격한것 이외에 독일에 비해선 큰 피해를 준것이 없어 그리 반일 감정이 강하지는 않다.

동남아 국가들도 공영권 시기 일본에게 피해를 입어 반일 감정이 강하지만, 서쪽에선 남중국과 인도가 동남아에 영향을 지속적으로 뻗치고 동쪽에선 미국이 영향을 뻗쳐 양쪽에서 속국 취급받는 데 대한 반감이 증대해 역으로 반일 감정은 희석되는 추세이며 오히려 인도네시아 등은 일본과 전략적으로는 제휴하기도 한다. 또한 애초에 동남아 국가들의 국력이 미약해 이들이 반일을 한들 큰 영향이 없다.

그나마 말레이시아의 경우 과거 말레이 반군 수백만 명을 학살한 일본에 대해 이를 갈고 있다.

미국과는 1997년 이래 경제 안보적 연대를 구축했었으나 2000년대 이후 일본의 국력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대립각을 세운다. 구 추축 동맹이었던 독일, 이탈리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교류 중이다.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80년대말 독일, 이탈리아가 물러간뒤 무주공산이 되며 일본과 미국의 외교전이 치열한 것으로 손꼽힌다. 사실 아프리카 독재자 입장에선 돈만 되면 되는데, 일본은 세계 1위의 국부를 가진데다 딱히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도 않아서[29]매력적인 선택지였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일본은 미국과 함께 아프리카를 양분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 외에 일본은 1992년 만주국, 몽강, 태국, 광동, 싱가포르 5개국을 규합해 아시아태평양공영기구라는 대동아공영권의 후신 격인 기구를 만들었으며, 매년 아태공영회의(亜太共栄会議)를 각국이 돌아가며 개최하고 있다.[30]이렇게 볼때 과거의 공영권과는 다른 대등한 동맹체로 보이나, 사실상 나머지 네 나라의 경제력을 모두 더해도 일본의 절반도 되지 않는지라 실질적인 맹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일미관계

과거에는 냉전에서 맞붙었던 적국, 현재도 일중관계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아서 그렇지 잠재적인 적성국에 가깝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1853년 쿠로후네 사건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세기 초중반까지도, 미국은 언제나 일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국가였다. 미국은 1940년대까지 일본의 최대 교역국이었나 태평양 전쟁 이후로 양국은 적대국이 되었다. 1945년 아카기 협정으로 미국을 굴복시키며 승리를 거머쥔 일본은 미국과 냉전 체제를 형성했다.

냉전 초반 미국은 패전으로 정체되고 일본은 아시아 식민지의 자원들을 뽑아먹으며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는 고도성장기 (1949 - 1973)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일본은 1964년 독일 GDP 돌파, 이후 1968년에 미국 GDP 돌파로 세계 1위에 올랐다.

해군력의 경우 이미 1940년대부터 세계 제1위에 올랐으며, 이때 일본은 과거 영국이 그랬듯 일본 해군이 미 해군과 독일 해군과 합해도 일본 해군력보다 적어야 한다는 이국표준정책(二国標準政策) 교리를 구사할 정도로 강대했다.

이렇듯 자신감을 얻은 일본이 지속적으로 미국을 위협하여 당시 미국과 일본간의 전면전으로 치달을 뻔 상황이 조성된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1962년 하와이 미사일 위기가 가장 잘 알려진 전쟁 위기이고 1970년 얄류샨 열도 분쟁지역에서 일미의 어선이 충돌한 아오바마루 사건도 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은 미국의 국력을 완전히 초월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자 그 절정을 찍으니 바로 1981년 도쿄 증권거래소 호황으로 시작된 쇼와 버블경제다. 이때 일본은 그야말로 초강대국을 넘어서 극초강대국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냉전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뒀다고 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좋았어도 일본의 치하에 있던 다른 민족들의 삶이 너무나 끔찍했다. 이러한 공영권 내의 내부 불만은 점차로 항일 독립의식으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권이 알게 모르게 위협받고 있었다. 거기다 버블이라 함은 석유파동 이후 경제의 하락을 숨기기 위해 정부가 조성한 마약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1987년, 독일이 공식적으로 유럽 내에서 반란이 벌어지자 일본도 최대 교역국 독일이 전쟁에 나서자 마자 버블이 터졌으며 경제는 붕괴하다시피 했다.

이 기회를 틈타 아시아 민족들이 독립전쟁인 아시아 혁명을 일으켜서 일본을 몰아냈고, 결국 대일본제국 붕괴로 이르렀다.

90년대

이렇게 사실상 냉전의 승리를 앞두고 내부 균열 통제 실패로 몰락해버린 일본은 다시금 미국과의 관계가 대폭 역전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본의 압제에 지쳤던 중국, 여타 동남아 국가들은 전쟁이 끝나자 마자 미국에 손을 뻗기 시작하였고 미국은 이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며 일본 고립 정책을 폈다.

일본은 이 무렵 1990년의 가네무라 담화로 민주화를 진행했으며 당시 자유당 정권의 용미 기조로 인해 1992년엔 일미정상회담과 고위급 회담을 여는 등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요 쟁점, 특히 태평양에서 양국의 이권이 첨예했기에 명목상 관계를 개선한다 해도 실상은 여전한 적국이었다. 일본 국민들의 반미의식도 매우 강했다.

이때 일본은 미국이 OFN을 아시아로 확장할 것을 우려하며 미국에게 OFN의 동진은 결코 용납할수 없다고 통첩을 보내기까지 했다. 본래 미국은 중국을 포함해 인도네시아, 말레이 등으로 OFN 동맹 확장을 꽤했으나 일본이 큰 위협을 느껴 이를 비난하자 일단 그만두게 되었다.

이렇듯 냉전종식 후에도 일본의 경계로 관계개선이 어렵던 것이 바뀌는 계기가 오게 되는데 1997년 가네무라 고스케 내각이 추진한 일미태평양평화조약.

어쨌든 중국과 껄끄러워진 이상 미국은 과거 적이던 일본에 접근하게 되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된 양국은 일단 적대관계만은 물리기로 했던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령 태평양 영토 일부가 중립지대가 됐고 미국이 아태지역에선 OFN 추가 가입을 안 받는 것을 서약하면서 양국은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물론 갈등의 불씨는 아직 산적하고도 남았고, 일본 국민들은 당시 조약에 반대해 반미투쟁을 벌였었다.

21세기

일본도 어쨌든 민주주의 국가가 되고, 상호간의 이익선에 대하여 인정한 1997년의 일미태평양평화조약 이후 양국의 관계는 괜찮았다. 보수의 자유당-자민당은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미국과 함께 서방세계를 선도하자는 입서론(立西論)을 기반해 외교 정책을 펼쳤다. 즉 제1세계를 미국이 이전까지 주도했다면, 이제 미국과 일본 양 거두가 주도하자는 것이 자민당의 2000년대까지의 외교 방침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2000년대까지도 2차대전때 같은 진영에 묶였던 독일, 이탈리아와 거리를 두며 미국과 관계를 나쁘지 않게 유지했다. 문화적으로도 90년대 후반부터 미국 문화를 개방함으로서 J-POP과 아니메 산업에도 미국과의 접점이 늘어갔다.

하지만 2008년 일본에선 자강을 외친 사회당이 집권하여 관계가 어느정도 냉각되었다. 또한 2009년엔 사회당 내란 사태가 터지자 자민당은 정권에 복귀했으나 더이상 자민당 내에서 친미파의 발언권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민주화 이래 처음 벌어진 정권교대의 결과가 지하 공산조직의 내란이었다는 결과는 곧 자민당 내 강경파의 민주주의 불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헤이세이 로망으로 불리던 냉전 종식 이래 불어가던 자유화 붐이 꺼지고 다시금 우경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나마 보수 본류파이자 용미파인 쓰키야마 아키히로의 집권 시기에는 일본의 급진적 우경화는 억제되었으나, 2012년 방류파의 반미성향을 가진 아베 신조가 집권하면서부터 안전핀이 풀렸다. 야권의 붕괴로 자민당의 의석은 압도적이었고, 자민당은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수단으로 사실상의 독재 파벌정치를 이어갈수 있었다.

자민당 내에는 급격히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언급하는 반미와 황당파 세력이 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자연히 (그글의 생각 속에서의) 일본의 미국에 대한 종속적 상태를 타파하고자 했다. 특히 아베노믹스가 성과를 거둬 20년만에 경제가 부활할 조짐까지 보이자 자민당의 자신감은 점점 올라갔다.

신냉전

신냉전의 시작은 2014년 독일의 알자스 사변이었다. 독일은 프랑스의 알자스-로트링겐 일대를 무단으로 점거하고 이곳이 독일 고유의 영토라고 선언했다. 이때 이제까진 독일을 향해 거리를 두던 일본이 이탈리아와 함께 UN에서 대독일 제재안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자 세계는 "구 추축국은 다시 부활했다"고 평했으며 신냉전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은 이전까진 독일 제재안에 대하여 기권을 하면서 최소한의 신의만 지켰다. 하지만 2014년 일본 대표단의 독일 제재안 "거부"는 이전까지와는 다르게 일본이 외교에 접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일본 하야시 요시마사 UN 대표는 "프랑스와 같은 무능한 나라를 위해 활동적 국가 독일의 발전을 막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2015년 일본이 안보법안을 가결시키는 등 연이어 무력 강화 조처를 취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고 이는 2019년 미일 무역전쟁으로 사실상 쐐기가 박혀버리게 되었다. 신냉전의 시작을 2019년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일본은 그렇다고 명확히 독일과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준 것도 아니다. 2022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당시에도 단지 "유럽의 전쟁에는 불간섭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규탄 결의에만 참여하지 않았을 뿐 그 이상의 제스처는 없었다. 그렇기에 미국도 일본을 완전히 적성국가로 분류하지는 않았으나, 양국의 관계가 많이 경색된건 사실이며 일본에서의 영어 열풍이 사그라들게 된 등 국민감정도 예전에 비해 악화되었다.

자민당 대신 입헌민주당 등 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미국에게 달라질것은 없다. 자민당은 2000년대까진 입서론, 아베 내각 이후로는 패권주의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 즉 자민당의 반미는 미국을 차후 패권의 경쟁자로서 보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사회당의 후신인 혁신계 야당들은 패권주의에 반대하고 고립주의와 비동맹주의 외교노선을 주창하고 있다. 다만 예전엔 보수 측의 자민당은 용미, 야당은 반미였다면 현재는 의도와 강도는 다르나 양쪽 모두가 반미를 공통점으로 가지게된 상황이라고 볼수 있다.

일중관계

일독관계

독일과 일본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그리 좋다고는 할수 없고, 나름 껄끄러운 관계이다. 하지만 신냉전의 와중에 미국에 대항한 공동전선을 형성하며 현재는 전략적인 협력관계로 들어섰다. 정부의 껄끄러운 관계와 별개로 양국의 국민 감정은 좋은 편으로, 독일에서 일본어를, 일본에서 독일어를 배우는것이 유행하며 일본을 가장 많이 찾는 비동양권 국가 여행객 1위가 독일이다. 독일로서도 비서양권 국가 중 일본인 관광객이 1위를 차지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아예 일본과 동아시아에서 맞붙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는 함께 추축국을 형성해 동맹으로 싸웠으나, 승전하자마자 독일의 일본에 대한 고압적 태도와 유대인 문제 등이 엮여 1951년 동맹이 파기되었다.

1950년대 이래로 냉전 시대에는 3자 냉전구도 하에서 사실상 적대관계로 변모하였다. 물론 각각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직접적으로 맞대고 있는 미국에 비해서 일본과 독일은 긴장의 강도는 덜했다.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잡자, 독일과 일본 모두 2000년대까지는 미국 주도의 패권에 협조하는 것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 일독관계 역시 해빙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은 서구와의 외교에 힘쓰며 독일과는 거리를 두면서 양국은 소닭보는 관계 정도로 변화했다.

그러다가 아베 내각 이후로 일본이 우경화되고 신냉전의 한 축으로 참여하기 시작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독일이 울라프 숄츠의 철권을 확립한 뒤 확장주의에 나서자, 자연히 독일과 관계는 다시 밀착해졌다. 2014년 알자스 사변에서 일본의 독일 지지를 계기로 아베와 숄츠가 친목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며 2010년대 양국관계가 급격히 개선, 준동맹 상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현재도 2022년 프랑스 침공에 대해 일본이 입을 닫아주는 것으로 사실상 암묵적 동의를 하고, 2023년 기시다 총리가 "일본, 독일, 이탈리아, 광동, 만주가 사이좋은 오형제"라고 발언하면서 더욱 진전됐다. 2024년 현재 독일과 한 배를 탔다는 평가를 받으며, 독일 내에서 낮던 일본의 호감도가 몇년 새 배로 뛰기까지 했다. 일본에서도 독일이 가장 호감인 국가 1위에 등극했다.

일만관계

일본-광동 관계

대중매체에서

국가에 따라 다르게 묘사된다. 미국이나 중국 등 반일 성향을 가진 국가들은 일본의 냉전시기에 대해 제국주의 시대라고 비방하며 이 시절을 영화화하는 등 부정적인 악당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할리우드에서 60년대 일본 간첩을 다룬 영화 2019년작 <더 어전트>가 유명하다.

반면 광동, 만주 등 친일적 국가에선 되도록 전쟁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일본의 선진적인 생활상, 도시의 모습, 일본 문화 등 밝고 긍정적인 부분을 묘사한다.

  1. 정체자 (남중국)
  2. 간체자 (북중국)
  3. >헤이세이 유신 이후.
  4. 파편화되어 있는 난요군도와 다이렌 등의 영토와 자잘한 군도들을 모두 합산한 수치.
  5. 현재 모두 사어이고 학술적 의의로서 보존만 이뤄지고 있다. 이 외에 재일 중국인 집단이 중국어를 쓰기도 한다.
  6. 기독교는 열도와 다이완에선 사멸 수준이나 조센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 중이다. 실제로 일본 교회의 대부분은 조센반도에 있다. 하지만 조센반도도 불교와 신토가 깊숙이 영향을 준지 오래기에 그비율은 조센반도 내에서도 9% 가량, 일본 전체에선 2% 수준이다. 그러나 비율상 신토-불교 중복신자를 제외하면 일본 제2의 종교로 자리잡고 있다.
  7. 천황은 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을 가지지 않는다.
  8. 쇼와 버블경제가 한창이던 1985년엔 42%를 차지해서 기축통화에 근접한 적도 있다.
  9. Britsh, France, Russia 등
  10. 약 3분 정도의 길이이며, 표준 기미가요이다.
  11. 교토, 오사카, 고베를 가리킨다.
  12. 니가와, 게이조, 미즈하라를 가리킨다.
  13. 1973년 일본 열도 합계 출산율 2.02명, 반도는 1980년까지, 대만은 1982년까지는 인구 유지선의 출산율을 유지했다.
  14. 반도인과 대만인의 상당수는 이런 수십년 이어진 편견과 차별의식에 절여지고 나서 내면화된 차별을 수용하여 오히려 더욱 혐중에 앞장서고 민족주의 활동을 하는 등의 경향이 강하다.
  15. 치시마 열도
  16. 게이조는 일본 제2의 도시이고 후산은 열도와 반도의 기착역인 항구 도시로서 승격에 이의가 없지만, 다이호쿠의 경우 나고야, 고베 등등 열도의 쟁쟁한 도시를 제쳐두고 단지 식민지 출신지 배려만으로 부가 된 케이스라 일부 우익들은 다이호쿠의 현 격하를 주장한다.
  17. 물론 일본 정부에 의해 금지되어 있는 공산당의 경우 천황제 철폐를 주장하고 있으나 적어도 제도권 정치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8. 예) 기시다 후미오 내각총리대신 각하께서는 오늘 미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가지고 일미 양국의 우호를 위한 장기적 협력을 강조했습니다. 각하께서는 또한...
  19. 신 헌법의 공포는 1991년 6월 25일 이루어졌으며 시행은 12월 25일 대일본제국 해체로 끝났다. 즉 9월 총선은 신헌법 시행 이전이지만 신헌법에 의거해 치러진 첫 총선이었다. 그래서 당시 정해진 중원선의 명칭도 유신 총선.
  20. 선거연령 하향과 함께 2022년 법정 성년의 나이가 18세가 되었다.
  21. 참고로 시민 리그는 게이조 지역주의, 나아가 게이키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게이조도 승격을 당론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국민의힘은 게이쇼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서 조선 반도 제2도시인 후산의 부 승격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 두 정당은 둘다 반도 지역주의를 표방한다는 공통점이 있어 연대가 이루어질 법도 하나 시민 리그는 2009년 사회당 내란 사태 당시 분열, 국민의힘은 2017년 자유민주당에서 분당된 정당이기에 정치적 스펙트럼은 각각 중도 좌파와 우파로 다르다.
  22. 사족을 넣자면 일본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태합이 조선 정권을 정벌한 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패전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사실상 언급이 금기시되는 전쟁이다.
  23. 일본 육군과 남중국 육군의 전력비교는 질적으로는 일본, 양적으로는 남중국 측이 압도적이나 서방 등 대부분 군사 전문가들은 일본 육군이 질적 우세로 양적 열세를 상쇄한다고 예측하는 편이다.
  24.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일본어, 독일어, 아랍어
  25. 재판소법에서는 일본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다.
  26. 냉전 시대에는 조선어나 대만어를 공식석상에서 쓰는것이 거의 금지되어 있었다.
  27. 대표적으로 흉악 성범죄
  28. 물론 21세기의 일본에서 천황을 정말로 신으로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은 사회 통념과 분위기상 신이라고 하는 것.
  29. 아프리카 국가들이 미국의 손을 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민주주의 요구였다.
  30. 가장 최근의 아태공영회의는 2023년 10월 만주국 신쿄에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