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 보병 대대 "페멜사크 돌격 연대"(바젠스어: 11e Galosági Zálóal "Fémélsák Rosztágós Ezrész")넬리자르의 육군 대대"였"다. 별칭인 돌격 연대(Rosztágós Ezrész)처럼 밀렌시 전투에서 특출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대대급 편제 중 최소의 사상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상위 명령 체계로 제151 보병 사단 소속이"었"다. 코스탄츠(Cóstánz)에서 주둔하던 중, 사령부의 허가없이 넬 에즈 아르헤쉬(Nél Ez Arhésü) 중령과 함께 부대원 전체가 군무이탈하여 "독립"대대가 되었다. 이윽고 이들은 이르지엔의 국경 지대를 넘어 루센츠 백국(Lusenz Megyesy)의 진입을 강행한 뒤 수도였던 트린폴을 점령하고 아르헨 공화국(Arhen Közsasá)를 수립하면서 공화국 내 유일한 합법 군사 전력으로서 독재화를 겪게 되었다.

초기 대대 편제

  • 본부 중대 (Semélyze Táság)
  • 아르파 중대 "로하넬 중대" (Arpha Táság, "Rohanel", A Tág)
  • 데르타 중대 "노르쉬 중대" (Derta Táság, "Norsü", D Tág)
  • 젤마 중대 "왕립 중대" (Gelma Táság, "Konár", G Tág)
  • 프로스 중대 "돌격 중대" (Pros Táság, "Rosztágós", P Tág)

자유를 향한 이탈

대대장이었던 넬 에즈 아르헤쉬밀렌시 전투 이후로 PTSD를 겪었는데, 대대의 별칭처럼 이르지엔군의 수많은 전력들을 살상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웠으나, 이 과정에서 밀렌시에 거주하던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분별하게 학살했다는 것에서 죄책감과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르헤쉬 외에도 다수의 대대원들 역시 이와 같은 외상 스트레스 장애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입은 이들이었고 하루빨리 일상 생활로의 복귀를 고대하였다.

그러나 사령부에서는 이들의 공적을 높이 사면서도, 부족한 전력을 메꾸기 위하여 이들에게 코스탄츠로의 주둔을 명령하였고 이에 아르헤쉬는 항명했으나 곧바로 기각되었다. 사령부의 입장에서 수많은 성인 남성 전력의 공백을 메꿀 여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본국과 사령부에 대한 극심한 분노와 실망감을 안고 있었으며, 결국 루센츠 백국에서 친위 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르헤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라는 명목하에 독단적인 결정으로 부대원들을 이끌고 주둔지를 이탈, 루센츠 백국으로 진입할 것을 결의하였다.[1] 이는 아르헤쉬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데, 밀렌시 전투에서 얻을 수 없던 '승리'를 루센츠를 구하면서 보상 받겠다는 변질된 마음에서 비롯되었는 것. 하여튼 C.786년 12월 5일, 제11 대대는 같은 주둔지에 제13 독립 중대(13e Füetle Táság)와의 교전 이후에 수십 명의 교전 포로들을 이끌고 국경 지대로 향했다.

루센츠 백국 진입

제11 대대는 루센츠 백국으로의 진입을 위해 이르지엔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파괴된 밀렌시 복구와 함께 이르지엔과 대립하던 빌레지아(Villezia)와의 유혈 충돌이 발생하자, 다수의 이르지엔군 병력이 동쪽으로 포진됨에 따라 무사히 이르지엔을 통과하여 루센츠로 진입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제11 대대는 친위 쿠데타로 인한 루센츠 내에 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독단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서 일반 민간인들과 물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또, 친위 쿠데타에 반발하여 국경 외곽에서 수도 진입을 시도중이던 루센츠 제105 독립전차중대[2]와 합류함에 따라 부족한 기갑 화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이들은 곧장 트린폴(Trinpol)로 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의용군의 참전으로 약 2천 명에 달하는 병력과 8대의 전차를 보유한 반 쿠데타 연합이 형성되었다.

쿠데타 진압과 트린폴 점령

친위 쿠데타군은 예상치 못한 제11 대대의 난입과 의용군들의 수도 진입에 당황하였으며, 당시 백국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전차레이데이 NT-2 13대[3]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1 대대가 소유하고 있던 대전차 소총N-Weuer는 NT-2 전차의 빈약한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13.2mm 대구경 철갑탄을 발사할 수 있었고, 이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친위 쿠데타군은 기갑 전력에서의 우세를 바탕으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들 N-Weuer에게 대거 전차들이 파괴됨에 따라 사실상의 기갑 전력이 전무하게 되었으며, 제105 독립전차중대를 중심으로 파죽지세로 반 쿠데타 연합은 트린폴 점령에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친위 쿠데타군의 지휘관이자 섭정인 로엘 아르베르 케잘흐(Loel Arvel Kezalh)는 항복을 선언하였고, 제11 대대는 항복한 쿠데타군들을 전원 트린폴로 압송시키는 한편, 당시 백작이었던 말비온 아르베르 케잘흐(Marvion Arvel Kezalh)의 백작 작위를 박탈할 것을 권고하였고, 이에 굴복한 백작은 백국령의 붕괴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협상국들의 묵인과 공화국 체제 성립

제11 대대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눈여겨 보고 있던 협상국(Szövesék)들은 루센츠의 친위 쿠데타군 사태에 대한 개입을 꺼려했는데, 자칫 이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협상국들 내에서의 균형이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넬리자르 역시 자칫 루센츠의 개입할 시 이르지엔과의 유혈 충돌을 감안할 수 있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으며, 밀렌시 전투가 끝난지 1년도 채 안되는 시점이었기에 가뜩이나 없는 전력을 소모시킬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11 대대가 '이르지엔'의 '국경'을 넘어 전혀 관련도, 연고도 없는 나라의 쿠데타를 진압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넬리자르는 기겁하였고, 곧장 이르지엔을 비롯한 협상국들과의 외교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4]

각주

  1. 본국에서도 높은 명망을 받고 있던 아르헤쉬가 주도하였기에 대부분의 대대원들은 이러한 아르헤쉬의 독단적인 결정에도 군말 없이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이들은 쿠데타 세력에게 항쟁을 선포하고서 루센츠 국경 외곽 시가지에서 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도중에 제11 대대가 진입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합류를 요청했다.
  3. 이는 루센츠 제105 독립전차중대도 마찬가지.
  4. 제11 대대 이후 무분별한 군무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넬리자르는 군대 운용 방식에 대한 전면적 개혁을 선언하는 한편, 부족한 전력으로 자칫 참전할 수 있는 꼬투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영세 중립국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이러한 결실이 바로 맬버프 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