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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그 길의 시작점
…근현대에 들어 사회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것은 물리법칙을 비틀고 왜곡시켜 현실을 조작함을 통해 초자연적인 현상을 인위적으로 발현시키는 힘을 총칭한다. 그 힘의 크기에 따라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을 달리하고, 조작되는 현실의 형태는 일관성을 보이며 다만 개개인에 따라 그 일관적인 형태는 상이하다. 두 힘이 조작하는 현실의 범위가 중첩될 경우 힘의 크기가 큰 쪽의 현실이 작은 쪽의 현실을 덮어씌우며, 달리 말하자면 이는 영향력이 작은 쪽이 현실을 조작하는 데에 있어 그 정도가 제한되는 것으로……… (후략.)
- 저자 유석환,
논문 [이능력에 관하여] 中











BGM - Children record MR










……….

아득히 가라앉은 어둠.

그 위로 단조롭게 내려앉은 새하얀 선들.

흐린 몽상 속임에도 이질적으로 선명한 그것들의 상이 뇌리에 하나둘씩 피어나고, 흑백의 길을 닮은 그것들의 끝에서 금빛 문양이 번뜩였다.

번뜩인 문양을 통해 무언가 보였다. 누군가의 인영이 그것들 위에서 자라나는 모습이.

"…너도 오늘 여기 입학하나 봐."

적빛을 띠는 칠흑이 하나,

"그러는 너도 그런 것 같고. 너, 꽤 기대되나 보다?"

또, 청빛을 띠는 칠흑이 하나.

"하하. 초면에 당황스러운 질문이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아하하. 말 한 마디 텄으면 친구지. 글쎄. 샐샐 웃는 게 진심 같아서."

"정답이야. 예리하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네 웃음은 진심이 아닌 것 같은데."

"정답이야. 예리한데."

너스레를 떠는 두 음성이 얽혀 화음을 이루고,

"나는 그닥 관심 없어서? 기대는 딱히. 그래봐야 조금 별난 고등학교고."

"하하… 너무 염세적인 거 아냐? 혹시 모를 일이잖아. 이 학교에서…"

두 적색과 청색이 얽힌 노을이 무채색의 벌판에 지자,


"세상을 위험에 빠트릴 사람이 나올 수도,"

"아니면 세상을 구할 사람들이 나올 수도."


그 너머로 새하얀 선들이 무수히, 그리고 난잡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또 멀리까지.


"…하하. 뭐, 이런 말을 하려는 거야? 생각보다 공상을 좋아하나 봐."

"예리하다고 느낀 게 벌써 두 번째야. 음, 어느 정도는."

"두 번이나 영광이고. 시간도 됐으니까, 우리 슬슬 들어갈까? 문학소년. 이름은?"

"재밌는 별명이네. 얼추 맞는 말이기도 하고. 나는, ………."

길의 끝을 향해 마구 피어난 것들 가운데 샛별 여럿이 반짝였다. 열쇠 문양이 피어남을 통해.


….

허나 그 음성들 너머의 갈래길들은 희미해져 볼 수 없었다. 그 음성들을 껴안은 벌판이 한순간에 흐려져 멀어졌다.

물장구 따위에 집중하느라 그만 수면 아래로 떨어져버린 아이를 급히 뭍에다 끌어올리는 양, 남자가 몽상 속에서 순식간에 현실 밖으로 끌어올려진 탓이었다.

헛숨을 커다랗게 들이쉬며 일어난 그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어대며 찬 바닥에 땀을 쏟았다. 빈 폐부로 부재했던 숨이 어느 정도 돌아왔을 때즈음, 남자는 황급히 일어나 벽면의 보드에 무언가 마구 휘갈기기 시작했다.

몽상이란 본디 현실에 침식되어 금세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도 잘 알고 있는 남자는 기억 한 켠에 겨우 매달려 언제 무의식 아래로 잠겨버릴지 모를 그 장면과 음성들을 재빨리 기록했다.

모든 기억이 어느정도는 보드 위의 마카 잉크 속에 옮겨담아지고, 남자는 두 발짝 정도 뒤로 물러나 보드를 멍하니 바라보며 입가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이번에도 그는 그 길의 끝을 보지 못했다.

"………보려고 안간 힘을 쓸 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더니."

다만 그는 마침내 그 길의 시작을 목격했다.

"자는 와중에 보일 줄이야."

중얼이며 남자는 펜을 다시 들었다. 대략을 적었으니 이번엔 세밀한 부분. 기억의 모서리 구석구석까지 의식을 쓸어내리며 되새기고, 또 적었다.

"…문양이 있었지. 호루스의 눈 모양이었고………."

그는 먼 훗날을 관측했다. 그 순간 이후에 존재하게 된 훗날임에도, 인과의 순서는 뒤틀려 훗날이 있은 후에 그는 관측했다. 그리고 관측으로 훗날은 생겨났다.

"………흐음. 그 뒤로 무언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순간으로 하여금 길들이 피어났고, 길은 이제 흘러간다.


"…열쇠 모양이었던가."
…이야기는 재밌게 돌아간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