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를란트-젬갈레 대공국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Курляндия и Семигалия
파일:United Baltic Duchy flag.png
19181940 파일:Flag of Latvian SSR.png
파일:Coat of arms of Courland and Semigallia.png
국기 국장
사실상의 동군연합
국가 하느님, 쿠를란트-젬갈레를 축복하소서!
Боже, благослови Курляндия и Семигалия!
파일:Courland and Semigallia 1920.png
수도 리가Рига
정치
공용어 라트비아어, 러시아어
정부 형태 동군연합, 입헌군주제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미하일 2세
Михаи́л II
알렉세이 2세
Цесаревич II
입법 사에이마Сейм Латвии
역사
 • 발트 연합공국 수립 1918년 11월 5일
 • 발트 연합공국 소멸 1918년 11월 28일
 • 파리 강화 회의 1919년 - 1920년
 • 쿠를란트-젬갈레 대공국 수립 1919년 1월 21일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참전 1919년 - 1921년
 • 소련의 합병 1940년 8월 5일
지리
면적 32,286㎢
내수면 비율 1.5%
인구
1930년 어림 875,000명

쿠를란트-젬갈레 대공국(러시아어: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Курляндия и Семигалия)은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Парижская мирная конференция)를 통해 러시아 제국차르(царь)[1]가 쿠를란트-젬갈레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으로 추대됨에 따라 성립된 동군연합 형태의 군주국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의 성립으로 인해 사실상 발트 지역과 폴란드가 공산주의로 위협받을 상황에 처하자 서유럽의 승전국들은 교묘히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를 새로운 독립국의 군주로 내세워 대항코자 했다.

역사

독일의 쿠를란트-젬갈레 공국 수립 및 좌절

1918년 3월 8일, 독일 제국이 쿠를란트-젬갈레 지역을 점령함에 따라 이곳을 빌헬름 2세를 새로운 공작으로 하는 동군연합 형태의 괴뢰국 수립을 희망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가능했던 것은 발트 국가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독일인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제국의회에서는 발틱 민족에 대한 자결권을 지지하는 한편, 독일의 군사 사령부는 발트해의 독일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독일 제국에 흡수 합병하려는 계획을 세우려는데 골몰하였다.

1918년 10월의 막시밀리안 폰 바덴 공자(Максимилиан Баденский)는 발트해의 군사 정부를 민간 당국의 권한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제안했고, 결국 1918년 11월 18일 발생한 독일 혁명으로 쿠를란트 지역과 젬갈레 지역은 독자적인 민정청이, 나머지 지역에 한해서는 라트비아 제1공화국(Латви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의 독립이 선포되었으며 12월 7일 독일 제국군은 카를리스 울마니스(Ка́рлис А́угустс Ви́лхелмс У́лманис)가 이끄는 라트비아 정부에 해당 통치권을 위임하였다.

한편으로 쿠를란트-젬갈레 공국은 발트 연합공국(Балтийское герцогство)에 편입시키려고 했으나, 그 이전에 독일제국이 패망함에 따라 무산되면서 독자적인 임시 민정청과 라트비아 제1공화국 정부의 위임통치를 받는 형태로 유지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 - 쿠를란트-젬갈레 대공국 건국

1919년부터 진행된 파리 강화 회의(Парижская мирная конференция)에서 당시 러시아 제국망명정부로서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는 연합국(聯合國)들에게 소비에트 러시아(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서한과 함께 러시아 본토 수복에 대한 지원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한편, 사실상 소비에트 러시아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렵던 승전국들의 인식과 함께 당장에 유럽에 등장한 공산주의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자칫 자국내 노동자들의 궐기를 비롯한 정치적 소요를 야기 시킬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다. 이에따라 다수의 러시아 귀족과 정교회 사제 및 백계 러시아인들이 망명한 쿠를란트-젬갈레 지역과 과거 핀란드 대공국(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Финляндское)에 한해 니콜라이 2세를 동군연합 형태의 대공으로 추대할 계획에 나서게 되었다.[2]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본토 회복을 위한 연합국들의 추가적인 지원을 얻어내지 못한 대신 핀란드 대공국쿠를란트-젬갈레 대공국의 대공(Великий князь)을 획득하는데 국한되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는 사할린을 기반으로 하여 러시아 극동(Д́альний Вост́ок Росс́ии)에 대한 동부 전선에 반볼셰비키를 지원하면서 항쟁에 나섰으나, 러시아 적군의 물량 공세로 이들 반볼셰비키 세력이 패퇴한 후 적백합의(赤白內戰)로 본토 수복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에 따라 사할린 차르국(Царство Сахалинское)으로 새로운 독립국의 군주로 즉위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각주

  1. 이 당시에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Николай II)는 적백내전의 혼란한 시기를 틈타 사할린으로 부터 망명정부를 수립하여 러시아 본토의 탈환을 기도하였다.
  2. 특히 소비에트 러시아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거하여 연합국에 이탈한 것과는 달리 망명정부는 사할린으로 망명했음에도 독일제국의 패망 선언 직전까지 연합국의 백계 러시아군을 파병하고 유럽 전선에 망명한 백계 러시아 세력과 연락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보상' 형태로 지급되었다는 점도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