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카 섬 작전
キスカ島撤退作戦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JapaneseKiska.jpg
1942년 6월 6일 키스카 섬에 제국기를 걸고 있는 일본군
날짜1943년 7월 29일
장소알류샨 열도 키스카 섬
결과
교전국

일본 제국
파일:760px-US Naval Jack 48 stars.png

미합중국
지휘관
기무라 마사토미
木村昌福
히구치 기이치로
樋口 季一郎
보리스 얀코프
Борис Янков
파일:760px-US Naval Jack 48 stars.png 토머스 C. 킨케이드
Thomas Cassin Kinkaid
병력

병사 7,500 명

병사 약 34,000 명

  • 각종 군함 100 척
피해 규모
잠수함 3척
1차 탈출 시도 중 손실
100여 명
아군 내 오인사격 피해

"돌아가자, 돌아가면 다시 올 수 있으니까."
( 帰ろう、帰ればまた来られるから)
기무라 마사토미

키스카 섬 작전(일본어: キスカ島撤退作戦, 러시아어: Род занятий Кыска)은 1943년 7월 29일, 알류샨 열도키스카 섬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 제국군이, 키스카 섬이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자 철수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군은 절망적 상황에서 거의 피해 없이 무사 탈출에 성공하여 기적의 작전이라고 불렸다. 또한 당시 연합국은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사할린 제2차르국유일하게 연합국에 대적하여 일본 제국군을 도운 유일무이한 작전[1]이기도 하다.

작전 배경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ミッドウェー海戦)의 곁가지 작전으로 애투 섬 점령작전(熱田島 占領作戰)이 실시되었을 당시, 키스카 섬(キスカ島)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하지만 이곳에 일본군의 거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미국 본토에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미군은 반격을 시작하면서 남방과 함께 이 방면에 우선적 공략을 시작했다. 한편, 일본군은 처음에는 이 지역을 중요시하지 않아서, 겨우 구색만 갖출 정도의 수비대와 정찰기 부대밖에 배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군의 공습 및 일본군 수송선에 대한 공격이 격렬해지고, 수비 병력의 증강이 급해진 일본군은 그제야 병력을 보강하려고 했지만 애투 섬 난바다 해전 등 미군의 저지 공격으로 인해 일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1943년 5월 12일, 미군은 애투 섬에 상륙, 공략 작전을 본격화했다(애투 섬 전투). 병력 차이는 미군의 11,000 명에 비해 일본군은 2,650 명으로 4분지 1에 불과했다. 보급도 증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군은 필사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 동년 5월 30일, 사령관 야마자키 야스오(山崎保代) 육군대좌 이하 잔존병력 300명 전원이 반자이 돌격하여 전멸했다. 애투 섬이 함락됨으로써 키스카 섬 수비대(육해군 도합 6,000 여명)는 완전히 고립되어 버렸다. 키스카 섬 수비대가 애투 섬 보다 많았던 것은, 키스카 섬이 미국 본토에 더 가깝기 때문에 미군이 이쪽부터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한 일본군이 키스카 섬에 병력을 중점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투 섬이 함락되자, 미 해군에 의해 점령된 애투 섬과 미군 비행장이 있는 암치카 섬 사이에 끼여 버린 키스카 섬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벽히 상실,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 죽음과 항복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대본영(大本營)에서도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애투 섬에 미군이 상륙한 상황에서 병력을 증원하는 것은 지리적으로도 병력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알류샨 제도 일대를 방기 및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아직 적군이 상륙하지 않은 키스카 섬은 병력 철수가 결정되었고, 애투 섬 수비대 역시 철수가 제안되었지만 육해군간 해결이 나지 않아 해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로써 키스카 섬 수비대의 철수에 중점을 둔 작전계획이 수립되게 되었다. 작전명은 "케"호 작전("ケ"号作戦)인데, "케"란 ‘건곤일척’을 의미한다.

1차 탈출 작전

철수작전은 본래 과달카날 철수작전처럼 구축함 등 고속 경함정을 이용해 야음을 틈타 철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지만, 일본 해군은 수상함을 이용한 철수 작전에 소극적이었다. 최전선의 수송 및 철수 임무에 구축함을 사용했다가 솔로몬 제도 전투의 실패를 반복할 우려가 있었고, 또 솔로몬 전투 당시 상당수의 구축함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구축함 소모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로 잠수함을 이용한 수비대 보급 및 철수 작전을 입안하여 실행했다. 참가 병력은 코우타 타케로(古宇田武郎) 소장 휘하 제1잠수전대의 잠수함 15척이었다.

1943년 6월 상순, 2회에 걸친 수송 작전이 실시되어 부상병 약 800 명이 후송되고, 탄약 125 톤, 식량 100 톤을 수비대에게 보급을 성공했다. 그러나 레이다를 시작으로, 미군의 초계망은 엄중했고, 1회 작전 때 이호 제24잠수함, 2회 작전 때 이호 제9잠수함과 이호 제7잠수함을 잃었다. 성과에 비해 손해가 더 컸고, 효율도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잠수함을 이용한 철수 및 보급 작전은 2회만에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이어 수상함에 의한 철수 작전으로 다시끔 방향이 선회하게 된다.

각주

  1. 당시 일본 제국에 의해 임의로 세워진 사할린 제2차르국은 일본의 괴뢰국이긴 하였으나, 독자적인 노선을 강조하여 연합국과 비밀리에 협조하는 형세를 보였고, 미국 역시 이러한 점을 파악하여 1944년부터 랜드리스(Ленд-лиз)를 통한 전쟁 물자 자원을 지원하여 일본 제국의 대항토록 도움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