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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역사

토번(吐蕃)은 티베트고원의 중앙에 성립된 고대왕국으로, 기원전 237년 네치첸포에서 9세기 중순 랑다르마에 이르기까지 천여년간 지속된 왕조이다. 당은 토번이 통일된 시기 티베트에서 존속한 왕조를 ‘토번’이라고 불렀고, 이 명칭이 14세기 중순까지 티베트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토번의 왕조의 명칭을 토번이나 얄룽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청나라 때까지 중국 문헌에서는 티베트의 전역을 일컫는 말로 또는 그 지배 세력을 일컫는 말로 언급됐다. 명나라 때 쓰인, 원사(元史) 선정원(宣政院)의 조항에도 토번의 영역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명나라 때 서장기(西蔵記)에서도 서장이 토번의 서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

얄룽 왕조의 시작

이 문서에서는 토번을 얄룽 왕조를 기점으로 잡고 시작하고 있다.

  고대 부족단위에서 벗어나 티베트 고원 전역을 포괄하는 토번제국을 건설한 것은 얄룽 부락이었다. 야룽 부락은 야루장포 강의 지류이자, 라싸의 동남쪽인 얄룽 계곡에 그 본거지가 있었다. 얄룽 역시 다른 티베트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조그만 부락 단위로 시작하다가 6~7세기 점차 인근 부락을 병합하면서 거대한 토번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네치첸포는 토번 얄룽 왕조의 초대 첸포로서 천상족의 후예라고 전해진다. 하늘에서 내려와 기원전 237년 윰부리강에서 얄룽 왕조를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네치첸포는 티베트 최초의 궁전인 윰부라캉 궁전을 건설했다. 아들 무치가 13살이 되자 아내 남무무와 함께 승천했다고 전해진다.

얄룽 계곡의 작은 부락으로 시작된 얄룽왕조는 원래는 세력이 미약하여 인근의 샹숭과 숨파에 병합되기도 하였으나,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31대 첸포 치세 때 급격히 발전하게 된다. 본래 야룽 부락은 농경과 목축을 병행하다가 이 시기에 이르면 숯을 이용하여 금속을 단련할 수 있었고, 농업기술 또한 발전하여 나무 쟁기와 가축을 이용한 경작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얄룽 부락이 발전하는 원천이 되었고 야룽 부락은 점차 인근 부락들을 병합하면서 티베트 사회에서 주도적인 세력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대외적 발전은 32대 첸포 남리송첸(南日松贊, gNamri Srong btsan)에 의해서 더욱 가속화된다. 남리송첸은 620년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던 숨파를 복속시키면서 티베트 고원 동북부에서 영향력을 장악한다. 이후 샹숭과 티베트 고원 서부의 부락들을 영향력 하에 두면서, 청해 일부와 사천 운남 서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얄룽 왕조의 강역에 포함되었다. 또한 이 시기 히말라야 건너편 네팔 왕국의 왕이 내란으로 남리송첸에게 의탁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은 토번 제국과 네팔이 혼인동맹을 맺는 계기가 되고 네팔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야룽왕조는 여전히 부족 연맹 체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리송첸이 일시적으로 티베트 대부분을 영향하에 두었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일시적인 것이라서 얄룽 왕조는 곧 각 부락들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샹숭과 숨파는 이내 다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토번 왕조가 이들을 다시 완전 제압하는데에는 약 1세기가 걸렸다. 게다가 남리송첸의 중앙집권화 시도는 야룽 왕조 내부의 귀족들의 반발을 초래하여 결국 629년 경 남리송첸이 암살되기에 이른다.

  남리송첸에 이어 찬보 위에 즉위한 것은 13세의 송첸캄포(松贊干布, Srong btsan sGampo)였다. 송첸캄포 시기 야룽왕조는 토번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역사상에 등장한다.

송첸감포

왕조의 중앙 집권화

13세의 송첸감포에게 지워진 시대적인 과제는 지방분권화된 얄룽 왕조를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만들고 찬보의 권력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당시 얄룽 왕조는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의 티베트 지역을 통일한 제국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부족 국가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위태로운 체제였다. 송첸감포의 아버지 남리송첸은 숨파와 샹숭 등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여 얄룽 왕조에 편입시키고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고자 했으나 몇 년도 안되어 샹숭과 숨파는 반란을 일으키고 귀족들은 남리송첸을 암살하였다. 얄룽 왕조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악재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송첸감포가 첸포에 즉위한 이후 우선 단행한 일은 수도를 옮기는 일이었다. 본래 얄룽 왕조의 본거지는 얄룽 계곡의 윰브라캉과 칭파 일대였는데, 이 지역은 귀족 세력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송첸감포는 귀족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수도를 얄룽 계곡에서 야루장포 강 북안에 있는 라싸로 옮긴다. 633년 얄룽 왕조의 새로운 수도가 된 라싸는 지금까지도 티베트의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수도를 라싸로 옮긴 젊은 첸포는 전 티베트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행정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36가지의 제도를 들 수 있는데, 6개의 법률, 6개의 회의 원칙, 6개의 관직, 6개의 포상원칙, 6개의 표식, 6개의 훈장 등으로 알려졌다.  6개의 법률에는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망언을 하지 않고, 음란한 일을 하지 않으며, 음주를 하지 않고,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있고, 이외에 16조항의 도덕규범을 제정하였다. 중앙의 6개의 관직은 조정을 이끄는 대상, 부상과 그 밑의 내정, 형부, 외무, 재정 대신이었다.

  또한 송첸감포는 지방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을 결합하여 전국을 군사단위로 만들었는데, 전국을 4개의 '루(如)'로 나누고, '루' 밑에는 2개의 '루라(分如), 루여 밑에는 4개의 '천호(千戶)' 조직을 두었다. 이러한 중앙통치체제는 송첸감포 시기 급격히 이루어졌기 보다는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송첸감포의 체제정비를 통해 얄룽 왕조는 티베트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젊은 찬보를 도와 토번왕조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들은 가르동첸(Gar Tongtsen, 禄東贊)과 톤미 삼보타(Thonmi Sambhota, 吐彌桑布札)라는 인물이었다. 명문 귀족 출신인 가르동첸은 문무를 겸비하고 상당히 정치적인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송첸캄포를 도와 토번왕조의 체제와 법전을 완비하고 부족들을 통합하는데 지도력을 발휘했고 후에 언급하겠지만 대당외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르동첸으로 인해 가르 가문은 티베트의 최고 가문으로 거듭난다.

  이에 반해 톤미 삼보타는 상당히 학자풍의 관리였던 것 같다. 그는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 인물로 알려졌다. <구당서>, <신당서>에 의하면 본래 토번에는 문자가 없었다. 티베트 역사서에 송첸캄포는 문자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톤미 삼포타를 7년 동안 인도로 유학보내 문자체제를 익히도록 하였다. 토번왕조가 중국의 한문이 아닌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체제를 참고한 것은 티베트 서부의 샹숭 왕국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인도와 가까운 샹숭 지역의 본교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알려진 샹숭 문자가 토번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인도에서 문자 체제를 배운 톤미 삼보타는 티베트로 돌아와 티베트 문자를 창제한다. 톤미 삼보타의 문자창제로 인해 티베트 인들은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되었고, 불경을 번역할 수 있게 되었다.

 송첸감포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난제는 무엇보다도 티베트의 여러 부락들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버지 남리송첸이 암살되면서 샹숭과 숨파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처리해야만 했다. 사실 샹숭과 숨파가 티베트에 언제 완전하게 복속되었는지는 사료마다 증언하는 것이 다르고 혼선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료를 통해 유추해보면 샹숭과 숨파는 남리송첸 시기부터 토번제국에 병합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반복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弄贊:송첸감포)은 약관의 나이에 즉위하였는데,(........) 인접국인 양동과 여러 강인들을 병합하여 복종케 하였다."고 적혀 있고, 티베트 문헌에 의하면 숨파의 저항은 송첸감포 초기에 일찍이 진압되고, 샹숭의 리그미 왕은 초기에 송첸캄포의 여동생과 혼인을 맺어 토번과 연대하였지만 643~644년 경 가르동첸의 계략으로 복속되었다고 전해진다. 비록 샹숭과 숨파는 송첸감포 사후 다시 독립을 시도하고 역사서에서도 그 이름이 등장하지만 사실상 이 시기 얄룽 왕조에 복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샹숭의 경우(샹숭이 중국 사서의 양동이라면), 토번과 연합하여 군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당과의 외교관계 그리고 문성공주

송첸감포는 왕조 내부의 체제를 다지는 한편, 대외적으로도 토번제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송첸감포 시기에 이르러 토번이라는 국가는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 토번제국이 티베트의 강국으로 부상할 무렵, 공교롭게도 중국에서도 당이라는 제국이 그 기틀을 다지면서 '세계제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연스럽게도 송첸감포가 집권하던 무렵 당은 태종 이세민이라는 중국 역사 상 명군으로 꼽히는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송첸감포가 당에 사절을 보낸 것은 634년(당 태종 정관 8년)으로 토번과 당이 최초로 관계를 맺은 사건이었다.

토번의 사신을 영접한 당 태종은 답례로 행인(行人) 풍덕하(馮德遐)를 토번으로 파견하였고 송첸감포는 풍덕하를 기쁘게 맞았다. 토번에게 있어서 당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당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토번왕조는 티베트 내적으로 그 권위를 과시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청해 지방과 사천 운남 일대의 여러 세력들에 당이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티베트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송첸감포로써는 당과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사천 방면의 토번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노력을 해야 했는데, 이러한 송첸감포의 전략에서 나온 사건이 바로 송첸감포와 당나라의 문성공주의 결혼이었다.

한대부터 중화왕조는 인근 국가의 군주들에게 공주 혹은 종실의 여인, 궁녀들을 처로 삼게 하여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혼인을 매개로 한 외교관계를 "화친(和親)"이라고 부르며, 화친의 명목으로 외국에 파견되는 여인들을 "화번공주"라고 말한다. 당 왕조 역시 이러한 화친관계를 종종 인접국들과 맺었고, 많은 종실의 여인들이 화번공주로 파견되었다. <당회요><공주> 항목에는 화번공주들만을 추려내어 '화번공주'라는 조항을 따로 분류해 기재하였다.

'오랑캐' 군주들에게 중화왕조와 화친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국내적으로 군주의 권위를 높이는 일임과 동시에 경제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공주가 이국으로 시집갈 때에는 그와 함께 지참금이란 명목으로 많은 수량의 중국의 선진 물품들이 보내지는데, 당대에는 '자장비'라고 하여 국고의 상당한 금액이 빠져나갔다. 당으로써는 평화를 위해서 치뤄야 할 상당한 댓가였지만, 상대방에게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었다. 송첸감포도 이러한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공주를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송첸감포 뿐만이 당의 공주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돌궐과 토욕혼 모두 당의 공주를 처로 맞는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풍덕하와 함께 다시 파견하여 금과 보물을 가져와 혼인을 청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미 송첸감포 이전에 돌궐과 토욕혼이 당의 공주를 처로 맞은 것이다. 당 태종은 송첸감포의 청을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토번 사신이 장안에 구혼하러 왔을 때, 마침 토욕혼(吐谷渾)의 사신이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토번이 티베트 중심부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청해호(몽골어로는 코코노르) 일대와 사천 일대에는 당항강, 백란강 등의 강인계 부족 세력과 토욕혼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토욕혼은 상당히 독특한 국가였다. 본래 토욕혼의 지도층들은 요서 일대의 선비인들이었는데 5호 16국 시대 무렵 청해호 일대로 이주하여 그곳의 강인 세력을 규합하여 나라를 건국한 것이었다.

이들은 수 양제 시기 수의 군대에 압도되어 수 왕조에 귀부했고, 당 왕조가 들어서자 당 왕조에 약탈과 화친관계를 병행하여 청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당은 635년(정관 9년) 이정을 파견하여 토욕혼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토욕혼을 완벽히 당의 위성국으로 만들었고, 당항, 백란 등의 여러 강인 집단들도 당에 협력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당은 청해와 사천을 비롯한 티베트 동부에서의 당의 세력 범위를 공고히 하였다.

당에게 프로포즈를 거절받은 송첸감포는 분개하였다. 게다가 당이 토욕혼을 신속시키면서 티베트 동부에서의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자, 이를 깊이 경계하였다. 송첸감포는 이에 샹숭과 연합 부대를 꾸려 토욕혼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그와 동시에 백란강과 당항강 세력을 공격하였다. 그 결과  토욕혼의 세력은 급격하게 축소되고 백란강과 당항강은 토번의 영향력 안으로 편입되면서 토번은 청해 일대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해와 사천 서부 고원 지대는 티베트에서 명마산지이기 때문에 토번은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대규모 기병 전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송첸감포는 이러한 상승세에 힘입어 638년(정관 12년) 당의 영토를 깊숙이 침공하였다.

토번과 당이 처음으로 충돌한 지점은 송주(松州)였다. 송주는 사천의 중심인 성도에서 민강을 따라 약 100km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이후 청해, 타림분지 등과 함께 당과 토번이 빈번히 충돌하는 지역이었다. 토번은 샹숭, 백란, 당항 등의 세력과 연합하여 약 15만 군대로 송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토번의 군사력에 놀란 당 왕조는 후군집 등을 파견하여 토번의 군대를 공격하였고, 토번군은 철수하였다. 당의 반격으로 토번의 기세도 한층 꺾이고 토번 내부에서도 당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된 듯 하다. <신당서>에 의하면 "처음 동쪽을 침범했는데, 해가 지나도 전쟁이 끝나지 않자 대신들이 첸포에게 돌아가자고 청했다. 첸포가 듣지 않고 친히 8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국 송첸감포 역시, 전쟁을 중단하고 당과의 교섭을 추진했다. <구당서>는 "농찬이 크게 두려워 하여, 병사를 이끌고 퇴각하였고 사자를 보내서 사죄하고 다시 청혼을 하니 태종이 허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구당서>의 논지는 마치 토번의 패배를 부각시키고 있지만, 사실상은 토번의 외교정책에 당이 굴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송첸감포로서는 토욕혼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키고 백란, 당항 등의 세력을 병합하여 청해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당과의 화친관계를 통해서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당과의 혼인 교섭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가르통첸이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또한 재상 녹동찬을 보내 예를 다하고 금 5천냥과 100여 개의 보화를 바쳤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티베트의 전승에 의하면 가르통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가르통첸이 당에 입조했을 때 당 태종은 토번에게 공주를 혼인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아 가르통첸에게 5가지 어려운 문제를 냈다. 가르통첸은 기지를 발휘하여 5가지 문제를 맞추고 공주를 혼인시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한다. 638년부터 641년에 이르는 약 3년의 교섭 기간을 걸쳐 결국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시집오게 되었다.

문성공주는 정관 15년인 641년, 이도종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을 출발하여 청해호 부근의 황하의 시작점(河原)이라고 알려진 오링 호수와 자링 호수 인근에서 송첸감포와 만났다. <구당서>에 의하면, "농찬은 부족들의 병사를 거느리고 백해에 병사들을 대기시킨 후 하원에서 공주를 친히 영접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송첸감포가 문성공주에 대해서 상당히 기대를 많이 했음을 보여준다. 덧붙여 언급하자면 문성공주가 당에서 티베트로 들어온 길을 당번고도(唐蕃古道)라고 말하는데 이 길은 운남에서 히말라야 산록을 경유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와 함께 중국과 티베트를 이어주는 주요 간선도로였다.

문성공주의 토번 입성과 함께 중국과 티베트 간에도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해졌다. 아울러 토번의 풍속에도 다소 변화가 생긴 듯하다. <구당서>, <신당서>에 의하면, 송첸감포는 중국의 문화를 사모하여, 의복도 중국식으로 바꿨고, 중국에 귀족 자제들을 유학을 시켜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학습하도록 하였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고대 티베트 풍습 중에 얼굴을 붉게 칠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문성공주가 이 풍습을 혐오스럽게 여기자 송첸감포는 이러한 풍습을 폐지하도록 명했다. 붉게 얼굴을 물들이는 풍습은 부족 연맹 시기의 관습이기 때문에 이를 폐지한다는 것은 토번 왕조가 부족적인 성격을 버리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송첸감포의 관제, 법률 개혁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성공주의 혼인이 티베트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국의 불교가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송첸감포에게 시집올 때,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왔고,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서 조캉사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물론 이 시기 중국의 불교만이 토번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고대 티베트 역사서에 의하면 남리송첸 시기 네팔의 왕이 한때 토번으로 피신해 온 것이 계기가 되어 송첸감포와 네팔의 브로큐티 공주가 혼인을 맺었고 브로큐티 공주 역시 석가모니 불상을 가져와서 라포체 사원을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문성공주의 조캉사원과 브로큐티 공주의 라포체 사원은 티베트 불교의 시발점이자 성지로 꼽힌다.

송첸감포가 문성공주, 브로큐티 공주와 결혼하면서 불교사원을 건설한 이유는 중국과 네팔에서 받아들인 불교를 후원함으로서,  첸포의 중앙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티베트에는 샹숭에서부터 발달된 본교가 널리 퍼졌다. 본교 승려들은 티베트 각지의 부락 군장들의 권력을 뒷받침하면서 중심 종교가 되었다. 송첸감포로서는 부족들의 종교적 기반이었던 본교보다는 중국과 인도에서 들여온 불교를 제국의 새로운 종교로 후원하여 기존의 본교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높다. 송첸감포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티베트로 들어온 불교는 이후 본교와 경쟁 타협하면서 티베트의 중심 종교로 발돋움한다.

650년 경, 송첸감포는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40도 채 안된 나이였다. 하지만 송첸감포는 재위 기간동안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티베트를 통일한 지 얼마 안 되어 분열의 위기를 맞은 토번 제국을 수습하고 각종 법률과 제도 등을 정비하여 중앙집권화에 성공하였다. 그러한 강화된 왕권을 토대로 청해호 일대와 사천 지역, 운남 지역까지 티베트의 영향력을 확장하였고, 당시 세계제국을 표방하던 당을 위협하기에 이른다. 또한 문성공주와의 혼인 외교를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불교를 비롯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기존의 티베트 문화를 쇄신하고자 하였다.

티베트에서 송첸감포는 티베트 실질적 건국의 아버지이자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꼽힌다. 그가 티베트에서 이러한 추앙을 받는 것은 그가 티베트의 강역을 넓히고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넘어서 티베트의 실질적인 문화정체성의 요소들을 창출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시기에 티베트 인들만의 문자가 만들어졌고 그의 시기에 받아들여진 불교는 티베트의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티베트의 문화 영웅이자 전륜성왕으로 꼽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러나 송첸감포가 중국과 티베트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고 중국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티베트의 문화가 중국에 종속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톤미삼보타의 문자창제만 보더라도 중국의 한문이 아닌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불교의 유입 경우에도 중국 뿐만 아니라 네팔로부터도 불교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송첸감포는 중국의 문물을 자국의 필요에 맞게 선택적으로 받아들였고, 중국의 문물이 대거 티베트에 들어왔지만, 그 요소가 티베트의 문화를 잠식했기보다는 오히려 티베트에 맞게 토착화되어 티베트 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가르 가문의 시대와 대비천 전투

가르 가문의 시대

650년 경 송첸감포가 죽고, 그 손자 망송망첸이 찬보에 즉위한다. 망송망첸의 아버지는 궁리궁첸이라고 알려졌는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티베트 문헌 등에 의하면 궁리궁첸은 655년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궁리궁첸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 아들이 대신 첸포 위에 오른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티베트의 문헌 연도가 정확하다면 송첸감포 사후 새로운 첸포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암투가 생긴 듯하다. 그렇다면 그 정치적 암투의 중심에는 당시의 실권자였던 가르통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당서>에 의하면, "(당 고종) 영휘 초, (송첸감포)가 죽자, 사자를 파견해서 조문했다. (송첸감포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손자를 첸포로 세웠는데, 어리고 정사를 처리하지 못하여, 녹동찬이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궁리궁첸 대신 망송망첸이 즉위하는 데에는 가르통첸의 압력이 컸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어린 찬보를 대신해 가르통첸이 일종의 보정대신(輔政大臣)으로 집권하면서 가르 가문은 찬보의 가문을 대신하여 토번의 중심이 되었고 가르 가문의 시대는 두송 망포체가 가르 첸링을 제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가르통첸이 토번 정권의 핵심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송첸감포 시기 때부터 당과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신당서>에서 가르통첸에 대해 "통첸은 문자를 알지 못하나, 천성이 총명하고 굳세었고 병사를 쓰는 것이 절제가 있어 토번은 그에게 의지했고, 마침내 강국이 되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중국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신당서>는 이어서 가르통첸이 처음 입조했을 당시 태종이 가르통첸에게 우위대장군 직을 내리고, 그 주군인 송첸감포보다도 먼저 낭야공주의 외손녀와 결혼시켰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당 왕조와의 밀접한 관계는 그가 토번 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당과 밀접하다고 하여 가르통첸이 대당외교에서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그는 대당외교에서 강온양면 정책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토번에 유리한 쪽으로 국제정세를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당 고종이 즉위한 이후인 658년, 토번은 황금으로 된 동이와 금실 등을 헌납하며 다시 청혼을 하면서 당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바로 토욕혼 문제였다. 토욕혼의 군주 모용락발(慕容諾鉢)은 640년 당의 홍화공주와 결혼하면서 당과 더욱 밀접해졌는데, 토번이 658년 다시 당에 청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에 내부(內附)를 한 것이다.

가르통첸은 분노했고 정예병력을 이끌고 토욕혼을 공격했는데, 당시 토욕혼의 대신이었던 소화귀(素和貴)가 토번으로 도망와서 토욕혼의 정세를 모두 알렸기 때문에 토번군은 쉽게 토욕혼을 공격할 수 있었다. 결국 모용락발은 홍화공주와 당의 양주(凉州)로 도망갔다. 토욕혼의 영역을 토번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당에게는 청해 일대의 경영권을 잃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타림분지의 경영도 위협받는다는 의미였다. 고종은 양주도독 정인태를 청해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고, 2년 후 백제 멸망을 이끈 장본인으로 잘 알려진 소정방을 안집대사로 임명하여 청해지역을 다시 평정하도록 하였다. 

정세가 당과의 전면전 분위기로 치닫게 되자, 가르통첸은 다시 장안에 사신을 보내어 당과의 화의를 꾀함과 동시에 청해 지역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고종은 가르통첸의 화의를 받아들이는 태도로 사신을 보내 토욕혼과 토번 간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였다. 이에 가르통첸은 당에 지금의 귀주성 서북부에 있는 적수(赤水) 지역을 말을 기를 수 있게 할양하라고 했으나, 당은 이를 당연히 거부하였다. 청해 일대를 두고 토번과 당 사이에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토번에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토번의 중심이었던 가르통첸이 급사한 것이다.

가르통첸이 급사를 했으나 가르 가문의 위세는 꺾이지 않았다.  가르통첸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신당서>에 의하면 "녹동찬이 죽자 아들들이 그 국가를 맡았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들 중 권력의 핵심은 가르친링(祿欽陵)이었다. 가르통첸의 죽음은 당 왕조로써는 불행한 일이었다. 가르친링은 아버지 가르통첸보다 대당외교에서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가르첸링이 집권하자 마자, 토번이 당의 기미 주에 속해있던 여러 강인 부락 12개를 격파했기 때문이었다.

당 고종은 당으로 도망쳐 온 토욕혼 부락들을 양주 인근에 배치하여 토번의 공격을 막는 한편, 재상인 강각(姜恪)과 화가로도 유명한 염립본(閻立本), 고구려 원정 시기 활약한 돌궐 출신 장수 계필하력(契必何力)을 불러 토번을 공격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생각 외로) 계필하력은 신중론을 택했고 강각과 염립본은 토욕혼을 구하여 토번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토번과 당의 고조된 긴장상태는 결국 670년 대비천(大非川)이라는 곳에서 포화 상태에 이른다.

대비천 전투

화친과 전쟁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던 토번과 당의 관계는 670년 대비천 전투를 통해서 폭발하였다. 대비천 전투는 토번과 당의 외교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전투였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판도를 변화시키는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전투를 계기로 당은 토번, 타림 분지에 대한 경영 방침을 바꿔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 대한 전략도 수정해야만 했다.

전쟁의 발단은 토번 군의 타림분지 공격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당은 고창 등을 복속시키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타림분지를 경영하고 있었고 안서 도호부의 4개의 진은 당의 서역 경영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670년(당 고종 함형 원년)에 토번은 당의 기미주 18개를 공격하고, 우전, 쿠차, 발환성을 점령하였다. 우전, 쿠차 등은 안서도호부의 핵심이었고 이 핵심지역을 토번에게 함락당하였기 때문에 안서도호부는 곧 폐지되었다. 토번에 의해 서역경영이 존폐 위기에 놓이게 된 당은 토번과 전면전을 펴야했다.

당은 토번과의 전면전에 10만 대군을 투입하였다. 당 고종은 설인귀(薛仁貴)를 라파도행군대총관(羅婆道行軍大總管)으로 임명하고 돌궐 출신의 무장 아사나도진(阿史那道眞)과 한인 장수 곽대봉(郭待封)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섬멸하도록 하였다. 설인귀는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당장으로,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때 활약하여 출세하여, 결국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의 책임자가 된다.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있던 요동과 한반도 방면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설인귀를 토번 전선에 투입한 것을 볼 때 당이 얼마나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는 지 알 수 있다.

이에 맞서서 가르친링이 통솔하는 토번의 군대는 대체로 샹숭, 숨파 등의 부족 연합군으로 편성되는데, 전력의 핵심은 청해와 사천 일대 강인들의 기병 전력이었다. 토번의 기마군단은 중장기병이었다. 토번의 중장기병은 두우의 <통전>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통전> <변방6> 토번 조에 의하면 "사람과 말 모두 쇄자갑(鎖子甲: 비늘 갑옷)을 입는데, 그 마름질 한 것이 심히 정교하고 몸 전체를 두루 싸고 오직 두 눈만 드러내니 화살이 뚫지 못한다. (.....) 창은 세밀하고 중국의 것보다 길며, 활과 화살은 약하나 갑옷은 견고하다. "고 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중장기병은 후대 몽골의 중장기병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18세기까지 티베트 군대의 핵심전력이었다. <구당서>나 <신당서>에 의하면 대비천 전투에 투입된 토번의 병력은 약 40만으로 추산된다.

양군이 격돌한 대비천은 지금의 청해호 남쪽의 절길(切吉) 평원이란 곳이다. 이 평원은 북쪽과 남쪽에 산을 끼고 있고 그 사이로 하천이 흐르는 분지 평원이다. 따라서 토번의 기병전력을 십분 활용하기도 좋고 산지를 이용한 기습 공격에도 유리한 곳이다. 게다가 이 곳은 토번이 장안으로 나가거나 서역지방으로 진출하는데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고 당 역시 토번을 공략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였다.

토번과 당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음에도 전투는 싱겁게도 토번의 일반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설인귀는 대비천에 이르러서 곽대봉에게 군사 2만을 주고, 후방의 수송부대를 맡도록 하였다. 더불어 대비령의 두 곳에 목책을 쌓고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후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대비천 하류에 있던 적들과 교전하여 격파하고, 소와 양 만 여 두를 노획하여 자신의 오해성(烏海城)으로 나아갔고, 곽대봉에게는 계속 후방에서 원조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곽대봉은 목책을 세우고 후방을 지키라는 설인귀에 명령을 어기고 수송부대를 이끌고 오해성으로 나아갔다. 결국 곽대봉이 저지른 실책은 겉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토번군 20만이 곽대봉의 수송부대 행렬을 급습한 것이었다. 사실 설인귀가 대비천 하류에서 패퇴시킨 토번군은 가르친링이 설인귀를 안심시키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수송부대를 모두 잃은 곽대봉은 험준한 계곡에 몸을 숨겼고, 오해성까지 나아갔던 설인귀는 다시 군대를 대비천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가르친링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40만 대군으로 설인귀를 몰아붙였다. 결국 설인귀는 가르친링과 굴욕적인 화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귀국해서 서인이 되어 쫓겨나게 되었다.

대비천 이후

토번과 당이 명운을 걸었던 대비천 전투는 결국 당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대비천 전투의 여파는 단순히 전투에서 당이 대패를 했다는 결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앞으로의 토번과 당의 외교 관계를 전개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당의 전반적인 외교정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우선 청해 일대의 토욕혼 세력이 완벽히 토번에 의해 멸망당했다. 토욕혼은 비록 작은 국가일지라도 당과 토번의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토욕혼이 궤멸되면서 당은 토번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되었고 사천, 감숙회랑, 타림분지에 대한 경영권은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토욕혼이 존재하던 청해 일대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수도 장안도 토번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것은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후 당의 동도였던 낙양이 좀더 중요해진 데에는 장안이 대비천 전투 이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대비천 전투 이후 당의 서방정책 뿐만 아니라, 흥미롭게도 동방정책도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당은 대비천 전투에 당시 안동도호부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설인귀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대비천 전투가 당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면서 당의 요동과 한반도 전략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구당서><설인귀전>에 의하면, "설인귀가 관직에서 제명되었으나 고려(고구려)의 무리가 다시 반역을 하여, 조를 내려서 인귀를 다시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경략하게 하였다."고 했다. 설인귀가 다시 동방정책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요동에서의 당의 영향력은 다시 회복되기 힘들었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당의 영향력을 배제시켰고, 요동에서도 거란인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틈을 타서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는 등 당의 영향력은 요동과 한반도에서 급속히 후퇴하였다.    한편 대비천 전투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다름아닌 토번의 실권자 가르친링이었다. 대비천 전투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당을 격퇴한 가르친링은 자국내에서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토번 내에서의 가르 가문의 위세는 한층 강력해 지게 되었다. 아울러 가르친링의 승리는 그의 대당강경책도 승리했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대비천 전투 이후 토번은 당에 대한 강경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할 수 있었다.

가르 가문 시대의 종결과 금성공주

토번의 계속되는 공세와 흑치상지

670년 대비천의 패배로 당에 대한 토번의 공세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당으로서도 한시 바삐 대비천에서의 패배를 만회해야만 했다. 676년 토번이 선주와 곽주를 약탈하여 백제에서도 전공을 세웠던 유인궤를 도하군 진수로 삼아 토번의 침입을 막도록 하였고 678년에는 토번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하여 중서령 이경현을 도하도 행군대총관, 서하진무대사, 선주도독으로 임명하고, 관내도(關內道)에서 모병(招募)을 실시하였다. 관내도의 모병실시를 통해 당이 토번 공격에 상당한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또한 익주장사 이효일(李孝逸), 휴주도독 발왕 이봉 등에게도 명을 내려 검남과 산남 지역에서 모병을 실시하여 토번을 제압할 수 있게 하였다.

678년 가을, 이경현의 당군과 토번의 군대가 청해에서 다시 충돌하였다. 수차례 전투에서 당의 군대는 토번의 군대에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이경현의 부장 공부상서 유번례는 전사하였고 이경현은 더이상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지 못하였다. 당군은 토번의 공세에 밀려서 퇴각하였고 이경현은 승풍령에 진을 쳤다. 하지만 승풍령의 상황도 당군에게는 심각했다. 진흙탕으로 인해 당군은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토번군은 이미 높은 언덕을 선점하여 당군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이러한 당군의 상황을 타개한 이가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달솔 출신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한때 백제 부흥군의 수령으로 활동하다가 당군에 항복한 인물이었다. 승풍령 전투 당시 흑치상지는 좌령군 원외장군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원외(員外)이기 때문에 직책은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흑치상지는 당군의 난개를 타개하기 위하여 결사대 500인 만을 거느리고 야음을 틈타서 토번의 군대를 급습하였다. 흑치상지의 야습으로 토번의 군중은 혼란스러워졌고 300명의 전사자를 내고 급히 퇴각하였다. 이경현은 그 틈을 타서 선주로 퇴각하였고 결국 그는 충주자사로 좌천되었다.

대비천 전투 이후 계속되는 대결의 결과는 당과 토번에서 각각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구당서>196. <토번 상>과 <신당서>216. <토번열전 상>에 잘 드러난다. 당 고종과 당의 대신들은 토번의 잇다른 승리에 매우 혼란스러웠던 반면에, 토번은 티베트 전역을 완벽히 통일하여 북쪽의 타림분지와 남쪽의 운남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토번은 대비천과 승풍령 전투의 기세에 힘입어서 679년 다시금 당을 공격한다. 공격의 선봉장은 가르친링의 동생 가르찬파와 소화귀였는데, 3만의 병사를 이끌고 하원(河原)으로 진출하고 양비천(良非川)에 진을 쳤다. 이에 당은 다시 이경현을 보내 황천(湟川)에서 토번과 전투를 했으나 다시 패배했다. 마치 전투의 양상은 승풍령 전투의 재현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킨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는 정예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토번 진영을 급습했고 흑치상지의 때아닌 기습을 받은 가르찬파는 토번 영내로 퇴각하였다. 흑치상지가 토번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자 당 조정은 흑치상지를 하원군경략대사로 임명하여 토번의 진출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나마 당으로는 흑치상지라는 대항마가 있어 다행인 셈이었다.

가르 가문의 흥망과 두송 망포체

대비천 전투 이후 당과 토번 간의 전쟁이 가속화되면서, 가르 가문의 명성과 위세는 점점 높아졌다. 가르친링의 대당 강경책이 효과를 얻었으니, 그와 그의 형제들이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럴 즈음인 675년(당 고종 의봉 4년), 찬보 망송망첸이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둔다. 망송망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어린 아들 두송 망포체였다. 두송 망포체도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망송 망첸의 미망인이자 두송 망포체의 어머니 크리 마 로드가 섭정을 하게 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가르 가문의 형제들이 쥐고 있었다. 송첸캄포 이후 찬보들의 이른 즉위와 이른 죽음이 가르 가문의 권력을 영속시키는 원동력이었다.

망송망첸이 죽고 가르 가문의 집권이 확고해질 즈음, 토번의 대내외적으로 큰 사건 2개가 연이어 터진다. 우선은 680년 토번으로 시집왔던 문성공주가 사망했다. <구당서>는 "영륭 원년, 문성공주가 훙(薨0했다. 고종은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치제하였다."고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송첸감포에게 시집간 이후 문성공주가 토번의 풍속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삶 자체에 대한 기록은 없다. 토번과 당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그녀의 삶은 항상 불안했을 것이고 아마 머나먼 티베트 고원에서 홀로 맞는 그녀의 죽음은 쓸쓸했으리라. 어쨌든 당과 토번을 이어주던 문성공주가 죽으면서 당과 토번의 관계도 매우 냉랭해졌다.

한편 당에서는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가 690년 당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고 주(周) 왕조를 세우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비록 690년에 무주 왕조가 세워졌지만, 무후가 병든 남편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664년부터가 실질적인 '무주시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주 시대의 토번관계도 고종 시대의 토번관계와 다를 바 없었다. 무후가 주왕조를 세우자 토번은 여러 국가들과 의례적으로 조하하였다. 하지만 698년 무후는 문창우상(文昌右相) 위대가를 안식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안서대도호 염온고를 부장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공격하게 하였고, 그 이듬해에도 문창우상 잠장청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치게 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튼튼하게 유지될 것 같던 가르가문의 위세도 692년을 기점으로 한풀 꺾이기 시작한 듯 하다. 692년 토번과 가르 가문에게는 큰 타격을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토번의 대수령이었던 갈소(曷蘇)와 잠추(昝捶)가 무측천에 귀부한 것이다. 갈소는 당항의 수령이었고 잠추 역시 강인들의 수령이었는데 대수령이라는 직위를 보서 이들은 토번제국 내에서 상당한 위치의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갑자기 무측천에게 귀부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당시 토번의 정치를 통해서 추측해 보면 두송 망포체 즉위 이후 토번의 중앙권력이 약화되었고 가르 가문의 집권에 반발한 일부 강인 수령들이 무후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무후로서는 이들 강인 수령들의 투항은 상당한 힘이 되었음은 당연하다.

무후는 이에 힘입어 타림분지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우응장위장군 왕효걸을 무위도행군대총관으로 임명하여 토번을 공격하였다. 왕효걸은 타림분지 일대의 토번을 공격하여 대파하였고, 무후는 다시금 타림분지 지역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에 토번은 중국에 빼앗긴 타림분지를 되찾기 위하여 돌궐과 연합하여 남과 북에서 양동공격하기도 하였고, 가르첸링 형제가 소라한산(素羅汗山)에서 왕효걸과 교전하고, 양주를 침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나, 왕효걸 등의 활약으로 결국 실패하고 가르첸링은 무후 측의 곽원진과 화약을 맺었다. 

갈소와 잠추의 귀부, 중국의 타림분지 회복 등의 잇다른 사건은 가르첸링 형제들의 집권에 적신호와 같았다. 또한 이무렵 찬보 두송 망포체가 장성하면서 점차 가르첸링 형제의 권력을 빼앗고자 하였다. 드디어 699년 두송 망포체가 칼을 들었고, 하늘을 찌르던 가르 가문의 권력은 그 종결점을 찍었다.

찬보 두송 망포체는 대신 논엄(論嚴)과 가르 형제를 제거할 계책을 짜고 섭정이었던 어머니 크리 마 로드의 동의를 얻었다. 고대 티베트 문헌에 의하면 크리 마 로드는 가르 가문의 공적으로 인해 가르첸링 숙청을 망설였지만 결국 아들의 편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가르 가문은 토번의 변경에 각각 군진을 보유하며 주둔하고 있었는데, 두송 망포체는 사냥을 핑계로 가르첸링의 무리를 수도 라싸로 불러들였다. 가르 가문의 수하 2,000여 명이 라싸에 집결하자, 두송 망포체는 친위군을 이용하여 이들을 제거하고 가르친링과 가르찬파를 수도로 불렀다. 가르친링은 첸포의 명을 거부하였고 두송 망포체는 친히 변경의 가르친링을 토벌하러 나섰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르친링의 군대는 찬보를 보자 무너지기 시작했고 이를 본 가르첸링은 자살하였다. 이로써 가르동첸 이후, 40여 년 간 전권을 휘두르던 가르 가문의 영화는 그 막을 내렸다.

첸링이 죽자, 동생 찬파는 형의 아들 분포지를 데리고, 중국으로 투항하였다. 무후는 가르찬파가 항복해 오자, 우림영의 군대를 파견하여 영접하는 한편, 찬파를 특진 보국대장군 귀덕군왕에 임명하였고 분포지를 좌우림대장군 안국공에 봉하는 등 이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또한 찬파에게 그가 거느리고 온 부락의 병사들을 하원에서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는 찬파를 회유하여 토번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고자 하는 중국 측의 의도였다고 생각된다. 가르찬파가 죽자 조정에서는 안서대도호로 추증하였다. 한때 티베트와 중국 일대에서 명성을 떨쳤던 첸링, 찬파 형제의 최후는 이와같았다.

가르 가문을 제거한 두송 망포체는 곧 중국을 공격한다. 하지만 중국 공격은 두송 망포체의 뜻대로 쉽사리 되지 않았다. 700년 두송 망포체는 장수 국망포지(麴莽布支)를 보내 양주를 공격하고 창송현을 포위하였지만, 농우제군주대사 당휴경과 당에 귀부한 가르첸링의 아들 분포지에게 패배하였고, 702년에는 두송 망포체 자신이 직접 실주를 공격하였지만 실주도독 진대자에게 4번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 결과 두송 망포체는 측천무후와 화의를 맺었다. 

중국 원정을 실패한 두송 망포체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로 네팔의 반란이었다. 네팔은 송첸감포 시기 토번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이 시기까지 토번의 속국이 되었는데, 이 시기 토번의 지배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네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두송 망포체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하지만 결국 진중에서 두송 망포체는 불운한 최후를 맞았다. 어린 시절에 찬보의 위에 올랐지만 줄곧 가르첸링의 권력에 눌려 제대로 정치를 못 펴보았고, 장성하여 기회를 틈타 가르 가문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드디어 친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운은 그를 따라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네팔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진중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치데축첸의 즉위와 금성공주

두송 망포체가 전장에서 사망하자, 첸포 위를 두고 두송 망포체의 아들들이 다퉜다고 <구당서>와 <신당서>는 전한다. 이러한 혼란기 속에서 첸포 위에 즉위한 것은 치데축(송)첸(赤德祖(松)贊, Kri-ide gtsung-btsan) 이었다. 치죽데첸은 당시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할머니였던 크리 마 로드가 다시 섭정을 하게 되었다.   티베트 전승과 역사서에 의하면, 크리 마 로드는 "하늘은 왜 이리 박정하여 이런 비극이 두 번씩이나 일어나게 하는가? 토번 왕조의 무거운 책임을 여인에게 지게 한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 비록 그녀의 한탄처럼 그녀는 여인으로 고된 삶을 지게 되었지만 그녀는 뛰어난 정략가였고 그녀로 인해 송첸감포 이후의 토번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치데축첸의 치세 동안 안정기를 찾은 토번 왕조는 치송데첸의 시대 최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치죽데첸의 안정된 치세는 크리 마 로드가 마련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크리 마 로드가 치데축첸의 섭정으로 시도한 정책은 송첸캄포 이후 단절되었던 중국과의 구생(舅甥: 장인과 사위의 관계) 관계의 회복이었다. 당시 중국은 무측천 사후 무측천의 아들 중종이 즉위하여 당 왕조를 다시 회복한 상태였다. 토번은 사신을 보내어 찬보의 즉위를 알리고 당과 회맹을 시도하였고, 708년 사신을 보내 찬보와 당의 공주 간의 결혼을 요청했으나 당은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한 것은 크리 마 로드였다. <신당서>에 의하면, "토번이 다시 사자를 보내 납공하였는데, (찬보의) 조모 가돈(可敦: 카툰, 유목 수령의 부인) 또한 종아를 파견하여 결혼을 청했다."고 하였다. 크리 마 로드의 노력으로 709년 토번과 당의 구생관계는 복원되었다.

문성공주에 이어서 토번으로 시집간 여인은 금성공주(金城公主), 옹왕(雍王) 이수례(李守禮)의 딸이자 중종의 조카였다. 토번의 사신 상찬돌(尙贊咄)과 명실렵(名悉獵)이 공주를 맞으러 장안으로 파견되었고, 중종은 그들을 환영하고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쿠차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는 한편, 양거에게 공주를 호위하여 토번까지 따라가도록 하였다. 중종은 직접 시평현(始平縣)까지 나왔고 금성공주를 보낸 후, 슬퍼하면서 공주를 배웅한 시평현 봉지향(鳳池鄕)을 금성현(金城縣) 창별향(愴別鄕: 이별을 슬퍼한다는 의미)으로 고치고  그곳 백성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1년 간 부역을 면제하였다. 이로 볼 때 중종이 금성공주를 떠나 보내는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금성공주는 토번에 들어가서 따로 궁궐을 짓고 기거하였다.

금성공주의 결혼으로 표면 상으로 당과 토번의 구생, 혹은 화친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이러한 관계는 얼마 안 가 다시 깨지고 말았다. 중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감찰어사 이지고는 토번에게 예속되어 있던 운남지역의 요주만과 서이만을 공격하자는 주청을 올렸다. 요주만은 운남 지역에 위치하면서 당시에는 토번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당으로는 사천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운남 지역도 안정시켜야만 했다. 결국 이지고의 청이 받아들여져 이지고가 요주만을 공격하였지만 이지고는 요주만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리고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토번과의 불안정한 관계는 타림분지와 하서회랑 일대에서도 계속되었다. <구당서>의 "토번은 속으로 비록 노했으나 겉으로는 화친과 우호를 다졌다" 기록은 당시 당과 토번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정세는 토번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토번은 당을 압박한 결과 하서구곡을 얻을 수 있었다. 명분 상은 금성공주의 목욕처로 당에게 선물받은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토번이 당의 전략적 요충지를 뺏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서구곡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비옥하고 병마를 기를 수 있는 땅"이었다. 따라서 토번이 이 하서구곡을 얻었다는 것은 병마를 기를 수 있는 요충지를 얻었다는 것과 동시에 당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금성공주의 결혼 이후, 토번과 당의 관계는 언제 깨질 지 모르는 살얼음판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 누구보다 조마조마 했을 사람은 아마 금성공주가 아니었을까? 금성공주는 중종에게 토번과의 진정한 화의를 바라는 상소문을 썼다고 전해진다. 토번의 볼모와 같은 신세 속에서 토번의 압력으로 상소를 썼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쩌면 자신의 간절한 바람도 그 안에 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금성공주의 염원과는 달리, 당과 토번의 관계는 화친과 전쟁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8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정착과 고선지의 원정

당 현종의 치세와 8세기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정착

치데축첸이 찬보에 오르고 금성공주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에서는 예종이 승하하고 태자 이융기가 황제에 오른다. 바로 당 현종이다. 현종의 치세는 당의 황제 치세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었고, 당의 중간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무측천이나 중종의 부인 위후 등 여인들의 정치를 청산한 현종은 당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당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현종의 치세는 크게 개원 연간과 천보 연간으로 나누는데 개원 연간은 성당시대(盛唐時代), 혹은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면서 당 태종의 치세 이후로 당이 가장 번창한 시기라고 평가된다.

현종 시대가 의미가 있는 것은 당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가 이 시기에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요동 지역에서는 발해가 국가체제의 틀을 확립하였고 한반도 일대에서는 신라 왕조가 유지되었다. 티베트에서는 토번제국이 그 지배를 확립하였고 운남지역에서는 남조라는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다. 또한 초원지대에서는 투르크 계 유목제국이 자리잡았다. 이러한 현종시대 확립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큰 틀은 9세기 말까지 변동없이 지속되었다. 또한 이러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큰 틀 속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자리잡았다.    

연장되는 토번-당의 힐항 관계

치데축첸과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완화된 토번과 당의 관계는 다시금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이미 현종 즉위 이전인 710년 경 토번이 금성공주의 목욕처를 명목으로 하서구곡의 전략적 요충지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구당서>는 "이로부터 (토번은) 다시 배반하고 병사를 이끌고 (당의 경계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自是復叛, 始率兵入寇.)"고 기록되어 있다. 

714년(개원 2년) 가을, 토번의 대장 분달언(盆達焉)과 걸력(乞力)이 10여 만 대군을 이끌고 임조군을 침공하고 난주와 위주를 휩쓸었다. 금성공주와 혼인을 주도하던 신료 양거는 두려운 나머지 약을 먹고 죽었다. 임조군은 장안의 턱 밑이라고 할 수 있었고 위주와 난주는 당시 당나라의 군마를 기르던 곳이었기 때문에 당으로써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비록 현종이 설눌과 왕준을 파견하여 토번 군을 겨우 격퇴했지만 당으로는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러한 충격은 현종이 직접 친정을 선포하고 장사들을 모병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토번의 위협은 하서구곡을 얻음으로써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얻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당과 토번의 충돌지대도 청해호 일대에서 농우, 하서 일대까지 확장되었는데, 이는 당의 세력이 토번에 의해 위축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번은 외교적으로 상당한 유리한 위치에서 당을 압박하였다. 임조에 대한 습격 이후, 사자를 보내어 현종에게 화의를 요청했고 현종이 화의를 거부하자 다시금 당의 변경을 약탈하였다. <구당서>의 "토번이 스스로 강성해졌음을 의지하면서, 매일 상소와 표문을 올렸는데, 서로 대등한 국가의 예를 요구했으며, 그 언사가 오만하여 황제가 심히 노하였다."는 기록은 토번과 당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 역시 손을 놓은 것만은 아니다. 727년 당은 청해호 서쪽 일대에서 토번군을 격파하였고 돈황 일대를 공격한 토번군을 격퇴시키도 하였다. 이러한 당과 토번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은 사실 당과 토번의 역사 내내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것이었다.

이 시기 토번의 군대를 이끈 것은 시노라궁가르(悉諾邏恭祿)라는 장수였다. 시노라궁가르는 727년 대비천에서 당군과 전투를 했고, 돈황일대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과로 인해 당시 그의 위명이 심히 진동하였다고 구당서는 전한다. 그러나 시노라궁가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찬보 치데축첸이었다. 토번 찬보로서는, 시노라궁가르의 성장은 또 하나의 가르 가문을 키우는 격이었기 때문에 치데축첸은 시노라궁가르를 주살하였다. 하지만 토번의 공세는 지속되었다.

714년부터 730년까지 약 15년 동안 토번과 당은 청해와 하서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인다. 그러던 상황은 729년 말 당이 토번의 청해 일대 요충지였던 석보성을 함락시키면서 화의의 분위기로 바뀌었고, 금성공주의 노력으로 토번과 당의 관계는 개선되었다. 아마 당과 토번과의 살얼음판 관계에서 누구보다 가슴 졸였을 것은 금성공주였을 것이고 금성공주는 사신단과는 별도로 황금을 바치며 현종에게 간곡히 화의를 청했다. 비록 <시>, <서> 등의 중국고전 등을 달라는 토번의 요구가 무시되는 등 다소 냉랭했지만 당과 토번은 734년 청해 하서 일대의 경계를 확실히 나누는 분계비를 세우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호전되었다.

덧붙여 말하면 금성공주는 740년에 티베트에서 사망한다. 화번공주의 삶들이 그렇듯이 금성공주의 삶도 순탄치 많은 않았다. 금성공주가 티베트에서 보낸 시대는 토번과 당이 외교적으로 공방전을 치열하게 벌인 시기였기 때문에 공주는 늘 불안한 삶을 살아야 했고, 토번이 하서구곡을 얻었을 때처럼 토번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이용되기도 하였다. 티베트 설화에서도 금성공주의 불운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금성공주는 치데축첸과의 사이에서 아들 1명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치데축첸에게는 티베트 인 왕비 1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자식이 없자 금성공주의 자식을 몰래 빼돌려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화번공주로의 금성공주의 불안정했던 지위를 잘 보여준다. 

금성공주의 노력으로 호전되었던 토번과 당의 외교적 갈등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터지게 된다. 그것은 기존의 것과는 달리 당과 토번 사이에서 벌어진 직접적 충돌은 아니었다. 당과 토번의 충돌은 운남 지역의 남조(南詔)라는 국가와 파미르 일대의 소발률(小勃律)이라는 국가를 두고 벌어졌다. 이 두 국가는 영토는 작은 국가였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토번과 당 간의 패권 다툼의 장이 되었다.

남조(南詔) 문제

대략 이무렵 운남 지역에서는 남조(南詔)라는 국가가 성립된다. 운남은 전한대로부터 서남이라고 불리웠고 삼국시대에는 제갈량이 경략한 지역이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본래 당 초에 이 지역은 6개의 큰 국가로 통합되었는데 부락의 군장을 '조(詔)'라고 하였기 때문에 흔히 6조라고 불렀다. 이러한 6조 중에서 가장 강성한 조(詔)는 몽사조(夢舍詔)가 강성하였다. 몽사조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조(南詔)라고도 하였다.  

운남 지역은 지정학적 위치 상 서쪽으로부터 동진해오는 토번 세력과 사천 지역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당과의 접점이었다. 따라서 당과 토번은 이 지역을 두고도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송첸감포 이래로 토번은 운남 일대를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고자 했다. 당은 그러한 토번의 운남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운남의 여러 세력들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었다.   그런 상황에서 약 8세기 초반 남조의 군장 피라각(皮邏閣)이 운남 지역의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곧 운남의 6조를 통합하고 통일정권을 세우기 이른다. 당은 피라각의 남조 정권을 인정하여 피라각을 운남왕으로 책봉하고 피라각에게 "귀의(歸義)"라는 이름을 내렸다. 당이 남조 정권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것은 남조를 통해 토번의 세력 확장을 막고자함이었다. 남조는 이러한 방파제 역할을 잘해 주었다. 토번이 운남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남조정권을 공격했지만 남조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당-토번-남조 간의 국제관계는 곧 급변하였다. 그 계기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 발생하였다. 귀의의 뒤를 이어 남조의 왕이 된 각라봉(閣邏鳳)이 검남절도사 선우중통과 외교관계를 맺기 위해 처자와 함께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운남 태수가 각라봉의 처와 사통을 하고 각라봉에게 모욕을 주었다. 이에 격노한 각라봉은 당과의 우호관계를 접고 당과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각라봉은 운남태수를 죽인 후 운남 일대의 당의 기미주에 속했던 32개의 부락들을 병합하였다. 이에 당은 검남절도사 선우중통에게 대군을 주어서 남조를 공격하게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당과의 관계를 단절한 각라봉은 토번에로의 "귀명(歸命)"을 선언하였다. 즉 토번과의 연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토번은 남조의 왕을 "찬보종(贊普鍾)"이라는 호칭과 금인(金印)을 하사하였고 아울러 동제(東帝)라는 칭호도 붙여주었다. "종(鍾)"이란 단어는 토번의 언어로 아우라는 뜻이기 때문에 "찬보종"은 "찬보(첸포)의 아우" 라는 뜻이고 동제라는 칭호는 토번 동쪽의 동반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남조는 토번과 연대를 맺고 당의 검남(사천) 일대를 위협하였다. 결과적으로 토번은 남조와 연대하면서 운남 지역에 자국 중심의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수립할 수 있어고 아울러 당과의 운남지역에 대한 외교전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소발률(小勃律) 문제와 고선지의 소발률 원정

남조와 함께 토번-당 간의 분쟁지역이 된 곳은 힌두쿠시 산맥 남쪽의 길기트 지역 위치한 소발률이었다. 본래 발률이라는 하나의 세력이 존재하던 것이 현종 즉위 초에 대발률, 소발률로 분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소발률은 당과 토번 사이의 완충지대로 위태로운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발률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원인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와 티베트 고원을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번으로서도 당으로서도 자국이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고 더불어 타림분지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확보해야만 하였다.

소발률 문제는 이미 722년 노출되었다. 소발률 왕 몰근망(沒謹忙)은 현종 개원 초기에 입조하였고 당은 소발률에 완원군(緩遠軍)을 두었다. 당이 이 곳에 군대를 둔 것은 토번의 서역 진출을 차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토번은 722년 "우리는 너희 왕국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안서사진을 공격하려는 길을 빌리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소발률국을 압박하였다. 몰근망의 원조 요청을 받은 당의 북정도호 장효숭은 소륵부사 장사례를 파견하여 토번을 격퇴하였다. 

하지만 점차 당은 소발률국에 대한 주도권을 토번에 빼앗겼다. 몰근망의 사후 이런 경향은 심화되었고 736년 대발률을 복속시킨 토번의 공격을 받게 된 몰근망의 손자 소실리(蘇失利)는 토번의 공주 크리 마 로드(치데축첸의 할머니와는 다른 인물)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소발률국과 토번제국 간의 결혼으로 인해 소발률 국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일대가 토번의 영향력 하에 들게 되었고 당의 타림분지 경영도 위태하게 되었다. 당은 소발률국에서의 토번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개가운, 부몽영찰 등을 파견하여 소발률 국에 대해 원정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종은 747년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수 고선지를 행영절도사로 파견하여 소발률국을 공격하도록 명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의 시작이었다.

현종이 소발률국을 공격하는데 고선지를 발탁한 이유는 그가 타림분지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내었고 당시 서역에 대한 정보에 정통하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고선지는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안서도호부의 치소인 쿠차를 출발하여 약 100일 만에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선지의 군대의 주요 전력은 빠른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었을 것이다. 당시 토번은 소발률국을 장악하고 소발률국으로 가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접경 지대인 와칸계곡의 연운보(連雲堡)에 1만 명의 부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호밀국의 사륵성에도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특히 와칸협곡에 둘러쌓인 연운보는 인도와 중앙아시아 티베트를 잇는 요충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고선지는 보급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타지키스탄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오식닉국을 장악하였다. 그 후 부대를 3군으로 나누어 소륵수착사 조숭빈이 이끄는 1대는 북곡로, 발환수착사 가숭빈이 이끄는 2대는 적불당로를 통하여 연운보로 진격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나머지 1대를 이끌고 호밀국을 거쳐 연운보로 진격했는데 도중에 사륵성에 진을 친 토번의 대군을 기습하여 궤멸시켰다. 7월 13일 고선지의 3군은 연운보에 집결하였다. 토번군 8, 9000이 연운보 남쪽에 성책을 두르고 진을 치고 있었고 연운보의 앞을 가로지르는 파륵천 역시 물이 불어 공격하기 어려웠다. 고선지는 새벽에 파륵천의 물이 줄어든 틈을 타서 파륵천을 건너 연운보의 후면을 기습공격했다. 고선지의 기습공격에 의하여 토번군의 약 절반이 전사하였다. 연운보에서 퇴각한 군대는 토번 본국으로 가서 원군을 요청하였다.   연운보를 공략한 고선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연의 장벽인 바로길 고개와 중국사서에 탄구령으로 기록된 다르호트 고개였다. 특히 다르호트 고개는 해발 4694m의 눈으로 뒤덮인 험준한 고개였다. 하지만 고선지로는 이 고개를 최대한 빠르게 넘어 소발률국으로 진격해야만 했다. 소발률국의 사이하에는 토번을 잇는 등교가 있었는데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토번 본국의 원군이 소발률국에 도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등교를 절단해야만 하였다. 고선지는 부장 서원경에게 별동대를 주어 미리 사이하의 다리를 끊게 하고 자신 역시 다르호트 고개를 넘어 소발률국을 공략하였다. 고선지의 전략은 성공적이어서 사이하의 다리를 끊어서 토번의 원군이 소발률국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고 소발률국의 국왕 소실리와 그의 부인을 장안으로 압송할 수 있었다. 

오렐스타인이나 폴 펠리오 등의 서양 학자들의 찬사를 떠나서 고선지의 소발률국 원정은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신당서> 221.<서역열전>에 의하면 "선지가 왕의 항복을 약속받고 그 나라를 평정하였다. 이에 불림, 대식 등 여러 호인들의 72개국이 모두 두려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이 일시적으로나마 토번의 서역진출을 제어할 수 있었고 자국의 중앙아시아와 자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상승세를 계기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은 당시 압바스 왕조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타슈켄트의 석국을 원정하고 석국의 왕을 죽였다. 하지만 당의 상승세도 751년 탈라스에서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압바스 왕조의 군대에서 대패하면서 꺾이게 되었다. 탈라스 전투의 여파는 당의 서역경영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일대는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게 되었고 당의 타림분지 경영도 후퇴하여 토번이 다시금 타림 분지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755년 당은 탈라스 전투보다도 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바로 범양평로절도사 안록산의 난이었다. 안록산의 난은 당 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유지되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도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토번의 역사에도 안록산의 난은 매우 큰 역향을 끼치게 된다.

치송데첸의 시대

치송데첸의 즉위와 안록산의 난

755년 치데축첸 찬보가 귀족세력에 의해 암살되어 죽고 그 아들 치송데첸(赤松德贊, Khri-srong iDe-btsan)이 찬보에 오른다. 치송데첸의 시대는 토번 역사 상에서 가장 번성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토번제국의 강역은 타림분지 전역과 네팔, 운남 일대까지 확장되었고 불교는 흥성하였고 문화사업 역시 활발히 진행되었다. 치송데첸은 송첸감포와 비슷하게 귀족세력들을 제거하여 중앙집권화를 도모하면서 활발한 대외 원정을 벌이게된다. 이러한 치송데첸의 대외원정은 당시 국제적인 변화와 맞물려서 일어났는데, 특히 치송데첸 즉위 직후 터진 안록산의 반란은 토번과 대립하던 거대한 축인 당을 무너뜨렸다.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을 휩쓴 안록산, 사사명의 난, 흔히 우리가 줄여서 안사의 난이라고 부르는 반란 사건은 당 왕조 뿐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의 전체적 맥락에서 보았을 때에도 당송변혁기라는 거대한 변화를 이끈 사건이다. 안록산의 난을 통해 그동안 누적되었던 당왕조의 제도적 모순들이 한번에 노출되었고, 안록산의 난 이후 당이란 제국은 실질적으로 병권을 지닌 절도사들의 번진들로 분열되어 당의 황제는 장안과 낙양 일대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밖에 없었다. 안사의 난 이후 중국은 송이 재통일할 때까지 분열과 혼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토번은 안록산 난이라는 혼란기와 화려했던 당 왕조의 몰락을 직접 목도하였다. 안록산의 군대가 장안에 육박할 무렵, 토번은 치송데첸의 즉위를 축하하는 당의 사신단에 대한 답례차로 다시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시 현종은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의 일족과 사천으로 피난을 떠나고 있었다. 토번의 회답 사절이 현종의 피난 행렬을 접한 곳은 바로 마외역이었다. 당시 토번 사신을 맞은 것은 양국충이었는데, 토번 사신을 맞는 도중 폭도로 변한 당의 근위대에게 살해되었다. 양국충을 죽인 당의 근위대들은 양귀비 일족을 모두 살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협박하였다. 현종은 근위대에 압박에 못이겨 양귀비를 죽이고 말았다. 토번의 사신단은 이러한 광경을 모두 목도하였을 것이고, 당 왕조의 몰락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토번의 성장에도 좋은 호재가 될 것임도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당의 국제적 위신은 약해졌고 외부세력이 당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위구르 유목제국이었다. 위구르는 투르크 계 유목 세력으로 돌궐 제 2제국을 대신하여 8세기 중반 이후 몽골초원 일대를 통일하는 유목제국을 건설하였다.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당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에 위구르 병력을 많이 의존하였는데, 위구르는 중국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중원까지 침투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당 조정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위구르와 함께 토번 역시 안사의 난을 이용,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러한 토번의 세력 확장을 당은 막아낼 여력이 없었고 급기야는 당나라 역사에서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였다. 763년 토번 군대가 당나라 장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일이었다.

토번의 장안 점령과 치송데첸 시대의 대외관계 

토번의 장안점령 징조는 이미 안록산의 난 초기부터 포착된다. 당은 안록산의 반군을 막기 위해 가서한에게 장안 주변의 군대를 주어 장안의 길목인 동관(潼關)을 방어하게 하였다. 장안 주변의 군대가 모두 동관 전선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장안은 그야말로 무바입 상태였고 토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안 주변을 약탈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신당서>에 의하면 "가서한이 하, 농의 군사들을 동쪽으로 모두 데리고 동관으로 갔고 여러 장군들은 각 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토벌하러 가니, 이 때 처음 행영(行營)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변경은 빈 땅이 되어 토번은 심하게 약탈할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토번은 당 숙종 지덕 초반에 사천의 휴주와 위무성 등을 공략하고 현종 시기 당에게 점령당했던 청해 일대의 요충지 석보성을 다시 되찾았다.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토번의 공세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토번의 본격적인 공세는 762년에  개시되었다. 당시 당은 안록산, 사사명에 이어 반란군 수장이 된 사조의의 군대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토번은 이러한 대치 상태를 틈타서 장안 일대를 대대적으로 공략한다.

762년 토번은 장안 서부의 임조, 진주, 성주, 위주를 함락시켰고 당은 토번에 사신을 보내지만 토번은 사신을 억류하기에 이른다. 이어 763년 토번은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하고 농우 일대까지 점령한 후 12만 대군으로 장안을 향해 진격하였다. 당 황제 대종은 장안을 빠져 나와서 섬주로 피난갔고 안사의 난에서 활약을 한 곽자의 역시 토번군의 기세에 압도되어 장안을 포기하고 상주로 퇴각하였다. 토번에 항복한 장수 고휘가 장안으로 토번군을 인도하였고 결국 토번은 장안을 점령하였다. 장안을 점령한 토번은 금성공주의 조카로 알려진 광평왕 이승굉을 황제로 세우고 괴뢰 조정을 세웠다. 이러한 토번의 장안점령은 보름 간 지속되었다.

수도 장안이 토번에 함락된 위기를 타개한 것은 장안 남쪽 상주로 퇴각한 곽자의와 장안에서 탈출하여 남전에서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저항하던 광록경 은중경이었다. 곽자의는 상주에서 군사들의 동요를 막고 전열을 재정비하였고 은중경 역시 남전에서 병사들을 모아서 대담하게 장안으로 진격하면서 성내의 백성들과 호응하였다. 토번 역시 장안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곽자의 군과 은중경의 군대와 맞붙고 장안의 민심을 수습하기도 힘들었고, 게다가 당시 당은 위구르와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름 만에 퇴각해야만 했다. 하지만 토번의 장안 점령 사건은 토번과 당의 관계에 있어서 토번이 당을 압도한 대표적인 사건이었고 토번인들도 자랑스럽게 여긴 사건이었다.

장안에서 비록 물러났지만 토번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장안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한동안 농우 지방을 장악하고 있었고 사조의의 난이 평정된 이후 투르크 출신의 장군 복고회은이 당에 반란을 일으키자 복고회은을 원조하여 대군을 파견하였다. 치송데첸은 이러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784년까지 빈번하게 당의 변경을 교란시키고 회맹을 청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토번과 당의 긴장상황을 완화시킨 사건이 784년 일명 "청수회맹(淸水會盟)"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당의 장일과 토번 귀족 대신이었던 상게첸이 청수에서 단을 쌓고 양, 소 등의 희생제물을 바치는 회맹의식을 치르고 당과 토번의 경계를 확실히 하였다. 이 청수회맹은 822년의 장경회맹과 함께 잘 알려진 회맹이다.

여기서 회맹(會盟)관계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회맹이란 것은 모여서 맹세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제후국들 간의 회맹 전통이 있었고 티베트에서도 여러 부락 간의 회맹 전통이 있었다. 회맹이란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세력끼리의 관계이기 떄문에 당과 토번도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회맹관계를 맺은 것이지만 사실상 토번의 군사적 압도 속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회맹관계는 당과 토번 간의 독특한 국제관계로 볼 수 있는데, 당과 토번은 706년 이후로 822년까지 총 8차례의 회맹을 하였다. 당과 토번이 이렇게 여러 차례 회맹을 가진 까닭은 아무래도 국경의 유동성이 심하고 요충지를 선점하려는 양국 간의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특히 토번의 팽창정책이 강력히 추진된 치데축첸 혹은 치송데첸 시기에 회맹이 집중되었다. 822년 장경회맹이 이루어질 때까지 당과 토번은 회맹과 전쟁 속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치송데첸 시기는 대중국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대외관계에 있어서 토번제국의 최전성기였다. 760년 대 감숙과 농우 일대를 장악한 것을 바탕으로 780년 대에는 탈라스 전투 이후 당이 주도권을 잃은 타림분지 전역을 장악하였다. 또한 고선지에게 탈취 당한 소발률을 다시금 회복하여 중앙아시아 일대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한편, 히말라야 너머의 동북 인도 일대까지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물론 이러한 치송데첸의 영토 확장에도 한계가 있었다. 중국 본토에 대한 침입에서도 위구르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중앙아시아 일대에 대한 확장도 아랍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타격은 치데축첸 시기에 토번과 연합했던 남조가 토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당과 우호관계를 맺은 사건이었다. 토번은 사천을 치기 위해 남조와 연합하였지만 당에게 패하자 남조왕을 일동왕으로 강등하고 남조에 조세를 요구하는 등 군신관계를 요구하였다. 이에 남조는 당과 다시금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치송데첸의 시대 토번의 대외관계는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안을 일시적으로 장악하는 등 중국을 압박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에 있던 타림분지와 하서회랑을 성공적으로 장악하얐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의 토번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치송데첸의 치세가 의미가 있는 것은 비단 화려한 영토확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안정되고 활발한 대외원정 속에서 토번만의 문화 중흥이 일어났다. 특히 치송데첸 시기 티베트의 불교는 그 독자적인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산타락시타와 파트마삼바바: 티베트 불교의 발전

치송데첸은 토번 역사 상 정복 군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후대 티베트 불교에서는 송첸감포, 치축데첸과 함께 조손 삼대법왕(祖孫三代法王)으로 꼽히는 왕이기도 하다. 원래 송첸감포 시기 중국과 네팔 일대에서 불교가 전파되고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진 조캉사원과 라모체 사원이 라싸에 건립되기는 하였지만 티베트 사회에서는 불교가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티베트의 토착 종교인 본교가 워낙 티베트 사회에서 깊이 뿌린데다가 본교 승려들은 귀족들과 밀접하게 결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쇄신 시킨 것이 바로 치송데첸이었다.

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치송데첸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초기에는 불교를 제대로 후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후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 불교를 후원하기 시작하였다. 종교적으로 치송데첸 시기의 불교가 본교에 대항하여 점차 세력을 넓혔다는 것은 중앙집권적인 첸포의 권력이 티베트의 지방분권적인 귀족세력을 압도했다는 의미와 같다. 치송데첸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해주고 티베트를 획일화할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을 불교에서 찾았고 사미예 사원 등의 사원을 짓고 경전을 티베트 어로 번역하는 등 불교를 공식적으로 후원하였다. 이러한 치송데첸의 지원을 받으며 티베트 불교의 사상적 초석을 놓은 사람은 네팔 출신의 산타락시타(Santaraksita)와 인도 출신의 파트마삼바바(Padmasambhava)라는 승려들이었다.

산타락시타는 네팔 출신의 고승으로 치송데첸에 의해 토번으로 초빙되어 왔다. 하지만 티베트에서 산타락시타의 불교 전도는 순조롭지 않았다. 토번의 귀족들과 본교의 승려들은 산타락시타의 추방을 위해 그를 음해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산타락시타가 건너온 이후로 티베트에서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연달아 일어났고 치송데첸까지 병에 걸렸다. 귀족들과 본교 승려들은 이를 빌미로 산타락시타가 귀신들을 노하게 했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의 추방을 요구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치송데첸 역시 이를 깨물며 산타락시타를 내쫓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산타락시타를 내쫓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불교를 티베트 사회에 뿌리내리려는 치송데첸의 의지는 꺾지 못했다. 그는 카슈미르 출신의 승려 파트마삼바바를 초청하였다. 파트마삼바바는 치송데첸의 강력한 후원을 통해 사미예 사원을 창건하는 한편, 치송데첸의 주재 하에 본교 승려들과 대대적인 토론을 벌이게 된다. 이 토론에서 파트마삼바바는 이론과 논리에서 본교 승려들을 굴복시켜서 불교의 '우월함'을 증명해낸다. 파트마삼바바의 승리에 힘입어 치송데첸은 네팔로 추방당한 산타락시타를 다시 중용하고 791년 불교를 토번제국의 국교로 공식 승인하였다. 로마사로 비유하자면 치송데첸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산타락시타와 파트마삼바바는 티베트 불교의 종조(宗祖)로 추앙되고 특히 파트마삼바바는 '구르 린포체'라고 추앙받는다. 산타락시아와 파트마삼바바가 티베트 불교사에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이들이 밀교, 즉 탄트라 불교의 승려였다는 점이다. 8~9세기 북인도에서는 마하보디 승원과 날란다 승원을 중심으로 탄트라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고, 파트마삼바바는 카슈미르 지역의 유명한 탄트라 승려였고 산타락시타는 네팔 지역의 탄트라 승려로 이름이 높았다. 이들에 의해 티베트에 유입된 탄트라 불교는 본교를 융합, 흡수하면서 티베트만의 고유한 불교를 창출하게 된다. 우리가 티베트 불교라고 하면 탄트라를 떠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치송데첸 시기 티베트 불교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일명 '돈점 논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이다. 치송데첸 이전까지 티베트에는 다양한 지역의 불교가 들어왔다. 당, 네팔 뿐만 아니라 북인도, 타림분지 일대에서도 불교가 들어왔다. 돈점 논쟁은 이러한 다양한 불교 종단이 정리되는 논쟁이라고 할 수 있고, 인도, 네팔 지역의 불교가 중국 불교의 영향력을 압도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직관을 통한 깨달음(돈오)을 표방하는 선종 불교가 크게 유행했는데, 티베트에도 마하연이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중국의 선종이 유입되게 되었고 이는 점진적인 수행을 통한 깨달음(점수)을 표방하는 인도 탄트라 불교와 마찰을 빚게 된다. 결국 돈오 측의 마하연과 점수 측의 카밀라시라 간의 이론 논쟁이 벌어졌다. 이론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카밀라시라의 점수파였고 치송데첸은 돈오파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돈오논쟁'을 계기로 티베트 불교에서 중국 불교의 영향력은 미미해지고 북인도의 탄트라 불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티베트는 불교에서도 중국의 대승불교와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8세기가 끝나가는 797년 치송데첸은 사망한다. 치송데첸의 시대는 8세기의 반세기를 차지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토번 제국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티베트 전 역사를 걸쳐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다. 티베트 역사상 가장 광활한 강역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던 당을 압도하며 토번 제국 나름의 국제질서를 형성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독자적인 선택에 따라 수용하면서 티베트의 종교와 문화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즉 치송데첸의 시기는 송첸감포 시기 티베트에 뿌려진 정체성의 씨앗이 싹으로 튼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치송데첸의 시대는 토번 제국 몰락의 신호탄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치송데첸 시대 때 후원받은 불교가 기존 티베트 사회에 깊숙이 뿌리 박힌 본교의 기반을 흔들고 본교와 대립한 사건은 토번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불교를 중심으로 한 찬보 권력과 본교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은 치송데첸이라는 구심점이 없어지면서 날선 대립을 하였다. 이러한 종교를 기반으로 한 토번정권의 분열은 결국 제국의 몰락을 가져왔다. 토번의 황혼기가 도래한 것이다.

제국의 붕괴

8세기가 끝날 무렵, 치송데첸 찬보는 사망하고 토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첸포의 즉위에 있어서 혼선이 빚어지게 되고 첸포와 귀족들의 갈등이 다시 한번 분출되었을 뿐 만 아니라, 본교와 불교 간의 종교적 갈등으로 제국은 점차 쪼개지게 된다. 결국 이러한 모순들이 분출되는 과정 속에서 토번제국의 마지막 찬보 랑다르마가 쿠데타로 인해 암살당하면서 티베트 최초의 제국은 종결된다. 이후 티베트는 수백 개의 소국들과 여러 불교 종파들로 분열된다.

이러한 분열의 양상은 비단 티베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7세기, 8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던 국가들이 9세기 동안 비슷한 양상을 띠면서 몰락해갔다. 당은 이름만 유지한 채 여러 절도사들의 번진(藩鎭)으로 분열되다가 결국 주전충에 의해 망하고 몽골초원의 위구르 제국은 카간 위를 두고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에는 키르기즈의 침략을 받아 몰락하였다. 요동의 발해도 거란의 침입으로, 한반도의 신라는 호족과 농민반란으로 몰락하였고, 토번과 당 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펼치던 남조도 몰락하여 대리국(大理國)으로 교체 되었다. 이러한 9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의 몰락은 거대한 역사적 흐름이었고 10세기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무네첸포와 치데송첸의 시대, 그리고 토번-위구르-압바스 조의 대립

치송데첸 사후, 토번의 첸포 위는 그의 아들들인 무네첸포(Mu-ne btsan-po, 木奈贊普)와 치데송첸(Khri-ide srong btsan,赤德松贊)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치송데첸 이후 토번 왕실의 계보에 다소 혼선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무네첸포의 재위와 관련된 것인데, 중국 측 기록과 일부 티베트 기록에 의하면 치송데첸의 차남인 무네첸포는 797년에 즉위한 후 1년이 안되어 모후에게 독살되었다고 기록된 반면, 일부 기록은 무네첸포가 804년까지 즉위했으며 귀족과 평민들 간의 빈부격차를 줄이는 정책을 폈다고 한다. 대체로 학자들은 무네첸포가 1년도 안되어 모후에게 독살했다는 설을 믿고 있다.

무네첸포에 이어 첸포가 된 치데송첸의 시대의 토번제국은 중앙아시아 일대와 타림분지의 패권을 두고 압바스 제국과 위구르 제국 사이에서 국제전을 치르게 된다. 치데송첸 시기 당의 세력이 반란으로 인해 국제적 주도권을 잃은 틈을 타서 하서 회랑 일대를 장악하고 타림분지를 장악한다. 하지만 이런 토번의 상승세도 불안정했다. 초원의 위구르 제국은 치송데첸 말년인 792년 당의 북정절도사를 죽이고 그 관할 지역을 점령하면서 타림분지의 북부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압바스 왕조도 타림분지 서부로의 지속적 확장을 시도하면서 타림분지에 대한 토번-압바스-위구르 3자 간의 갈등 양상이 전개되었다. 또한 남조 역시 토번의 영향력에 벗어나면서 토번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치데송첸은 첸포에 즉위하면서, 이러한 타림분지와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둔 토번-압바스-위구르의 대립양상은 더욱 심화되었다. 먼저 전쟁을 일으킨 것은 토번이었다. 801년 토번은 압바스 군대와 격돌하였고 805년~808년 경에는 타림분지의 중심지였던 쿠차에서 위구르 군대와 격돌하였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우선 쿠차를 공격한 토번군은 위구르에게 대패하였다.<구성회홀가한비문 >에 의하면 "(토번의) 사면을 모두 포위하여 일시에 박멸하였다. 시체썩는 냄새가 사람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진동했다.'고 한다. 압바스 조에 대해서는 한때 사마르칸트와 카불 일대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으나, 812년 혹은 815년에 무슬림 세력에 의해 다시 밀려났다. 물론 압바스 조의 뒤이은 카슈미르 공세에 대해서는 방어를 했으나, 압바스 조와 위구르의 계속된 공세로 토번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다소 어려워졌다.

 

'마지막 법왕' 치축데첸의 시대와 불교-본교의 대립심화

817년(혹은 815년 경) 치데송첸이 죽고 그이 셋째 아들 랄파첸(Ralpakan)이 첸포에 오르니, 치축데첸(Khri gsung ide brstan)이다.  치데송첸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는 일찍이 출가를 했고 둘째인 랑다르마와 셋째인 랄파첸에게 첸포 계승권이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랑다르마에게 왕위 계승이 유리했지만, 랄파첸이 찬보에 즉위한 이유는 랑다르마가 본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다. 치송데첸 이후 찬보가 불교를 강력히 후원하면서 토번 조정 내에서도 불교를 믿는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고, 이들은 불교에 심취한 랄파첸을 찬보로 옹립하였다.

랄파첸, 치축데첸은 조부인 치데송첸보다도 더욱 강력히 불교를 후원하고 본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펴면서 토번 제국의 '마지막 법왕'으로 인식된다. 그가 티베트 불교 역사에서 행한 중요한 일은 불경 번역에 필요한 표준언어체제를 정비했다는 일이다. 그는 불경 번역에 있어서 산스크리트 어를 표준어로 삼고, 학자들을 초빙하여 산스크리트 어와 티베트 어를 대조한 사전인 마하뷰파티(Mahavyutpatti)를 제작하였다. 이 작업으로 인해 티베트 인들은 그들 자신만의 독립적인 언어로 불교를 이해, 해석하고 불경을 서술할 수 있었고, 불교의 이해도도 높아졌다. 티베트 인들의 불교 삼장(三藏)경전이 번역된 것도 이 시기였다.

치축데첸의 불교 진흥정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승려를 우대하여 귀족의 지위보다도 높은 지위를 부여하였고 ,승려에게 막대한 토지를 하사하고 평민 7명 당 승려 1인을 부양하게 하였다. 게다가 "승려를 불손한 눈으로 쳐다볼 경우 그 눈을 도려낸다."는 엄혹한 법령도 공포하였다. 치축데첸의 이러한 과도한 불교진흥정책은 당연히 반발을 낳을 수 밖에 없었다. 억압당한 본교 승려들은 당연하거니와 승려들을 부양하고 농토까지 빼앗긴 농민, 기존의 기득권을 승려에게 침범당한 귀족들은 당연히 불만을 품었다. 그 결과 불교와 본교 간의 대립은 심화되고 결국에는 치축데첸 자신까지도 암살당하기에 이른다.

치축데첸 시기의 대외관계를 보자면, 타림분지, 하서회랑 일대를 두고 위구르,당과 대립하였다. 치죽데첸은 초기에는 당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820년부터 당에 대해서 공세정책을 펴게 된다. 하지만 토번과 당의 대립에 위구르가 개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비록 위구르는 당에 대해서 경제적 압박을 가하고 약탈을 하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꾸준히 화친관계를 맺어왔고 군사적으로도 연합하였다. 토번은 이러한 위구르의 개입에 위기를 느끼고 821년 6월 청새보를 약탈하지만 염주자사 이문열의 방어에 성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위구르에게 군사적 위협까지 받았다.   

위구르에 의해 견제받은 토번은 821년 당에 대한 공세정책을 거두고 당과 회맹관계를 맺는다. 우선 토번이 장안에 사신을 파견한 이후 당의 사신 유원정이 토번 라싸에 파견되어 토번과 회맹을 맺었는데, 그 결과 양국은 다시금 구생관계를 확인하고 전쟁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 회맹은 당 목종 장경 연간에 이루어진 회맹이라 하여 '장경 회맹'이라고 불리며, 이 결과 세워진 회맹비가 라싸 죠캉 사원 앞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토번의 초기 역사와 당과 토번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사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장경 회맹은 당과 토번 간의 8차례 회맹 중 마지막 회맹으로도 유명한데, 장경 회맹을 계기로 화친과 전쟁을 불안정하게 반복하던 토번과 당의 관계가 비로소 안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과의 관계는 장경 회맹으로 안정된 것에 비해 위구르와의 관계는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특히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지역과 페르가나 일대를 두고 그 접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는데 816년 토번은 위구르의 경계를 침범하였다. 하지만 820년 위구르 군대의 반격을 받고 페르가나 일대를 빼앗긴다. <구성회홀가한비문>에 의하면 "카를룩과 토번을 공격해 정벌하였다. 그 깃발을 찢고 목을 베었다. 도망한 것을 쫓아갔다. 서로 페르가나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페르가나는 토번의 중앙아시아 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위구르에 의해 페르가나를 빼앗기면서 토번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838년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던 치축데첸에게도 말로가 찾아왔다. 치축데첸의 지나친 숭불정책에 억압을 받고 불만을 품은 본교 파 귀족들이 치축데첸을 암살한 것이다. 그들은 술에 취해 잠든 치축데첸의 목을 꺾어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의 형이자 본교를 숭상하던 랑다르마를 찬보로 옹립하였다. 토번의 붕괴는 랑다르마의 즉위와 함께 성큼 다가왔다.

랑다르마와 제국의 붕괴

불교에 대한 지나친 후원으로 치축데첸은 암살당하고 그의 형(중국 기록에는 아우)이었던 랑다르마(Lang-Darma, 朗達瑪)가 옹립되었다. '랑다르마'는 그의 별명일 뿐 실제 이름은 다르마이다. '랑'이란 티베트 어로 소라는 뜻으로 즉 랑다르마란 '소같은 다르마'라는 뜻이다. 이러한 별명으로 보아도 티베트 인에게 랑다르마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현재까지도 티베트 인들은 랑다르마를 마라, 즉 악마의 화신으로 믿고 있다.

랑다르마가 티베트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원한의 대상이 된 까닭은 그가 토번의 마지막 첸포라서기 보다도 그가 행한 '폐불' 정책때문이었다. 본교를 숭상했고 본교 파 대신들과 승려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그가 폐불 정책을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폐불 정책은 티베트 인들이 치를 떨 정도로 무자비한 것이었는데, 당시 티베트 불교의 중심지였던 조캉사원과 사미예 사원을 폐쇠하고 조캉 사원은 외양간으로 고쳤는데 랑다르마의 별명도 여기서 유래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원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불상을 강물에 빠뜨렸으며 불교도를 강제 개종 시키거나 개종을 거부하면 학살하였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당에서도 무종 황제에 의해 '회창폐불'이 단행되면서 불교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랑다르마의 가혹한 폐불정책은 당연히 불교도들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랑다르마는 842년 독실한 불교도였던 랄룽 팔기 도르제에 의해 암살당했다. 티베트 전승에 의하면, 랄룽 팔기 도르제는 동굴에서 "랑다르마를 계속 나두게 되면 이 세계가 암흑천지가 되게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라싸에 가서 랑다르마를 활로 쏘아 죽였다. 사실상 마지막 찬보인 랑다르마가 암살 당하면서 토번의 찬보 제국은 종결이 되고 분열의 시기를 맞는다.

랑다르마에게는 두 왕비가 있었고 랑다르마가 암살될 당시에 둘째 왕비가 아들을 임신 중이었는데 랑다르마가 죽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오숭을 나았다. 그런데 랑다르마가 생존해 있을 때 자식이 없어 자신의 권력을 둘째 왕비에게 강탈당할 것을 두려워한 첫째 왕비가 그녀의 조카(혹은 거지의 아들) 윰텐을 자신의 아이라고 속이고 그를 왕자라고 주장하였다. 대신들은 첫째 왕비의 농간을 눈치챘지만 당시 첫째 왕비의 외척 가문이 권력에 정점에 서있었기 때문에 복종할 수 밖에 없었다. 랑다르마 시기의 정치 상황을 볼 때 첫째 왕비와 윰텐 측은 본교 파였고 둘째 왕비와 오숭 측은 불교 파였을 가능성이 높다.

랑다르마가 암살되자 오숭이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첸포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윰텐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오숭의 즉위에 불복하여 윰텐을 따로 왕으로 옹립하면서 토번 왕조는 점차 분열되었다. 대체로 오숭의 일파는 초기에는 야룽 계곡을 중심으로 라싸의 윰텐 측과 패권을 다투다가 서부의 아리 지역으로 건너가서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오숭과 윰텐의 왕위 쟁탈전을 계기로 티베트는 분열의 시기를 맞게 되었고 게다가 849년부터 약 20년 간 일어난 평민 폭동으로 인해 토번제국은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른다.

티베트의 사료와 전승에 의하면 평민 폭동은 독실한 불교도 대신이었던 팔케 욘텐이 본교파 신하들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여 원귀가 되면서 티베트 농민들을 선동했다고도 하고, 얄룽 계곡의 토호가 평민들을 강제로 저수지 공사에 동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결국 이 두 이야기 모두 토번의 평민 폭동이 본교-불교 갈등 등으로 인한 토번 지도층의 붕괴와 평민에 대한 토번 지도층의 과도한 착취 등이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평민들은 토번의 봉건 귀족들로 인해서 억압을 받은데다가 치축데첸과 랑다르마가 각각 불교와 본교 승려들을 우대하면서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869년 라싸 주변에서 일어난 대폭동은 결정적으로 티베트 최초의 통일제국 토번제국을 와해시켰다. 평민 반란군은 877년 토번 제국의 왕릉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송첸감포의 능을 제외한 첸포의 능들은 훼손되었다. 토번제국이 와해되면서 티베트 각지에서는 봉건 귀족들과 불교 종파의 승려들이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분립하기 시작하였다. 토번 제국의 왕족들도  각기의 세력으로 분립했는데, 한국인에게 <차마고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차마고도의 서쪽 종착점으로도 잘 알려진 구게왕국도 랑다르마의 아들 오숭의 후손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그럼 티베트 최초의 통일제국이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했던 토번 제국이 붕괴된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국가가 몰락하는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얽혀다. 토번 역시 건국 이후부터 자체적 모순들이 내재되어 있었고 그러한 모순들이 축적되다가 곪아터지면서 몰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토번제국은 시작부터가 부족 연맹체제였다. 비록 송첸감포 이후 티베트 지역의 여러 부족을 병합하면서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부족들의 군장들은 제국의 귀족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바탕으로 첸포의 중앙집권화에 반발하면서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첸포들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으나, 결과는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랑다르마가 암살되어 제국의 중추가 무너지자 제국으로 묶인 귀족들은 각자의 세력으로 분립한 것이다.

이러한 제국의 분열은 종교에 의해 가열되었다. 토번 제국 이전의 부족들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본교를 믿고 있었으나 제국이 성립되면서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들어와서 본교의 위치를 위협하였다. 그러면서 본-불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이러한 종교 갈등은 첸포와 귀족, 혹은 귀족들 간의 정치투쟁과 얽히면서 제국의 분열에 시너지 효과를 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한 것은 제국의 통합을 위해 들여온 불교가 제국이 붕괴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티베트 자체의 독자적인 색체를 띠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티베트의 지형 자체가 제국의 통합을 가로막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위의 두 가지 원인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 지리적 요건은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티베트의 지형 역시 티베트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티베트는 기본적으로 3~4000m의 험준한 고원, 산악지대라서 사람들은 분산되어 제한된 곳에 거주할 수 밖에 없다. 중앙집권적인 국가를 구성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은 중앙의 명령이 지방에 잘 하달될 수 있는 교통, 통신이 잘 발달되어야 하는데, 티베트의 경우, 20세기 초까지도 지역 간의 왕래가 불편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티베트의 지리적 요인이 제국의 통합을 저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역대 군주

기술

철을 달구지 않고 두들겨 갑옷을 제작하는 냉단법이란 기술을 최초로 사용한 국가가 바로 7~8세기의 토번이였다. 일반적으로 금속을 두들겨서 무기나 갑옷을 만드는 단조의 경우 철을 뜨겁게 달구어 모양을 만들기 쉽게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것은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더 소모하는 경향이 있으며 경도가 높아지는 대신 잘 부러지는 특성을 지니게 된다. 실제로 유럽에서 냉단법으로 플레이트 메일 같은 갑옷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경이다. 냉단법의 장점은 빠른 시간 내에 뛰어난 품질의 갑주를 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군대 전체의 갑주 보급률을 빠른 속도로 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일반 병사에게 보다 강력한 갑주를 보다 빠르게 보급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전략적 우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군사력

그들은 막강한 제국이었으며 유일하게 당(唐) 제국 수도를 점령한적이 있는 이민족이었다.  실상 안사의 난 이후 위구르 제국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상 토번제국의 유아독존(有我獨存)시기나 다름 없었다.

당시 토번의 군사들 무장에 대해선 아래의 기록에서 알수 있다.

『통전(通典) 卷190』 토번(吐蕃) 병사(兵士)와 군마(軍馬)는 모두 훌륭한 솜씨로 제작된 갑옷을 입는다. 갑옷은 눈만 빼고는 온몸을 감싸며 아무리  강한 활과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  싸울때는 말에서 내려 정렬해 싸우며 앞의 병사가 죽으면 뒤의 병사가 그 자리를 메운다.  그들은 끝까지 싸우며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창은 우리 중국(당제국)것보다 길고 창 끝은 매우 날카로우며 활쏘는 솜씨는 신통치 않다.  전투를 하지 않을때도 병사들을 칼을 차고 다닌다.

 

『신당서 권216(新唐書 卷216)』 그들은 활과 칼, 방패와 창, 갑옷과 투구를 갖고 있다....(생략)...인간과 말은 정교하게 가공된 쇠로 만든 갑옷으로 덮어져 있다.


방진

중세시대라 고대와 많이 다르지만 아마도 고대 토번인들도 창에 철을 돌돌 감아 잘 부러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또한 창 길이 역시 기록을 볼때 저것보다 더 길었으리라 본다.(당나라 창 길이가 1.5~2.5m 정도라는걸 볼때 아마도  토번의 창 길이는 3~5m정도 되었으리라 본다.)

군법(軍法)은 엄하여 매 전투에서 맨 앞열이 모두 죽임을 당한뒤 뒷열이 진격하며 앞렬과 뒷렬의 의미는 방진(方陣)을 의미한다. 그리고 엄한 군법은 이러한 방진을 짯을때 물러서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1]

그들은 4~5m짜리 창과 방패로 무장하였으며 이러한 방진은 큰 효과를 가지고 왔다.  마케도니아 외에도 창 길이는 이보다 짦지만 그리스 폴리스국가들도 이러한 방진을 사용했으며 방진이 흩어지지 않는 이상  그들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토번의 방진이 다른 국가들과 다른점이 있다면 토번 특유의  반정주(半定住) 반유목(半遊牧)의 특성에서 기인한 이동시 기마병으로 전환한다는것. 그리고 취사병이 필요없도록[단기간 전쟁에서 지만] 휴대식 "짠파"와 육포를 각자 지니고 다년다는 점.  이로서 토번의 창보병은 중무장보병대의 약점인 기동력을  상당부분 커버할수 있었다. 이는 징기즈칸의 몽골에서도 볼수 있는 특성이다. 보병은 보병이되 승마보병(乘馬步兵)인 것이다.

노예

토번은 인구중 70%가 노예로 구성되어 있다. 토번제국의 국유노예- 방금락(邦金洛)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 군법은 엄하여 매 전투에서 맨 앞열이 모두 죽임을 당한뒤 뒷열이 진격하며 중상을 입은자와 악질에 걸린자는 죽임을 당한다... (생략)... 전투에 임하여 패배한 자는 공개적으로 여우의 꼬리를 머리에 올려서 비겁한 자의 본보기로 삼아 모욕을 당하게해서 대중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해 스스로 자결하거나 전쟁에 패해한 것에 모욕을 당하여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양손모두 땅바닥을 집고  개처럼 짖으며 몸을 구부렸다 폈다하기를 반복했다

전사위주의 민족들이 다들 그렇듯 이들도 명예를 목숨처럼 여김을 알수 있다. 패배와 후퇴를 하느니 장렬히 전사한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라이(Thermopylae)전투[영화 300]에서 처럼 위에 나온 창보병대의 방진은  이러한 정신이 뒷바침 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자연스레 강자숭배로 이어졌다.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 "혈기왕성한 건장함을 중시하여 늙으면 천시하였고 어머니는 아들을 섬겼으며 아들은 아버지의 뒤에 걸었으며 출입시엔 어린자는  앞에서고 늙은자는 그 뒤에 걸었다."

의사 古 gYu-thog 傳 Derge판 목판본 141 - 토토리 첸포의 시대에 두명의 의사가 인도에서 토번을 방문했다. 그들은 병자가 집 밖으로 실려나가는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들은 병자를 쫓아내는것이 티베트의 관습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티베트인은 "만일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그들을 문 밖으로 쫓아내지 않지만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은 부모님을 쫓아낸다." 라고 답해주었다.

어엿한 집안의 가장이 나이들고 키우던 자식이 장성하면 무시받는게 운명이며 심지어 병들면 버려지기 까지 하는게 당연시 되는 사회. 어머니가 아들을 지아비로 섬기는건 조선시대 유교에도 나오지만 그 강도는 토번쪽이 더 고압적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병폐에 대한 자각이 아예 없던건 아니었다.

Ma-ni bka'-bum, Dreg판, 목판본 2권 -"부모의 자애로움에 대해 악하게 보답하지 말아야한다. 토번 33대 왕, 송첸캄포. 16조 도덕적 규칙

물론 이 법령은 중앙티베트에서 실행되었지만 동부와 서부에서는 부모를 버리는 일들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악습은 불교가 전역에 퍼지고서야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다른 족속들에 대한 오만함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부 외지사람들은 남쪽오랑캐라는 몬(mon),   북쪽 사람들은 날것이나 먹는 북쪽 오랑캐라하여 호르(Hor:이말은 이후  위구르를 칭할때 사용된다.)라 칭하며 자신들과 별도로 취급하였다.

토번은 당시 실크로드의 혜택을 받는 나라들에 둘러 싸여 그 강력한 군사력으로 당나라든, 압바스든, 무역에서 손해 볼 위치가 아니었고 귀족들은 상당한 축제를 할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인 방금락(邦金洛)계층은 하루 두끼가 끝이었다.

토번은 국유노예 방금락들이 병역에 종사할수 있는것과 비교하면 크나큰 차이다. 다만 토번의 방금락도 토번내의 방금락과 전쟁 포로로 잡혀온 방금락 사이의 계급차가 존재했다. 포로 방금락은 팔과 머리에 노예를 의미하는 문신을 새기고 병역에 종사할수가 없었다.

군사제도

크게 보면 천하병마도원수(天下兵馬都元帥)인 태상룬(國相)의 지휘하에 보통 있었고 나라는 크게 6개로 나누어 6루첸으로 두었다.  이러한 군사개편은 주로 7c 가르통첸(祿東贊)이 주도하여 만들었다.[2] 7c에 그는 전국을 6개로  나누었고 자신은 그 6부의 수장으로 올랐다. 6개의 부는 행정과 더불어 군사에 적용되었고[3] 그는 다시 5개의 부를 따로 만들어 2개의 부는 "노역자의 집단"으로 만들었고 나머지 3부는 "전사 집단"으로서 국경을 수비 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전사 3부를 61개의 천명 단위의 조직으로 만들어 61000명의 정예전사들을 따로 선별해냈다.

티베트문서에 의하면 전사는 "최고의 국민"으로 칭송받으며 대접도 화려했다.  그들은 법에 의해 징발된 노역자와는 차별화 되었고 이러한 전사3부는 토번이 팽창하면서 20만 정도, 즉 200개의 1000단위 조직으로  나뉜듯 하다. 이것은 토번의 국력상승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들은 "군역에 종사하는 최고의 국민"이든 "법에 징발된 노역자"이든 13세 부터 군에 종사하여 40~50세가 되어서야 끝난다. 그리고 은퇴한 노병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 아닌 자식들에게 무시받고 버림받는 쓸쓸한 최후였다. 그럼에도 이런 민군정일치의 군사행정은 그들의 나라를  7~9c, 특히 8c에 막강한 제국으로서 군림할수 있게 하였다.

앞서 토번제국의 특성을 반정주(半定住) 반유목(半遊牧)이라 했는데 이는 기마술 외에도 축성기술을 보유했음을 뜻한다. 이는 미란(米蘭)요새가 증명해주는데 8c에 티벳이 점거한 미란에 요새는 높이가 11m~13m일정도로 높았고 그 성벽 위에  또 2m짜리 성벽이 있었다.[4]

요새의 수비는 보통 3시간씩 8교대를 하였으며 적군대가 올 곳에는 미리 방책이나 나무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를 만들어두어  수성에 유리하도록 만들었다. 또 각 방책과 나무말뚝에는 소규모의 궁수부대를 배치하여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에게 피해를  입히도록 만들었다.[5] 토번의 수성전은 쇠날요새전투나 여러 요새전투 에서 이미 보여준 바이다.

봉화

토번군의 신호는 주로 봉화를 통해 알려졌다.  그들은 각 요새 근처와 요충지에 봉화를 설치하였고 소봉화의 경우 6~12명이 근무하였으며 대규모 봉화의 경우 수백명이 지켰다.  그들은 봉화 아래에 막사를 치고 근무했는데 봉화대위에는 봉화받침대 3개가 솟아있고 바침대에서 그 아래 막사까지 도화선이 이어져  있어 적들이 급습해도 막사에서 도화선에 불만 붙이면 바로 적들의 침입을 알릴수 있었다.  소봉화의 경우 3개의 봉화가 있었으며 2개에서 연기가 오르면 경계 3개는 적이 나타났다. 1개는 경보해제를 알렸다.  봉화에는 약 3~4주간의 식량이 비축되있었다.[6]

공성무기

공성무기로는 중국의 무기 영향을 많이 받은것으로 보여지는데 아마도 그들은 충차투석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때로는 투석기에 석회가루와 비소를 천으로 싸서 얇은 토기속에 체워 넣어 유독 가스를 내뿜게 만드는 발연탄을 넣어 쏘기도 하였다.  또한 토번군은 창에 가연성 물질을 바르고 있다고 적의 병사들이 돌격해오면 불을 붙여 불타는 창을 적진에 던져 적진을 무너트린뒤  진격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술은 적의 진영을 무너트린 다음 방진으로서 적진을 공격해버렸기에 효과적이었던것으로  보여진다.

갑옷

이러한 강점외에 빼먹어선 안될게 있으니 그것은 바로 갑옷이다.

위에 잠깐 나온 통전을 다시 보자.

『통전(通典) 卷190  -토번의 갑옷을 가리켜 "갑옷은 눈만 빼고는 온몸을 감싸며 아무리 강한 활과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

다른 기록에는  "토번의 병사들은 모두 갑옷을 입는다." 라고 하였다. 두 기록을 합하면 갑옷의 성능, 보급률 모두 상당히 좋았음을 알수 있다.

티베트는 냉단법(冷鍛法)을 최초로 개발했다고 나온다. 정확한 개발시기는 모르겠지만 토번 문헌에서는 지굼첸포(志共布,Gri-gung btsan-po)때 이러한 발달이 있었다고 한다.[7] 물론 그것은 전설상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그러한 갑옷이 나오는것은 빨리 잡으면 남리루첸 늦게 잡으면 8c로 볼 수 있을것이다. 티베트의 지리적 위치가 중원과 사산왕조의 철기술을 모두 전해받을수 있는 위치이며 그 이점을 충분히 살렸으리라 보고 있다. 이 증거로 토번제국의 의술만 봐도 서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중국 의술의 혼합체인것을 들고 있다.

파일:토번갑옷.jpg
토번의 갑옷
파일:토번갑옷투구.jpg
토번의 갑옷과 투구

토번(吐蕃)의 갑옷 8~9c 토번(吐蕃)이 점거했던 미란요새에서 출토된 갑옷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냉단법(冷鍛法)을 사용해 만들어진 토번의 갑옷은 단단하면서도 잘 안부러졌고 생산속도가 빨랐다.   토번(吐蕃)의 갑옷과 투구 전형적인 티베트(Tibet) 갑옷으로 티베트 갑옷의 형태는 5~6c로 시작하여 특별한 변화없이 오랜 세월 유지되었다.  러멜러(lamellar)형식이며 이러한 티베트 러멜러(lamellar)갑옷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것이 몽골의 러멜러(lamellar) 갑옷이었다.  그만큼 티베트 갑옷은 성능이 좋았으며 그들에 제철기술과 갑옷제작 기술은 여러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냉단법은 철을 달구지 않고 두드려 만드는 것이고 소입(燒入:달금질로 불에 달군 철을 급격히 냉각 시키는것을 말한다. 철을 다루던  보통적인 방법이다. 단단하지만 잘 부러진다.)의 기술과 달리 제작시간이 보다 짧고 부러지는 단점이 보완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13c정도부터 냉단법을 사용했는데 냉단법은 플레이트 아머를 만들때 유용.) 이때문에 성능좋은 갑옷의 보급률이 빠르고 그것은 곳 군사력 증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토번의 남부와 숭파땅은 철의 산지로 청해지방의 강족들은 철을 잘 다루었다. 현 티베트에는 10억톤의 철광석이 나오고 있다. [8]

  1.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가 이긴것은 그리스 방진(方陣)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 크다.
  2. 『구당서 토번전(舊唐書 吐蕃傳)』
  3. 이는 티벳이 민군정일치(民軍政一治)이기  때문이다.
  4. 『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5. 『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p84』
  6. 『실크로드 이야기 수잔 휫필드(Susan Whitfield)저 p84』
  7. 『dPa'o gTsug- lag phreng-ba 연대기, Lhodrag판, 목판본,1545~1565』
  8. Les tribus anciennes des marches sino-Tibetaines, Melanges publ. par l'lnstitut des Hautes Etudes chinoises, XV, Paris.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