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설정본 (16-09-30; Document name: The Rhine Military Campaign, 라인 강 전역) 
1989년 1월 1일 새해에 연합국은 무자비한 무력침략을 한 소련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의 유럽지역 총 사령부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항공력을 동원해 독일지역을 폭격하는 작전을 제정했다. 미국은 즉시 CVN-68 USS니미츠 함과 CVN-69 US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함을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구축하여 북해에 파견했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도 HMS 인빈시블 함과 HMS 아크로열 함을 북해에 파견하여 다각도로 항공 전력을 확보하였다. 1989년 1월 16일 해가 뜨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영국 공군사령관인 데이비드 밀러 중장의 명령이 런던의 공군기지에 하달되어 영국과 미국의 항공기가 런던에서 이륙하여 독일 북부의 대도시인 함부르크를 향해 이동했다. 런던에 배치되었던 200대 가까이 되던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모두 출항하자, 에드워드 허디슨 소장은 항공모함의 함재기 이륙을 명령했다. 프랑스와 미군의 전투기는 영국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모두 출격했을 때야 비로서 이륙을 시작했다. 1500대가 넘는 전투기와 폭격기, 전폭기들이 독일 상공으로 향했고, 아침 9시 30분쯤 함부르크를 지키던 12기갑사단이 제일 처음 적들을 확인했다. 당시 레이더상으로 수 많은 표시가 들어와있었다. 독일 북부 사령관으로 부임받은 폰 하인트 준장은 곧바로 미그-29 전투기 80기를 출격시키고, 소련군 최고사령부(STAVKA)에 증원을 요청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STAVKA의 참모부는 독일과 폴란드의 전군에게 출격준비를 명하고, 대규모 공군을 출격시켰다. 모스크바에서 전투기가 출격할 때쯤, 연합국의 혼성부대는 대규모 폭격을 실시했다. 함부르크는 북해에서 출격한 항공모함의 함재기에 쑥대밭이 되었다. 제 12 기갑사단의 전차들은 전투기의 공대지미사일에 절반이상이 피격되어 거리에서 불타거나 뒤집혀있었다. 남부로 약 450km 거리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상공에 프랑스 소속의 전투기가 나타났다. 프랑크부르크에는 제 5 보병연대가 참호를 파고 방공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상공의 프랑스 전투기들은 대공포화에 다수가 도시외곽으로 떨어져나갔다. 이런 소련군의 저항에도 프랑스군은 도시외곽 방공망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뒤따라오던 미 폭격기는 도시를 방어하던 제 5 보병연대를 완전히 전멸시켰다. 동부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와 전투기가 베를린 남부의 라이프치히를 지키는 주요 군을 괴멸시켰다. 그에 따른 대가도 컸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제 1 베를린 요새라 명명되어 로닌 소장이 거느리며, 방어임무를 띄고 있었다. 독일에 주둔한 군사들 중 절반이 그곳에 배치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연합군 사령부는 그곳에 2차 폭격을 준비했다. 1차폭격이 끝난 뒤, 데이비드 에반 소장의 미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함재기가 다시 라이프치히로 출격했다. 그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출격했지만, 그들은 곧 그들이 맞이할 전투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오후 1시쯤, STAVKA의 추가 병력이 라이프치히 상공에서 방공임무를 띄고 있었다. STAVKA의 스미르노프 소령은 그들이 다시 라이프치히로 올 것이라 확신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2시까지 주변을 정찰했다. 2시쯤 미국의 함재기들이 라이프치히 외곽에서 미그 전투기를 식별했고, 공중전투가 펼쳐졌다. 물론 지상에서는 소련군의 대공포가 불을 뿜었고, 절대적으로 소련군이 유리했다. 항모에서는 전투가 시작한지 10분이 돼서야 알아챘다. 데이비드 에반 소장은 퇴각을 명령했지만, 이미 미그 전투기와 소련군의 대공망에 겹겹으로 싸여 뚫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 결국 미국의 함재기는 1기 조차 돌아오지 못했다. 제공권이 붉은 군대에 다시 넘어가자, 연합군 측은 3차 공습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번의 목표는 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닌 시간을 끄는 것이다.

이미 11시쯤, 서독에게 모든 지휘권과 주권을 상실한 네덜란드 군과 서독의 군대 8개 사단이 서쪽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1시간 즈음 후, 동쪽에서도 7개의 사단과 모든 권리를 상실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이 양동작전을 펼쳤다. 당시 폴란드는 대규모 기갑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합류하여, 독일로 진격한다면, 연합군의 손실은 막대해지고, 작전기간도 늘어날 것임이 분명했다. 이에, 체코슬로바키아의 3개의 사단이 폴란드 남부의 세르게이라고 명명된 요새에 양동작전을 펼쳐, 시간을 끌었다. 하인츠 대장이 이끄는 제3,10,4,5사단은 장갑사단을 이용하여 빠른 돌파를 계획했다. 진격을 시작한지, 1시간 30분쯤, 장갑사단과 기계화 보병사단은 서독의 수도였던 본 외곽에 도착하여 정렬했다. 본에는 카를 중령이 제 4 보병여단을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다. 하인츠 장군은 전차대대와 기계화 대대를 이용해 본을 포위한 후, 뒤늦게 따라오는 보병사단과 같이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1시간도 되지 않아 포위망을 구축했다. 이 사실을 빠르게 알아낸 카를은 군사들을 집결하여 돌파를 시도했다. 남부에는 주요거점인 프랑크푸르트가 있었다. 카를은 그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카를은 하인츠가 공격 명령을 하달하기 전에 남부의 도로를 탈환하여 도시를 버리고 빠르게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하인츠는 그 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쫒아가 완전히 소멸하길 바랬으나, 북부의 대도시들을 점령하기 위해 두 갈래로 나눠져야 했다. 하인츠는 북부의 도르트문트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그 동안 카를은 후퇴를 위한 양동작전을 시작했다. 제 3 보병여단을 룩셈부르크로 이동시켜 역공을 했다. 비록 가망없는 자살작전이었지만, 이 작전으로 프랑크푸르트의 요새를 재건할 시간을 벌었다. 하인츠는 룩셈부르크는 프랑스에게 맡기고, 북부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거기서 300km 북부의 브레멘에서는 서독군이 베저강을 도하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함부르크를 포기하고, 베를린을 고수 하기위해서, 군사들을 베를린 보호지역으로 재배치하고, 폴란드의 전차군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폴란드도, 갑작스러운 남부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보며 포위를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일부 대대밖에 파견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남부에서는 겐트 폰 슈테인 중장 예하 사단들은 베를린 요새에 준하는 외곽방어선인 예나지역을 격파했다. 두 개의 기갑사단의 힘은 2차 세계대전의 바로바로사의 초기 상황과도 같았다. 소련군의 독일 주둔, 기갑부대는 라이프치히 방어선으로 모두 물러난 상태였기에 앞으로의 전투가 문제였다. 하지만, 외곽 방어선이 붕괴되며, 남부지역은 고립되어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작전 5일만에 카를 사령관은 연합국에 항복했다. 카를이 항복하기 2일전에는 함부르크를 제 1, 9사단이 탈환했다. 이 또한, 소련군이 버린 도시기에 무혈입성했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군이 육로로 지원을 했고, 연합국은 2차례의 폭격을 베를린에 집중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베를린 방어선을 1월 23일까지, 라이프치히-마그데부르크-노이루핀로 확장하여 유지했다. 곧 이 곳은 죽음의 벽이 되었다.

 2차 설정본 (17-11-15; Document name: Operation Vigrid, 비그리드 작전) 
비그리드 작전(독일어: Unternehmen Wigrid, 영어: Operation Vigrid) 또는, 지도자 지령 3호(영어: Leader's 3rd Order)는 도이치 정부가 독일 본토를 수복하고 사회주의 세력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 작전으로 신화에서 마지막으로 대전쟁의 서막이라는 뜻으로 노르드 신화에서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 들판의 이름을 따왔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동독서독의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면서 동유럽에 빠른 공산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큰 위협을 느꼈다. 또한, 프랑스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는 공산권 국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면서 안보의 위기가 발생했다. 그들은 독일의 지리적 중요함을 강조했으며, 그것의 회복을 회의에서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1987년 1월 3일, 독일 국가 첩보 기관(NIA)는 소련에서 동독으로 전달되는 기밀문서를 가로채는 것에 성공했다. 그들이 가로챈 문서는 0급 군사 문서로서 소련이 계획하던 ‘카토비세 공세’의 작전 안이었다. 그것은 동독과 소련의 군대체코슬로바키아로의 진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는 독일 내부에서 최고 기밀 사항으로 붙여졌고, 정보부 장관이자, 국방부 장관토비아스의 발표에 언뜻 언급되었다. 그는 이 자료를 살펴보고 기밀로 치부한 다음 한 연설에서 나토의 안보적 위협과 함께 동유럽의 도미노 현상에 대응해야 함을 독일의 통일로 설명했다. 특히, 그는 체코와 같은 독일과 인접한 반공 국가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행동이 진행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설로 나토의 안트베르펜 회담이 개최가 확정되었다. 독일은 그 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군사적인 국토 회복 방안을 모색했다. 독일의 지도자인 하이덴베르크 1세는 왕권이 강화된 직후 지도자 지령 1호를 발령하여,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에 작전을 수립할 것을 명령했다. 전술부에서는 크게 두 가지 안이 채택되어 상위 기관으로 올라갔다. 그 중 하나는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이었고, 또 다른 안은 하인츠 클라인의 안이었다. 게브하르트 겐트너의 안은 북부의 평야를 통과하여 베를린을 주요 목표로 하여 기동하여 적에게 정신적인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었다면, 하인츠 클라인의 안은 두 개의 방면에서 공격을 감행하여서 적에게 양면 전쟁을 강요하게하면서 베를린에 중심으로 주변부를 우선적으로 공격하여 주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와 토비아스는 후자를 채택했고, 지도자 지령 2호를 발령하여 국내의 군 장비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준비가 끝나가자, 그쯤이 1987년 6월 15일, 안트베르펜 회담이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을 중심으로 개최되었으며, 서독은 이 회의에서 비밀스럽게 하인츠 클라인의 작전을 소개했다. 소련의 공세에 초조하던 미국은 이를 승인했고, 지원을 약속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더 나아가 항공모함 전대의 지원과 대규모 항공지원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는 자국의 안보문제라는 것을 역설하며, 육군 지원을 부탁했다. 이는 덴마크에도 요청했다. 대부분은 내부 공산화가 시작되었다는 위협감과 소련의 추가 군사행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대부분의 요청이 승인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오직 8개의 병력만이 투입되는 것이 결정되었고, 이는 프랑스가 독일을 믿지 못한다는 이유에서 이었다. 대신, 영국과 미국이 각각 2개씩의 항공모함 전대 지원이 확정되었다. 또한, 프랑스와 영국의 공군이 작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전보를 받았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전차 지원을 약속받았다. 1987년 11월 동안, 미국에게 M-1 에이브람스 전차 4,000대를 지원받았고, M-16 소총 80,000필을 지원받았다. 또한 다량의 석유 또한 지원받았다. 프랑스는 11월 20일에 도이치 정부에 8만 여명의 병사들만 지원함을 정식적으로 통보했고, 영국은 12월까지 HMS 인빈시블을 중심으로 구성된 R-6 해상 타격대HMS 아크로열을 중심으로 구성된 R-7 해상 타격대북해 함대에 배치했으며, 미국도 1월 중에 2개의 항모 전대가 도착할 것임을 알렸다. 이렇게 독일의 전력이 강화되는 기간 동안, 소련은 일본이 일으킨 도발에 대응하면서 동맹국을 지키기 위해 아시아 전구(1988)로 군대를 계속해서 파견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소련은 동독을 지원하면서 ‘카토비세 공세’를 진행할 폴란드 주둔군의 일부를 아시아로 이전 배치했으며, 동독 군도 일부 차출하여 아시아로 파견 보내며 전력이 약화되고 분산되었다. 그럼에도 서부방벽(1988)이 독일 남부에서부터 룩셈부르크까지 국경을 따라 대부분 건설된 상태였으며, 에센뒤셀도르프 일대에도 서부 방벽 공사가 완료되어갔다. 또한, 동독의 당시 병력은 총 104만 명이었다. 독일의 NIA는 공산군의 규모가 축소됨을 알아차리고 1988년 1월 중에 작전을 시행할 것을 확정했다. 그 기점은 미국의 항모 전대의 북해 배치일로 정해졌다. 지도자는 작전의 구체화를 위해 지도자 지령 3호를 발령하여 하인츠 클라인의 안을 거의 공식적으로 ‘비그리드 작전’으로 명명했다. 또한, 정규군을 동부 집단군(비그리드)서부 집단군(비그리드)으로 나누었다. 서부 집단군의 지휘관으로 하인츠를 배정했고, 기동전의 주된 역할이 수행될 예정이었다. 그 만큼 많은 88만의 병력이 배치되었고, 동부 집단군은 지휘관으로 겐트너를 배정했고, 동부 전선의 소모-전지연-전을 담당했다. 80만의 병력이 배치되었으며 대부분은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군이 국경에 배치되자, 항공작전을 시행할 일자를 정해야했다. 하이덴베르크 1세는 긴급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독일 자체 항공력을 공개하지 않고, 동맹의 항공력만을 이용하여 본국의 직접적인 피해를 줄이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항공 작전이 작전에 포함됨이 확정되면서, 작전 자체가 조금씩 변형되었다. 그들은 폭격해야 할 곳을 정해야했고, 3차례의 회의를 통해 8개의 주요 지역을 결정하였다. 그 중 여럿은 서부 집단군이 처음으로 돌파해야하는 도르트문트부터 까지에 이르는 도시 장벽(1988)에 위치한 6개의 대도시이며, 또 다른 곳은 적의 주력이 있는 라이프치히 방어선(1988) 일대, 또한, 베를린으로 향하는 군이 지나가는 올덴베르크함부르크도 폭격 대상에 포함되었다. 그 다음 회의에서는 공군 대장 에리히 폰 라이닝겐에 건의로 프랑크푸르트뷔르츠부르크도 폭격대상에 포함되었다. 이 사안은 1987년 12월 15일에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군사 고위급 장성 회의에서 각 공군에게 목표가 배정되었다. 프랑스는 본국과 가까운 독일 남부의 프랑크푸르트 암마인과 뷔르츠부르크를 담당하게 되었고, 영국도 본국과 가까운 도시장벽을 폭격하기로 했다. 미국은 에드워드 메튜 제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라이프치히와 독일 북부의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를 맡게 되었다. 2일 뒤, 미 정보국에 의해 라이프치히가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올덴베르크와 함부르크는 영국에게 모조리 책임이 넘어갔다. 프랑스 군은 뷔르츠부르크의 폭격이 너무 멀어 공중 작전의 효율이 떨어짐을 독일에게 제시했고, 22일부터 뮌헨 공군 비행장으로 프랑스 공군의 이전 배치를 허락했다. 12월 말 쯤에 미국 해군은 각각 USS 니미츠USS 아이젠하워를 중심으로 구성된 제68기습전단제69기습전단을 구성하여 북대서양을 거쳐서 북해로 파견했다. 독일 공군의 제의로 공군력이 부족함이 작전에 큰 공백이 될 수 있음이 시사되자, 미국이 파견을 결정해주었다. 이들이 작전 위치에 도착하면 그 즉시 독일 군부에 의해 작전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그것은 1월 초일 것이며, 다수의 다국적 공군의 도움에 힘입어, 계획의 작성자인 하인츠는 승전을 확신했다. 1988년 1월 5일 21시, 미국 2개의 기습전단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자 독일 제일 전략 전술부(TS)는 작전 일자를 1월 6일로 결정짓고, 새벽 7시부터 총공세를 펼치기로 모든 동맹에 알렸고, 밤 동안 모든 독일 병사들이 작전 위치에 배치되었고, 북해의 항공모함 4기를 지키기 위해, 북해 정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 밤 동안 동독의 초계기가 함부르크에서 북해 정찰을 시행했고, 가까스로 이를 저지하여 공해 상에서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길고 길었던 밤이 지나자, 작전이 시행되었다. ‘지즈 공세(Ziz Offensive)’로 후일에 명명된 지역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차 공세동안 1,100대의 전투기가 독일 상공에서 폭격을 했으며, 영국의 R-7 해상 타격대는 60대의 전투기를 올덴베르크 일대와 브레멘 서부 방어선을 완전히 무력화 시켰고, 그 과정에서 소련 제 12군의 군 사령부가 무너지며, 고위급 인사들이 사망하고, 지휘체계가 무너졌다. 또한 나머지 영국 공군은 600대의 공중 병력을 투입하여 도시방벽의 도시인 에센과 뒤스부르크의 외곽지를 폭격했고, 후방의 아우토반을 제외한 도로를 파괴하고, 주둔지를 붕괴시켰다. 이 공격으로 주둔지에 있던 제 8군의 고위 장교와 상당수의 병력을 붕괴시켰다. 그 동안 프랑스는 240대의 군용기를 통해 뷔르츠부르크를 폭격하여 앞선 군과 같이 지휘체계와 보급체계를 무너뜨려 제 2군의 붕괴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대신 미국은 더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전투를 맞이했다. 160대의 전투기와 10대의 전략폭격기로 라이프치히 방어선을 폭격을 맡은 이들은 동독의 공중 전투 부대와 격돌했고, 공중전동안 8기의 전략폭격기를 잃고, 10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지상 공중 방어 체계로 접근 자체가 위험해졌다. 폭격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미국은 2차 폭격을 제의했다. 미국의 제안을 승인한 다국적군 최고 사령부(1988)다국적군(1988)의 공중 전력의 절반을 라이프치히로 투입시키며, 푸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에 또 다른 폭격을 시행되었다. 이들 폭격은 앞선 폭격보다 준비된 군과의 대면이기 때문에 효율이 낮았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라이프치히에서만 공중전이 다시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공중전에서 동독의 제 8군은 라이프치히 방어선에 건설된 방공호로 모두 숨어들어서 지상 피해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2차 폭격 공세의 취지와 어긋나게 공중전이 펼쳐졌다. 450대의 동독 국적의 전투기 출격하여 그들과 교전을 벌였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다국적군이 우월했으나, 이는 동독의 지상군의 엄호가 없다는 가정이었다. 실제로는 둘 다 모두 고전을 면치못했다. 약 30분도 채 안되는 동안, 425대의 동독 전투기가 격추되었고, 다국적군도 318대의 전투기를 잃고, 92대의 전투기가 피해를 입었다. 기지로 무사히 돌아온 다국적 군의 전투기는 총 140대였고, 동독 전투기는 3대에 불과했다. 이 공중전에서 승리한 다국적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차지하기 위해 3차 폭격도 예정했다. 동독은 제공권을 빼앗기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즉시 동독 군부는 소련에 공중 지원을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허가했다. 폴란드러시아 일대에서 약 2,000대의 전투기를 모아 파견했고, 이 시간은 약 3시간 뒤였다. 다국적군은 2차 공세가 끝나자 직접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아침 8시 8분 모든 독일 군은 동독의 국경을 넘어 진격을 시작했다. 약 144만 명의 대병력이 일제히 움직였다. ‘지즈 공세’간에 붕괴된 군을 제외하면 72만 명의 병력으로 이들을 막아야했다. 동독의 최고 군사 사령관이었던 슈나이더 폰 바덴부르크은 전황을 파악하는데 열중하라고 명령했다. 동독은 당시 전황파악부터가 우선이었다. 동독의 전황판단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하루가 지나서 서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뒤에서야 판단이 가능했다. 하인츠는 서부 전선의 중요성을 역설했고, 또한, 독일이 덴마크바이에른과 이어지는 회랑을 개척하는 것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강조해왔다. 또한, 2개의 군을 북부로 진격하여 덴마크에 이르게 준비했다. 덴마크 또한, 진격 준비를 했다. 덴마크까지 진격할 제 1군제 9군은 2차 공세 동안 확보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동을 실시했다. 특히 기갑부대는 12시간 동안, 아무런 피해 없이 브레멘까지 진격해 나아갔다. 보병부대는 뒤이어 오면서 붕괴된 동독 제 12군의 패잔병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이들 대다수가 저항없이 투항했기 때문에 피해가 크지 않았다. 덴마크 군은 동독 제 13군과 교전을 하여 을 점령해내었다. 제 13군도 공세에 큰 피해를 입어서 덴마크 군에게 쉽게 무너졌고, 이 또한, 대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13군의 병력은 동독 제 103사단에 흡수되었다. 이 2만 여명은 함부르크에서 항전을 준비했으나, 곧 큰 피해를 입고 파괴된다. 작전이 시작된 지 20시, 함부르크가 서독에 의해 함부르크가 포위되었고, 1시간동안 항공 폭격이 시작되었다. 103사단은 도심 속에서 항전을 이었다. 약 4시간동안 덴마크 보병들과 서독의 기갑부대가 시가지로 진입했고, 그들은 의미없는 항전 이후, 모조리 사살되었다. 그 시간에도 덴마크의 기계화 보병사단은 슈베린로스토크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작전이 시작한지 32시간이 지나 덴마크 군과 합류했으며, 로스토크까지 210마일을 진격했다. 제 2군은 북부 공세를 하는 제 1군과 제 9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역할로 하노버까지 아무 방해 없이 진군했고, 베를린 외곽 방어선(1988), 노이루빈에서 50킬로미터 거리의 엘베 강까지 진군하였고, 페를레베르크에서 덴마크 군과 합류하면서 진군을 멈추었다. 그러는 동안 도시방벽 지역에서는 대규모 포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 10군이 도시방벽의 중간부분을 타개하고 들어가서 뒤셀도르프를 점령하고, 그 북부를 내달려서 제 8군의 절반과 도르트문트에서 만나면서 에센뒤스부르크포위망에 갇혔고, 그 안의 동독 제 5군의 패잔병들도 갇혔다. 이들을 제 3군이 처리하는 동안, 제 8군과 제 10군은 계속 진군하여서 뮌스터, 빌레펠트를 거치고 괴팅겐에서 다시 만나면서 아직 멀쩡한 제 11군을 포위했고 그 즈음이 작전이 시작된 지 20시간이었다. 더 남쪽에서는 뒤셀도르프에서 나뉜 제 10군의 절반이 쾰른을 거쳐 제 4군의 기동부대와 옛 수도 외곽에서 만나 폭격으로 혼비백산한 제 4군을 가두었다. 제 4군은 지도부의 명령으로 본에 집결하여 후퇴를 준비했지만, 오히려 독이 되어버렸다. 하인츠는 포위망에 본만 들어가면 되다는 명령을 전달하고, 여분의 제 4군의 병력을 남쪽으로 진군시켰다. 작전 시작 약 48시간 즈음 포위망 3개가 모두 섬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동독 제 4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일부 병력이 포위망 밖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부대는 루트비히 바그너 부 사령관이 직접 관할하고 있는 군이었기에 투항하는 인원이 거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포위망을 열어제치고 슈투트가르트로 후퇴했다. 남쪽으로 진군하던 제 4군과 약간의 교전이 있었지만, 대부분 무사히 탈출했다. 제 4군은 남쪽으로 진군한지 약 20시간쯤 룩셈베르크의 동독 제 3군을 제 5군과 함께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포위 전을 진행하는 동안 동독 제 3군이 제 5군을 집중 공격하는 상황이 벌어져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입었다. 동독으로의 침공이 시작된 지 3일째인 9일이 되자, 동독 최고 군사 사령부는 전황 판단을 끝내었다. 제공권이 마비되어서 전황 판단이 힘들었고, 모든 곳의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명령을 따리지 않았다. 2일 동안 동독은 6개의 군이 무너져 내렸고, 총 48만명의 전력이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반면, 다국적 군은 항공피해를 제외하면 한 전투에서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한 번을 제외하고 발생하지 않았다. 룩셈베르크 포위전에서 약 1,60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피해는 미약했다. 나머지 대부분은 덴마크 군의 피해였다. 또한, 동독은 슈베린, 페를레부르크, 하노버까지의 영토를 잃었고, 서부의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했다. 독일을 포함한 다국적군은 2일 동안 거둔 승리에 매우 감탄했다. 기습이 제대로 통한 것이었다. 사령관인 하인츠는 ‘적들이 이제 공격의 방향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동부 집단군이 할 차례다.’라는 것을 통해 겐트너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겐트너는 바이에른 동부에 배치된 제 19, 20, 21군을 움직여 동부 방벽(1988)의 모든 부분을 공격했고, 19군과 21군의 대다수는 이를 우회하여 슈투트가르트로 진격했다. 이 동시에 제 4군도 서쪽에서 슈투트가르트를 향해 오고 있었다. 9일 12시가 되자, 제 19군은 텅빈 뷔르츠부르크를 점령하고 나머지 3개의 군이 슈투트가르트를 포위했다. 슈투트가르트에는 본 포위전에서 탈출한 동독 제 4군과 남부 지역을 담당하던 제 10군이 함께 후퇴를 준비하고 있었다. 약 16만 명의 군이 모여있는 곳이였기에 겐트너와 하인츠 모두 직접적인 공격말고, 고립을 하게했다. 그 대신 안전장치로 제 10군을 프랑크푸르트에 암마인에 진주시키며 나머지 군들과 완전히 분리시켰다. 제 19군의 북부에 동독 제 1군이 압박을 가하자, 오후 5시, 제 22군이 제 1군과 전면전을 시작했다. 겐트너의 억지로 후퇴하는 제 1군과 격렬한 전투가 펼쳐졌다. 이들 북쪽으로 제 8군이 괴팅겐에서 잘레 강까지 진격하면서 동독 사령부는 남은 군대가 후퇴해야 할 지역으로 폰 방어선(비그리드)을 지칭했다. 마그데부르크라이프치히를 이은 선인 폰 방어선은 막 공사가 끝난 상태로 병사들로 채워져야했다. 후퇴한 대부분의 병력은 그 곳으로 가게되었다. 하지만, 후퇴한 병력이 별로 없었고, 라이프치히 남부의 로닌 방어선도 지켜야했기에 항상 병사들이 부족했다. 10일 새벽 5시, 동독 제 1군은 전면전에서 패배하고 다수가 투항했다. 남은 제 22군은 큰 피해를 안은 채로 예나 서부로 진격했다. 예나는 로닌 방어선(1988)을 압박하기에 매우 좋은 곳으로 꼭 차지해야할 곳이었다. 서쪽 포위망을 맡은 병력이 전면전으로 크게 약해지자, 프랑스 파견군(1988)이 투입되었다. 또한, 제 23군이 예나의 동부와 북부에 정렬하면서 예나와 그 안의 동독 제 9군은 포위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파견군이 양단한 뒤, 23군에 의해 분해되었다. 11일 오후 2시, 예나의 제 9군과 슈투트가르트의 제 4군과 제 10군이 모두 항복하면서, 서독은 거의 목표를 완수했다. 이때 소련이 직접적으로 참전을 시작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소련은 약 2,000대의 항공기를 파견하여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이는 독일의 폴란드 공세(비그리드)에 내부 혼란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군 최고 사령부(STAVKA)는 공중 작전을 수립했고, 15일에 출격을 결정했다. 이 문서 또한, 동독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NIA에 의해 탈로나면서, 다국적군도 만만의 준비를 했다. 소련의 ‘노비코프 공세’는 쾰른을 타격하는 작전이었고, 라이프치히의 상공을 지나갈 예정이었다. 다국적군은 지난 2차 공세 때, 92대의 전투기의 수리를 마치고, 총 780대의 전투기를 곧장 라이프치히로 출격할 작정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라이프치히가 다국적군의 치하여야 했다. 일단 하인츠는 로닌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판단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라이프치히의 공중 방어시설의 대다수가 로닌 방어선에 놓여있었다. 일단 폰 방어선의 동부를 압박하던 제 15군과 17군은 로닌 방어선의 동부를 공략하게 했고, 제 8군과 10군을 라이프치히 북서부에 배치했다. 또, 피해를 복구한, 제 22군을 포함한 19에서 23군까지 모든 병력을 로닌 방어선 서부에 집중시켰다. 중간에는 제 16군이 맡아서 돌파하게 되어있었다. 방어를 맡은 적은 제 8군으로 동독의 최정예 군 8만 명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13일 먼저 제 8군과 10군은 북부에서 로닌 선의 뒤를 공격하여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폰 방어선으로부터 분리시켰다. 그 직후로 5개의 군이 서부에 공격을 집중하여 돌파해내고, 로닌 방어선의 절반을 무력화했다. 나머지 3개의 군이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에 제 8군과 제 10군이 후방에서 남은 방어선을 덮쳐서 붕괴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에 7만여 명이 죽거나 다치는 큰 피해를 보았다. 이들의 공백은 금방 채워질 예정이었지만, 독일 측에서는 작전 중 전례 없던 사상자 기록에 꽤 놀랐다. 이제 이 작전의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라이프치히 공중전(1988)이다. 15일 아침 6시부터 780대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라이프치히 상공을 정찰했으며, 붕괴된 로닌 방어선에도 미국이나 프랑스의 방공장비들이 도착했다. 하지만, 이 동안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슈투트가르트 반군(비그리드)이 시가지를 탈환했다는 것이다. 이 반군은 다름 아닌 항복한 제 4군의 잔병들이었다. 그들은 1만 명조차 되지 않는 규모였지만, 충분히 방공 장비의 운송을 지체시켰다. 이들을 하인츠는 남부를 담당하던 독일 제 4군에게 처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5일 오후 1시, 시가지를 포위한 독일 군은 시가지로의 진입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라이프치히의 상공에 적기들이 출현했다. 수적으로 다국적군이 매우 불리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들에게서 시간을 빼앗는 것이었다. 약 20분 동안 그들의 폭격기를 주 목표로 작전을 진행했다. 8일 동안이 전투에서 동독의 공군 전력이 전멸했으며, 약 300대의 폭격기를 파괴했으며, 80대의 미그기또한 격추시켰으나, 다국적군도 580여기의 전투기가 격추되는 피해를 입었다. 양측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남은 적들도 연료 부족으로 후퇴해야 했고, 일본 공격으로 항공기를 아시아로 옮기면서 소련의 공세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다국적군의 공군이 거의 전멸되면서 제공권은 잠시 소련으로 기울었다. 8일 동안 연일 공중전이 펼쳐지는 동안에 슈투트가르트에서는 피의 시가전(슈투트가르크)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난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생긴 잔해들과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서 독일 군을 겨냥했으며, 이들 대다수가 저격병이어서 많은 수의 병력이 이 곳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 4군의 사상이유 1위는 저격이었고, 2위가 지뢰였을 만큼 저격의 위력이 상당했다. 4일 동안 밤낮으로, 건물을 수색해 나아가며 결국 적들의 숨을 건물이 없어졌고, 적들은 모두 투항했다. 하인츠 원수는 1988년 2월 23일, 라이프치히 공중전의 끝으로 작전의 종료를 알렸고, 17일간의 혈투의 끝을 알렸다. 살아남은 동독의 고위 장교는 그대로 서독의 하급장교로 임명되었고, 독일 지역을 서독의 땅으로 선포했다. 소련도 제네바 UN회의에서 이를 인정했고, 다음 분쟁이 없을 것을 당부했다. 안타깝게도, 소련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미 에른스트 1세는 TS에 새로운 지령을 하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