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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 República dos Pampas
República Rio-Grandense
팜파스 공화국
히우그란지 공화국

18691877 파일:Flag of Pampas.png
파일:Coat of Arms of Pampas.png
국기 국장
미승인국
파일:Pampas on the Globe.png
팜파스 공화국의 위치
수도 피라타니Piratini
정치
공용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정부 형태 대통령제 입헌 공화국
대통령 호세 고메스 데 자딤
José Gomes de Jardim
역사
 • 세리갈 전투 1875년 - 1877년
 • 피라타니 합의 1877년 5월 9일
지리
면적 96,456 ㎢
인구
1870년 어림 134,300명
현재 국가 산티아나 산티아나 팜파스 주

팜파스 공화국(포르투갈어: República dos Pampas)는 1869년부터 1877년까지 존재했던 남아메리카미승인국이었다. 분리주의자들의 주도로 산티아나왕정이 수립되자 이에 반발한 극단적 연방주의자들과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리갈 전투(Battle of Serigal)에서 상당한 패배를 겪으면서, 사실상 진압될 위기에 처하자 피라타니 합의(Piratini Acuerdo)를 통해서 자치령으로 편입될 것을 선택하였다.

역사

산티아나의 역사
Historia de San Tiana
고대
Antiguo
중세
Medieval
근세
Día moderno
현대
Moderno
차라니족
Charaníes
리베네그로 요새
Fortaleza de Rivenegro
시스살레라테 요새
Fortaleza de Ciscalerate
시스살레라테 공방전
Fortaleza de Ciscalerate Asedio
동방 연합
La Unión Oriental
1811-1820
시스살레라테 주
Estado de Ciscalerate
1820-1828
산티아나동방공화국
República Oriental del San Tiana
1828-1867
팜파스 공화국
República dos Pampas
산티아나 왕국
Reino Oriental del San Tiana
1867-현재

팜파스 공화국의 건립은 산티아나에 만연했던 분리주의에 외부 표출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분리주의는 왕정 선포 이전부터 막심하였으며, 이에따라 초기의 어수선한 대내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산티아나의 수많은 정치가들은 분리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는 것을 경제 정책과 함께 우선 순위로 치부하였다. 중시하였으며, 후안 데 바이비안(Juan De Vallivián) 총리 이후로 팜파스 지역에 대한 산티아나의 영향력이 가속화 되고, 해당 팜파스 일대의 독립도 무산됨에 따라 급물살을 받고 있던 분리주의는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후로 산티아나는 고질적인 동부-서부간 지역 분쟁을 제외하고서는 강력한 중앙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이는 1930년대 이전의 느슨한 연방체의 모습을 하던 브라질[1]과 현재도 볼리비아산타크루스주(Departamento de Santa Cruz) 분리 독립 운동, 칠레마푸체 족(Mapuche) 분리 독립 운동과 같은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있는 방임적 지방 행정의 문제를 진작에 해소할 수 있었다.

성립 배경

당시 팜파스 지대는 가우초(Gaucho, 남미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목동)들의 밀집 지역으로서 온화한 기후와 평탄한 지형으로 산티아나의 목축업 중심지로서 크게 번성하는 곳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우루과이아르헨티나의 영향을 받은 연방주의에 입각한 공화정을 주장하던 이들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특히나 시스에르타 당(聯邦黨)의 수많은 이들과도 연고가 있는 곳이었다.

1868년, 기존의 과두 공화정이 폐지되고 왕정이 수립되자, 이곳을 연고지로 하던 수많은 연방주의자들은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초대 총리였던 호아킨 데 트리비안(Joaquín De Tristán)은 가우초들의 경제권을 장악하고자 팜파스 일대를 국유화 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에 수많은 가우초들이 연방주의자들과 연대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곧 공화주의자였던 호세 고메스 데 자딤(José Gomes de Jardim)을 중심으로 내각에 독립을 선언하면서 팜파스 일대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권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국가 건립과 세리갈 전투의 패배

파일:Jadim.jpg
팜파스 지역의 독립을 주도했던
호세 고메스 데 자딤

연방주의자들과 가우초들은 호세 고메스 데 자딤을 팜파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며, 입헌 공화정에 입각한 국가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중앙 정부에 압력에 가우초들은 점점 산티아나로 도피하거나 토지권을 포기하였으며, 내부적으로는 호세 고메스 데 자딤과 일부 인사들의 독재 정치가 지속되기 시작했다. 결국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놓인 팜파스 공화국의 주민들은 자딤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도리어 자딤은 이 같은 내부적 모순과 문제를 대외적으로 표출하기 위해 당시 산티아나의 세리갈(Serigal)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루과이-산티아나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던 산티아나 의용군(Ejército voluntario de la San Tiana)에서 비롯되었고, 파라과이 전쟁우루과이 내전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으며,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군사 고문을 통하여 철저한 군사 교리와 신식 장비로 무장했던 산티아나 왕국군과는 달리, 팜파스 공화국의 시민군들은 오합지졸이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제대로 된 총을 들고 전투를 벌인 적이 없던 민간인들이 다수였다. 결국, 수적으로만 우세하던 시민군은 왕국군의 일방적인 맹공에 대패하였으며, 자딤은 최악의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당시 팜파스 공화국의 수도를 자칭하던 피라타니(Piratini)[2]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과 자치령으로의 편입

자딤의 협상은 팜파스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받기 위함이었고, 이를 눈치챘던 후안 데 바이비안(Juan De Vallivián) 총리는 팜파스 일대의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은 자치령의 수립을 인정하는 대신, 군사적 권한을 중앙 정부에 위임하고 산티아나로부터의 독립을 시도를 금할 것이라는 조건을 걸고 자치령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자딤 세력과 가우초들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팜파스 자치령 내에 일종의 내분이 발생하자 이러한 상황을 노린 바이비안은 중앙 정부군을 파견하여 이 둘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진압하였고,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의 경제적 기반이었던 농토와 목지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후 팜파스 자치령은 행정 구역 개편으로 일개 로 지위가 격화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각주

  1. 브라질의 중앙집권화는 1930년대 쿠데타를 주도했던 제툴리오 바르가스(Getúlio Dornelles Vargas) 대통령의 전체주의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바르가스 대통령은 또한 당시 산티아나의 총리였던 에스네스투 데 오르살레스(Ernesutu De Orzáles)와 함께 남미의 친추축 진영을 선두하기도 했다.
  2. 현재는 팜파스 주의 주도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