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레이놀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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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É 선정 위대한 아일랜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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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아일랜드의 공영방송 RTÉ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존 흄 마이클 콜린스 피터 레이놀즈 제임스 코널리 폴 데이비드 휴슨
6위 7위 8위 9위 10위
에이먼 데 벌레라 메리 로빈슨 노엘 크리스토퍼 브라운 패트릭 피어스 필 라이넛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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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Peter Wright Reynolds
피터 라이트 레이놀즈
멤버 (개인 자격)
입성 연도 1996년[1]
후보자격 연도 1995년
후보선정 연도 1996년
선정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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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링 스톤이 2015년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실제 현역 기타리스트들과 평론가들이 뽑은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지미 헨드릭스 지미 페이지 피터 레이놀즈 에릭 클랩튼 에디 밴 헤일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키스 리처즈 리치 블랙모어 데이비드 길모어 제프 벡 피트 타운젠드
같이 보기: 명반, 아티스트, 송라이터, 가수, 드러머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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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링 스톤이 2015년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를 선정한 순위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밥 딜런 척 베리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6위 7위 8위 9위 10위
피터 레이놀즈 롤링 스톤스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 지미 헨드릭스
같이 보기: 명반, 아티스트, 송라이터, 가수, 드러머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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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미국의 케이블 음악채널 VH1에서 음악평론가와 현직 뮤지션, 기타 음악산업 종사자 등 총 200명 이상에게 투표를 실시하여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Top 100' 순위를 정했다.
1위 2위 3위 4위 5위
비틀즈 레드 제플린 마이클 잭슨 롤링 스톤즈 밥 딜런
6위 7위 8위 9위 10위
엘비스 프레슬리 피터 레이놀즈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너바나
11위부터는 VH1 참조
VH1 선정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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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H1이 2000년 발표한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순위.
1위 2위 3위 4위 5위
레드 제플린 피터 레이놀즈 딥 퍼플 블랙 사바스 메탈리카
6위 7위 8위 9위 10위
AC/DC 더 후 반 헤일런 너바나
11위부터는 VH1 참조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2020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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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ME 선정 500대 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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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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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음악가 음반 판매량 순위
List of best-selling music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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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음반 판매량 순위
List of best-selling albu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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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b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피터 레이놀즈
Peter Reyno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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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피터 라이트 레이놀즈
Peter Wright Reynolds
출생 1943년 5월 11일
영국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타인 위어 뉴캐슬어폰타인
사망 2005년 3월 1일 (61세)
아일랜드 먼스터 코크
국적 영국, 아일랜드[2]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사회운동가
소속 크림 (1967 - 1969)
무소속 (1969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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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아버지 : 윈스턴 라이트 레이놀즈
어머니 : 줄리아 메리 레이놀즈
배우자 엔젤 유진 (1970 - 1974, 이혼)
브루스 베이커 (1981 - 2005)
학력 이스트엔드 문법 학교 (졸업)
노섬브라 대학교 (동양 철학 / 중퇴)
신체 175cm, 64kg, A형
혈통 아일랜드계 영국인[3]
종교 무종교 (무신론)
소속 정당 아일랜드 노동당[4]
장르 하드 록, 블루스 록, 포크 록,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프로그레시브 메탈, 사이키델릭 메탈, 포크 메탈
활동 기간 1966년 - 1977년, 1979년, 1980년 - 1981년, 1985년[5]
사용 악기 일렉트릭 기타, 어쿠스틱 기타, 베이스, 보컬, 키보드
레이블 폴리도르, 워너 브라더스, 소니, 유니버설, EMI, 하베스트
링크

개요

Father of the Heavy Metal

영국 뉴캐슬어폰타인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 기타리스트. '헤비 메탈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헤비 메탈을 비롯한 스래시 메탈, 글램 메탈, 바이킹 메탈 등 여러 메탈 장르 형성에 매우 큰 기여를 한 전설적인 음악가이다.

상세

말년에 프로그레시브 록 색체를 강하게 띄었던 것 때문에 사이키델릭 록에서 전향하여 프로그레시브 록을 추구했던 핑크 플로이드, 사이키델릭 록의 강한 색체에 프로그레시브 록이 가미된 음악을 했던 시그마 6, 그리고 블루스 록을 기반에 둔 헤비 메탈에 프로그레시브 록을 섞었던 피터 레이놀즈는 세계 3대 프로그레시브 록밴드로 불린다.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후기 음악 커리어만 두고 그가 프록 메탈만 한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중기에는 사이키델릭 록의 영향을 받은 사이키델릭 메탈을 추구하기도 했고, 또 기본적으로 에릭 클랩튼이나 레드 제플린과 같은 블루스 록을 기반에 둔 정통파 헤비 메탈 음악가중에 한명이었다. 하여간에 후기 음악들이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대성공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프록 메탈 음악가로서 더 잘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43년 5월 11일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하드록, 헤비 메탈 음악가였다. 음악적으로는 비틀즈,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더 후의 영향을 받았다. 1966년 활동을 시작해, 1967년 데뷔하였고, 이후 1977년까지 활동했다. 대표곡으로는 What a Whole Life, It's Just a Shadow 등이 있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업적 역시 뛰어나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잉위 맘스틴 등과 함께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롤링 스톤에 의해 역대 최고의 기타리스트 3위에 랭크되었다. 음악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빌보드 1위 싱글 곡 8개를 배출했으며, 약 3억 5천만장의 음반을 팔았다. 역대 음반 판매량 7위다.[6]

더 후,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등 유명 밴드의 세션 멤버로도 거론되었으나 스스로 거부하고 독창성을 지키기 위해 무소속으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크림 등 밴드에 아예 가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1971년 이후로는 언제나 무소속으로만 활동해왔다. 그러면서도 1970년대 역대 음반 판매량 4위라는 넘보기 힘든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 파급력 있는 솔로 아티스트이다.

또한 사회 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여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히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으며, 1970년대에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등 진보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다. 1971년에는 Concert for Bangladesh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 자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록 아티스트들이 매너리즘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새로움을 시도할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음악은 완전히 끝났음을 선언하며 음악계를 급작스럽게 은퇴했다. 이후 아일랜드에서 은둔하며 음악 활동은 물론, 몇몇 인터뷰나 자선 공연을 제외하면 공개 행사와 언론 노출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5년 3월 1일,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생애

유년기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철강 노동자였던 윈스턴 레이놀즈와 줄리아 레이놀즈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3달만에 윈스턴이 공장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외동 아들로 자라났으며, 줄리아 레이놀즈는 경제난으로 가정을 돌볼 형편이 안되자 더블린에 살던 친척집으로 피터를 보냈다. 13살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뉴캐슬어폰타인에서 자랐으며, 이스트엔드 문법 학교를 졸업했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학비를 댈 형편이 안되어 지역 대학교인 노섬브라 대학교의 동양 철학부에 입학했다.

노섬브라 대학교 동양 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불교 신앙을 접하게된 이후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1970년대 중반까지 불교에 깊기 귀의하였다. 1965년 인도 여행을 다녀온 이후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으나, 신앙심과 별개로 성적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자마자 노섬브라 대학교를 중퇴했다. 또 대학교 시절 영국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

초기 음악 활동 (1966 - 1967)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63년이었는데, 대학교에 갓 입학했던 때에 친구가 들으라고 빌려준 비틀즈 1집 Please Please Me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날로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기타를 연습해봤다고 한다. 기타에 나름 소질이 있었기도 했고 하루에 6시간씩이나 연습했던 그는 단숨에 중급 이상의 기타 실력을 가지게 되었고, 또 밥 딜런,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야드버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고 로큰롤에 관심을 가졌다. 1966년, 피터 레이놀즈는 첫 곡을 작곡했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대학교를 중퇴했다.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서 막노동을 전전했고 리버풀에서 항만 노동자로 3달동안 일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아 야드버즈 소속이었던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에릭 클랩튼이 그의 기타 실력에 관심을 가져 작곡 및 기타 연주법에 대해 몇가지 조언을 해주게 되었다. 이후 에릭 클랩튼과는 사적으로도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Revolver 음반을 듣고 사이키델릭 록에 관심을 갖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익숙했던 블루스 음악을 주로 작곡했다. 이후 그는 지미 헨드릭스, 더 후, 비틀즈 등 다양한 밴드의 영향을 받아 블루스와 록을 결합한 블루스 록을 시도했으며, 에릭 클랩튼도 그의 음악 장르 형성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크림 활동 시절 (1967 - 1969)

에릭 클랩튼, 진저 베이커와의 인연으로 크림(Cream)이라는 밴드에 세션 기타리스트로 영입된다. 초반에는 베이스 기타를 조금 치는 수준이었지만, 조금 뒤에는 일렉트릭 기타를 다뤘고 1968년경에는 아예 밴드에 공식으로 가입하여 크림이 4인조 밴드가 되어버렸다. 밴드 초반에는 음악 함량이 많이 부족했지만 1년간 어깨 너머로 곡을 배우면서 엄청난 성장을 거쳐, 크림의 3집인 Wheels of Fire에서는 수록곡 13곡중 6곡을 자작곡으로 채웠다. Wheels of Fire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더블 앨범이라는 기록을 가지게 되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1967~1968년 당시 활발했던 히피 운동에 심취하여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졌다. 공산당을 탈당하고 기성 정치의 해체를 주장했으며, 그 유명한 우드스탁 콘서트에서도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영국 정부를 맹비난하며 젊은이들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69년 알타몬트 공연 참사로 인한 히피 문화의 해체 이후에도 히피 사상을 유지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사상관을 평생동안 가지고 살았다.

그러나 밴드 멤버들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멤버간 갈등이 심화되어 크림은 1969년 Good Bye 앨범으로 해체를 선언했고, 피터 레이놀즈도 그대로 무소속으로 돌아갔다. 이후 피터 레이놀즈는 1968년에서 1971년까지 핑크 플로이드를 일시적으로 탈퇴했던 시드 바렛의 대타로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밴드 내에서 자리를 잡던 데이비드 길모어의 반대로 핑크 플로이드로 들어가지는 않았고, 대신 더 후에서 세션 기타리스트로 간간히 뛰었으며, 레드 제플린에도 잠깐 세션 멤버로 참여했다.

솔로 활동 (1969 - 1977)

1971년까지 단 한장의 앨범을 내지 않았던 피터 레이놀즈는 에릭 클랩튼의 도움으로 첫 솔로 1집인 Synesthetic Associations를 발매하는데, 빌보드 76위, 영국 차트 9위까지 오르며 첫 데뷔 앨범치고 매우 선전했다. 블루스와 하드 록을 결합한 구성으로 평론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으며, 이에 자신감을 얻은 피터는 1972년 2집인 The Soldier's Tale를 발매해 처음으로 빌보드 2위에 오르고 영국 차트에서는 1위까지 올랐다. 타이틀 곡인 The Soldier's Tale는 한 잡지에서 선정한 "올해의 음악" 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솔로 활동기에는 더 후, 롤링 스톤스 등에서 세션 멤버로 거론되었으나 거부하고 솔로활동 유지를 선언했다. 1971년 조지 해리슨이 주최한 Concert for Bangladesh은 피터 레이놀즈를 세계구급 록스타로 올려놓았다. 키스 문과 같은 무대에서 엄청나게 빠른 기타 연주와 신들린 퍼포먼스로 "지미 헨드릭스의 귀환"이라는 평가까지 받았고, 1971년 영국인들이 뽑은 최고의 기타리스트 1위에 올랐다.

1972년 3월에는 2집을 발매한지 한달만에 베트남 전쟁 반대의 주제를 담고있는 In Your Blues를 발표해, 빌보드 1위까지 오르고, 각종 국가 차트에서 1위에 올랐다. 1972년부터는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와 교류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헤비 메탈 등 블루스에서 탈피한 다양한 록 음악 장르를 시도했다. 또 프로그레시브 록까지 손대는 등 1973년까지 상당히 다양한 음악적인 실험을 거쳤고, 그 결과가 1973년 발매한 앨범 It's My World이다. 현재까지 약 4500만장이 팔려 1973년 2번째로 많이 팔린(1위는 핑크 플로이드The Dark Side of the Moon) 앨범으로 등극되었고,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6위를 차지할 정도로 비평적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글램 록, 프로그레시브 록, 사이키델릭 록, 헤비 메탈, 포크 송 등 다양한 음악적인 성향이 앨범 속에 담겼지만, 그중에서 제일 잘나갔던 헤비 메탈로 방향을 선회해 1974년 이후로는 메탈과 하드 록, 블루스 록에 다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1973년 이전의 여러 시도들을 메탈에 접목시켜서 글램 메탈, 스래시 메탈 등 여러 메탈 장르가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치도 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퀸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고 영국을 떠나 아일랜드의 저택에서 살면서 사실상 아일랜드인이자 영국인으로서 자신을 규정하였다. 그러면서도 영국의 문화를 읊조리는 곡을 쓰기도 해 메탈 아티스트로서는 이례적으로 보수적인 기성 세대들에게서도 환영받았다.

사생활 면에서 1974년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1970년 결혼했던 그루피족 출신의 엔젤 유진의 각종 기행과 불륜[7] 행각으로 인해 질린 피터는 그와 이혼을 선언하고, 여성과는 다시는 사귀지 않을 것이라며 동성애자 커밍아웃을 해 당대 영국 사회에 큰 반항을 몰고왔다. 보수 언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도리어 인기가 더욱 높아져 반체제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인기도 엄청나게 높아졌다.

또 1970년대 중반 들어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는 길은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에서 찾아야한다는 곡인 I'll Follow My Way를 발표해 빌보드 1위에 다시 곡을 올렸으며, 동년에 불교를 버리고 무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밝혔다. 또 기성 좌파 정당인 노동당에도 입당해 이상주의적인 정치관에서도 약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1975년, 4집인 The Needs of Each Before Move를 발매해 약 3200만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 시기 완전히 헤비 메탈에 심취하여 거의 슬래시 메탈에 가까운 음악을 보여줬으며, 라이브 공연 당시 너무 연주를 빨리해서 한 공연에 일렉 기타를 3개나 부숴버렸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내려올 정도였다. 1975년 8월 12일 브로미치 공연에서는 약 16만명을 동원해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한 공연으로 세계 신기록을 쓰기도 했다. 1976년, 롤링 스톤이 조사한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 투표에서 그는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한편으로는 갓 데뷔했던 밴 헤일런부터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그리고 무명 시절의 주다스 프리스트까지 여러 메탈 아티스트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고, 반대로 영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블루스에 기반을 둔 다소 온건한 메탈 음악가였지만, 후기로 갈수록 매우 과격하고 빠른 템포의 메탈 음악을 쓰기도 했다.

급작스러운 은퇴와 그 이후

5집 발매 직후 록 음악이 매너리즘에 빠져있기 때문에 더이상 록 음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급작스러운 발표를 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록 음악계는 충격에 빠졌고 로저 워터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등 그와 친분이 있던 아티스트들이 모두 은퇴를 말렸지만 록 음악에 있어서 미래란 없다면서 그냥 앞으로 몇번의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 외에는 |아일랜드에서 요양을 하겠다며[8] 음악 활동 중단의 뜻을 밝혔다.

이후 1979년 레드 제플린과 합동 공연을 했고, 1980년 12월부터 1981년 2월까지 영국 순회 공연을 다녔으며 이후로는 라이브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 관심을 가지고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곡 3곡을 연주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로버트 플랜트를 보컬로, 존 폴 존스를 베이스로 하여 곡을 연주하였다.

1985년 이후로는 공식 석상에서 자리를 비추지 않으며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서 자발적인 은둔 생활을 했으며, 간간히 인터뷰를 하는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91년 에릭 클랩튼의 Unplugged 앨범에서 마지못해 몇몇 곡의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해주긴 했지만, 이후에는 정말로 아무 음악도 공식 석상에서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1987년 MBE 수훈 대상으로 선정되어 MBE 훈장을 받았다. 2001년 기사 작위 후보에 올랐지만 스스로 거절했다. 또 199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지만 이 역시 수상을 거부했다.

주류 음악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음악에는 꾸준히 관심을 가졌는데, 메탈리카너바나, AC/DC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가끔씩은 유명한 음반이나 노래에 대한 촌평을 남기기도 했고, 힙합에도 의외로 후한 평가를 줬다. 말년에는 음악적인 취향이 꽤 넓어져 팝 록 밴드인 플리트우드 맥의 음악도 들었다. 2001년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제일 좋아하는 요즘 밴드로 라디오헤드를 꼽기도 했다.

시인과 화가로서의 삶

은퇴한 이후에는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문예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로 추상주의 미술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다만 남에게 더이상 새 작품을 보여주고싶지 않다는 신념 때문에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 공개된적은 없고, 시의 경우 2~3편만이 공개되었다.

사망

2005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췌장암이었고 2002년부터 암에 걸렸지만 공개하지 않아 정말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사후 영국에서 공연된 폴 매카트니가 주도한 자선 콘서트 Live 8은 거의 피터 레이놀즈에 대한 추모 공연에 가까웠다. 에릭 클랩튼, 핑크 플로이드, 오지 오스본 등 피터 레이놀즈의 지인들이 피터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명곡들을 연주했다.

생전에도 그의 음악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지미 헨드릭스나 커트 코베인과 마찬가지로, 사후 그의 음악들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당시나 지금이나 메탈 음악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블루스로부터 이어지던 기타 리프를 헤비하게 바꿔놓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1970년대 영국 음악가로서는 예외적으로 롤링 스톤에서도 2010년대 이후로는 꽤나 높은 평가를 받는 등, 사후에 그의 업적은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사용 악기


영상속 기종은 Fender 1958 Telecaster다.


영상속 기종은 American Vintage Reissue 1962 Stratocaster다.

녹음을 할때는 Fender 1958 Telecaster와 Fender 1957 Stratocaster를 가장 선호했다. Fender 1964 Stratocaster, Gibson 1958 Les Paul Standard도 사용했는데, 말년에는 레스폴 커스텀 시리즈인 Gibson 1960 Les Paul Custom Black Beauty with Bigsby를 제일 많이 사용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Gibson J-200를 제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녹음할때와는 달리, 라이브 공연에서는 Gibson Les Paul을 더 많이 썼다. 그러나 라이브 연주에서도 Gibson Led Paul이 부숴지면 스트라토캐스터로 갈아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 1970년 이전에는 라이브 공연에서도 레스 폴보다 텔레캐스터를 더 선호했다는 말도 있는데 스스로가 밝히길 기타 기종은 별로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그냥 레스 폴의 디자인이 더 멋지고 녹음때와는 다른 기분을 내고 싶어서 자주 쓰는거라고 한다. 다만 사운드는 스트라토캐스터와 텔레캐스터가 더 마음에 들어서, 녹음할때는 언제나 스트라토캐스터와 텔레캐스터만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Fender와 Gibson에서 둘 다 시그니처 기타가 나왔다. 에릭 클랩튼과 함께 몇 안되는 Fender, Gibson 공동 엔도서이다. 본래 피터 레이놀즈의 시그니처 스트라토캐스터는 1992년 50대 한정으로 생산될 예정이었으나 폭발적인 수요로 인해 아예 공식으로 생산하는 기타가 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는 500만원 상당에 팔리는 커스텀라인에서도 고가의 스트라토캐스터 기종이다.

Vox 앰프를 주로 사용했다.

음악적 성향과 유산

기타리스트



두말할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이다.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를 뽑는 투표나 명단에서도 결코 3위권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에서 그의 기타 기교는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일렉트릭 기타 기교만 보자면 에디 밴 헤일런, 지미 헨드릭스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을 정도다. 기교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도 대단한데, 양다리로 비트를 맞추다가, 헤드 벵잉을 엄청나게 하고, 무대 위를 폴짝 폴짝 뛰어다니면서 척 베리의 오리 걸음까지 시전한다. 어떻게 저런걸 다하면서 엄청나게 빠른 비트를 맞추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평이다. 거기다가 거의 악마라도 씌인듯 엄청난 템포를 보이는데, 분당 500BPM의 속도로 저 위에 열거된 모든 퍼포먼스를 시전하며 신들린 기타 연주를 선보인다. 1971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 당시에는 헤로인을 엄청나게 하고 무대에 올랐는데, 분당 2,500BPM의 템포로까지 기타를 연주했다는 증언도 있고, 공연 직후 그의 양손에서 피가 철철나는 모습을 본 밥 딜런이 깜짝 놀라서 의사를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

무엇보다 기존의 곡을 일렉트릭 기타를 통해 재해석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비틀즈의 YesterdayLet It Be를 헤비 메탈로 편곡하여 완전히 마개조를 해버리지를 않나, 기타 실력이 더욱 발전된 1970년대 후반에는 클래식까지 메탈로 변형하여 공연에서 선보였다. 쇼팽의 Prelunde n.4, Polonaise opus 53이 메탈로 개조되었는데 이 버전이 오히려 쇼팽의 원곡보다 유튜브 조회수가 더 높다.

마약을 너무 많이 하고 공연에 오르는 날에는 템포가 무척 빨라지지만 삑사리를 남발해서 리치 블랙모어데이비드 길모어 등 무대 매너가 좋은 기타리스트들과 비교되어 까이기도 한다. 키스 문의 증언에 의하면, 1971년 방글라데시 자선 콘서트 당시에는 헤로인을 너무 많이 먹고 무대에 올라서 거의 날아다니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고. 그런데 이런 삑사리도 애드립으로 여겨질정도로 그의 기타 기교가 엄청나게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신들린 일렉트릭 기타 연주 실력 때문에 묻히는 사실이지만 어쿠스틱 기타나 베이스 기타도 상당히 잘 다뤘다. 특히 말년에는 에릭 클랩튼의 Tears in Heaven을 자주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했다고 하는데, 그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안맞는 것은 사실이다. 베이스 기타의 경우에는 나름 안정적인 비트를 선보였다는데 실제로 그의 베이스 기타를 들어보면 정신나간 속도는 어디로 가고 없고, 얌전한 양처럼 베이스 기타를 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송라이터

훌륭한 기타리스트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송라이터로도 불린다. 롤링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에서 21위에 오른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기타리스트로서의 실력이 더 뛰어나지만 송라이팅 실력도 1970년대 당시에는 최정상급이었고, 로저 워터스를 비롯한 여러 송라이터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줬다.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플리트우드 맥,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과 마찬가지로 초기와 후기 커리어에 많은 변화가 있는 아티스트다. 영국의 블루스 록 기타리스트가 말년에 들어서는 아일랜드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아티스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이 10년도 안되어 일어났다는 것이 놀라운 점이다.

극초기에 작곡된 곡들은 대체로 일상적이거나 사랑에 대한 가사들을 다뤘지만 크림 해체 이후 솔로 커리어였던 시절에는 조금 더 작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사회 문제에 대한 고발들이 많았고 그 외에도 내일에 대한 불안감, 또는 사이키델릭하고 몽환적인 가사들도 작곡되었다. 말년에는 컨트리 음악의 영향을 받아 정경을 묘사하는듯한 가사도 많이 썼지만, 기본적으로는 파괴나 혁명같은 과격한 주제의 가사들을 작사하였다.

또한 곡의 성향 역시 초기와 후기에 따라 그 차이가 갈리는데, 초기에는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하드 록을 중심으로 작곡했지만 후기에 들어서는 여러 장르들을 메탈에 결합시킴으로서 다채로운 작곡 성향을 보였다. 마지막 5집에서는 프로그레시브 록과 아트 록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듯한 느낌도 난다. 그 외에도 4집에서는 포크와 메탈의 결합을 시도했고, 2집과 3집에서는 블루스를 기반으로하여 유행이 끝난 사이키델릭 록을 메탈에 결합하기도 하였다. 데이비드 보위에도 관심을 가져서 글램 록을 시도하여 후일 밴 헤일런이 주도적으로 이끈 글램 메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저 워터스의 영향을 받아서 말년에는 컨셉트 앨범을 시도했는데 4집과 5집을 컨셉트 앨범으로 만들었고 5집은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같이 전체 곡이 하나의 메들리로 이어지는 구조를 띄고 있다. 4집에서는 문화적 퇴폐주의를, 5집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감을 주제로 제작되었다. 4집과 5집은 이런 구성 때문에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시초로 불린다.

다만 말년에 시도했던 프로그레시브 록이나 컨셉트 앨범보다는 3집이 조금 더 원류 메탈에 영향을 많이 줬다는 평가다. 특히나 3집은 스래시 메탈글램 메탈, 둠 메탈의 시초로서 메탈리카메가데스, 앤스랙스 등 수많은 밴드들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반해, 비교적 다채로운 시도를 선보였던 4집과 5집은 비틀즈의 White Album과 마찬가지로 다소 산만하고 어지러운 구성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얼터너티브 록의 부상으로 원류 헤비메탈이 몰락하고, 반대로 4집과 5집에서 보여준 여러 사운드들이 2000년대 들어 뒤늦게 재조명 받은 장르인 프로그레시브 록의 시초로 여겨져 현대에 들어서는 시대를 앞선 음악으로 고평가받는다. 3집의 경우에는 메탈 씬의 몰락을 보여주듯이 점점 평가가 떨어지는데 반해 4집과 5집은 평가가 오히려 현대에 들어서 상승한 경우다.

한편으로는 2집인 The Soldier's Tale에 수록된 "It's Time to Go"가 슈게이징의 시초로도 불리는 등 각 곡에 대한 재조명 역시 꾸준히 이뤄지고 있어, 록씬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근미래에 급격히 평가가 하락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2년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비틀즈, 핑크 플로이드,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등 여러 록 아티스트들의 음반들의 순위가 하락했는데, 피터 레이놀즈의 음반들은 도리어 5개 음반 모두가 순위가 올랐다. 헤비 메탈 씬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들은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고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키보디스트

키보드 실력도 대단해서 전성기 시절에는 키보드와 일체가 된것같다는 말도 나왔는데, 너무 기타 연주를 많이 하다보니 손이 부르트고 메탈 음악에 심취하며 점차 키보드에서 관심을 놓게 되어 말년에는 키보드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보드 실력은 여전히 정상급이라서 은퇴 이후 밴 헤일런의 몇몇 곡의 키보드 녹음을 맡아주기도 했다.

프로듀서

프로듀서로서도 나름 훌륭한 소질을 갖췄다. 피터 레이놀즈가 1967년부터 1970년까지 크림에서 뛰었을 시기 여러 록밴드들의 세션 기타리스트를 맡아주기도 했는데, 그 밴드가 레드 제플린, 더 후,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등 여러가지였고 자연스럽게 세션 기타로 뛰는 멤버들을 만나기 위해 EMI 스튜디오(현 애비로드 스튜디오)를 밥먹듯이 출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등 너머로 배운 프로듀싱 기술과, 어떻게 하면 보컬과 기타의 잡음을 없애는지, 어떻게 하면 훌륭한 더빙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모로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졌고, 이런 그의 프로듀싱 실력은 그가 크림의 리듬 기타리스트로서 들어간 1968년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70년 친한 친구였던 시드 바렛의 2집 Barrett의 프로듀싱을 도와준 것을 시작으로 자기 앨범은 무조건 자기가 프로듀싱하는 원칙을 갖게 되었고, 이후 여러 밴드들의 음반을 프로듀싱해줬다. 1977년 음악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소일거리로 삼아서 마음에 드는 밴드들의 음반을 봉사 차원에서 무료로 프로듀싱해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메탈리카의 Master of Puppets, 너바나의 Nevermind의 프로듀싱을 맡았고 그 외에도 굵직한 하드 록/펑크 록/메탈/그런지 계열의 음반들을 프로듀싱해줬다. 프로듀싱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아티스트들과 친해졌는데, 커트 코베인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남에도 프로듀싱을 하면서 어느정도 친해져서 너바나의 상업적 성공을 도와줬다.[9]

음악 평론가로서

은퇴 후에는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은거하며 가까운 지역에서 발행되는 지역 신문에 1주에 한번 음반 평론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1990년대에는 피터 레이놀즈의 평론이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록 음악 앨범의 평가가 요동칠 정도였다. 2002년 이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평론을 그만뒀는데, 이 직후 평론이 실리던 지역 신문의 발행수가 무려 60%가 감소했다고 한다.

대체로 신선한 시도를 한 앨범에 평론을 후하게 주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매너리즘과 상업화에 빠지지 않은 록의 정신을 되살리기 위함이라고 직접 밝혔다. 반면 핑크 플로이드나 레드 제플린 등 거대 밴드들의 앨범들은 굉장히 평점을 깐깐하게 매겨서, 이 때문에 절대적인 수치로서 피터의 평점을 바라보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많다.

★★★★★ 세기의 앨범 The Beatles (1968)[10]
★★★★☆ 아주 훌륭한 앨범 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1977)
The Wall (1979)
Nevermind (1991)
Songs in the Key of Life (1976)
★★★★ 훌륭한 앨범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Let It Bleed (1971)
London Calling (1979)
Loveless (1991)
★★★☆ 좋은 앨범 Rubber Soul (1965)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Doolittle (1989)
Modern Life Is Rubbish (1993)
★★★ 괜찮은 앨범 Wish You Were Here (1975)
Rumours (1977)
Thriller (1982)
OK Computer (1997)
★★☆ 평범한 앨범 A Night at the Opera (1975)
Computer World (1981)
Let's Dance (1983)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1995)
★★ 나쁜 앨범 The Who by Numbers (1975)
No Jacket Required (1986)
Unplugged (1991)
★☆ 이하 쓰레기 A Momentary Lapse of Reason (1987)

인기

ITV 설문조사 "영국을 대표하는 음악가"
영국의 ITV가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2019년 실시한 여론조사를 통해 15개 대표 음악가 명단을 발표
순위 이름 득표수 순위 이름 득표수 순위 이름 득표수
1 핑크 플로이드 35.60% 6 레드 제플린 2.09% 11 오아시스 1.93%
2 비틀즈 19.22% 7 존 레논 2.03% 12 라디오헤드 1.92%
3 5.15% 8 롤링 스톤스 1.96% 13 아델 1.79%
4 피터 레이놀즈 2.77% 9 엘튼 존 1.94% 14 시드 바렛 1.71%
5 데이비드 보위 2.19% 10 에드 시런 1.93% 15 비 지스 1.64%
16위부터는 미공개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음악 활동 중단은 물론이고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기타 연주 실력과, 헤비하면서도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적 성향 등 때문에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인기있는 메탈 아티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음반 판매량으로만 따지면 피터 레이놀즈는 헤비 메탈 아티스트로서 레드 제플린에 이은 2위이다. 비록 헤비 메탈 아티스트로서 레드 제플린이 거둔 실로 사기적인 상업적 성공 때문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피터 레이놀즈는 1970년대에 핑크 플로이드, 엘튼 존 그리고 레드 제플린 다음으로 많은 음반을 판 아티스트였다. 더군다나 3위와의 격차도 꽤나 큰 편이다.

부머 세대들에게만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 세대들에게도 아주 인기가 많은데 특히나 헤비 메탈 덕후들에게 아주 사랑받는다. 영국과 미국에서 사랑받는 1970년대 록 음악가 3명을 꼽으라고 할때 결코 빠지지 않고 온라인 인기 투표에서도 top 10 안에는 꼭 들어간다. 최고의 기타리스트 투표때에는 2위나 3위를 반드시 차지하며, 라이브 앨범이나 컴필레이션 앨범들도 나오는 족족 수백만장씩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2019년 한 언론에서 20~30대들을 상대로 조사한 "최고의 록 아티스트" 투표에서 피터 레이놀즈는 3위[11]를 차지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에도 개회식때 피터 레이놀즈의 "Love in My Life"가 블랙 사바스를 통해 연주되었고, 신나는 메탈 송들은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가로도 자주 사용된다.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기타 실력이 꽤나 유명한지라 인기가 높다.

평론가들에게서도 인기가 높은데, 어느 리스트에나 최고의 아티스트 10위권 안에 들어가있고 하드 록으로만 한정할 시에는 1위나 2위를 차지한다. 동료 음악가들중에서도 메탈리카, 아이언 메이든, 밴 헤일런 등 수많은 메탈 아티스트들이 존경감을 표할 정도로 인기가 엄청나다. 메탈 아티스트들을 한정으로 "가장 위대한 메탈 음악가"를 뽑는 투표에서도 피터 레이놀즈가 무려 74.3%의 표를 쓸어가 1위를 했을 정도였다. 프로그레시브 메탈, 글램 메탈, 스래시 메탈, 둠 메탈, 파워 메탈, 팝 메탈 등 여러 메탈 장르들의 실질적인 창시자이기 때문에 메탈 음악가들에게는 "헤비 메탈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또한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노동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운 것 때문에 인간적으로도 대단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아일랜드에서는 거의 국부와 비슷한 수준인지라, 한 언론에서 투표한 "최고의 아일랜드인"에서 본래 아일랜드인도 아니고 영국 국적인데 아일랜드에서 살았던 그가 3위를 하기도 했다.

디스코그래피

앨범


 피터 레이놀즈 디스코그래피
[ Studio Albums ]
[ Live Albums ]
[ Compilations ]
[ 관련 문서 ]
Studio Albums
연도 앨범 명 장르
1971 1집 Synesthetic Associations 헤비 메탈, 블루스 록, 하드 록, 포크 록
1972 2집 The Soldier's Tale 헤비 메탈, 하드 록, 블루스 록
1973 3집 It's My World 헤비 메탈, 사이키델릭 메탈, 팝 메탈, 헤비 블루스, 포크 메탈
1975 4집 The Needs of Each Before Move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1977 5집 Is This the Life We Really Want? 헤비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아트 록, 록 오페라
Compilation Albums
연도 앨범 명
1975 1972 - 1975
1978 1975 - 1977
1982 Creamy Guitarist
1985 Sunny Blonde Sunshine
1988 Gold
1992 Greatest Hits
1993 Greatest Hits II
2006 Is There Somebody out there?
2019 He Came

싱글

빌보드 1위

  • What a Whole Life (1972)
  • In Your Blues (1972)
  • The Soldier's Tale (1973)
  • It's Just a Shadow (1974)
  • I'll Follow My Way (1975)
  • Story of a Man (1975)
  • Good Bye War! (1976)
  • We Shall (1977)

빌보드 2위

  • Eclipse (1972)
  • Second Floor, Harrods (1973)
  • Money (1973)
  • o̲o̲ (1974)
  • The Wind Blows (1975)
  • He Came in to a Colour (1976)
  • Powerful Amplification (1977)

어록

It's weird not to be weird.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더 이상하다.
Art is only a way of expressing pain.
예술은 고통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I believe in God, but not as one thing, not as an old man in the sky. I believe that what people call God is something in all of us. I believe that what Jesus and Mohammed and Buddha... and all the rest said was right. It's just that the translations have gone wrong.
나는 신을 믿는다. 하늘 위에 떠있다는 노친네 말고. 나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속에 잠재되어있다고 믿는다. 난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그리고 부처... 그리고 모든 신들이 모두 옳았다고 믿는다. 그냥 그들의 가르침이 곡해되었을 뿐이다.
전반적으로 곡들이 형편 없어요. 가사는 눈뜨고 볼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요. 길모어가 쓴 가사는 저열한 삼류에요.
핑크 플로이드 13집(A Momentary Lapse of Reason)에 대한 촌평

여담

  •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강해서 1970년대 이후로는 쭉 아일랜드에서 살았고, 실제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다. 북아일랜드 문제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서 북아일랜드는 아일랜드에 복속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가, 영국 주류 언론에 의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영국 언론의 90%는 정신병자 집단이다"라는 직설적인 말로 응수했다. 죽을때까지 아일랜드 시골집에서 기거하다가, 급작스럽게 건강이 위독해져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사망했다. 아일랜드 시골 마을이 좋았는지 아일랜드를 찬양하는 곡들을 많이 만들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였던 로리 갤러거와도 친한 사이였다.
  • 로리 갤러거와 헤어 스타일을 빼면 쌍둥이 수준으로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기타 연주법에 아일랜드계 혈통까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해서 숨겨진 형제 설이 돌기도 했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말 로리 갤러거와 피터 레이놀즈는 판에 박은듯이 닮아서 서로 친구가 되었다. 하여간에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지만 엄청난 동안으로 그루피족을 몰고 다녔다. 40대 후반에 찍힌 사진도 30대 초반급으로 보일정도로 상당한 동안이었다. 그러다가 50대 초반에 들어 애연가답게 얼굴이 폭삭 늙어서 죽기 직전에는 오히려 노안이 되었다.
  • 에릭 클랩튼과는 살아 생전 절친 사이였지만 정치 성향은 굉장히 달랐는데, 정치 얘기를 안하는 쪽으로 친구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 워킹클래스 출신 답게 엄청난 짠순이였다고 한다. 에릭 클랩튼이 말하길 "피터를 죽이고 싶다면 달리는 2층 버스 앞에 동전 하나 떨어트리면 된다"란다. 돈을 워낙 아끼는 성향이다보니 동전이 떨어지면 그것조차 주우려다가 버스에 치여 죽을거라는 소리다.


  • 1975년 더블린 공연 당시 바이올린 현으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한 퍼포먼스가 유명하다.
  • 기타를 많이 부숴먹는 록스타로도 유명한데 전성기에는 하루 라이브 연주에만 3개의 기타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기타가 그의 너무 빠른 손을 쫓아가지 못하고 맛이 가거나, 아니면 아예 과격한 퍼포먼스로 기타를 불태우거나 폭탄을 터트려버리는 식이었기 때문에 남아나는 기타가 없었다. 거기다가 무대에 난입한 극성팬을 쫓애느라 비싼 기타 2개를 부쉈고, 또 에릭 클랩튼과 정치 얘기를 하다가 분노해 에릭 클랩튼을 읽렉트릭 기타로 폭행하다가 또 하나를 박살냈다고 한다.
  • 난봉꾼으로 유명한 섹스 피스톨즈쟈니 로튼에게 현피 제안을 받은 바 있다. 정작 피터 레이놀즈는 섹스 피스톨즈를 1970년대 최고의 밴드라고 칭찬하는 등 섹스 피스톨즈의 대중적 인기에 도움을 줬다.
  • 젊은 시절 불교를 믿었고 후일 종교를 버렸지만 불교의 참선과 명상 등 불교적인 철학관은 매우 좋아해서 조지 해리슨과 함께 인도 여행도 가고, 불교 및 힌두교 교리를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 유명한 자동차 덕후라서 틈날때마다 모터 스포츠 경기를 보러가고, 페라리, 재규어, 알파 로메오 등 고가의 스포츠카를 타보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자동차를 그렇게 많이 모을 필요는 없다면서 정말 좋아하는 몇몇 차를 빼면 팔아서 모터 스포츠에 후원금으로 줬다.

음악 취향

기본적으로 헤비 메탈을 가장 선호했지만, 사이키델릭 록, 포크 록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고 인생 말미에는 팝 록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가 1998년 인터뷰에서 밝힌 "가장 좋아하는 앨범 25선"을 보면 그의 음악적 취향을 알 수 있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비틀즈, 1967
Never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
섹스 피스톨즈, 1977
Master of Puppets
메탈리카, 1986
The Beatles
비틀즈, 1968
Revolver
비틀즈, 1966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핑크 플로이드, 1967
Killers
아이언 메이든, 1981
The Doors
도어즈, 1967
British Steel
주다스 프리스트, 1980
1984
밴 헤일런, 1984
Led Zeppelin II
레드 제플린, 1969
Bluesbreakers with Eric Clapton
에릭 클랩튼, 1966
Abbey Road
비틀즈, 1969
London Calling
더 클래시, 1979
Let It Bleed
롤링 스톤즈, 1969
So Far So Good... So What!
메가 데스, 1988
Nevermind
너바나, 1991
Paranoid
블랙 사바스, 1970
Deep Purple In Rock
딥 퍼플, 1970
Blackout
스콜피언즈, 1980
Rumours
플리트우드 맥, 1976
Use Your Illusion
건즈 앤 로지스, 1991
Who's Next
더 후, 1971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벨벳 언드그라운드, 1967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킹 크림슨, 1969

음악을 공부하는 어린이에게 추천해줄만한 앨범 3개로 비틀즈의 "The Beatles",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그리고 플리트우드 맥의 "Fleetwood Mac"을 꼽기도 했다.

타 음악가와의 관계



시드 바렛과의 콜라보
Bike (1975)
밴 헤일런과 콜라보
Jump! (1984)[12]

놀라운 기타 실력과 철학적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깊은 주제를 다룬 곡들을 써내 1970년대에는 꽤나 신비스러운 이미지였지만 의외로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에릭 클랩튼과는 엄청난 절친 사이였다. 중간 중간에 잠깐 트러블들을 겪긴 했지만, 서로 음악적인 영향을 주고받던 음악적 파트너이자 옆집에 건너 사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라이브 에이드에 참석한것도 에릭 클랩튼의 권유 때문이었다.

1977년 이후 음악 활동은 접었지만 종종 후대 아티스트들을 만나서 음악에 대한 조언을 주기도 했는데, 1984년 밴 헤일런의 Jump라는 곡에 키보드를 쳐주기도 하고, 라이벌 밴드로 유명한 메가데스와 메탈리카에 동시에 코드 관련 진행법 조언을 해줬다. 1980년대 헤비 메탈 음악가 치고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메탈 음악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존재였는데, 피터 레이놀즈 스스로도 이런 점을 알고 기타 연주를 잘하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코드 조언, 또는 음반 평가 등 다양한 방법으로 후대 메탈 음악가들과 어느정도 교류했다. 음악가를 줄세우는 것을 싫어해서 가장 좋아하는 메탈 음악가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생전에는 밴 헤일런과 주다스 프리스트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또 동시대 음악가들과도 나름 친한데,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바렛이나 로저 워터스와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시드 바렛과는 쭉 사적인 친구로 지냈다. 사이키델릭 메탈의 모체가 되는 피터 레이놀즈 3집의 수록곡 "Let's Go Higher and Better"가 둘이 같이 마약 피우고 만든 노래라는 루머도 있었다. 반면에 데이비드 길모어와는 사이가 나빴는데,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가 데이비드 길모어와의 갈등으로 인해 탈퇴한 후 데이비드 길모어가 독자적으로 제작한 음반에 무지막지한 악평을 남긴게 화근이 되었다. 시드 바렛과 로저 워터스가 1985년 핑크 플로이드를 탈퇴한 이후 만든 솔로 앨범들에 대해서는 나름 호평했다. 지미 페이지, 로버트 플랜트와도 음악적인 성향이 맞아서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음악적인 동료가 되었다.

비틀즈의 존 레논, 폴 매카트니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고, 지미 헨드릭스와도 생전에 잠깐 만나 기타 합주을 하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와는 음악적인 성향은 꽤나 달랐지만 정치적인 운동을 함께하면서 가까워졌다. 상기한 로저 워터스와도 정치 성향이 아주 비슷해서 쉽게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정치 성향이 어느정도 달랐던 믹 재거나 에릭 클랩튼과는 정치 얘기를 하지 않기로 하면서 친분을 유지했다. 다만에 이것의 계기가 된게 그 유명한 기타 폭행 사건인데, 보수당의 지지자인 에릭 클랩튼과 정치 얘기를 하다가 격분해 에릭 클랩튼을 일렉트릭 기타로 두들겨 패버렸고 이후 피터가 사과하면서 앞으로 정치 얘기 하지 말자고 하면서 잘 해결되었다.

그 외에도 엘튼 존, 프레디 머큐리와도 같은 성소수자로서 어느정도 공감을 하면서 친분을 가졌고, 심지어는 섹스 피스톨즈의 쟈니 로튼과도 1980년대에 서로 만나보고서는 친해졌다고 한다.

이런 폭 넓은 관계 때문에 2005년 사망하고 이뤄진 자선 공연 Live 8은 거의 피터 레이놀즈의 추모 콘서트에 가까웠다. 폴 매카트니가 주도했고, 핑크 플로이드[13], 주다스 프리스트, 메탈리카, 밴 헤일런,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에릭 클랩튼, 퀸, 딥 퍼플, 킹 크림슨, 데이비드 보위 등 그와 생전에 협업을 했거나 친분이 있는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모여 피터 레이놀즈의 곡들을 불렀다.

정치관

매우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정치 성향으로도 유명하다. 비록 히피 사상에 심취하고 프라하의 봄으로 공산주의에 회의감이 커지면서 공산당을 탈퇴하긴 했지만 10대 때에는 공산당 청소년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대학교 때에는 영국 공산당을 지지하는 모임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상업적으로 상당히 성공한 이후에도 반자본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은 여전해서, 번 돈으로 산 스포츠카를 몇번 타고는 바로 자신의 철학관에 위배된다며 팔아 치워버리고 돈을 모두 기부한 일화도 있다.[14]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 뿐만 아니라 반전운동, 환경운동, 장애인 인권 등 여러 의제에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페미니즘과 동성애 권리를 위한 노래를 만들기도 하는 등의 진보적인 활동을 보여왔다.[15]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싱글곡은 빌보드 1위까지도 올랐다. 1980년대에는 우경화된 노동당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일부 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노동당 지지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노동당의 "더 큰 정부, 더 큰 통제" 정책에는 반대했다. 또 주변인의 증언에 의하면, 말년에는 뉴스를 볼때마다 토니 블레어에게 쌍욕을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정당 정치와 성향이 잘 맞지 않았던듯하다.

환경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폴 매카트니와 정치 성향이 맞아 정치적인 목소리를 같이 내는 사이가 되었고, 존 레논과도 경제적인 면에서 많이 일치해서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아일랜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반환을 공공연하게 주장해 영국 내 보수 언론에게는 비판을 받았지만, 아일랜드에서는 거의 국부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이 때문에 말년에는 아일랜드에서 여생을 보냈다. 스스로도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공존한다고 밝혔다.

1972년에 보수적인 정치 성향으로 유명한 에릭 클랩튼과 정치 얘기를 하다가 빡쳐서 스트라토캐스터로 에릭 클랩튼을 두들겨 패버렸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절교 직전까지 갔다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고 하면서 화해했다.

성적 지향성

여느 영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애자였으나, 그루피족들과의 관계에 회의감을 갖기도 했고, 부인의 각종 기행에 지쳐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하고 성적 지향성을 바꿨다. 초반기에는 양성애자에 가까웠으나 점차적으로 진지하게 동성애를 받아들여 말년에는 완전히 동성애자가 되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거의 무성애적인 성향으로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부터 그와 함께 투어를 다니며 드럼을 쳐주던 세션 드러머 브루스 베이커와 동거를 시작했고, 1981년부터는 공식적으로 파트너 사이가 되었다. 이후 죽을때까지 아일랜드에서 같이 동거했다. 비록 서로 갈등이 없는건 아니었지만 엔젤 유진과 결혼했을때보다는 더욱 행복한 삶이었다고 스스로 회고했다.

같은 동성애자인 엘튼 존, 양성애자인 프레디 머큐리와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는데, 프레디 머큐리, 데이비드 보위, 이기 팝과 관계를 맺었다는 유명한 루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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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개회식 연주자 명단
시간 연주자 원작자 곡명
8:00 콜드스트림 근위대 미상 God Save the Queen
8:02 에드 시런 핑크 플로이드 Wish You Were Here
8:05 블랙 사바스 피터 레이놀즈 Love in My Life
8:08 듀란 듀란 Bohemian Rhapsody
8:14 악틱 몽키스 비틀즈 Come Together
8:17 폴 매카트니 비틀즈 Hey Jude

각주

  1. 수상 거부
  2. 1972년 취득
  3. 100% 아일랜드계
  4. 1997년까지는 영국 노동당 당적을 갖고 있었으나 이후 토니 블레어를 "제2의 마거릿 대처"라고 비판하며 영국 노동당을 탈당했다. 그래서 사망 당시에는 아일랜드 노동당 당적만을 갖고 있었다.
  5. 은퇴
  6. 1위 핑크 플로이드, 2위 비틀즈, 3위 마이클 잭슨, 4위 엘비스 프레슬리, 5위 엘튼 존, 6위 레드 제플린, 7위 피터 레이놀즈
  7. 지미 페이지와 바람이 났다는 설도 있다.
  8. 본래 아일랜드 혈통에 관심이 있었고 72년도에 아일랜드 국적을 따기도 했다.
  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너바나의 상업적 성공은 커트 코베인의 사망을 앞당겼다고도 한다.
  10. 5점은 이 앨범 하나가 유일하다.
  11. 1위 핑크 플로이드 (22.4%) 2위 비틀즈 (20.2%) 3위 피터 레이놀즈 (9.1%). 4위 레드 제플린 (6.6%) 5위 롤링 스톤즈 (6.1%)
  12. 1977년 은퇴 후에 참여한지라 작곡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키보드와 기타 솔로를 쳐줬다.
  13. 1985년 이후 처음으로 원년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심지어는 시드 바렛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던 로저 워터스까지 뭉쳤었다.
  14. 여기서 그가 단순히 입만 떠벌리는 입진보가 아님을 보여준다.
  15. 다만 레디컬 페미니즘 등 여성우월주의적인 목소리에 대해서는 꾸준히 경계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해서 국내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여혐 음악가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진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