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4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트루먼 339인 (63.6%)
(30.2%) 161인 듀이
1944년 11월 7일
1944 대선
1948년 11월 2일
1948 대선
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투표율 56.9%
투표자 60,221,831표
선거일시 1948년 11월 2일 5시 ~ 3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부통령
앨번 W. 바클리
공화당
대통령
토마스 E. 듀이
부통령
얼 워런
선거인단
339 161인
전국득표
56.9%
34,287,674표
38.4%
23,146,692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민주당
해리 S. 트루먼 | 앨번 W. 바클리

1948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4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48년 11월 2일 실시된 41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나온 선거로, 민주당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 토마스 E. 듀이 주지사를 상대로 승리했다.

트루먼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서거한 이후 1945년 4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전당대회에서 그를 떨어트리려는 많은 난관을 돌파한 트루먼은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결과에 반발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가 탈당해 창당한 주권민주당은 몇몇 남부 주에서의 민주당의 지지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주권민주당의 목표는 선거에서 선거인단의 과반수 확보하는 후보가 없도록 하여 최종적으로 대통령 지명 권한을 하원으로 넘기는 것이었다.[1] 또한 트루먼은 헨리 A. 왈레스 전 부통령이 창당한 진보당의 공격도 받았다. 공화당 동부 자유주의 파벌의 지도자였던 듀이는 194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과 다른 후보를 물리치고 후보로 지명되었다.[2]

트루먼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은 남부 백인들과 노동조합, 카톨릭 및 유대인 유권자들로 구성된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 기반에 안정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또한 중서부의 농장주들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좋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새로 연방에 가입한 사우스코리아에서 트루먼은 압도적인 지지를 누리고 있었다. 듀이는 위험이 낮은 선거운동을 지향했으며, 트루먼을 직접 비판하는 것을 피했다. 민주당의 분열과 트루먼의 낮은 지지율로 인해 트루먼은 양자대결에서 사실상 패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사실상 모든 예측은 듀이가 당선될 것을 예상했다.[3][4]

이런 부정적인 예측들에 트루먼은 대선에서 보란 듯이 듀이의 161인을 두 배 이상 뛰어넘는 339인을 확보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트루먼은 듀이가 얻은 총 득표 38.4%와 큰 격차인 56.9%의 선택을 받았고, 제3후보들은 각 3% 미만의 득표율을 보였다.[5] 트루먼의 깜짝 승리는 민주당의 5연속 대선 승리였으며, 1880년 대선 이후 가장 긴 연승 기록으로 남았다. 1948년 의회 선거에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1946년 패배했던 양원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따라서 트루먼의 선거는 민주당의 다수당으로써의 지위를 확인 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1951년 수정헌법 제22조가 발효되기 전의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6] 이 선거는 민주당이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없이 승리한 마지막 선거이자, 메릴랜드 없이 승리한 유일한 선거이다. 또한 이 선거는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딥사우스 주 없이 민주당이 승리한 첫 번째 선거였으며, 1836년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없이 승리한 첫 선거였다.

후보

민주당 후보 지명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48년 민주당 지명 후보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앨번 W. 바클리
Alben W. Barkley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1945–1953)
미국 상원의원(켄터키)
(1927–1949)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7월 12일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에서 소집되었다.[7] 공화당은 당시 1946년 중간 선거에서 양원과 주지사의 과반수를 장악했고, 여론 조사의 대부분은 트루먼이 듀이를 때로는 두 자릿수 격차로 쫓아가는 모양새를 보여왔기 때문에, 전당대회의 열기는 낮았다. 게다가 일부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이 헨리 A. 왈레스의 진보당으로 이탈하기도 했고, 당 지도부는 왈레스가 민주당의 표를 충분히 잠식해 북부와 중서부의 선거인단을 공화당에 내줄 것을 우려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남부 지역을 확고히 통제하고 있었고, 남부 민주당 내의 노동조합과 흑인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민주당은 또 한번 분열하게 된다. 1947년 남부 보수주의자들은 트루먼이 노동조합 통제법을 가결 시켜 줄 것을 기대했으나,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런 기대는 사라졌고, 남부의 목소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제3자를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정책이나 스스로가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8]

여론조사에서 약세를 보이는 결과가 계속해서 발표되자 몇몇 민주당 지도부는 트루먼을 버리고 더 인기 있는 후보자를 지명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아이젠하워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는 것을 희망했다. 7월 10일 아이젠하워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했고, 거절 이후 윌리엄 O. 더글라스 대법관을 후보로 내세우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글라스가 대통령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반 트루먼 지도부와 대의원들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트루먼을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민주당 대회

1947년의 시민권 문제에 대한 트루먼의 입장은 너무 모호했기 때문에 주권에 대한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북부와 서부의 유권자를 실망 시켰음에도, 남부의 보수주의 유권자들을 달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트루먼의 주권 제안에 대해 각자 수정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전 텍사스 주지사 무디는 주 권리의 현상 유지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한편 위스콘신 하원의원 비밀러는 트루먼의 제안보다 더 확실하고 노골적인 강력한 시민권법을 제안했다.

트루먼과 각료들은 어떤 대안이라도 남부 대의원의 항의와 반발에 부딪힐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시민권이 중요한 도덕적 원칙이라고 믿었고 궁극적으로 온건한 방식으로 시민권 문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651.5 대 582.5로 통과한 비밀러 제안을 지지하고 방어했다. 이런 행동은 많은 대도시 당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시민권 제안이 도시의 증가하는 흑인인구가 민주당에 투표할 유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민권 제안의 통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와 남부 대의원의 집단 탈당을 불러왔다. 남아있던 남부 대의원들은 트루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7명의 민주당 대의원들이 트루먼을 민주당 후보로 뽑았고, 러셀은 남부로부터 266표 만을 얻는 데 그쳤다. 트루먼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켄터키 주의 앨번 W. 바클리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이 지명은 전당대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트루먼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바클리 상원의원과 나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해 여러분과 공화당 모두가 좋아하게 만들겠습니다....우리는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에 대해서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공화당 후보 지명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48년 공화당 지명 후보
토마스 E. 듀이
Thomas E. Dewey
얼 워렌
Earl Warre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47대
뉴욕 주지사
(1943–1954)
제30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1943–1953)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는 지도부의 노력이었고, 공화당의 경우는 보통 지역 위원회와 같은 풀뿌리 조직에서 영입해 달라는 요청에 가까웠다. 1948년 1월 23일 까지 공화당 지역 조직들은 대통령 예비선거를 치르는 모든 주에 아이젠하워의 이름을 성공적으로 집어넣는 것에 성공했고, 여론조사는 계속해서 그가 어떤 민주당 주자를 만나도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첫 예비선거가 다가오자 아이젠하워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현직 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군인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출마를 거부하고, 지역 조직들의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아이젠하워 영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역 조직들은 해럴드 스타센 전 미네소타 주지사를 지지하면서 조직을 해산했다. 아이젠하워의 출마 거부로 공화당 전당대회는 스타센, 토마스 E. 듀이 뉴욕 주지사, 로버트 A. 태프트 오하이오 상원의원, 캘리포니아 주지사 얼 워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아서 H. 반덴버그 미시간 상원의원의 경쟁 구도로 시작된다. 194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듀이는 예비 선거가 시작되었을 때 선두로 여겨졌다. 1946년 뉴욕 주 역사상 가장 큰 차이로 주지사로 재선되기도 했다. 듀이의 유일한 단점은 많은 공화당원들이 개인적인 면모에서 듀이를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듀이는 세간으로부터 차갑고, 뻣뻣하고 계산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태프트는 중서부와 남부 일부에서 공화당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파벌의 리더였다. 태프트는 많은 뉴딜 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복지가 고용주에게 불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며 유엔과 같은 외국 동맹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태프트는 두 가지 약점이 있었는데, 하나 그의 선거운동이 굉장히 공격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공화당 지도부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인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었다.

반덴버그와 워런은 모두 국내에서 인기가 많기는 했지만, 둘 모두 예비선거의 선거운동을 거부해 후보로 지명 받을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했다.[9] 유명한 전쟁영웅 맥아더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맥아더는 GHQ에서 연합국 최고사령관으로 복무하고 있었기에 선거운동에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재임 중에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다면 그 제안을 수락할 것임을 밝혔고, 일부 보수적 공화당원 사이에서는 주요 예비선거에서 맥아더를 승리시켜 유권자들에게 맥아더의 인기를 어필하고자 했다.

1948년의 깜짝 후보는 단연 미네소타 출신의 자유주의자인 스타센이었다. 그는 전시 해군에서 복무하기 위해 미네소타 주지사를 사퇴했고, 1945년에는 유엔 창설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스타센은 공화당 후보 중 가장 자유주의적이었지만, 예비 선거기간 동안 그는 많은 문제에 대해 모호한 답변만 하는 등 지지자들에게 큰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센은 위스콘신 예비선거에서 듀이와 맥아더를 압도했으며, 이 결과는 맥아더의 경선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다. 기세를 몰아 네브레스카에서도 듀이를 꺾으며 자신을 얻은 스타센은 태프트의 고향인 오하이오에서도 그를 이기기 위한 전략적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스타센은 오하이오에서 자신이 승리한다면 태프트가 사퇴하고, 태프트의 지지층이 자신에게 옮겨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프트는 홈스테이트인 오하이오에서 스타센을 이겼고, 선거 유세 중의 태프트에 대한 과격한 발언들은 당 내 보수주의자들의 적대감을 키워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센은 오리건의 지지율이 듀이를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고, 듀이는 이제 다른 예비 선거까지 지면 대권 도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오리건 예비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한다.

1948년 4월, 듀이는 그의 보좌관인 록우드를 오리건에 파견해 강력한 지역조직을 건설했다. 듀이의 강력한 뉴욕 후원단체가 보낸 15만 달러는 오리건에 126개의 광고판, 주 내 모든 방송국에서 수 백 번이 넘는 60초 라디오 광고, 정오마다 30분의 듀이 특집을 위해 지출되었다.[10] 듀이는 오리곤에서 광범위한 선거운동을 벌였고, 오리건에서만 3주를 보냈다. 당시 정치권의 화두인 사우스코리아 가입 문제에 대해서는 스타센이 모호한 입장을 견지한 것과 다르게, 강경한 반대 입장을 내비치며 차별화에도 나섰다.

1948년 5월 17일의 최초의 라디오 생중계 토론이 있은 지 나흘 후, 듀이는 오리건 예비선거에서 스타센을 꺾었다. 이 시점부터 듀이는 공화당의 두 번째 후보 지명에서 승리하는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었다.

공화당 대회

1948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 전당대회는 전국에서 TV로 생중계된 최초의 전당대회였다. 대회가 열리기 전 듀이는 대의원 수에서 큰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대의원 확보에 있어서 경쟁자인 태프트 의원은 여유를 가지고 대하고 있었지만, 듀이는 사활이 걸린 문제로 취급해 계속해서 대의원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듀이의 주요 상대인 태프트와 스타센은 태프트의 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나 스톱 듀이 운동을 계획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듀이를 반대하는 단일 후보로 합쳐지는 것을 반대하면서 그런 움직임은 무산되었다.[11] 대신, 태프트와 스타센은 반덴버그 상원의원과 함께 듀이가 과반수를 얻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의 대의원을 계속해서 보유하기로 동의했다. 이 이후에는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 태프트가 지도하는 상하원 의원들이 사우스코리아의 연방 가입을 요구하는 민주당의 제안에 찬성하거나, 스타센이 뒤늦게 가입을 지지하는 등 경선에서의 주목도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듀이가 2차 투표에서 50%에 근접한 득표를 하자 후보직을 모두 사퇴해 듀이가 전당대회에서 박수로 공화당 후보에 추대되었다.

선거

가을의 선거운동

트루먼의 인기가 식고 민주당에 치명적인 삼자 분열을 생각해볼 때, 듀이는 공화당 지도부가 보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큰 실수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조언에 따라 듀이는 위험을 피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피하면서 모호한 연설을 했으며, 연설 내용의 대부분은 낙관적인 미국의 모습이나 명백한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 연설은 그 유명한 "당신은 당신의 미래가 여전히 당신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발언까지 나오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루이빌 저널은 그의 연설을 역사상 어떤 후보도 연설을 4문장으로 요약할 수 없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농업은 중요합니다. 강은 물고기로 가득합니다. 자유가 없이는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앞에 놓여있습니다.

뉴욕에서 선거운동을 진행 중인 듀이

다른 기자는 듀이가 선거 운동에서 제시한 유일한 어젠다는 단결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반 미국인에게 내재적 호소력이 없는 단어였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듀이의 선거 운동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종 듀이는 유권자에게 단결함으로써 단결을 이룰 수 있다고 보이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편 트루먼의 선거전략가 클리포드는 트루먼의 선거운동이 "노동자, 농민, 흑인, 소비자 등" 네 개의 뚜렷한 이익집단에 집중해야 한다는 확실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트루먼의 움직임에는 이 네 가지 이익집단을 염두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었다. 여론조사에서 트루먼이 듀이를 쫓는 모양새였기 때문에 트루먼은 네거티브 선거 전략을 채택하기로 했다. 그는 듀이의 이름을 조롱하고, 듀이의 특정 문제 해결 거부를 비판했으며, 공화당이 통제하는 80대 의회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표현하는 등 비방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트루먼은 선거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공화당의 승리를 응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또 다른 대공황을 가져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듀이를 배부른 특권 혈통이라거나, "미국 소비자들을 벽에 박제할 사람"이라고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아이오와에서 열린 전국농민경연대회에서 트루먼은 8만 명의 농부들 앞에서 "공화당 의회는 이미 농부의 등에 삼지창을 꽂았다"라고 말하고,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트루먼은 공화당이 통제하는 의회를 최악의 무능한 의회라는 별명으로 불러, 공화당 의회 지도자인 태프트의 강한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12][13] 듀이의 지도 하에 공화당은 1948년 전당대회에서 사회보장의 확대, 공공주택에 대한 더 많은 예산, 시민권법의 제정, 연방 교육 및 건강 진흥 플랫폼 설립 요구와 같은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보수적인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트루먼은 순무의 날에 제80대 의회를 특별소집해 공화당 지도부가 자신의 비전을 통과하도록 대담한 행동을 보이면서 공화당의 분열을 이용하고 이간질했다. 이 때문에 80대 의회는 내내 트루먼의 손 위에서 놀았고, 이 기간 동안 트루먼의 입법을 방해하는 실질적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트루먼은 듀이의 정책이 대부분 공화당 주류보다 훨씬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인기 없는 80대 의회의 보수적이고 방해만 하는 경향을 따라간다고 규정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트루먼은 그의 말빨을 이용해 전국의 많은 곳을 여행하며 열정적인 지지자들과 함께 했으며, "Give'em hell, Harry"라는 구호는 미국 전역에서 외치는 인기 있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론조사 전문가들과 분석가들은 듀이의 리드는 뒤집을 수 없으며, 트루먼의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트루먼 주변에서 트루먼이 선거를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내인 베스 여사를 포함해 아무도 없었다. 오직 트루먼 자신만이 본인이 승리할 수 있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확신에 차 이야기할 뿐이었다. 트루먼은 선거운동이 끝나갈 무렵 개인적으로 주별 선거 예측을 작성해 보좌관인 조지 엘시(George Elsey)에게 보여주었는데, 이 종이에는 자신이 34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다.[14]

선거운동의 마지막 주 동안 전국의 영화관은 두 주요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두 편의 짧은 광고를 영화 상영 전에 재생하기로 동의했다. 당시 듀이는 충분한 예산이 투입되어 전문적으로 촬영된 광고를 보내 어떻게든 뉴욕 주지사의 시절의 신중한 이미지를 강조했고, 트루먼은 사실상 예산이 없는 상태로 제작되어 기존의 뉴스들을 짜집기해 급조된 영상[15]으로 자신의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을 강조했다. 하지만 듀이의 광고는 예산에 비해 인상 깊지 못했지만, 트루먼의 광고는 조잡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선거 운동이 끝나갈 무렵, 여론조사는 트루먼이 영화관 광고를 통해 이득을 얻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트루먼이 막판 추격을 벌인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정치 분석가들은 전통적인 예측 방법을 깨고 트루먼의 승리가 가능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물론 듀이도 선거운동 중간에 자신의 지지세가 줄어들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당장 모이는 군중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공격적인 선거운동을 취하기 위해 지도부에 방침 변경을 요구했지만, 지도부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듀이가 여전히 10%p 이상으로 앞서고 있기 때문에 공격적인 선거운동으로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클리포드 K. 베리먼의 1948년 10월 19일 만평은 10월 중순의 전문가들의 일관된 예측을 보여준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많은 신문과 잡지 및 정치 전문가들은 듀이의 임박한 승리에 대해 과신 했다. 그들은 선거 결과를 정해 놓고 듀이의 대통령 당선을 알리는 조간 신문을 미리 인쇄했을 정도였다. 뉴스위키는 50명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선거 결과의 예측을 부탁했고, 50명 모두 듀이의 승리를 확신했다. 드류 피어슨이나 조셉 더프와 같은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칼럼니스트들은 아예 듀이의 내각 각료로 누가 선정될 지 예측하는 글을 써 조간신문에 실어 놓기도 했다. 선거 전날 신문에서 피어스는 트루먼이 승리할 가능성은 "불가능"으로 써냈고, 선거 다음 날 신문에 인쇄된 그의 칼럼에는 "86일 후 백악관을 장악할 듀이의 주변 집단"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월터 윈첼은 트루먼에 대한 도박 확률이 15 대 1이라고 보도했다. 전국 전체 유통량의 78% 이상을 차지하는 500개 이상의 신문이 듀이를 지지했다. 트루먼은 10%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182곳의 신문사의 지지를 얻었다. 이 결과는 12%의 서먼드에게 밀리는 수치였다. 영국 가디언지의 저명한 기자 알리스터 쿠케는 선거 당일 "해리 S. 트루먼:실패의 방정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NBC는 TV에서 듀이의 승리가 확정되었을 때 튀어나올 두 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백악관 로고가 포함된 판자를 만들어두기도 했다. 트루먼의 패배가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당나귀가 그려진 판자는 아예 제작되지도 않았다.

트루먼이 선거 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고향인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로 향했을 때, 그의 측근 중 일부는 이미 다른 직을 제안 받고 수락해 곧 떠날 사람이었으며, 함께 선거운동 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기자도 그가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듀이의 승리를 예상한 많은 공화당 의원들은 입각을 고려해 D.C.에 집을 구입했다.

결과

트루먼이 웃으며 자신의 패배로 잘못 인쇄한 한 신문을 들고 다니는 유명한 사진.

선거 당일 밤, 듀이와 가족들, 선거운동원들은 자신 있게 뉴욕의 루즈벨트 호텔에 모여 결과를 기다렸다. 비밀경호국의 도움을 받아 트루먼은 캔자스시티에서 그를 취재하는 기자를 떠나 미주리 주 엑셀시어스프링스 근처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엘름스 호텔의 방을 체크인하고 저녁 식사와 터키식 목욕을 하고 일찍 잠을 청했다.

개표가 시작되자 트루먼은 일찍이 득표 수에서 주도권을 잡고 한 번도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NBC의 칼텐본과 같은 주요 라디오 해설자들은 듀이의 늦은 표가 나오면 트루먼이 주도하는 개표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있게 예측했다. 잠을 청했던 트루먼은 자정에 깨어나 방에서 라디오를 켰다. 그는 칼텐본이 트루먼이 총 득표 수에서는 앞서고 있지만,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고 발표하는 것을 듣고 다시 잠을 청했다. 새벽 4시 다시 깨어난 트루먼은 라디오에서 자신의 총 득표수가 무려 5백 만 표 이상 리드하고 있다는 것과 선거인단 확보 수에서 훨씬 앞서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지키고 있는 비밀경호국 요원들에게 캔자스시티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는데, 그 때 트루먼은 "이제 4년 더 일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이 날 밤 이후로 칼텐본이 트루먼의 패배를 예측하는 현학적인 목소리를 계속해서 기쁘게 흉내 냈다. 한편 듀이는 뉴잉글랜드와 뉴욕에서 일찍 돌아왔을 때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예상했던 득표 수보다 심각히 뒤쳐졌음을 인식했다. 그는 밤 동안 내내 개표 상황을 주시했으며, 이른 새벽들어오는 투표 집계 결과를 분석하고 오전 10시 30분 자신이 패배했음을 직감했다. 오전 11시 14분, 그는 트루먼에게 "아름다운 패배" 내용을 담은 전보를 보냈다.

친 공화당 일간지인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듀이의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에 화요일 오후에 여론조사가 끝나기 전, 다음날 헤드라인으로 "DEWEY DEFEATS TRUMAN"을 이미 인쇄했다. 트루먼의 승리가 많은 여론조사 기관과 전문가들에 충격으로 다가온 이유는 신흥 조사기법에 수정되지 않은 결함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48년 깜짝 선거의 주역은 단연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주였다. 트루먼은 이들 각 주에서 1%p 미만의 짜릿한 신승을 거뒀다. 세 곳은 75명의 선거인단을 선물했다. 듀이가 29,000표를 더 얻어 세 주를 모두 승리했다면, 그는 236명을 확보해 트루먼이 과반수인 267명을 확보하지 못하게 해 보수적인 서먼드가 이끄는 33명의 선거인단과 교섭하거나 공화당이 우위인 의회로 대선을 끌고 갈 수 있었다. 만약 이렇게 해서 듀이가 당선되었다면 듀이는 무려 천 백만 표(18%p)나 득표 수에서 뒤졌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했을 것이다.

이 세 곳의 주의 극단적인 줄타기가 듀이가 11월 3일 아침까지 패배를 인정하는데 오래 기다린 이유였다.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일리노이 등을 제외하더라도 트루먼은 아이다호를 적은 표차로 리드했고, 듀이 자신도 뉴욕, 미시간, 메릴랜드에서 비슷한 표 차의 리드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선거 판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한방이 되지는 못했다. 듀이는 이후에도 1944년엔 승리했던 중서부의 농촌 투표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믿었다.

듀이의 예상치 못한 패배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선거 운동에 있어서 그의 낙관적이고 관망자적인 접근, 트루먼의 공격에 대한 미온적인 대응이 꼽힌다. 저널리스트 줄스 아벨스는 듀이의 패배에 대해 "듀이의 패배는 무관심이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준비, 그리고 또 준비는 항상 듀이와 그의 선거캠프의 특징이었다. 중요한 것은 듀이의 선거운동이 너무나 조심스럽고 계산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듀이의 선거운동이 경직된 이유는 그의 능력이나 운동원들의 문제가 아니라, 지나치게 조심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트루먼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그의 공격적이고 포퓰리즘적인 선거 운동이 꼽힌다. 트루먼의 외교 정책, 특히 그 해 베를린 봉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80대 의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리고 사우스코리아 가입 문제에 있어서 결국 트루먼의 뜻대로 가입이 승인된 것도 혼자 결정조차 못하는 무능한 의회를 트루먼이 타개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결과만 낳았다. 또한 1946년과 47년의 비교적 심각한 경기 침체[16]를 겪은 후 경제는 1948년 내내 회복하기 시작했다. 1948년 민주당은 선거에서 양원을 모두 탈환했기 때문에 민주당에게는 빛의 해였다. 또 트루먼의 승리는 민주당의 전례 없는 다섯 번째 연속 대선 승리였다.

두 명의 민주당 탈당파는 예상했던 것 만큼 트루먼에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서먼드의 주권민주당은 예상보다 적은 네 개의 주를 확보하는데 그쳤다. 시민권 공약은 트루먼이 북부 및 중서부 주의 흑인 유권자들 사이의 다수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7] 왈레스와 진보주의자들은 전국에서 2.0%밖에 얻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이 예상한 수치보다는 훨씬 적었으며, 주권민주당보다도 0.1%p적은 수치였다. 왈레스는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한 것보다 자유주의자들의 표를 얻지 못했다.

만약 민주당의 분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트루먼의 압도적 선거 결과만을 불러왔을 뿐이다. 트루먼은 모든 서먼드 주를 확보했을 것이며, 왈레스의 존재가 없었다면 뉴욕, 미시간, 메릴랜드를 트루먼이 가져갔을 것이다. 이 주들에서 승리하면 선거 결과는 트루먼 438 대 듀이 95로 민주당으로서는 역사적인 대승을 거뒀을 것이다. 1940년 이후 민주당의 득표는 계속해서 줄어왔는데,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으로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마지막 승리보다 8.33%p, 득표 수로는 9백만 표를 더 얻는 값진 승리를 거뒀다.

한편 1948년의 대통령 선거는 이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치러진 다른 선거와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결과였는데, 이는 트루먼은 재선에 성공한 전쟁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대통령 후보 정당 홈스테이트 득표 선거인단
득표수 득표율
해리 S. 트루먼 (현직) 민주당 미주리 34,287,674 56.94% 339
토마스 E. 듀이 공화당 뉴욕 23,146,692 38.44% 161
스트롬 서먼드 주권민주당 사우스캐롤라이나 1,275,930 2.12% 33
헨리 A. 왈레스 진보당/미국노동당 뉴욕 1,217,328 2.02% 0
노먼 M. 토마스 사회주의자당 뉴욕 143,569 0.24% 0
클로드 A. 왓슨 금주당 캘리포니아 104,208 0.17% 0
에드워드 A. 테이처트 사회주의노동당 펜실베이니아 29,304 0.05% 0
파렐 돕스 사회주의노동자당 미네소타 13,662 0.02% 0
기타 3,504 0.01% 0
합계 60,221,831 100% 533
선거인단 과반수 267

각주

  1. 결국 대통령이야 트루먼이나 듀이 둘 중 하나가 되겠지만, 하원에서 승리하려면 자신들의 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 당시 전당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3. 특히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이 패배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스코리아의 55명의 선거인단으로는 만회하기 힘든 수준으로 동남부와 중서부에서의 지지가 부실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4. 당시 예측에서 듀이의 확정적 우세로 판단된 캘리포니아(28), 일리노이(24), 오하이오(23) 세 곳만 합쳐도 사우스코리아(55)를 넘긴 상황이었다.
  5. 서몬드는 결국 남부의 4개 주를 차지하는데 성공하긴 했다.
  6. 수정헌법 제22조는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재임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2회로 제한하였다.
  7. 공화당이 몇 주 전에 전당대회를 진행한 경기장이었다.
  8. 이 때문에 트루먼은 1947년 7월,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경선에서 맥아더에게 패배할 경우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제안은 아이젠하워가 거절했다.
  9. 그럼에도 이들의 지지자들은 각자 성향이 확실한 듀이-태프트-스타센이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자신이 지지하는 반덴버그나 워런을 타협 후보로 내세울 거라는 희망적인 믿음이 있었다.
  10. 오리건의 포틀랜드에서는 하루에 5번의 듀이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11. 결렬 이유는 꽤나 심플했는데, 단순히 스타센이나 태프트 모두 자신이 사퇴해서 꼭 듀이의 당선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듀이를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 특히 태프트는 트루먼의 사우스코리아 가입을 지지하고 자신을 따르는 의원들을 트루먼의 제안 투표하도록 독려한 터라, 잘못하면 의회에서의 입지가 대폭 축소될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기 때문에 특히 강력히 반발했다.
  13. 이런 와중에도 듀이는 이런 트루먼의 발언에 별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14. 결과적으로 33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면서, 이 예측은 거의 정확히 들어맞았다.
  15. 조약에 서명한다거나, 중요한 법안에 서명한다거나, 세계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의 영상이 대부분이었다.
  16. 해당 기간 실질GDP가 12%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15%를 넘는 상황이었다.
  17. 일리노이와 오하이오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