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스티븐슨 134인 (25.1%)
(74.9%) 399인 아이젠하워
1948년 11월 2일
1948 대선
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1956년 11월 6일
1956 대선
투표율 64.3%
투표자 72,799,857표
선거일시 1952년 11월 4일 5시 ~ 5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부통령
존 스파크맨
공화당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부통령
리처드 닉슨
선거인단
134인 399
전국득표
49.2%
35,792,653표
50.0%
36,414,293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리처드 닉슨  

1952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52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52년 11월 4일 실시된 미국의 42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공화당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민주당애들레이 E. 스티븐슨 후보에 대해 압도적 승리를 거뒀고, 이 선거로 1932년부터 시작된 민주당의 연승가도를 끝냈다.

일리노이 주지사 스티븐슨은 테네시 상원의원 에스테스 케파우버, 조지아 상원의원 리처드 러셀 주니어 및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의 3차 투표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다. 공화당 후보 지명은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와 오하이오의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 사이에서 치러졌다. 토마스 E. 듀이와 공화당 지도부의 지지를 받은 아이젠하워는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캘리포니아 출신의 젊은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을 러닝메이트로 삼아 태프트를 간신히 따돌렸다. 이 대선은 역사상 첫 번째 TV 광고를 송출한 선거였는데, 이 때 아이젠하워와 스티븐슨의 광고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아이젠하워의 카리스마가 굉장한 호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공화당은 트루먼의 사우스코리아 승인과 광범위한 냉전 전략을 공격했고, 소련 스파이들이 미국 정부에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과 스티븐슨은 인기 없는 트루먼 행정부와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뉴딜의 향수를 자극하는 선거운동을 벌였고, 공화당 정부의 재집권은 또 다른 대공황을 불러올 것이라고 불안감을 확산 시키는데 주력했다.

아이젠하워는 캠페인 슬로건인 "I Like Ike"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대전을 통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이 인기와 트루먼의 저조한 인기는 공화당의 승리로 이어졌고, 아이젠하워는 50.02의 득표율을 얻으며 1928년을 제외하고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로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던 남부의 버지니아, 테네시, 플로리다, 텍사스 등 모든 주에서 승리했다. 1888년 이후 웨스트버지니아 없이 공화당이 승리한 선거 역시 이번이 처음이었다. 1920년 이후 켄터키 없이 공화당이 승리한 미국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선거였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양원을 확고히 통제하는 것에는 모두 실패했다.[1]

후보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52년 민주당 지명 후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존 스파크먼
John Sparkma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1949–1953)
미국 상원의원(앨라배마)
(1946–1979)

민주당 후보 지명에 가장 유력한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이었다. 새로 제정된 수정헌법 22조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출마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1952년이 시작하는 해에 지지율이 곤두박질쳤다. 전 대선 후보였던 듀이가 주도하는 사우스코리아 문제에 대한 공화당의 반발은 네 번째 해에 접어들었고, 중국이 공산화되고 자유의 경계선이 후퇴한 상태에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의 반공산주의십자군은 "붉은 위협"을 강조하며 대중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또한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 일부와 연방 공무원들의 광범위한 부패가 적발되면서 트루먼은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상황이었다. 여론조사에서 그는 57%를 넘는 부정 평가를 받았으며, 이는 수십 년 후 리처드 닉슨이나 조지 W. 부시의 부정 평가에 이어 3번째를 기록했다.

트루먼의 경쟁 상대는 포퓰리스트인 에스테스 케파우버 테네시 상원의원이었다. 케파우버 의원은 1951년 전국적으로 방송된 조직범죄수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으며, 범죄와 부패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2월 15일의 갤럽 여론조사는 트루먼의 약세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 트루먼은 36%, 케파우버는 21%의 선택을 받았지만, 중도층에서 트루먼은 18%에 그쳤지만 케파우버는 두 배인 36%의 지지를 받았다.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케파우버는 트루먼 보다 높은 표를 받았는데, 이는 트루먼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케파우버는 "이 결과는 정부에 대한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욕망"이라며 겸허하게 결과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예비선거에서 자신감을 잃은 트루먼은 3월 29일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2]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공화당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 시절을 경고하는 광고.

트루먼의 퇴장으로 케파우버는 선두주자가 되었고, 그는 대부분의 예비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다른 주요 경쟁자에는 홈스테이트에서 승리한 휴버트 험프리 미네소타 상원의원, 플로리다 예비선거에서 승리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승리한 외교관 아벨 해리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 대의원의 대부분은 프라이머리가 아니라 코커스였기 때문에 민주당 주지사나 시장이 대의원을 사실상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트루먼을 포함한 민주당 지도부와 북부와 중서부의 민주당 위원장들은 케파우버를 굉장히 싫어했는데, 그의 범죄조직 조사위원회에서 마피아와 대도시 민주당 조직들 사이의 부정한 커넥션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 지도부는 케파우버를 신뢰할 수 없는 매버릭으로 여겼고, 그래서 그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트루먼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으면서도, 민주당 지도부도 수용 가능한 다른 후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후보자들은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러셀은 남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인종차별을 지지했으며, 트루먼이 주도하는 시민권법에 반대한 전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북부와 중서부 대의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트루먼은 뉴욕의 해리먼을 선호했지만 그는 선출직을 맡은 적이 없었고, 정치의 경험이 없었다. 앨번 W. 바클리 부통령은 74세의 고령인데다, 노동조합 위원장들의 반대로 추대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약점이 거의 없는 일리노이 주지사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을 찾아내며 민주당 지도부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스티븐슨은 일리노이의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으며, 달변가였고, 지적인 이미지였으며, 정치적으로도 온건파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952년 봄, 트루먼은 스티븐슨에게 대통령 경선 출마를 제안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주지사 재선을 원하고 있었고, 트루먼 대통령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민주당 지도부는 끊임없이 요청했으며 유권자들은 다가오는 전당대회에 깜짝 등판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민주당 전당대회

1952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공화당이 몇 주 전에 모인 시카고 경기장에서 열렸다. 전당대회가 스티븐슨의 홈스테이트에서 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전당대회 개막 인사를 하게 된다. 그는 유머 있고 감동적인 인사는 대의원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이 출마를 거부하는 상황에서도 대의원들이 그를 지명하기 위한 노력을 더 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리노이 지역조직 위원장인 제이콥 아비가 스티븐슨을 개인적으로 찾아가 경선 출마를 간청한 이후, 스티븐슨은 마침내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 출마 결정과 동시에 중서부와 북부의 지역 지도부는 빠르게 스티븐슨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케파우버는 1차 투표에서는 선두를 달렸지만, 승리에 필요한 표보다 훨씬 적은 표 만을 얻었다. 스티븐슨이 3차 투표에서 지명될 때까지 케파우버의 표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대의원들이 스티븐슨을 지명한 후, 전당대회는 부통령 후보 선출로 전환되었다. 존 스파크먼 상원의원과 마이크 먼로니의 두 명으로 후보를 좁힌 트루먼과 민주당 지도부는 앨라배마 출신의 보수주의자인 스파크먼을 후보로 지명했다. 이후 전당대회는 스파크먼을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로 확정했다. 그는 남부 정체성과 보수적인 가치관 덕분에 선택되었으며, 당 지도부는 스티븐슨과 스파크먼이 시너지를 내 균형 잡힌 표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52년 공화당 지명 후보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유럽최고연합군 사령관
(1951–1952)
미국 상원의원(캘리포니아)
(1950–1953)

공화당 후보 지명 경선은 록펠러 공화당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과 보수파인 로버트 A. 태프트 오하이오 상원의원, 태평양 인접 주의 지지를 받는 얼 워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싸움이었다. 이외에도 해럴드 스타센 전 주지사는 중서부에서 미약하지만 여전히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온건주의 성향의 록펠러 공화당원들은 1944년과 1948년의 자당 후보였던 토마스 E. 듀이 뉴욕 주지사가 여론을 주도했다. 온건파는 해외에서 냉전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유라시아에서 소련과 대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개입주의적 성향이 많았다.[3] 또한 온건파는 1930년대에 뉴딜로 정립된 사회보장정책의 대부분을 수용했지만, 보다 효율적이고 친기업적으로 정책을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온건파는 또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연패를 종식시키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고, 인기 있는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을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라고 느꼈다. 그런 이유로 듀이는 자신이 공화당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대선 출마를 거절했다. 공화당은 무려 20년 간 권력을 잃은 상태였고, 균형 있는 양당체제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는 강한 정서가 작동했다. 또한 백악관을 차지하는 당이 조지프 매카시 위스콘신 상원의원과 같은 급진주의 선동가의 고삐를 쥐는 역할이 될 것이라고 느꼈다.

태프트가 이끄는 보수주의 성향의 공화당원들은 중서부와 남부 일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중서부는 보수주의와 고립주의 정서의 보루였다.[4] 유럽인 특히 영국에 대한 혐오감이 흔했으며, 영국이 미국의 외교 정책을 자신의 입맛대로 전횡하고 있다고 느꼈다.[5]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뉴딜의 많은 부분을 반대했는데, 이런 정책이 개인의 자유와 사업의 자유를 크게 축소시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태프트는 1940년과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전당대회에 출마했지만 두 번 모두 지명을 받는 데에 실패했다. 63세의 나이인 그는 이번이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고, 그래서 그의 친구와 지지자들은 그를 위해 부지런히 뛰었다. 그는 결국 선거 이후 9개월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런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이젠하워 지지자의 설득으로 출마를 결정한 아이젠하워는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큰 표차로 승리를 거뒀고, 그의 지지자들은 투표용지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태프트에 대한 승리를 과격하게 만끽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가 개최되기 전까지만 해도 예비선거의 결과는 상당히 균등한 상황이었고,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후보 지명 경쟁은 굉장히 치열했다. 태프트는 네브래스카, 위스콘신, 일리노이, 사우스다코타 예비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아이젠하워는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매사추세츠, 오리건에서 승리했다. 스타센과 워런은 각각 미네소타와 캘리포니아의 홈스테이트에서만 승리하여 후보 지명에서 사실상 탈락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또한 여러 주의 열 명의 대의원의 지지를 받았지만, 대회 개최 전부터 그는 자신이 후보로 나설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상황이었다.

공화당 전당대회

아이젠하워-닉슨 포스터

1952년 시카고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대부분의 정치전문가들은 태프트와 아이젠하워의 대의원 득표 결과가 거의 비슷할 것으로 예측했다. 듀이와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매사추세츠 상원의원 등 아이젠하워 선거운동본부는 태프트가 텍사스와 조지아와 같은 남부 주에서 부당하게 대의원을 훔쳤다고 비난했고, 그 주의 보수주의 당 지도부가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대의원을 태프트를 지지하는 대의원으로 교체해 자리에 대신 앉혔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로지와 듀이는 그 주에서 태프트를 지지하는 대의원을 퇴거시키고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대의원으로 교체할 것을 제안했고, 이 제안을 "페어플레이"라고 홍보했다. 태프트와 지지자들은 분노하며 제안을 거부했지만, 전당대회는 이 제안을 658 대 548로 지지하기로 결정해 태프트는 많은 남부 대의원을 잃었다. 아이젠하워의 승리는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의 불충한 대의원이 자신을 지지하기로 결정했을 때, 스타센이 자신을 지지하는 대의원들에게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라고 요청했을 때 확신으로 바뀌었다. 결국 많은 남부 대의원들의 교체와 불충한 대의원의 지지로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 전당대회는 미국 역사상 가장 씁쓸하고 네거티브가 짙은 대회 중 하나였다. 태프트 지지자인 에버렛 더크센 일리노이 상원의원이 연설 도중 전당대회 현장에서 듀이를 가리키며 공화당을 패배의 길로 내몰았다고 소리쳐 비난했을 때, 대의원들의 야유와 환호가 비등하게 터져나왔다. 일부 태프트와 아이젠하워 대의원들 사이에서는 주먹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아이젠하워가 1차 투표에서 태프트를 적은 표차로 패배시켰을 때, 경선으로 인한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그는 태프트가 묵는 호텔 스위트를 방문했다. 태프트는 아이젠하워의 승리를 축하하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는 대의원을 훔쳤다는 비난에 대해 씁쓸해했고, 전당대회 이후 몇 주 동안 아이젠하워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를 보류했다. 1952년 9월 태프트와 아이젠하워는 뉴욕의 모닝사이드 하이츠에서 다시 만났다. 태프트는 아이젠하워가 선거에서 승리하면 태프트의 지지자들에게 공정한 몫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으며, 아이젠하워가 연방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모든 분야에 대해서 국내 사회주의자들과 맞서 싸울 것"과 같은 요구를 이행하는 대가로 아이젠하워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아이젠하워는 이 조건에 동의했고, 태프트는 공화당의 표를 높이기 위해 열심히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사실 아이젠하워와 태프트는 국내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안에서 입장을 같이했다.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보통 외교정책[6]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부통령으로 자신을 지지하면서 비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스타센이 지명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는 온건파와 보수파 사이의 분열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태프트가 탈당해 독자적으로 출마할 것을 경계해 태프트의 지지자들을 매료할 수 있는 러닝메이트를 찾고 싶어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러닝메이트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거의 별 생각이 없었다. 한 번 기자들이 그에게 누구를 지명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전당대회에서 누군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자리는 결국 중도주의자로 여겨졌던 젊은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리처드 닉슨에게 돌아갔다. 닉슨은 공격적인 운동가이자 치열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고립주의와 뉴딜 해체를 포함한 당의 우익 세력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 지명이 민주당에 대한 승리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선거

선거운동 문제

아이젠하워의 선거운동은 여성 표심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노력을 기울인 최초의 선거운동이었다. 그는 라디오와 TV광고 대부분에서 교육, 인플레이션과 같은 여성에 호소력있는 주제를 다뤘다. 아이젠하워의 선거운동은 유권자들에게 전화를 걸고, "Ike" 뱃지를 나눠주고 전단지를 배포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선거 당일, 아이젠하워는 여성 투표에서 확고한 과반수를 차지했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가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들인 '사우스코리아, 공산주의, 부패'를 정면으로 공격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에 소련 스파이들이 침투해 있다는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선거 기간 내내 트루먼 행정부와 민주당을 괴롭히는 주요한 이슈였다. 공화당은 사우스코리아가 아직 연방에 편입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는 것에 대해 민주당을 비난하고, 민주당이 연방정부 내에 공산주의 스파이를 품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양한 범죄로 기소된 많은 공무원들에 대해 트루먼 행정부를 공격했다.

스티븐슨은 보수적인 태프트 공화당원들과 온건한 아이젠하워 공화당원 사이의 균열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스티븐슨이나 스파크먼은 트루먼 행정부의 일원이 아니었고, 둘 다 루즈벨트 시절의 뉴딜 성과를 강조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허버트 후버 대통령 치하의 대공황의 재림에 대해 경고했다. 역사가 허버트 파멧은 스티븐슨이 트루먼 행정부와 차별화를 시도했지만, 그의 노력은 당시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공산주의에 대한 편집증과 이제 바뀔 때가 됐다는 공통된 인식을 불식시키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평가했다. 스티븐슨이나 다른 어느 누가 후보로 나왔더라도 유권자들의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에서 탈피하려는 욕망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선거운동

1952년 9월 메릴랜드 볼티모어에서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선거운동

많은 민주당 지지자들은 아이젠하워가 위스콘신에서 예정된 선거운동에서, 매카시가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간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나중에는 매카시를 지지하는 것처럼 매카시와 악수를 나누는 사진을 찍었을 때 분노했다. 한 때 아이젠하워와 친구였던 트루먼은 이런 배신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아이젠하워가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이후에는 "그는 내가 생각했던 거의 모든 것을 배신했다"고 입장을 바꿨다.

아이젠하워는 2차 세계대전에서의 주도적인 활약에 의해 엄청난 개인적 인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 많은 군중이 전국에서 그를 보기 위해 나왔다. 그의 캠페인 슬로건인 "I Like Ike"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슬로건이었다. 스티븐슨은 젊은 신흥 지식인 계급의 지지를 선도했지만, 아이젠하워는 대중적인 대부분의 계층에서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스티븐슨은 일부 지역에서 대통령이 되기에는 너무 유약하다고 조롱받았다.

닉슨 스캔들

1952년 선거운동 기간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은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인 리처드 닉슨이 부유한 기부자들로부터 공개되지 않은 "선물"로 18,000달러를 받았다는 비난을 받은 스캔들이었다. 실제로 기부금은 지지자들로부터 한 사람당 1,000달러로 제한되어 있었다. 민주당을 두고 "도둑"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하던 닉슨은 갑자기 방어에 나섰다. 아이젠하워와 선거 전략가들은 닉슨을 후보에서 떨어트리고 다른 러닝메이트를 뽑는 것을 고려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닉슨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던 아이젠하워는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닉슨은 TV 생중계를 통해 극적인 30분간의 "체커스 연설"로 정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연설에서 닉슨은 자신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고, 겸손하게 금융 자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했으며 동시에 아이젠하워의 입후보에 대한 빛나는 평가를 제시했다. 연설의 하이라이트는 닉슨이 "제 딸이 받은 강아지가 있습니다. 딸이 그 이름을 체커스라고 지었습니다. 저희는 그 강아지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한 순간이었다. 이 연설은 전국적으로 수십 만 명의 시민들이 공화당 전국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공화당이 닉슨을 지켜야한다고 촉구하게 만들었고, 아이젠하워는 그를 계속 부통령 후보로 신임했다.

공화당 우익의 매카시즘에도 불구하고, 선거운동 자체는 상당히 격식과 존엄 있게 이루어졌다. 스티븐슨은 민주당 20년 집권에 지친 유권자들에게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젊은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스티븐슨은 강경한 보수주의의 보루인 참전용사 계층에서 앞서 갔고, 매카시가 하고 있는 일은 애국심이 아니며, 미국을 위한 것도 아니라고 대담하게 선언했다.

선거운동의 존엄 있는 모양새에도 불구하고 두 후보 간의 혐오는 눈에 띌 정도였다. 스티븐슨은 아이젠하워가 매카시를 비난하지 않고 TV 매체를 활용하는 것을 비난했고, 아이젠하워는 스티븐슨을 존경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를 그저 평범한 직업정치인으로 묘사하며 싫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TV

1952년의 선거 운동은 TV라는 새로운 매체를 사용한 최초의 선거 운동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선도적인 광고회사의 노력에 의해 사용되었다. 광고회사의 책임자인 리브스는 1948년 캠페인에서 듀이에게 일련의 라디오 운동을 처음 제안했지만, 듀이는 이를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브스는 나중에 듀이가 약간 더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면 선거에서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리브스는 지난 7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말이 강력하면서도 초점이 맞지 않고, 너무 거시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젠하워의 연설 역시 그런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리브스는 아이젠하워가 메시지를 간단한 몇 가지로 단어로 압축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이젠하워는 처음 TV에 나서 연설할 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다. 텔레비전 조명은 늙어보이고, 매력적이지 않게 만들었다. 특히 그의 이마는 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경향이 있어 더욱 심했다. 아이젠하워는 CBS 특파원 브룬의 지적에 따라 이마를 덜 눈에 띄게 하기 위해 화장을 하고 자세를 바꾸라는 요구에 화가 났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그 요구를 따랐다. 리브스는 또한 아이젠하워가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안경을 착용하지 않기를 원했지만, 프롬프터가 없는 곳에서는 아이젠하워가 정면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거대한 필기판을 고안하기도 했다.

리브스의 텔레비전 광고는 혁신적이었지만, 대통령 후보를 자동차나 치약브랜드 마냥 대중에 판매하려고 한다는 이유로 상당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스티븐슨은 TV에는 전혀 출연할 생각이 없으며, 아이젠하워가 "시리얼을 파는 것처럼 대통령직을 먹으려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텔레비전을 보유하지 않은 많은 계층이 존재함을 지적했으며, 이는 아이젠하워를 지지하는 구성원들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선거운동이 끝날 무렵 아이젠하워는 주요 연설에서 선거에서 승리하면 사우스코리아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사우스코리아에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의 위대한 군사적 업적과 대중의 피로감, 미국 사회의 분열 등 여러 요인의 결합으로 아이젠하워의 승리를 향한 마지막 스퍼트가 시작되었다.

결과

선거 당일, 아이젠하워는 국민투표의 50% 이상을 획득하고 49개 주 중 39개 주를 차지함으로써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스티븐슨은 메이슨-딕슨 선의 북쪽이나 아칸소 서부의 주에서는 단 한 곳도 승리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는 남북전쟁 이후 공화당이 단 한 번만 이긴 남부의 세 주[7]에서 선택받았다. 민권운동의 여파로 "단단한 남부"가 붕괴되기 전에 민주당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아이켄 카운티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

아이젠하워는 인구가 25만 명 이상인 40개 도시 중 21개 도시에서 우승했다. 그는 여덟 개의 가장 큰 남부 도시 중 여섯 곳에서 우승했다. 선거 결과를 컴퓨터인 UNIVAC I가 예측하는데 사용된 첫 번째 선거였다.

한편 이번 선거는 사우스코리아의 전체 선거 결과 왜곡을 가장 많이 보여준 선거였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39개 주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에서는 단 60만 표의 격차 만을 보여줬다. 득표율로는 겨우 0.85%p차였다. 이 결과가 발표된 직후 공화당은 반발했으며, 사우스코리아의 연방 가입이 민주당과 트루먼 행정부의 사익을 위한 결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어떤 주에서 다른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누군가의 사익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굉장히 편협한 발언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 이상의 행동에는 나서지 않았는데, 실제로 민주당은 사우스코리아의 압도적인 지지로 하원 통제권을 유지하는 것에 성공했고, 상원의 경우 49 대 49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8]

선거 결과

선거 결과
대통령 후보 정당 홈스테이트 득표 선거인단
득표수 득표율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민주당 일리노이 35,792,653 49.17% 134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공화당 뉴욕 36,414,293 50.02% 399
빈센트 할리난 진보당 캘리포니아 240,746 0.33% 0
스튜어트 햄블론 금주당 텍사스 173,412 0.24% 0
에릭 하스 사회주의노동당 뉴욕 115,997 0.16% 0
달링턴 후페스 사회주의자당 펜실베이니아 25,203 0.03% 0
더글러스 맥아더 헌법당 아칸소 18,105 0.02% 0
파렐 돕스 사회주의노동자당 미네소타 10,402 0.01% 0
기타 9,046 0.01% 0
합계 72,799,857 100% 533
선거인단 과반수 267

카운티별 득표 결과


각주

  1. 상원은 49대 49로 동률이었기 때문에, 리처드 닉슨이 가부동수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어 근소한 우위로 볼 수 있다.
  2. 한편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케파우버에게 패배하기 훨씬 전에 재선 출마에 대한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3. 다만 유라시아에서의 대립은 사우스코리아 주와 같이 직접적인 국경선의 인접이 아니라 최소 보호령이나 자치령을 세워 간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지점에서 공화당 내에 의견 차가 존재했다.
  4. 고립주의 성향임에도 사우스코리아 문제에서 태프트 의원의 승부수에 의원들이 동의한 것은 사우스코리아가 같은 시민들이 사는 주이기도 하지만 상품시장으로서의 가치, 값싼 인력, 개발을 통한 막대한 경제적 이익, 본토에서 수 천 km 떨어진 초소라는 군사적 가치 그리고 외부 개입을 통해 소련의 의도를 떠보려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5. 하지만 이것은 중장년층의 생각이었고, 유럽에서 영국과 함께 싸운 청년층은 이런 경향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6. 사우스코리아 주 문제에 있어서도 큰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이미 가입한 상황에서 퇴출을 논의하는 것도 상당한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퇴출을 주장하는 지도부는 어느 진영에서도 없었다.
  7. 버지니아, 플로리다, 텍사스
  8. 민주당은 48년의 트루먼의 결단에 대부분 정치적 묘수였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민주당은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으로 향후 몇십 년 간 막대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