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M 경돌격차량 유커쇠
57M Kleinsturmwagen Eucause  · 57M Eucause
종류 경돌격차량
형식명 57M Kleinsturmwagen Eucause
개발국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개발사 야고트
체스터-볼프만 총기회사
슈라프트 조병창
제작사 야고트 ( 차체 )
슈라프트 조병창 ( 포탑 )
배치 1657년
역사
개발년도 1655년 ~ 1556년
생산기간 1657년 ~
사용국가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사용전쟁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
생산량 260량
일반 제원
승무원 2명
길이 3.68 m
높이 1.94 m
2.14 m
중량 1.9 t
공격력
주무장 55M 25 qb (25 mm) 자동포 1문
주포개발사 체스터-볼프만 총기 주식회사
사용 포탄 25×108 qb ( 약 31×137 mm )
부무장 56M 6.3 qb (7.92 mm) 자동총 1정
기동력
엔진 야고트 수랭식 4기통 엔진 23hp
마력 23마력
서스펜션 토션 바
야지 속도 41 km/h ( 노상 )
36 km/h ( 야지 )
항속 거리 165 km
변속 전진 5단, 후진 1단
도하 사실상 불가
방어력
장갑 6~15 mm
장갑 방식 리벳접합, 전기용접

57M 경돌격차량 유커쇠(게파르토어: 57ㅔㅁ ㅋㅡㄹㅏㅣㄴㅅㅠㅌㅜㄹㅡㅁㅂㅏㄱㅔㄴ ㅠㅋㅓㅅㅚ 57엠 클라인슈투름바겐 유커쇠, 게파르토 키르수스어: 57M Kleinsturmwagen Eucause)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가 설계·개발한 게파르토 제국의 '초소형 돌격차량(전차)'이다. 1655년 2월부터 시작된 설계는 1656년 7월 완성되었고, 이후 1657년 9월, 제52 흉갑기병연대에 최초 양산인도분이 배치되었다.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에 투입되어 비교적으로 빈약한 화력과 적은 숫자의 1658년식 전차를 사용하는 키르수스 황립육군을 상대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게파르토 제국이 처한 환경에 따른 미약한 생산량으로 인해 제52 흉갑기병연대를 포함한 일부 연대에만 배치되었고, 그마저도 생산 공장 환경에 따라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1 개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게파르토 제국에세르 지방만을 얻은 채 고립을 맞이했다. 키르수스는 전쟁 도중 개발된 전선자주포(키르수스어: Frontpanzerartillerie 프론트판처아르틸레리)를 개량해 전차(키르수스어: Panzerkampfwagen 판처캄프바겐) 사업을 추진했으며, 게파르토 제국 또한 기갑병기 사업에 손을 댄다. 게파르토 제국 기갑차량 권위자인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는 키르수스그란치프의 기갑교리가 게파르토 제국에 맞지 않다 판단, 1000년 간 포병을 바탕으로 영토 방위에 중점을 둔, 국제적으로 고립된 현시점의 게파르토 제국에 맞는 독자적인 교리를 발전시켰고, 유커쇠는 그에 맞게 개발되었다.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
전차의 정의는 오늘날 다소 변형되었다. (중략) 전차란, 인간과 비슷한 전고로도 작아질 수 있으며, 소총탄, 기관총탄에 대한 방어를 제공하며, 무엇보다도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에 계산적 운용이 탁월한 차량을 이른다.

헤르만 쾨지커니저, 『전차에 주목하라 Achtung panzer』 중

헤르만 쾨지커니저슈탄다르테 사관학교의 강의교수인 본인의 위치를 살려 게파르토 제국에 맞게 정립한 '전차' 논의를 설파했고, 이는 게파르토 군사계의 뜨거운 감자로 발전했다. 헤르만 쾨지커니저의 기갑차량 설계방향은 '초소형 전차', '중장갑 전차', '자주포' 세 갈래로 나뉘어졌고, 이중 유커쇠는 '초소형 전차'의 설계방향으로 개발되었다. '초소형 전차' 기획은 '최소한의 무장', '최소한의 운용인력', '최소한의 방위력', '최소한의 크기'의 특성을 지닌 채 키르수스의 전차 혹은 전선자주포와도 제한적인 교전을 실시할 수 있음을 목표로 했다.

더 세부적인 조건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적 보병측 소총탄과 중기관총에 대한 방어가 가능할 것.
  • 2인, 많아도 3인 정도의 인원으로 운용 가능할 것.
  • 적측 보병과의 교전, 적측 소형 전차―당시 키르수스의 기갑체계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대보병용 전차 다수와 이를 보조하는 대전차용 전차를 소수 도입하는 체계로 구축되었는데, 그 중 대보병용 전차를 겨냥한 것으로 추측된다―와의 제한적인 교전을 상정할것.

해당 조건을 바탕으로 '초소형 전차' 설계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전선자주포의 주류를 차지하던 육중한 몸체와 대형 포탑, 다수의 운용인원은 최소한의 크기와 1인용 포탑, 2인의 운용인원으로 대체되었다. 이윽고 '초소형 전차'의 명칭은 다카리바고 3세에 의해 '돌격차량'(게파르토어: ㅅㅠㅌㅜㄹㅡㅁㅂㅏㄱㅔㄴ 슈투름바겐)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초기 개발 경합 결과 농업용 트랙터 설계 경험이 있던 '야고트'가 전체적인 형체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른하이어제 트랙터가 원형 구조로 채택되었다. 또한 '체스터-볼프만 총기회사'가 기관총, '황제 폐하를 위한 슈라프트 병기제작국'이 화포류를 설계하였다. 포탑 생산의 경우 대구경 화기 생산이 익숙한 슈라프트 병기국이 맡았고, 특히 기관총은 당시 게파르토군 신형 기관총 도입 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같이 계획된 '중장갑 전차'와 '자주포' 사업이 게파르토 제국의 예산 부족으로 난항을 겪는 와중에도 '초소형 전차' 개발은 순항하였다.

2 실전

전차를 기병의 현대화로 구상한 헤르만 쾨지커니저의 의향에 따라 제52 흉갑기병연대가 첫 실전 운용을 맡을 예정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병 병과의 미온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설계가 1656년 7월 종료되었음에도 제53 흉갑기병연대가 첫 양산인도분을 수령한 시점음 1657년 9월 경이었다.

유커쇠의 첫 실전날은 1657년 9월 24일이었다. 제52 흉갑기병연대폴크스주 북부 숲에 주둔한 키르수스 보병을 대상으로 첫 작전기동을 실시하게 되었다. 본래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는 양측 모두 확정을 원치 않는 제한적인 국경분쟁의 양상을 띄었기에 중장비의 투입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유커쇠 투입 불과 몇 주 전 키르수스가 이러한 암묵적 합의를 깨고 구형 전선 자주포를 투입함으로써 게파르토 제국 또한 그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유커쇠의 첫 투입은 게파르토 장교단에게 인상적인 경험을 남겼다. 유커쇠의 55M 2.5qb 기관포는 열세에 몰려 투입된 전선자주포의 빈약한 보일러 철판을 찢어버렸고, 내부 탄약고의 유폭과 함께 ―유커쇠를 엄호하던 병력의 기록에 따르면― "불꽃놀이"를 일으켰다.

...도로변에서 우군이 보병대를 이용하여 접근하리라 판단한 채 수풀 속에 숨어있던 적군 보병대는 각 단차의 화력에 궤멸되었다. ... 적을 색적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적군의 놋쇠 뿔이 조금이라도 빛나면, 소대장차가 곧장 그 위치로 포탑을 돌렸다. 대개 그 직후에 수풀이 붉은 색으로 물들거나, 살점이 튀겼다. ... 우리는 본대로 복귀했고, 뒤이어 우릴 엄호한 아인종 연대들이 바닥을 기어다니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항복자들을 수습해 산채로 불태웠다.

제52 흉갑기병연대 소속 ' 드너시 게자' 대위의 작전보고서 중

게파르토 제국은 유커쇠의 첫 활약은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의 당사자인 키르수스보다 4개월 가량 앞서 신형 기갑체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음을 알렸다. 전술했듯이 키르수스 황립군은 그들의 기갑체계가 본격적으로 시동하기 이전이었기에, 한동안 유커쇠는 키르수스의 전선자주포를 격파하며 기관포의 위력을 과시했다. 전선에서 유커쇠가 나타나면, 이를 상대하기 위해 키르수스군은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전차포 중대를 급히 동원하거나, 낡아빠진 전선자주포의 야포가 유커쇠보다 신속히 화력을 투사해주길 바라야 했다. 혹여 대전차소총조차 없는 날에는 수류탄을 엮어들고 직접 돌진해야 했다. 유커쇠가 실전 투입되기 이전 그 비대칭적인 형태에 착안해 지어진 '기형아'라는 멸칭은 애칭이 되었다.

전선에 휘몰아친 유커쇠의 위상은 군사학계를 넘어 민간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는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다카리바고 1세 용맹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제52 흉갑기병연대는 최고사령부로부터 "황립 돌격차량연대"의 이름을 수여받았다. 제52 흉갑기병연대 '황립 돌격차량연대'는 기병의 황혼기인 1646년 설립되어 11년 간의 무명 신세를 거쳐 하루아침에 게파르토군의 최정예이자 중요 미래자산으로 거듭났다.

전차병 복식

전차병을 위한 자체적인 복식체계와 병과장이 게파르토 기병대의 전통을 따와 급히 신설되었고, 생산 물량이 극도로 부족했던 철모 역시 전차병을 위해 특수 개조되어 우선적으로 지급되었다.

한편, 당시 키르수스 황립군은 기갑 계획은 물론 이전 세대의 대전차 소총 및 대전차 수류탄 체계를 쇄신하고자 각종 개선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56호 대전차포Pak56가 있었다. 유커쇠보다 1년 앞서 배치되어 대전차수단이 부족하던 키르수스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전차병기 사업은 키르수스군의 병기개발 역량을 분산시켰다. 당초 계획했던 58년식, 63년식 전차는 긴 개발 진통과 군인정치인을 내세운 병과 간의 분쟁, 막대한 군비 유치로 인한 개발비 부족 등의 이유로 설계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대보병용 전차인 1658년식 전차는 주무장이 기관총에 불과했기에 유커쇠를 격파할 수 없었다. 유커쇠를 마주한 키르수스군에게 구식 전선자주포와 대전차포 중대를 호출하는 것 이외의 선택지는 고려될 수 없었다.

게파르토군 또한 상황이 여유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커쇠가 게파르토 군사학계의 엄청난 주목을 받고 황제로부터 손수 활약을 주문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은 기대수량의 최저치를 웃돌았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게파르토 제국이 마지막 출구로서 사활을 걸었던 에세르 지방 개발은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며 사회의 모든 역량을 집어삼켰다. ―허나 그것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는가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경돌격차량 유커쇠는 이를 집중적으로 편제해 운용하던 제52 흉갑기병연대를 제외하면 매우 극소수의 부대만이 시범적으로 배치됐다. 더군나 기갑 장비를 처음 도입한 게파르토 제국의 기계화 군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었기에 부품에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했다면 몇날 며칠을 정비고에 머무르며 교환할 부품이 배송되기만을 기약없이 기다려야 했다. 전차병들은 유커쇠를 신줏단지 모시듯 세심히 운용해야 했고, 전선에 얼마 없는 '소방수'로서 항상 막대한 전과와 전투피로 누적을 강요당했다.

3 포병의 관할권 주장

전차를 기병의 현대화한 산물로 생각한 헤르만 쾨지너키저 박사의 의향에 따라 유커쇠를 비롯한 돌격차량의 관할은 기병 병과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게파르토 제국 내에서 유서 깊고 명망 높던 기병 병과와 그 고위 장교층은 전차가 기병을 대체한다는 것에 모욕감을 느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미온적인 태도를 지녔다.

전차는 흥미로운 장난감이나, 그 뿐이다.

'졸탄 언드라시' 기병과 중장, 지역 신문 '에슈티 오도페스Esti Odopest'에서

유커쇠의 첫 활약 이후 유커쇠에 대한 기병 병과의 태도, 더 나아가 게파르토 제국군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전차 체계가 급격히 분야의 선두와 국민적 인기를 확보하자 타 병과의 견제 행보가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사례로 포병대의 요구가 있었다.

게파르토 포병대는 그들이 전선에서 직접 전투하지 않는 특성상 고강도의 업무에 비해 인정받을 기회가 흔치 않기에 유커쇠를 통해 활약하고자 했고, 유커쇠에 탑재된 기관포는 본디 포이기에 포병대에게 돌격차량의 관할권이 있다 주장했다. 그러나, 게파르토 제국 포병대는 그 실력과 규모에 비해 긴 평화시기로 인한 군기 문란에 항상 직면에 있었고, 이에 기병대는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적의 방진과 대열을 붕괴시키는 것이 존재 목적이던 그들이 전쟁 기술 발전으로 인해 그 존립이 위태로워져 돌격차량의 개발은 이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으며, 더군나 돌격차량의 개발은 오로지 기병대만이 이루어낸 성과이기에 포병대의 주장은 정당성이 없다 주장했다. 양측 간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자 결국 최고사령부인 게파르토 전쟁 및 신성주 방위성과 황실이 개입했다.

전쟁 및 신성주 방위성의 전면적인 결단에 의해 당분간 기병대 예하에 존속하되, 추후 증편을 통해 일정 규모를 이룬다면 기병대를 계승한 자체 병과로 분리독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양 병과 모두 해당 결정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돌격차량의 관할권을 주장한 포병대는 그다지 효과적인 명분도 없었고, 기병대 또한 돌격차량에 대한 투자가 미비했음을 시인하길 회피했기에 적극적인 반발은 없었다. 해당 결정과 함께 그간 포병대와 기병대를 비롯한 다양한 병과들이 자체적으로 운용하던 전선자주포 또한 기병대에게 인계된다.

4 표기 체계

게파르토군의 기갑차량들은 전 차량이 일련의 규칙으로 이루어진 표준적 표시제도를 따르고 있다. 이를 통해 쉽게 해당 단차가 어느 대대·중대 소속인지 확인할 수 있다.

단차 식별 부호 : 게파르토군의 모든 기갑차량은 일련의 자모음 서술을 통해 해당 단차가 어느 대대, 중대, 소대 몇 번 단차인지 구분한다. 아래는 예시이다.

  • 1대대 2중대 2번 단차 도색 : 1대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그라타'의 첫마디 ㄱㅡ가 도색 상부, 2중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니이마'의 ㄴㅣ가 그 아래에, 하이픈(-)을 통해 2번 단차를 의미하는 '2'가 기입.
  • 2대대 3중대 1번 단차 도색 : 2대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ㄴㅣ, 3중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도그타'의 ㄷㅗ, 1번 단차임을 의미하는 '1'이 기입. 모든 소대의 1번 차량은 소대장차임으로, 해당 도색과 동시에 소대장차 표식 또한 삽입한다.
  • 3대대 1중대 2번 단차 도색 : 3대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ㄷㅗ, 1중대 소속임을 의미하는 ㄱㅡ, 2번 단차임을 의미하는 '2'가 기입.

소대장차 표식 : 모든 지휘차량―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차량. 즉, 모든 전투소대 및 지휘소대의 1번 차량―은 차량 측면에 붉고 흰 체크무늬를 칠해 해당 차량이 해당 소대의 지휘차량임을 표시한다. 도입 당시 이러한 체크무늬가 전장에서도 전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여 적 병력에게도 색적 기회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이는 기병대의 전통으로부터 기인한 요소였기에 해당 의견 자체가 불경하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질타에 완전히 묵살되었다.

5 생산
야고트 체스터-볼프만 총기회사 슈라프트 병기국

게파르토 제국의 군수공장들은 대부분 유커쇠의 도입을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전통적으로 수백년 간 각종 구경의 화포와 총기를 생산해오던 여러 조병창들은 동력차량의 발주 요건에 대해 상당히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국영 조병창 합작회사이던 황제 폐하를 위한 슈라프트 병기제작국과 사기업 체스터-볼프만 총기회사가 각각 유커쇠에 탑재될 총기와 화포류를 설계·경합했다. 포탑 생산 자체는 대구경 화기 생산이 익숙한 슈라프트 병기국 소속 생산 공장들이 맡기로 했다.

유커쇠를 생산할 무렵 게파르토 제국의 군수 산업 역량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저하된 상태였으며, 경제적 혼란이 장기화됨에 따른 원자재 수급의 불안정 또한 존재했다. 이로 인해 야고트사와 슈라트프 병기국 소속 생산공장들은 매우 열악한 여건 아래에서 차체와 포탑을 양산해냈고, 이는 공장마다의 품질저하현상, 임의적인 유격·형상 변경 등 매 공정마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발생했다.

기예르 공장 생산품
체케데모어 공장 생산품

유커쇠 중에서 가장 표준적이라 일컬어지는 차량은 제국 서북부의 신성주 중 하나인 하이츤 신성주의 주도인 베아르란트에서 생산된 차량들이다. 아래는 표준적인 생산품이 아닌 것들의 에시이다.

슈탄다르테 신성주기예르에서 생산된 유커쇠 극초기 생산물량은 상부 전차장용 잠망경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개발 당시 잠망경은 설계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실전 투입 이후 추가된 것으로, 기예르 공장이 게파르토 제국 중 가장 먼저 유커쇠를 생산했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다. 슈탄다르테 신성주게파르토 제국 신성주 중에서 특히 군사적인 두각을 드러내는 주로, 제국 굴지의 장교양성기관 슈탄다르테 사관학교가 이를 증빙한다.

게파르토 제국 남부 다사르 신성주체케데모어에서 생산된 유커쇠 차체는 일반적인 유커쇠 차체와 큰 차이를 지닌다. 다사르 신성주게파르토 제국 내에서 가장 교통 기반시설이 낙후된 지역으로서 물자 수급에 있어서 큰 차질을 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최고사령부의 수요 물량을 맞추고자 무리한 결과 대대적인 차체성형의 불량을 유발시켰다. 총안구 또한 불량 성형의 영향이 끼쳐, 차체 내부에서 쉽게 총열을 교환할 수 있도록한 타 유커쇠 차체와는 달리 체케데모어 생산 유커쇠는 해당 부위가 간략화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다사르 신성주가 일부 도심지역을 제외하고는 근대화되지 못한 농촌 지역이 다수를 차지하는 신성주였기에 게파르토 제국 일반의 산업역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러한 산업역량의 낙후는 불량 부품, 저열한 장갑재, 삽탄 불량, 조준경 초점 불일치 등 총체적인 문제가 발생하기에 이른다. 총체적인 문제점으로 인해 1658년 4월, 다사르 신성주야고트 생산공장은 차체 생산을 공식적으로 종료하며 일부 부품만을 생산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이전 생산된 유커쇠 불량품은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문제점을 알고도 내부 부품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운용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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