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야 : 혁명의 잔재 ]
[ 4대 팩션 ]
PATRA Commonwealth of Nations SchutzBündnis Pacte de La Rochelle
대한제국
大韓帝國
국기 국장
광명천지
光明天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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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국명 (국문)
대한제국, 한국, 대한
국명 (한문)
大韓帝國
상징
국기
태극기
국화
오얏꽃
황실 상징
이화문
역사
1866년 제너럴 리노호 사건
1884년 갑신유신
1918년 제국보안법 제정
1919년 3월 민권 운동
1929년 한국 혁명
지리
수도
한성
위치
지구
한반도 및 부속도서
주변국
접경국
중화민국 장춘정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비접경 주변국
일본 사회주의 제국, 대일본제국
정치 · 경제
정치 체제
사회자유주의
입헌군주제, 민주주의 체제
국가 원수
이우 (Yi Wu)
행정 수반
조완구 (Jo Wangu)
경제 체제
자본주의 경제 체제
통화
대한제국 원 (圜)


1929년 일본에서 일어난 혁명의 여파는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갑작스런 국제정세의 변동은 한국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기성세력이던 유신회는 완전히 붕괴하였고, 이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3월 혁명의 주역인 신한청년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얻지 못한 자유는 심각한 혼란 또한 야기하였습니다. 신한청년당은 당내의 수많은 계파 간의 갈등과 백색, 적색 테러들로 의회에서 정당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했을 개혁들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 대한제국은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황실과 정치권의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브나로드 운동을 통해 농촌과 지식인 사이에서 세력을 불리고 있으며, 신한청년당의 계파들은 각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정당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특히 군 내 세력인 족청계의 핵심 인물인 이범석과 총력계의 박중양의 유착은 정부가 군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혁명 이전에 제정된 제국보안법은 제정 당시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논란을 낳고 있으며, 현 여당이 폐지하고자 하는 제 1의 법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극단주의에 대응하는데 효과적인 법안이기에 이 법안을 개정으로 마무리하려는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상황은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좋지만도 않습니다. 분데스베르케 쇼크의 여파는 아직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우리가 일본에 의존하던 산업 구조는 현재 우리에게 독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없는 한 우리의 경제 상황은 지속적으로 개선될 것이며, 몇몇의 성공적인 경제적 개혁은 이를 가속하고 있습니다. 신흥 기업들은 이를 견인하고 있으며, 하얼빈 조약은 군사동맹을 넘어 하나의 경제블록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한이 이런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지금 우리의 중대사는 정치, 경제가 아닌 외부의 위협일 것입니다. 북쪽의 소비에트 연방과 동쪽의 일본 사회주의 제국은 우리를 적화하고자 지속적으로 인력과 자본을 투입하고 있으며, 국내의 공산주의 세력들은 이들의 지원을 받아 제국의 안정을 해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대내외적으로 극단주의의 준동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위협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말로만 독립과 안전을 보장하는 서구 열강들을 믿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들은 극동에 개입할 여유도, 의지도 없습니다. 제국이 의지할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상제는 우리 황제와 제국을 도우소서.

개요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은 동아시아에 위치 국가이다. 일본 혁명의 여파로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며 현재는 하얼빈 조약의 주도국으로써 동아시아에서 반공주의 세력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분데스베르케 쇼크(Bundesberkekrise)의 여파로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문제를 겪고 있으며 북쪽의 소련과 남쪽의 일본 사회주의 제국의 위협으로 대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다.

1933년의 상황

내각총리대신 황제
이우
황제
정명 황제
 - 안정도 :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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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 황제라 불리는 이우는 1912년 11월 15일 의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조국은 일본의 지배 하에 있었고, 대한제국의 볼모였던 그는 어릴때부터 일본 유학을 명목으로 많은 기간을 조국이 아닌 일본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조국의 무력함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치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9년 일본육군사관학교 1학년으로 재학하던 그는 일본에서 벌어진 공산혁명으로 급히 조국으로 귀국하였고 뒤이어 발발한 조국에서의 혁명을 통해 황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혁명 당시 신한청년당의 혁명이념에 동조하였으며 혁명 이후에는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후원자로 변모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 이후의 그의 짧은 통치 기간동안 벌어진 정치적 혼란과 대외적 위협, 세계적인 경제적 불황은 대중들의 불만을 야기하기에 충분하였고 정치에 대한 불간섭을 고수하던 그도 더이상 입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조국에 있어 혁명의 후원자이자 제국의 대들보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개혁적인 성향과 젊은 패기는 대중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조완구 이우
  조선공산당 (1)
  조선공산당 (1)
  흑우회 (2)
  조선공산당 (1)
  신한청년당 좌파 (12)
  신한청년당 중도파 (19)
  신한청년당 민정계 (21)
  신한청년당 우파 (13)
  헌정국민회 (7)
  광명당 (4)
  신한청년당 극우파 (10)
  천도교 (1)
  광명당 (3)
  신한청년당 총력계 (5)
신한청년당 중도파 NYKP(M)
사회자유주의 Social Liberalism
국민정신
불안정한 연립정부
매일 정치력 획득 : -0.80
안정도 :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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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제국의 여당이자 3월 항쟁의 위대한 주역인 신한청년당은 지금 분열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이념 문제로 얽힌 당내 계파들의 갈등과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과격파들의 독단적 행동은 당 내부의 문제를 넘어 국정 운영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던 중도파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이 불안하고도 살벌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신한청년당을 근본부터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또는, 제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이 정당을 해체해버리는 것이 또 다른 해결책일지도 모릅니다...
적색 공포
안정도 : -5.00%
전쟁 지지도 : +5.00%
전선주의 외교 수용 : -80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외교 수용 : -80
자유지상적 사회주의 외교 수용 : -80
대중사회주의 외교 수용 :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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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1912년 고종 암살 사건과 1923년 순종 암살 미수 사건은 대한의 백성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유교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에서 공산주의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마수가 일본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은 지금, 동아시아는 극심한 '적색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향후 이 공포에 대한 대책이 앞으로의 국정 운영의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비대한 군대
사단 속도 : -10.00%
사단 조직력 : -10.0%
사단 회복 : -10.00%
사단 공격 : -20.00%
사단 방어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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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과 바다 너머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조국을 위협하고 있는 지금, 제국은 급격하게 육군의 규모를 증강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군대는 급격하게 증가한 규모는 감당할 수 없는 예산의 증가를 불러왔고, 상당수의 부대는 제대로 된 보급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향후 정상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백색테러와 적색테러
안정도 :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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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진영 간의 극심한 이념 대립은 상대 정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넘어 급기야 폭력과 테러를 일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성전 또는 순교라고 미화하지만, 이는 그저 정치적 이익을 위한 테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공황
소비재 공장 : 25.0%
안정도 : -25.00%
건설 속도 : -25.00%
생산 효율성 한도 : -25.00%
생산 효율성 성장 : -25.00%
공장 생산량 : -25.00%
조선소 생산량 : -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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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분데스베르케 쇼크로 시작된 대공황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정부는 세입의 급감으로 인한 재정난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브나로드 운동
매일 정치력 획득 : +0.03
연구 속도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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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나로드 운동은 19세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계몽 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대중 계몽 운동입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여당과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농촌을 근대화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 지식인들이 이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이념이 농촌에 전파되는 등 이념적인 문제도 산재하고 있어 당국이 이 운동을 지원하는데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 제국보안법

제국보안법은 1921년 당시 19대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의 주도로 제정된 법률로써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제국보안법은 1912년 공화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극좌 테러리스트에 의해 일어난 고종 시해사건 이후 들끓는 공화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이후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대부분의 반정부운동을 탄압하는데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29년 혁명 이후 여당이었던 유신회가 실각하였고 신한청년당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국보안법의 주요 탄압 대상이었던 신한청년당은 집권 이후 이를 가장 먼저 폐지하고자 하였으나 혁명 이후 미 대륙에서 시작된 대공황과 극단주의 광풍, 계파 간 권력투쟁은 이를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신한청년당이 집권한지 4년이 되어가지만 제국보안법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지지부진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지칠대로 지친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으며, 제국보안법은 머지않아 심판대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 1933년 탁지부 제국경제보고서

1929년 이래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우리 대한제국은 분데스베르케 쇼크의 영향을 씻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황제 폐하의 치세 동안 제국의 경제는 느리지만 회복세를 띄고 있으며, 이는 적극적인 외국 기업의 유치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신흥 기업가들을 육성하는 신흥기업지원법이 결실을 맺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순종 황제 폐하의 치세 동안에 독일 연방의 프랑크푸르트증권거래소를 본따 만든 한성증권거래소의 제국경제지수 또한 연일 상승세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 중 비약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두 기업이 외국 기업이 아니라 우리 기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긍정적입니다.

제국의 경제 규모는 아직도 일본 사회주의 제국에게 대적하기엔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추세로 관과 민이 합심하여 제국 경제를 일으켜 나간다면 앞으로 빠르면 10년, 늦어도 15년 안에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충분히 맞설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저희 각 부의 대소신료들은 오로지 폐하와 사직, 그리고 이 나라 대한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다만 저희를 믿으시고 선제 폐하들과 같이 굳건하게 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 신한청년당의 파벌

대한제국의 정국은 독립 이래로 안정적이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29년 혁명 당시 신한청년당은 유신회를 몰아내려 했지만 신한청년당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이를 위해서 신한청년당은 다른 세력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신한청년당을 현재의 거대 연립정당으로 만듦과 동시에 신한청년당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현재의 신한청년당은 연립 정당이라기보다는 개별 정당에 가까운 수준으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의 목표가 아닌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어 분열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 신한청년당 중앙계

흔히 신한청년당이나 중앙계, 합작파로 불리는 이들은 주로 여운형과 혁신계 인사들, 조완구와 김규식의 중도~중도 우파의 민주계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나 기본적으로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중앙계 간의 협력이나 타협 또한 다른 정파에 비해 수월한 편입니다.

허나 중앙계의 타협적 성향과 이상주의는 그들을 우유부단하고 현실성이 부족한 집단으로 보이게 만들었으며 당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음에도 극단주의 정파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향한 의지와 기개는 아직도 중앙계가 많은 지지를 받는 이유 중 하나이며,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황제 또한 그들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지는 그들이 아슬아슬하게 당내 우위를 점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나 이마저도 상실한다면 중앙계는 빠르게 와해될 것이며, 이는 곧 신한청년당 전체의 붕괴를 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 총력계와 족청계

이들은 각각 국민총력조선연맹과 조선민족청년단의 약자로써 총력계의 수장인 박중양과 족청계의 수장인 이범석의 정치적 합의로 이루어진 협력관계입니다.

이들의 정치적 이념은 불분명하나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워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목표는 강력한 민족국가의 건설이며 이를 위하여 무력의 사용 또한 불사하고 있어 주로 백색 테러와 암살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이 불분명한만큼 그들의 목표 또한 모호하기 짝이 없어 일각에서는 그들이 단순한 정치깡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한청년당에서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을 단순한 무뢰배들로만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역사

개화기

1866년 태평양 합중국의 정부선이 청을 방문하여 돌아가는 와중에 평양에 기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평화적인 접근을 시도하였고, 박규수는 이를 당시 조선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보고하였다. 대원군은 그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이 적대적 목적 없이 통상을 위해 왔을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는 조선이 서구에 갖는 저항심을 낮추는 계기가 되어 태평양은 조선에 서양 사상이 유입되는 창구가 되었다.

제한적이지만 평화로운 서구와의 교류가 이어지던 와중, 프랑스의 흑선을 통해 개항한 일본은 조선과 달리 빠르게 서구 문물을 수용하였고, 조슈 번을 주축으로 하는 유신 세력들이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선포, 제국을 표방하며 국가를 서구식으로 개편하고 군사력을 대거 증강한 일본은 류큐 왕국을 병합함과 동시에 조선 문제에 개입하고자 했다.

갑신유신

일본 정부는 일본 내 개화 사상가들을 통해 조선의 독립개화파들에게 접근하여 이들을 후원하고, 이들로 하여금 정변을 계획토록 하니 이는 갑신유신이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내 일본의 후원을 받은 급진개화파들은 갑신유신을 일으켰다. 조선은 태평양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인해 서구 사상이 어느 정도 확산되어 있었으며 이는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증가로 이어졌고, 갑신유신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때마침 청불전쟁으로 청군이 정변에 대한 초기 대응에 실패하게 되었고, 조선은 깁홍집을 필두로 하는 내각을 출범하였다. 이후 명성황후, 민씨들을 포함한 기성세력은 대부분 권력에서 축출 및 숙청되어 일본은 조선 내 친일 정권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갑신유신의 성공으로 조선에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강경대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과 일본군의 충돌에서 청이 저지당하면서 변법개화파가 완전히 정권을 붙잡았다. 이에 청은 흥선대원군이라도 재차 압송하여 조선 개입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하나, 개화파에서 이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한성 시내에서 대치가 계속되었다. 이내 우발적인 총성은 양국 간 긴장의 폭발을 일으켰고, 전면전으로 번지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내 양무운동의 미진은 청의 패배를 초래하였다.

일제 간섭기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확보한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급진개화파들은 갑신유신 이후 대한제국 최초의 정당인 신민회를 설립하였고, 일본의 후원 아래 여러 급진적인 개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분명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자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출자된 것이었기 때문에 신민회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경제구조를 갖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부산, 원산, 삼화에 일본군의 주둔이 허용되었다. 이처럼 철저히 일본의 입맞에 따라 설계된 조선은 대전기동안 대한제국이 일본의 충실한 병참기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절반에 이르는 온건개화파와 유림 세력, 민중들은 이를 국권 침탈로 받아들였으며 본격적인 저항 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와중 1913년 고종이 공화주의자의 손에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잠시 사그라드는 듯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이후 1918년 일본에서 일어난 쌀소동은 대한제국에서의 미곡 소요 사태로 이어졌다.

일본 내 미곡 가격 폭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쌀들이 일본으로 반출되었고,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쌀 생산량 자체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던 한국에겐 큰 악재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 관료들은 이를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사주로 간주하였고 이를 빌미로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던 이완용의 주도 아래 제국안보법이 중추원을 통과하였다. 제국보안법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신진 세력들의 반정부운동을 탄압하는 구실로도 적용되었다.

3.1 민권 운동

제국보안법은 반정부세력과 민중을 크게 자극하였고 이는 결국 1919년 3월 민권운동을 야기하였다. 민권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듯 하였으나 이완용이 민권운동의 주동자들을 공산주의자로 선동하면서 교묘하게 탄압하였고, 민권운동의 주요 세력이었던 여운형과 주요 인사들은 크게 힘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신민회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떨어져 나가 자유민정당을 창당하며 반발하였고, 이완용은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허울뿐인 약속만 받아낸 3월 민권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3월 민권운동을 주도한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헌정국민회와 광명당 등 많은 정당이 이 시기에 창당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의 민권운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많은 이들이 중국으로 피신하거나 지하 조직으로 숨어드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지하로 숨어든 이들은 과격화되어 1923년 순종 암살 미수를 벌이거나 총파업을 벌이는 등 제국은 점점 극단화되었다.

3월 혁명

1929년 일본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일본 혁명은 열도에 일본 사회주의 제국이라는 기형적인 공산국가를 탄생시켰고 이는 대한제국과 같은 극동의 여타 비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의 혁명 이후 대한제국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신한청년당을 필두로 유신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였고, 유신회는 이를 무마하려 하였으나 당시 황제였던 이강이 퇴위를 선언하는 등 강수를 두었고 차기 황제인 이우가 신한청년당을 지지하면서 황제의 지지와 민의를 잃은 유신회는 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반 유신회 세력들은 신한청년당 주도의 연정을 형성하였다.

당장 존속 위기의 기로에 놓인 대만의 구 제국 세력은 열강 각국의 지지 아래, 일부 조항을 수정하여 극동 공화국, 옛 종속국이었던 대한제국 등의 극동 국가들을 포섭하여 대공(對共) 방위체계를 구성하게 되었고(하얼빈 조약), 특히 혁명 당시 쓰시마를 확보하여 보호해줬던 대한제국과의 협력을 중시한 망명 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해 그들과의 공생관계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혁명의 충격은 극동 내에 끊임없는 여파를 일으키며, 만주파의 태동과 29년 한국 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하였으며, 대외적 방편들이 무색할 만큼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극동 정세의 변동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정치

정부 구성

대한제국 황제
이 우
내각총리대신
조완구
참정대신
안재홍
내부대신 외부대신 탁지대신 학부대신 농공상부대신
안창호 김규식 송진우 여운형 박중양
군부대신 제국익문사 독리
민영환 김구

군사

대한제국 육군

대한제국 육군(大韓帝國陸軍, Korean Imperial Army)은 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사회주의 제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육군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력이 혁명 이후 보충된 병력이며 그마저도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여 대전쟁 이전 시기의 화기로 무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군 내 세력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져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어려워진 경제 사정은 국방비의 축소로 이어져 대한제국군의 전투력에 큰 손실을 야기하였다.

현재 대한제국 육군은 지방의 29개 진위대, 수도의 1개 친위대와 2개 시위대, 1개 기병 여단, 1개 차량화 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한제국 육군항공대

대한제국 육군항공대 (大韓帝國陸軍航空隊, Korean Imperial Army Air Forces)는 대한제국 육군의 산하 부대로서 대전쟁 시기 창설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은 2개 전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편제는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육군항공대 1전대 대한제국 육군항공대 2전대
1전대 1중대 1전대 2중대 2전대 1중대 2전대 1중대
전투기 4개 편대 경폭격기 3개 편대 전투기 4개 편대 중폭격기 2개 편대

대한제국 해군

대한제국 해군(大韓帝國海軍, Korean Imperial Navy)은 동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대전쟁 시기 건조된 함정들이며 일본 혁명 발발 이후 일본 제국이 처분한 함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다가 해군의 숙련도 또한 그리 높지 않아 연안함대 수준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사회주의 제국의 위협이 점점 다가오는 상황에서 대한제국 해군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재 대한제국 해군은 총 32척의 함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함급 급명 수량
순양전함 대동급 1척
중순양함 연일급 1척
경순양함 연일급 1척
경순양함 송림급 2척
구축함 해무급 7척
구축함 박무급 11척
잠수함 유엽화급 9척

대한제국 해군항공대

대한제국 해군항공대 (大韓帝國海軍航空隊, Korean Imperial Navy Air Forces)는 대한제국 해군의 산하 부대로서 전간기 당시 해군의 강력한 주장과 필요성에 의해 창설되었다. 현재 대한제국은 3개 중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편제는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 해군항공대 1중대 대한제국 해군항공대 2중대 대한제국 해군항공대 3중대
1중대 2중대 3중대
전투기 4개 편대 뇌격기 3개 편대 경폭격기 1개 편대

경제

대한제국의 경제는 갑신유신 이래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투자는 대부분 일본의 입맛에 맞춰졌고 이에 따라 대한제국의 경제 구조는 일본에서의 수입 없이는 자국의 수요를 제대로 충당할 수 없는 기형적인 구조를 띠게 된다.

추후 작성 예정

인물

  • 이우
  • 이강
  • 여운형
  • 조소앙
  • 김규식
  • 안재홍
  • 이승만
  • 김구
  • 박중양
  • 김원봉
  • 김두봉
  • 이범석

정당 및 단체

  • 신한청년당
  • 헌정국민회
  • 자유민정당
  • 유신회
  • 흑우회
  • 조선공산당
  • 광명당
  • 조선민족청년단
  • 국민총력조선연맹

기타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