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친차이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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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친차이나 왕국'''({{llang|zh-yue|交趾王國 <small>가우지웡궉</small>}}, {{llang|vi|Vương quốc Giao Chỉ <small>브엉꾸옥자오찌</small>}})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약칭은 '''코친차이나'''({{llang|zh-yue|交趾 <small>가우지</small>}}, {{llang|vi|Giao Chỉ <small>자오찌</small>}})다. 국토 면적은 총 40,652 km<sup>2</sup>로 [[메콩강]] 하류 삼각주 전역이 해당되며, 북쪽으로는 [[캄보디아]], 북동쪽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며 서쪽과 남쪽은 [[타이 만]]과 맞닿고 있다. 인구는 680만 명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가장 적다. 수도는 [[칸저이]](芹苴), 최대도시는 [[메이자우]](美湫)이다.
'''코친차이나 왕국'''({{llang|zh-yue|交趾王國 <small>가우지웡궉</small>}}, {{llang|vi|Vương quốc Giao Chỉ <small>브엉꾸옥자오찌</small>}})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약칭은 '''코친차이나'''({{llang|zh-yue|交趾 <small>가우지</small>}}, {{llang|vi|Giao Chỉ <small>자오찌</small>}})다. 국토 면적은 총 40,652 km<sup>2</sup>로 [[메콩강]] 하류 삼각주 전역이 해당되며, 북쪽으로는 [[캄보디아]], 북동쪽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며 서쪽과 남쪽은 [[타이 만]]과 맞닿고 있다. 인구는 680만 명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가장 적다. 수도는 [[칸저이]](芹苴), 최대도시는 [[메이자우]](美湫)이다.


과거에는 [[프놈]], [[첸라]], [[캄부자]] 등 [[크메르족]]이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17세기 말부터 [[야우사이딕]](游世迪 <small>유세적</small>), [[목가우]](鄚玖 <small>막구</small>)<ref>[[베트남어]]로는 각각 '주테딕'(Du Thế Địch), '막끄우'(Mạc Cửu)라 부른다.</ref> 등이 [[명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호신]](河僊 <small>하띠엔</small>)에 정착하면서 독립적인 화인 사회를 형성시켰다. 이후 [[시암]]의 위협으로부터 호신 일대를 보호하고자 [[응우옌 주]]의 신하를 자처했으며, 1757년에는 [[캄보디아]]의 [[체이 차타 5세]]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영토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프놈]], [[첸라]], [[캄부자]] 등 [[크메르족]]이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17세기 말부터 [[야우사이딕]](游世迪 <small>유세적</small>), [[목가우]](鄚玖 <small>막구</small>)<ref>[[베트남어]]로는 각각 '주테딕'(Du Thế Địch), '막끄우'(Mạc Cửu)라 부른다.</ref> 등이 [[명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호신]](河僊 <small>하띠엔</small>)에 정착하면서 독립적인 화인 사회를 형성시켰다. 이후 [[시암]]의 위협으로부터 호신 일대를 보호하고자 [[응우옌 주]]의 신하를 자처했으며, 1757년에는 [[캄보디아]]의 [[앙 톤]]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영토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허나 19세기부터는 [[떠이선의 난]]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으며, 새롭게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에 맞서야했다. 이에 국권을 지키고자 [[타이청|야우사우인]](游守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접촉, 1858년 [[코친차이나 원정]]에서 베트남을 몰아내고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의 경제적 수탈이 지속되자, 당시 군주였던 [[시우라이]](紹豊 <small>티에우퐁</small>)<ref>[[응우옌 왕조]]가 코친차이나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번속국 관계를 청산함에따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ref>는 이를 해소하기위해 프랑스인들의 농장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고, 프랑스는 군사를 일으킨뒤 그를 폐위시켜 코친차이나 전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 직할지로 편입시켰다.
허나 19세기부터는 [[떠이선의 난]]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으며, 새롭게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에 맞서야했다. 이에 국권을 지키고자 [[타이청|야우사우인]](游守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접촉, 1858년 [[코친차이나 원정]]에서 베트남을 몰아내고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의 경제적 수탈이 지속되자, 당시 군주였던 [[시우라이]](紹豊 <small>티에우퐁</small>)<ref>[[응우옌 왕조]]가 코친차이나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번속국 관계를 청산함에따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ref>는 이를 해소하기위해 프랑스인들의 농장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고, 프랑스는 군사를 일으킨뒤 그를 폐위시켜 코친차이나 전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 직할지로 편입시켰다.

2021년 1월 19일 (화) 00: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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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Kingdom of Cochinchina
광둥어: Gaau1 Zi2 Wong4 Gwok3
베트남어: Vương quốc Giao Chỉ
프랑스어: Royaume de Cochinchine
크메르어: ព្រះរាជាណាចក្រនៃកូសាំងស៊ីន
코친차이나 왕국
交趾王國 (교 지 왕 국)
국가 평화의 왕국
(광둥어: 和平王國, 베트남어: Vương quốc hòa bình)
국화 연꽃
(광둥어: 蓮華, 베트남어: Hoa sen)
표어 太平一統世界 평화는 세계를 통일한다.
(베트남어: Thái bình nhất thống thế giới)
면적 72,123 km2 (아시아 35위, 세계 121위, 아시아 0.16%)
역사
- 일본 제국의 점령
1945년 3월 - 8월
- 독립 선언
1953년 10월 29일
성립 이전 - 프랑스 연합 (1946-1953)

인문 환경


인구 총 인구 6,853,245‬‬명(2021년 기준) / 세계 108위
민족 구성 한족 88.6%
베트남인 7.5%
크메르인 2.8%
기타 1.1%
인구 밀도 95.05 명/km2
기대 수명 78.7세(2021년 기준)
출산율 1.83 명(2021년 기준)
공용 문자 한자, 주음 부호, 로마자, 크메르 문자
종교 분포 기독교 30.2%
도교 15.1%
불교 12.3%
기타 4.8%
무종교·무신교 37.6%
HDI 0.652(2021년 기준) Medium세계 130위
국군 코친차이나군

정치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단일국가, 다당제, 성문법주의(대륙법계)
민주주의 지수 6.02(2021년 기준)
결함있는 민주주의(세계 75위)
국왕 함이우 咸耀[1]
국가
요인
총리 레이가이닥 利偕德
부총리 아우영서이 歐陽瑞
국회의장 윈지훙 完知鴻
사법원장 푼사우윗 潘琇悅
집권 여당 공민진보당 公民進步黨
  1. 본명은 '야우서우링얌'(游守鈴音 유수영음)으로 표준 중국어는 '유서우링인'(Yóu Shǒu Líng Yīn), 베트남어로는 '주투린엄'(Du Thủ Linh Âm)이라 부른다.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적 시장경제질서, 소유권 절대의 원칙, 사적 자치의 원칙, 과실책임의 원칙
명목
GDP
전체 GDP $824.9억(2021년 기준)
1인당 GDP $12,026
GDP
(PPP)
전체 GDP $2,074억(2021년 기준)
1인당 GDP $30,263
수출
입액
수출 $231.4억(2021년 기준)
수입 $226.8억(2021년 기준)
외환보유액 $92.8억(2021년 기준)
신용 등급 무디스 A3
S&P A-
Fitch BBB
화폐 공식 화폐 코친차이나 파이(交趾塊)
ISO 4217 CCF
국가
예산
1년 세입 $138.9억(2021년 기준)
1년 세출 $140.3억(2021년 기준)
지니계수 37.8(2021년 기준) / Low

단위


ccTLD .cc, .交趾
ISO 3166-1 687, CC, CCA
국제 전화 코드 +853
법정연호 서력기원, 연호
DST UTC+7(코친차이나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
날짜 형식 yyyy-mm-dd
운전석(통행 방향) 왼쪽(우측 통행)

외교


유엔 가입 1955년 12월 14일 가입
유엔 회원국 승인 여부 193개국 승인
여행 경보 전 지역[코로나19]

코친차이나 왕국(광둥어: 交趾王國 가우지웡궉, 베트남어: Vương quốc Giao Chỉ 브엉꾸옥자오찌)은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나라로 약칭은 코친차이나(광둥어: 交趾 가우지, 베트남어: Giao Chỉ 자오찌)다. 국토 면적은 총 40,652 km2메콩강 하류 삼각주 전역이 해당되며, 북쪽으로는 캄보디아, 북동쪽으로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며 서쪽과 남쪽은 타이 만과 맞닿고 있다. 인구는 680만 명으로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 가장 적다. 수도는 칸저이(芹苴), 최대도시는 메이자우(美湫)이다.

과거에는 프놈, 첸라, 캄부자크메르족이 지배하던 지역이었으나, 17세기 말부터 야우사이딕(游世迪 유세적), 목가우(鄚玖 막구)[1] 등이 명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호신(河僊 하띠엔)에 정착하면서 독립적인 화인 사회를 형성시켰다. 이후 시암의 위협으로부터 호신 일대를 보호하고자 응우옌 주의 신하를 자처했으며, 1757년에는 캄보디아앙 톤을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영토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허나 19세기부터는 떠이선의 난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으며, 새롭게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 왕조의 노골적인 침략 야욕에 맞서야했다. 이에 국권을 지키고자 야우사우인(游守姸)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와 접촉, 1858년 코친차이나 원정에서 베트남을 몰아내고 프랑스보호국이 되었다. 허나 시간이 지나면서 프랑스의 경제적 수탈이 지속되자, 당시 군주였던 시우라이(紹豊 티에우퐁)[2]는 이를 해소하기위해 프랑스인들의 농장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했고, 프랑스는 군사를 일으킨뒤 그를 폐위시켜 코친차이나 전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내 직할지로 편입시켰다.

코친차이나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 동안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벌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는 일본 제국의 도움을 받아 코친차이나 제국이 수립되기도 했다. 종전 후에는 프랑스 연합의 식민지로 복귀하였지만 새로 즉위한 호이심(開禪 카이티엔) 왕을 중심으로 헌법 제정, 의회 개설 등 부분적인 주권 회복이 이루어졌고 1953년에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독립 이후 코친차이나는 국왕의 비호 아래 성립된 칸웡 내각과 협력해 친미 반공 정책을 주 이념으로 삼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으며, 공산주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이는 비교적 안정된 정치 질서와 경제적 원조, 풍부한 농산 자원과 맞물려 경제 성장으로 나아갔고, 이 시기에 토지개혁공업화가 이루어졌다.

현재는 전임 총리였던 레이보우궝(李保光)의 아들, 레이가이닥이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나아가 3대 세습을 감행하는 등 족벌 정치에 폐단이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나 공민진보당의 일당 독재에 대한 불만은 대학생과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2021년 코친차이나 민주화 시위로 이어지고 있다.

각주

  1. 베트남어로는 각각 '주테딕'(Du Thế Địch), '막끄우'(Mạc Cửu)라 부른다.
  2. 응우옌 왕조가 코친차이나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고 번속국 관계를 청산함에따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