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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출정
極東出征
a trip to the Far East
냉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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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 작전을 수행하는 일본군
날짜
1958년 9월 12일 ~ 1958년 11월 28일
장소
구 러시아 극동
배경과 원인
러시아 군벌들의 만주국 치안 교란
목표
극동의 안정화
종류
군사작전
결과
일본, 극동 재정복. 극동 공화국 수립
영향
시베리아 지역 러시아 군벌의 일본 종속화
교전 단체
군벌
대동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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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군벌
대동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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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노비코프
바실리 슈크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유리 갈란스코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일:러시아 국기.pnh 다닐 하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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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1]
군벌
대동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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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보시비르스크: 약 50만 명
우랄 군관구: 약 40만 명
톰스크: 약 14만 명
기타: 약 2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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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약 6만 명
만주군:약 15만 명
피해 규모
군벌
대동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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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만 명 사망
민간인 100만 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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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군인 3500명 사망
각주
  1. 11월 배치 병력 기준


개요

1958년 일본 관동군이 감행한 구러시아 극동 침공. 이를 통하여 콘스탄틴 로자옙스키를 이용하여 괴뢰국 극동 공화국을 세우는 한편으로 극동을 안정화한다.

상세

1958년, 당시 소련 붕괴이래의 혼란 아래서 러시아가 군벌시대로 들어선 가운데, 일본의 극동 통제력이 약화하자 군벌들은 공영권, 특히 만주국을 향하여 잦은 약탈 및 침략행위를 벌였다. 이에 대하여 관동군은 도쿄 본국에 극동 토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무시하는 가운데 만주국의 피해는 계속됐다.

결국 1958년 9월 3일, 만러경계선의 상황을 보고받게 된 내각은 본래부터 극동 출정을 준비 중이던 관동군에게 극동의 안정화를 위한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 이에 본래부터 기회만 노리던 관동군의 세지마 류조다카기 마사오는 바이칼 호 부근에서 일본군 병사의 실종을 조작, 곧바로 관동군을 주공, 만주군을 조공으로 하여 극동을 침공하기로 결의하게 된다.

전개

1958년 9월 11일, 관동군은 이르쿠츠크의 철도역에서 일본군 병사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러시아 군벌인 우랄 군관구 측은 일본 측의 모함이라고 반박하였으나, 일본군은 명목상 다카기 마사오에게 세지마 류조가 명령하는 형식으로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9월 12일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르쿠츠크가 점령되고, 일장기를 게양했다. 9월 13일, 제국 해군이 해군성의 명령에 따라 지원 의사를 타전, 캄차카 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일 당일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만주의 일본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일본의 특별 군사작전이 시작되었음을 포고했다.

또한 14일에는 조센반도에 주둔하던 4개 사단 또한 출동 명령을 받고 만주국으로 월경했다. 이렇게 육해군 합동으로 극동 정복을 위한 작전이 시작되고, 대본영은 이를 사쿠라 작전(桜作戦)이라고 명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