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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4대 신에 의해 창조 된 세계.
위대한 4대 신에 의해 창조 된 세계.

2022년 11월 20일 (일) 21:27 판

위대한 4대 신에 의해 창조 된 세계. 그 곳에는 인간을 비롯하여 엘프,드워프, 오크, 고블린과 같은 지성을 가진 지성체들이 문명을 일구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빛의 신을 따르는 인간들의 국가 제국은 일명 교회 공화국이라고 불린다.

신화의 시대

세계의 창조

태초에 빛께서 꿈을 꾸시니 그곳을 이첼로스이라 하시니라

태초에 이 존재했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에서 빛은 잠을 자고 있었다. 빛은 잠을 자며 꿈을 꾸었는데 그 꿈 속이 현재 세상의 이상향, 원조라 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 이첼로스였다. 그곳은 이 세계 그 자체였으며 이 땅의 생명체들은 악을 모르며 모두 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첼로스의 생명체들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존재가 등장했으니 그 자가 바로 어둠이었다. 어둠은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이첼로스에서 선의 결핍을 통하여 악을 탄생 시켰다. 이첼로스에서 악을 창조한 어둠은 공허 속으로 추방 되었으나 어둠은 공허 속에서 힘을 길렀다. 어둠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면서 어둠은 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어둠의 복수는 끝내 실현 되었다. 빛은 어둠의 공격으로 잠에서 깨어났고 이첼로스는 사라졌다. 빛은 이첼로스의 멸망에 분개하여 어둠을 공허 깊숙한 곳에 봉인 하였으니 그곳이 사후 세계이다. 그리고 어둠을 감시하고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달을 창조하였다.

한번 잠에서 깬 빛은 다시 잠에 들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첼로스를 볼 수 없게 된 빛은 공허에 다시 한 번 이첼로스를 재현하고자 하였고 세계가 창조 되었다. 은 6일 동안 세계와 생명체 그리고 최초의 지성체 엘프가 창조 되었다. 이때 생명체를 창조하며 부여된 빛의 힘을 마력이라고 한다.

엘프 초고대문명

이 세상 그 자체이자 원동력이었던 이첼로스와 달리 공허 속에 창조된 세계는 불완전했다. 생명체가 태어나 제 명을 끝내고 죽는 것이 당연하던 이첼로스와 달리 세계의 생명체들은 죽지도 태어나지도 않았다.

생명과 죽음

엘프의 폭주를 처단한 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불완전성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은 생명체의 탄생과 유지를 관리하는 생명과 생명체의 죽음과 사후를 관리하는 죽음을 창조 하였다. 그리고 생명은 지상에 죽음은 지하에 강림하여 맡은 일을 하도록 하였다. 지상에 강림한 생명은 그 땅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의 힘으로 순식간에 자라났고 지역 전체가 울창한 숲이 되었다. 그 땅이 바로 트란몬치움스이다. 거대한 숲은 자연스럽게 생명체를 끌어보았고 이러한 흐름을 따라 엘프들도 트란몬치움스에 정착하였다.

오크와 고블린의 탄생

생명은 놀이와 유흥의 신이다. 세계를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 삶의 이유를 만들어줘야 됐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죽음은 균형과 질서의 신이다. 생명체들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며 그 일에 누군가 개입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생명은 언제나 죽음을 상대로 놀이를 제안했다. 균형과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죽음을 놀려 먹는 일이 재미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엘프들의 숭배를 받는 것에 질린 생명죽음에게 세계의 탄생 이래 다시는 없을 내기를 제안 한다. 바로 지성체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물론 죽음은 그 제안을 거절 했으나 생명의 현란한 말솜씨로 죽음을 설득하고 지성체를 창조하게 된다. 이때 생명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질병을 죽음드워프를 창조했다. 하지만 빛의 힘으로 창조 되지 않은 지성체들은 완전하지 못했다. 드워프는 이 시기에 탄생 되었음에도 지하에 문명을 이루어 지상으로 나온 것은 인간의 역사보다 짧았고 오크와 고블린은 남성만 존재하여 마력이 가득한 진흙은 빚어 번식 하였다.

최초의 전쟁

오크와 고블린 그리고 드워프생명죽음이 활동하는 트란몬치움스에서 처음 등장 하였다. 드워프는 지하에 문명을 이루고 있었기에 엘프와 조우 할 일은 없었으나 오크와 고블린은 번식을 위해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 하였고 이는 숲의 황폐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오크와 고블린엘프 간의 전쟁이라는 최초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나 전쟁은 엘프의 승리로 끝이났고 오크와 고블린트란몬치움스에서 추방 되었다.

엘프의 분화

전쟁의 원인이 생명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프들은 그들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신학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초기에는 생명 숭배를 거부하는 이들의 주도로 이루어졌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알 수 없는 이유로 생명 숭배를 거부하는 이들의 대다수가 사망 하면서 신학 논쟁의 결과는 생명 숭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 지어졌다. 생명 숭배를 거부 하면서 생존한 극소수의 엘프들은 트란몬치움스 북쪽의 변방 지역으로 추방 되었다. 이때 추방된 엘프들은 생명 대신 죽음을 숭배 하였다. 이때부터 생명을 숭배하는 엘프들을 자연엘프, 죽음을 숭배하는 엘프들을 세속엘프라고 칭하게 되었다.

인간의 창조

트란몬치움스에서 추방된 오크와 고블린은 현재는 아르키펠라고라스의 알 무라 사막 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정착 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번식을 위해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 하면서 땅을 황폐화 시켰다. 그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오크와 고블린에 대항 할 지성체를 창조하니 이들이 바로 인간이다.

도시의 시대

아르키인과 바르바론인

아르키펠라고라스의 거대한 두 호수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들이 건설 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르키인이라고 칭하였고 그 외 지역의 인간들은 야만인이라는 의미에서 바르바론인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아르키인들은 현재 인간 세계의 근간이 되는 무수히 많은 지식과 사상, 기술을 만들고 발전 시켰다. 아르키펠라고라스의 바르바론인들 또한 이들 나름대로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 아르키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세계를 탐구하며 보르하스의 라인란트 일대까지 아르키인의 도시를 건설한다.

하지만 아직 이 시기의 아르키인들은 정신적으로는 하나된 아르키인이라는 동질성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무수히 많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 되어있어 알 무라 사막의 오크와 고블린에게 대적 할 만큼의 국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아르키펠라고라스 동맹

알 무라 지역이 오크와 고블린에 의해 막대한 양의 마력을 소모 하면서 사막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자 오크와 고블린은 인근 지역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확장은 자연스럽게 아르키인바르바론인의 영역까지 이어졌고 오크와 고블린의 공격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아르키인바르바론인은 오크에 대항하기 위한 광범위한 동맹을 결성하니 이것이 바로 아르키펠라고라스 동맹이다. 그리고 아르키펠라고라스 동맹오크와 고블린을 대상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이름을 따 헤로도토스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은 현재 아나톨리아 지방에 위치한 테르모필 길목에서 아르키펠라고라스 동맹이 대승을 거두면서 오크와 고블린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이후 패배한 오크와 고블린은 사막이 되어버린 알 무라 지역을 버리고 북방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니 그곳이 오르크란트 지방이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아르키펠라고라스 동맹은 내부에서 오크와 고블린이 남기고 간 수 많은 부를 놓고 전쟁이 벌어지니 이 전쟁 또한 전쟁을 기록한 투키디데스의 이름을 따 투키디데스 전쟁이라고 한다.

왕국의 시대

루멘 왕국의 성장

루멘 왕국은 오늘날 팔츠 지방에 위치한 왕국이다. 이들은 현재 보르하스의 라인란트 지방에 위치한 아르키인 개척지인 마그나 아르키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아르키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들로 스스로를 루멘인이라 칭했다. 루멘 왕국은 총 8 명의 왕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마그나 아르키아 출신의 아르키인이자 6대 국왕인 대(大) 타르퀴니우스는 루멘 왕국아르키인의 선진적인 문물들을 대거 도입하여 훗날 루멘 제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다.

공화국 혁명

6대 국왕 마그누스 타르퀴니우스의 손자이자 8대 국왕인 미노르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혈통을 굉장히 중시하는 자였다. 그는 귀족들의 회의체로 국왕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원로원을 제거하고 루멘 왕국의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다. 미노르 타르퀴니우스는 마그나 아르키아에게 접촉했다. 당시의 마그나 아르키아는 내부로는 부패한 지도층과 개혁파의 정치적 혼란을 외부로는 투키디데스 전쟁을 피해 유입된 대규모의 난민으로인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미노르 타르퀴니우스는 마그나 아르키아의 개혁파를 루멘 왕국의 지도층으로 만들고자 했고 이들과 함께 원로원을 숙청 할 계획을 세운다.

그로부터 몇년 뒤 원로원의 대다수가 장군으로 참여한 루멘 왕국군이 마그나 아르키아를 정복하기 위해 원정을 나섰다. 이들은 미노르 타르퀴니우스와 마그나 아르키아의 개혁파가 준비한 함정에 빠져 전멸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원정에 참여하여 원로원을 함정에 빠트리고 도망치기로 예정 되어있던 미노르 타르퀴니우스의 장남 섹스투스의 실수로 계획이 원로원에게 들통 나면서 마그나 아르키아 원정군은 루멘 왕국으로 회군하여 미노르 타르퀴니우스를 처형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

이 역사적인 회군을 위대한 업적이라는 뜻을 담아 에그레지움 회군이라고 칭한다.

공화국의 발전

루멘 공화국초창기 역사는 외부로는 침입에 대한 저항과 확장의 역사이고 내부로는 체제 확립을 위한 갈등의 역사였다. 공화국 혁명 이후 가장 먼저 있었던 혼란은 루멘 왕국 내 이민족의 봉기였다. 왕실의 폭정 앞에 무릎 꿇어야 했던 이민족들이 왕실이 무너진 이후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물론 모든 봉기는 시민군에 의해 진압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크게 두 가지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시민군의 파업 과정에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평민회의 설립이고 다른 하나는 이민족의 제한적 시민권 인정이었다.

1차 켈트전쟁

내부의 혼란을 잠재우고 영토를 확장해나가던 루멘 왕국 갑작스럽게 성장한 새로운 이들의 침공을 받게 된다. 바로 현재의 프랑크 지방카린티아 지방에 거주했고 현재는 브리튼 섬 일부에만 거주하고 있는 켈트인이다. 켈트인의 전설적인 지도자 브렌누스는 카린티아 지방켈트인을 하나로 결속 시켰고 더 많은 부를 찾아 루멘 공화국을 침공했다.

루멘 공화국의 군은 켈트인의 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했고 브렌누스의 군대는 루멘 공화국의 수도 루멘을 팔라티노 언덕에 위치한 요새 구역을 제외하고 7주 간 처참하게 약탈했다. 그 후 루멘 왕국은 굴욕적이게도 브렌누스에게 막대한 양의 금을 내어주었는데 이때 브렌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패자에게는 슬픔 뿐이다.

2차 켈트전쟁

브렌누스 사후 켈트인을 통치한 이는 아르키인이자 용병대장이었던 바르카였다. 그는 브렌누스의 충실한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으나 브렌누스의 노년에 그의 불안정한 정신을 활용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3차 켈트전쟁

군제 개혁

4차 켈트전쟁

1차 삼두정

루멜리아 내전

2차 삼두정

제국의 시대

황금의 제국

제국의 부패

12 사도의 등장

본래 랫킨이 숭배하던 신이었다. 이들은 이 세계를 창조하고 생명력을 불어넣는 태초의 역사를 담은 성서를 제작하여 을 숭배 하였다. 하지만 랫킨에 대한 신앙심은 루멘 제국의 부패와 함께 약화 되어갔고 랫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계시를 내린다. 이때 의 계시를 받은 12 명의 인간사도라고 부른다. 12 명의 사도는 첫 계시를 받은 자 베드로를 중심으로 을 숭배하는 인간들의 종교를 창시하게 된다.

제국의 분열

콘스탄티누스의 등장

북 루멘 제국 개혁

오히크라트 원정

오크의 남하

대분열의 시대

북 루멘 제국의 멸망

오크와 고블린의 남하에서 시작된 프랑크인의 대이동으로 북 루멘 제국의 혼란은 더욱 심화 되었다. 북 루멘 제국의 주요 도시들은 오크와 고블린을 피해 이주해온 프랑크인에 의해 정복 되었고 루멘 제국의 최초의 도시이자 최고의 도시인 루멘이 당시 프랑크인의 지도자인 클로비스에 의해 정복 되고 원로원과 평민회를 비롯한 북 루멘 제국의 최고 권력 기구가 괴멸 되면서 북 루멘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북 루멘 제국의 멸망을 기점으로 보르하스 일대는 통일된 제국이 등장하지 않았고 이 시기를 대분열의 시대라 칭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성장

샤를마뉴의 등장

롤랑의 노래

공화국의 시대

건국 황제 오토 1세

샤를마뉴 사후 삼 형제의 왕위 계승 분쟁이 시작 되었다. 그러자 교황은 교회와 대립한 샤를마뉴의 후손에게 북 루멘 제국 황제 칭호를 수여하지 않고 대 프랑크 동맹의 수장 오토에게 수여한다. 북 루멘 제국 황제 칭호를 수여 받은 오토는 신성 루멘 제국의 건국 황제 오토 1세로 즉위한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프랑크 제국은 귀족들의 허수아비 첫째 프랑크 제국의 황제로 즉위 시키고 샤를마뉴의 둘째가 오를레앙의 공작을, 샤를마뉴의 셋째가 부르고뉴의 공작을 수여 받음으로서 분쟁을 종결 시켰다. 다만 이들의 분쟁 종결은 겉으로만 이루어졌고 내부로는 여전히 세 형제 간의 암투와 세력 갈등이 진행 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분쟁이 계속 되던 한편 건국 황제 오토 1세투링기 공국슈바벤 공국의 지원을 약속 받은 뒤 프랑크 제국을 침공한다. 이에 허수아비 오토 1세에게 항복 하면서 유혈 사태 없이 프랑크 제국신성 루멘 제국에게 복속 된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오토 1세를 교회의 수호자로서 인간을 모두 통치 할 권리가 있음을 공인한다. 오토 1세는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교황의 권위를 높혀 줄 팔라티노 공의회를 개최했다.

이후 건국 황제 오토 1세는 자신이 사망 할 때까지 제국의 방위를 위해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개척 기사단포르투나 제도 개척, 마자르 왕국 개발에 힘쓴다.

팔라티노 공의회

루멘 제국의 멸망 이후 처음 개최된 공의회이자 혼란 속에서 분열된 교리를 재정립하고 통합된 중앙 교회를 설립한 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공의회이다. 팔라티노 공의회 이전의 교회에는 굉장히 다양한 종파가 존재했다. 그러한 종파들은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인간 우월과 인간 이외의 지성체 부정을 내포하고 있는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일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지성체의 구원을 주장하며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일파였다. 전자를 삼위일체를 주장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따서 아타나시우스파라고 부르며 후자를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반박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라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네라토리우스파라고 부른다. 팔라티노 공의회 당시 아타나시우스파는 옛 북 루멘 제국의 영토 전역에 널리 전파되며 인정되고 있었지만 네라토리우스파는 옛 남 루멘 제국 일대에서만 공식적으로 인정 되었고 옛 북 루멘 제국 지역은 인정되지 않거나 소규모로 존재했다.

팔라티노 공의회가 개최되자 교황교회의 영향력이 끼치는 모든 땅에서 공의회에 참석 할 대표를 보내라는 성명을 발표 했으나 이는 교황의 계략이었다. 삼위일체를 부정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황제-교황주의를 주장하는 네라토리우스파아타나시우스파의 지지를 받는 교황에게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때문에 교황아르키펠라고라스오크와 고블린의 침공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선택해 공의회를 개최했다. 교황의 예상대로 아르키펠라고라스네라토리우스파 주교들은 혼란 속에서 공의회에 참여하지 못했고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축제가 되었다. 공의회에 참여한 네라토리우스파는 옛 북 루멘 제국 지역에 있는 소규모 공동체들 뿐이었다.

그리하여 팔라티노 공의회는 당연하게도 네라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지명했다. 그러자 네라토리우스파 전체의 임시 대표였던 리구리아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여러분이 저희를 이단으로 지명한 것에 대해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저희를 이단으로 지명한 이유를 참으로 다양하게 만들어냈지만 저는 그 수많은 이유들이 여러분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신앙과 저희에 대한 증오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을겁니다. 여러분의 잘못된 믿음도 결국에는 빛을 위하는 것일테니 말입니다. 빛께서는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겉모습보단 그 속에 담겨진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마음을 보십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분들은 정말로 진실된 마음으로 빛을 믿으며 이러한 믿음을 빛께서 바라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를 원망하고 질투하며 사랑하고 존경하던 모든 이들에게 빛의 구원이 있기를 바라면서 저는 제 몸을 불 구덩이 속에 집어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 연설 이후 공의회에 참석한 네라토리우스파 대표들은 화형에 쳐해졌고 그들이 운영하는 공동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는 붕괴 되었다.

바다 늑대의 시대

건국황제 오토 1세 사후 작센 왕실은 선군 없이 암군과 폭군만 등장하는 암흑시대에 돌입 하였다. 교황은 쇠퇴한 작센 왕실을 허수아비로 사용 하였고 제국 전역에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세속 기사단을 육성 했다. 제국은 쇠퇴하고 교회는 부패가 만행했다. 한편 북방의 오크와 고블린의 서진으로 노르드인의 거주지 축소 되었다. 그러자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몰려든 노르드인으로 인해 대기근 발생 하였고 이는 자연스럽게 노르드인의 해적화로 이어졌다. 이를 포르투나 기사단이 막아내기 위해 노력 했으나 부패한 제국포르투나 기사단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포르투나 기사단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은 테라 메디움해를 지나 제국 내부를 침공한다.

이때부터 재건 황제 카를대왕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를 바다 늑대의 시대라고 한다.

제국 대공회

북방의 해적으로 인한 혼란이 지속 되자 작센 왕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교회의 권위는 겉보기에는 높아져 갔다. 이러한 제국의 상황에 의문을 품은 팔라티노의 공작 헤르만 2세는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작센 왕실을 대신해 스스로를 궁정백이라 선언한 뒤 제국 각지의 유력자들을 소집하여 제국 대공회를 결성한다. 제국 대공회황제의 규탄과 교황의 파문으로 정당성을 잃었으나 제국 전역의 지지를 얻었기에 제국 대공회제국 전체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헤르만 2세가 북방의 해적과의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제국 대공회는 해체된다.

모하치 전투

포르투나 내전

포르투나 기사단과 북방의 해적 간의 협약으로 고틀란드가 본래의 주인인 고트인에게 반환되고 기사단과 해적 간의 전쟁은 종전 상태가 되었다.

이는 포르투나 제도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축복이었으나 그 외의 지역에 사는 제국민들에게는 절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국은 포르투나 기사단을 적으로 선포했고 포르투나 기사단은 이에 반응하여 포르투나 왕국을 건국했다. 포르투나 기사단장이 아폰수 1세가 되어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래 명칭인 아비스 항해 기사단에서 이름을 따온 아비스 왕조를 개창했다. 이에 반발하여 브리튼 섬의 친 제국 성향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포르투나 내전의 시작이었다.

포르투나 제도는 크게 두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동쪽에 위치한 브리튼 섬이고 다른 하나는 서쪽에 위치한 이베리아 섬이다. 브리튼 섬은 오토 1세가 처음 포르투나 제도를 개척 할 당시 개척되기 시작한 섬이다. 때문에 제국의 지원을 많이 받아 개척이 진행 되었으며 이로인해 귀족과 성직자를 중심으로 개척이 진행 되었다. 이로인해 지금도 브리튼 섬은 포르투나 기사단의 본거지 리스보아를 제외하면 자유민 도시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장원이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비되게 이베리아 섬은 바다늑대의 시대에 개척되기 시작한 섬이다.

무능한 제국에서 북방의 해적들에게 공격을 받은 자들은 흔히 크게 세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둘은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가는 것이며 마지막은 포르투나 제도로 도망 가는 것이다.

그 정도로 포르투나 제도에는 수많은 난민들이 유입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나 기사단은 이 정도로 많은 난민들을 브리튼 섬 하나로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제국에서 피난 온 막대한 부를 지닌 상인들을 포섭해 이베리아 섬의 개척을 시작하게 된다. 상인들과 훗날 자유민이 될 난민들을 중심으로 개척이 이루어진 이베리아 섬은 장원이 차지하는 토지가 굉장히 적으며 그 외의 지역은 모두 자유민 마을과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즉 포르투나 내전은 바다 늑대의 시대 동안 축적 되어온 자유민 중심의 이베리아와 장원 중심의 브리튼의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카린티아 봉기

포르투나 왕국의 독립을 계기로 제국 내부에서 개혁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크란트 지방의 국가들에서는 베네토로 성지 순례를 오는 지식인 오크와 고블린에게서 아르키의 옛 학문들을 수용했다. 그리고 옛 프랑크 제국의 영토에서는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센 왕실은 하인리히 3세의 아내이자 섭정 아그네스를 중심으로 왕실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한 여러 개혁들을 진행했다. 하지만 섭정 아그네스의 개혁은 여성 섭정이라는 특성 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였고 개혁은 항상 방해에 봉착했다.

그때 카린티아 왕국의 왕위 계승권 문제로 슈바벤 공국과 바이에른 백국 그리고 투링기 공국이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섭정 아그네스는 자신의 권위를 향상 시키기 위해 카린티아 왕국의 작위 자체를 공석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작센 왕실에 불만을 품고 슈바벤 공국과 투링기 공국이 봉기를 일으키니 이를 카린티아 봉기라 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작센 왕실에 의해 진압 당하였고 작센 왕실의 개혁은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섭정 아그네스가 암살 당함에 따라 작센 왕실의 제국 개혁은 실패 하였다.

재건 황제 카를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