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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베트남 공화국
Republic of Vietnam
국기 국장
Tổ quốc, Công minh, Liêm chính
조국, 공명, 청렴
상징
국가 공민에게 고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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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 1954년
  • 공화제 도입 1956년
  • 민주화 1987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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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사이공
최대 도시
사이공
접경국
캄보디아, 라오스, 북베트남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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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4천 5백만 명
출산율
2.18명
기대 수명
71세
공용어
베트남어
종교
국교
없음
분포
불교 61%, 기독교 13%, 토착종교 4%,  무종교 19%, 기타 3%
군대
베트남 공화국군
하위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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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 행정구
28개 성, 3개 직할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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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단일국가, 총통제, 공화제, 단원제
민주주의 지수
71.5점 (결함 있는 민주주의)
국가 원수 (총통)
응웬쮸
정부
요인
총리
응오반키엠
국회의장
오아인스우
여당
베트남 공화당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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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GDP
(명목)
전체 GDP
$3,800억
1인당 GDP
$8,000
화폐
공식 화폐
아태달러
ISO 4217
APD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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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7
도량형
SI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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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91년
ccTLD
.sv
국가 코드
410, ROV, SV
전화 코드
+84

개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한 민주공화국. 분단국가이며 인도차이나 유일의 민주국가이다.

역사

건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는 해당 지역을 점령했었던 일본군이 철수하고 베트민이 베트남 전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베트남을 지배하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양측이 충돌하여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서 베트민이 승리하면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미국과 소련 간의 제네바 합의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 부근으로 분단되어 남쪽에는 친미 입헌군주국 베트남국이, 북쪽에는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남베트남의 군주는 바오다이, 수상은 응오딘지엠이었고 북베트남의 국가주석은 호치민이었다.

합의대로라면 2년 후인 1956년, 남북 총선거를 실시해 베트남을 통일시킬 계획이었지만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 지도부는 공산주의자들을 크게 불신했고 총선거를 사실상 거부했다.

시간을 조금 되돌려 1955년,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를 맹비난하고 폐위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폐위시켜버렸다.  이후 베트남국은 베트남 공화국이 되었고 초대 총통으로는 응오딘지엠이 취임했다.

워싱턴의 위정자들은 응오딘지엠의 지도력에 관한 의문을 가졌었지만 응오딘지엠은 보란 듯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군벌까지 정리하는 데에 성공한다.  또한 응오딘지엠은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탈북한 월남민 수십만 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풍부한 쌀 생산을 바탕으로 농업과 경공업을 육성하였으며 당근과 채찍을 쓰며 부정부패를 해소하였다.  수출 또한 장려하여 쌀, 천연고무, 수산물 등의 수출량이 크게 늘었다.

베트남 전쟁

하지만 북베트남은 베트콩을 이용하여 남베트남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부추겼다.  전국 곳곳에서 준동하는 베트콩을 상대로 10만 명 남짓한 남베트남군은 무리가 걸리게 된다.  이에 미국은 남베트남군 사단 증편과 전투력 향상을 위한 대규모의 무기 지원을 실시하였고 1962년 경 남베트남군은 잘 무장된 3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잘 무장된 군대가 언제나 잘 싸우지는 못했다.  베트콩을 상대로 남베트남군은 전반적으로 선전했으나 패하는 경우도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북베트남의 촌락에서의 공포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농촌 지역에서의 정부 장악력이 약화됐다.  촌락민들은 베트콩의 협박에 겁을 먹어 투표를 하지 않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응오딘지엠은 이에 민병대 편성으로 응수했지만 상황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남베트남에서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참전했고 동맹국들에도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이승만채명신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사단급 부대를 파병했다.  이후 5년이 전쟁의 절정이었다.  베트남 전역에서 연합군의 베트콩 소탕 작전이 실시되었다.  미군과 한국군에게 훈련받은 남베트남군도 적극적으로 베트콩 소탕에 참여했다.

궁지에 몰린 베트콩은 상황 반전을 위해 1970년 구정에 50만 대병력을 동원하여 대공세를 감행한다.  베트남인들도 설을 쇠기 때문에 구정에는 휴전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북베트남 지도부는 그걸 기회로 남베트남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연합군은 공세의 징후를 파악한 상태였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1]  공세의 결과는 베트콩의 궤멸이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의 베트콩 활동은 지리멸렬해졌고 잔당은 70년대 중반에 완전히 소탕되어 빈껍데기가 되었다.

경제성장

베트남 전쟁에서 연합군이 사실상 승리하면서 미군을 제외한 연합군은 남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1년, 응오딘지엠이 퇴임하면서 판후이꽛이 총통에 취임했다.  판후이꽛 정부는 수십년간 정체되어있던 경제성장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남북베트남의 경제력 격차는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되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 접어든 후에는 판후이꽛은 경제전문가 응웬쑤언오아인을 등용하여 국가의 경제를 국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옮기는 개혁을 실시하였고 야간 통금조치를 폐지하는 등 사회가 상당히 자유화되었다.

판후이꽛을 이어 남베트남의 3대 총통이 된 쩐티엔키엠 역시 전임자의 정책을 답습했다.  차이점이라면 북베트남과의 제한적인 대화를 시도하였다는 점이었다.  1981년 남북베트남 적십자사 회담이 성사되었고 1984년에는 양국의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전티엔키엠은 정상회담까지도 원했는데 북베트남측은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남베트남의 민주화를 요구했다.[2] 결국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다.

민주화와 현재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유로워진 사회 분위기 하에서 야당들이 통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쩐티엔키엠 정부는 계속해서 물밑 방해공작을 펼쳤다.  그러다 1986년, 정부 비밀문건이 유출되면서 공화혁명당 정부가 조직적으로 야당에 정치 공작을 실행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에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이공대학 2학년 응웬까오푹(1965~1986)이 경찰이 발포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시위가 전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총통 쩐티엔키엠은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개리맨더링과 정치공작에 대해 사과했고 1987년에 치루어질 대선을 유엔의 감독에 맡기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권 통합 논의는 급물살을 탔고 1987년 대선을 몇 달 앞두고 통합 야당인 베트남 민주당이 창당되었다.  선거 결과, 민주당의 응웬쑤언오아인 후보가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33년만의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정치

총통

남베트남의 총통은 남베트남의 국가 수반이다. 대한민국 총통과 매우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기는 4년이며 재선이 가능하다. 다만 대한민국 총통과는 달리 국회의원과의 겸임은 불가하다

공화국의회

 
베트남 공화국 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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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국민회의
120석
야당

공화당
143석

진보당
16석

자유당
9석

좌파연대
4석
무소속  8석
재적 300석

총 30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역할은 대한민국 국회와 비슷하다.

외교

한국-남베트남 관계

각주

  1. 미군 측은 보도 통제까지 실시했다.
  2. 당시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 이래로 공화혁명당의 독주 체제였다.  선거 자체는 자유롭고 민주적이었으나 개리맨더링과 야당에 대한 정치공작이 일상화되어있었다.그렇다 해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에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