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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향'''({{llang|zh|花鄕}}, {{llang|en|Kingdom of Haron}})은 [[동중국해]](東中國海)에 위치한 국가이다. [[화향 제도]](花鄕諸島)를 국토로 하고 있으며, 수도는 [[낭경]](朗京)이다. 북동쪽으로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일본]](日本), 서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남쪽으로는 [[중화민국]](中華民國)과 인접하게 위치하고 있다.
'''대화향국'''({{llang|zh|大花鄕國}}, {{llang|en|Empire of Great Formosa}})은 [[1854년]] [[2월]] [[6일]]부터 [[1945년]] [[3월]] [[16일]]까지 [[군주정]](君主政)을 바탕으로 [[동아시아]](東亞)[[태평양]](太平洋) 일대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주로 이 시기를 [[민월 제국주의]](閩越帝國主義)라고 일컫는다.<ref>혹은 [[민월 군국주의]](閩越軍國主義), [[화향 제국주의]](花鄕帝國主義)라고 부르기도 한다.</ref>


공용어로는 [[한반도]](韓半島)[[제주도]]에서 넘어온 한국어족인 [[향어]](鄕語)를 표준어로 지정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중국어의 방언인 [[민어]](閩語)를 사용하기에 부분적 공용어로 취급하고 있다. [[중국 대륙]](中國大陸)에 가까이 위치해 있으나, 한반도에서 유입된 [[도래인]](渡來人)들의 후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서 문화적으로는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갑진민란]](甲辰民亂, 1844), [[신사교란]](紳士攪亂, 1847)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자강회]](自彊會)<ref>[[장녕 조약]](長寧條約, 1842) 이후 서양 열강의 직접 다녀온 유학생 및 외교 사절 출신의 인사들이 조직한 정치 개혁 단체이며, 다수의 소속원이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1870년대에는 입헌 정치에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제헌운동]](制憲運動, 1872)을 주도하기도 했다.</ref>는 [[갑인변법]](甲寅變法, 1854)을 추진하여 구미 열강을 표방하기 위해 학제 개혁, 양력(陽曆) 사용, 행정 제도 정비를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군사 개혁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신식 군사 체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ref>향촌 사회를 주도하던 지방 사족들의 의용군 및 사병 조직들을 혁파한 후, 1860년부터 황실을 호위하는 [[시위영]](侍衛營)과 [[태평천국 운동]]을 위해 조직된 [[북화영]](北花營)이 초기 근대적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다.</ref>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해창국]](海蒼國), [[무심국]](霧深國), [[안지국]](安地國) 등으로 분열되었던 [[화향 제도]][[신손가]](神孫家)를 중심으로 통일하면서 통합 사회를 일구어낼 수 있었다. 이후에는 [[네덜란드]](和蘭), [[포르투갈]](葡萄牙)을 비롯한 서구와의 교역 및 중계 무역을 적극 활용하면서 번영을 구가했다.
1860년대부터 [[태평천국 운동]](太平天國之亂)에 개입하여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1870년대에는 [[제헌운동]](制憲運動)을 거쳐 근대적 법률 체계인 [[흠정대법]](欽定大法, 1874)이 제정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확립하게 된다. 변법 이후 91년 동안 제국 사회가 유지되었으며, 1945년에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향주 공습]](鄕州空襲)으로 인한 무조건 항복으로 [[화향 연합군 군정사령부]](花鄕聯合國軍政部軍政)가 설치되면서 제국은 해체되는 수순을 맞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서구 열강들에 아시아 침탈과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노골적인 침략이 가시화되었으나, 구미 열강의 대외 진출에 대한 방어 거점의 필요성을 염두하고 있던 [[청나라]](靑國)와 태평양의 이권이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율리시스 S. 그랜트]]의 중재를 통해 [[경진수호조규]](庚辰修好條規, 1880)를 체결하면서 어렵사리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ref>이와는 대조되게, 똑같이 [[율리시스 S. 그랜트]](Ulysses S. Grant)의 중재가 이루어졌던 [[류큐]]는 청 지도층의 무대응 지연책으로 [[일본 제국]]이 먼저 류큐 일대를 장악함에따라 끝내 국가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ref>
== 최대 판도 ==
{{화향 최대 세력권}}


열강들의 개입에 자주성이 크게 흔들렸던 화향은 [[단화개혁]](端和開革, 1882)을 단행하고 서양 군함을 구입하는 등 국력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지도층과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외세간의 분쟁을 이용해 내부 정세를 복잡하게 만들어 침략을 단념토록 하기 위해 시도한 [[중립 외교]](中立外交)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에게서 차관 도입 및 [[영국]]과 의도적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ref>이는 [[일본 제국]]이 영국 서구 열강의 묵인을 통해 침탈 행위를 시도하려던 점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실제로 [[화영통상조약]](花英通商條約, 1885) 체결 이후 일어난 [[보회함 사건]](普恢艦事件, 1894)에서 화향에 대한 이권 침해가 우려되어 영국이 개입했을 때 일본은 주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ref><ref>이후 열강을 통한 화향의 중립화 노력은, [[영일동맹]] 협약문에서 영국이 직접적으로 청나라와 함께 화향에 대한 특수한 이익을 갖고 있다고 언급함에따라 일본의 침략 계획을 좌절시키는 성과로 나타나게 되었다.</ref>
[[태평양 전쟁]]에 합류한 이후, [[일본군]](日本軍)과 함께 [[화남 전역]](華南戰域)에서 공세를 시도하거나 [[미국]](米國)의 자치령이었던 필리핀 전역을 차지하여 [[필리핀 제2공화국]](Repúbliká ng Pilipinas)을 세우는 등 [[제국주의]](帝國主義)[[군국주의]](軍國主義)가 팽배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과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진먼 대학살]](金門大虐殺, 1942)과 [[산페르난도 대학살]](The San Fernando massacre, 1943) 등의 전쟁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말았다.


[[제1차 세계대전]](第一次世界大戰) 발발 당시에는 중립국을 표방했으나, 여러 열강들과의 불평등한 관계와 빼앗긴 이권을 되찾고 [[전쟁특수]](戰爭特需)를 누리기 위해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대략 5,000명에 달하는 비전투 노무자들을 서부 전선에 파견했다. 이후 [[민족주의]](民族主義)와 서양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노동·사회 운동이 탄력받았으며, 종전 이후 이루어진 [[파리 강화회담]](Paris Peace Conference, 1919)에서의 권익 반환 문제로 인해 [[8.18 운동]](八·一八運動)이 촉발되면서 반제국주의·혁명 투쟁이 시작되었다.<ref>이후 8.18 운동에 원인이 되었던 불평등 조약 청산·재정립 권익 반환에 대한 문제 해소는 [[워싱턴 회담]](Washington Conference, 1922)에서 마무리 짓게 된다.</ref>
1940년 이후에는 [[화해작전]](花海作戰)을 통해 [[하이난 섬]](海南島)을 비롯하여 [[광동성]](廣東省), [[광서성]](廣西省) 남부 및 동남아 일부를 점령지로 삼고서 최대 판도를 누렸으나,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 1944)에서의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국력이 고갈되고, [[필리핀 해전]](菲律賓海戰, 1944)과 [[포르모사 항공전]](Formosa Air Battle, 1944)에서 제해·제공권을 상실한 뒤 본토 공습을 당하면서 몰락하였다.
 
== 역사 ==
{{본문|화향의 역사}}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치로 세워졌던 [[정씨왕국]](鄭氏王國) 내 이주민과 토착 민족국가인 [[유번국]](流樊國) 지배층의 결합으로 세워진 [[동녕제국]](東寧帝國) 이후로, [[화향 제도]](花鄕諸島)의 역사는 급격한 변혁을 맞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 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해짐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던 대륙·한반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관과 역사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향촌]](鄕村)이라 불리는 봉건적 지방 제도와 중앙 집권적 체제가 혼합된 [[향사분봉제]](鄕士分封制)가 실시되었으며, 사탕수수 및 장뇌 등의 특산물을 바탕으로 한 상품 경제의 촉진과 도시화의 진행이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무역항을 이용하는 서양 상선들을 통제 및 완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동요를 억제하고 [[양학]](洋學)이라 불리는 유럽의 기술·학문·문화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충돌에 대응했다.
 
=== 문호 개방과 근대화 개혁 ===
[[팽호해전]](澎湖海戰, 1842)에서 패배한 직후, 자국의 전근대적 행태를 비난하고 서구 열강에 맞서 부국강병의 기치를 세우려는 시도로서 [[화신양구운동]](花神洋具運動, 1843)이 추진되었다. 이름 그대로 '화향의 넋 혹은 정신(花神)을 바탕으로 서양의 것을 갖춘다(洋具)'는 의미였는데, 이는 당시 화향 내 핵심 권력기구인 [[선정국]](宣政局)의 실권자들이었던 [[경장파]](更張派)가 주장한 온건적 근대화였다.<ref>시기에 훼손되었던 지방 통제가 강화되고,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일시적으로 사회 체제가 회복되었기에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서 '성륭중흥(成隆中興)'이라 부르기도 한다.</ref>
 
[[화신양구운동]]을 통해 화향 내부에서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목표로 일련의 개혁안이 추진되었다. 서양의 기술 및 교류와 재정 정책을 단일화하기 위해 개혁 기구인 [[내각통상아문]](內閣通商衙門)과 신식 군사 기술을 확보하고자 [[양포총국]](洋砲總局)이 설치되었다. 또한 주요 도시에는 군수 공장인 [[서무기기창]](西務機器廠)을 두어 근대식 포탄과 화약을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명주]](鳴州)에는 [[조선청]](造船廳)이 설립되어 양선(洋船)을 건조하였다.
 
신식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철강 석탄 확보를 위해 전국 곳곳에 광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대북주]](台北州)에 기륭(基隆) 탄광, [[묵주]](墨州)에 인애(仁愛) 탄광 등이 이 당시에 개발된 광산들이었다. 또, 이들 공장들의 운영을 위해 서양 기술 서적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중앙 정부 주도로 [[동문학원]](同文學院)을 설립하여 [[영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 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면에서 정부는 열강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지로 유학생들을 파견하였고, 기존 [[과거제]](科擧) 아래에서 기술자들을 선발하는 [[성무시]](成務試)와 개혁 인재들을 등용하는 [[양과]](洋科)를 배치하였다. 군사면에서는 [[성륭수사학당]](成隆水師學堂, 1843)을 세운 뒤 열강으로부터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유능한 지휘관들을 양성코자 했고, 봉건적 질서에 위치했던 향촌 사회를 관리하고자 '향사관제조관(鄕士管制條款)'을 발표하여 사병 제도를 혁파하였다.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양잠업(養蠶業)이 진흥하여 [[양광회사]](洋鑛會社, 1844) 등 근대 농림 기업들이 등장했다.
 
=== 잇따른 효란과 안정화 ===
 
==== 태평천국 운동 개입 ====
 
==== 제국 선포와 제헌 운동 ====
 
=== 제국주의화와 침략 전쟁 ===
 
=== 군국주의와 폭주, 그리고 몰락 ===


== 각주 ==
== 각주 ==

2019년 7월 3일 (수) 22:23 기준 최신판

대화향국
화향제국 / 대월민국
大花鄕國
Empire of Formosa / 大越閩國

18541945
국기 국장
표어 흥아쇄국(興亞刷國)
(동아를 일으켜, 나라를 닦으라.)
수도 낭경(朗京)
최대도시 유신주(庾信州)
정치
공용어 향어(鄕語), 민어(閩語)
정부 형태 군주제, 훈정헌정[1]
황제(皇帝)[3] 성화제(成華帝)
1852~1885
건녕제(建寧帝)
1915~1926
광화제(光和帝)
1930~1944
군기장경(軍機章京)



흠차대신(欽差大臣)
위하문(魏夏文)
1854~1867
박중돈(朴中旽)
1913~1919
아예기원(阿禮岐元)
1865~1879
강유혼(强兪混)
1920~1928
입법 의정원(議政院)1854~1888
입법원(立法院)1888~[2]
역사
 • 갑인변법[4] 1854년 2월 6일
 • 태평천국 운동 1851년 ~ 1864년
 • 화청전쟁 1865년 ~ 1867년
지리
면적 299,610㎢
내수면 비율 약 2.8%
인구
1930년 어림 37,936,684명
기타
통화 화향 원(元)
  1. 訓政, 군주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립내각이 정권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 8.18 운동 이후에는 구색정당이 몰락하고 입헌군주정(憲政)이 확립되었다.
  2. 1920년 이후 국민대회(國民大會)가 실질적인 입법부의 역할을 행사함.
  3. 민월식 군호(閩越君號)로는 신손(神孫)이라고 칭함.
  4. 성화유신(成華維新)이라고도 불림.

대화향국(중국어: 大花鄕國, 영어: Empire of Great Formosa)은 1854년 2월 6일부터 1945년 3월 16일까지 군주정(君主政)을 바탕으로 동아시아(東亞)와 태평양(太平洋) 일대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주로 이 시기를 민월 제국주의(閩越帝國主義)라고 일컫는다.[1]

갑진민란(甲辰民亂, 1844), 신사교란(紳士攪亂, 1847)을 거쳐 정권을 장악한 자강회(自彊會)[2]갑인변법(甲寅變法, 1854)을 추진하여 구미 열강을 표방하기 위해 학제 개혁, 양력(陽曆) 사용, 행정 제도 정비를 실시했고, 그 중에서도 군사 개혁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신식 군사 체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3]

1860년대부터 태평천국 운동(太平天國之亂)에 개입하여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1870년대에는 제헌운동(制憲運動)을 거쳐 근대적 법률 체계인 흠정대법(欽定大法, 1874)이 제정되면서 근대 국가의 틀을 확립하게 된다. 변법 이후 91년 동안 제국 사회가 유지되었으며, 1945년에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내 향주 공습(鄕州空襲)으로 인한 무조건 항복으로 화향 연합군 군정사령부(花鄕聯合國軍政部軍政)가 설치되면서 제국은 해체되는 수순을 맞게 된다.

최대 판도

화향 최대 판도
花鄕最大版圖

초록색 : 화향 제국의 내지(內地) (1864년 기준)
연한 초록색 : 외지(外地), 괴뢰정권 혹은 점령 지역 (1940년 기준)

태평양 전쟁에 합류한 이후, 일본군(日本軍)과 함께 화남 전역(華南戰域)에서 공세를 시도하거나 미국(米國)의 자치령이었던 필리핀 전역을 차지하여 필리핀 제2공화국(Repúbliká ng Pilipinas)을 세우는 등 제국주의(帝國主義)와 군국주의(軍國主義)가 팽배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인명과 국력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진먼 대학살(金門大虐殺, 1942)과 산페르난도 대학살(The San Fernando massacre, 1943) 등의 전쟁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수많은 나라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고 말았다.

1940년 이후에는 화해작전(花海作戰)을 통해 하이난 섬(海南島)을 비롯하여 광동성(廣東省), 광서성(廣西省) 남부 및 동남아 일부를 점령지로 삼고서 최대 판도를 누렸으나,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 1944)에서의 불필요한 소모전으로 국력이 고갈되고, 필리핀 해전(菲律賓海戰, 1944)과 포르모사 항공전(Formosa Air Battle, 1944)에서 제해·제공권을 상실한 뒤 본토 공습을 당하면서 몰락하였다.

역사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치로 세워졌던 정씨왕국(鄭氏王國) 내 이주민과 토착 민족국가인 유번국(流樊國) 지배층의 결합으로 세워진 동녕제국(東寧帝國) 이후로, 화향 제도(花鄕諸島)의 역사는 급격한 변혁을 맞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서구 세력과의 교류가 활발해짐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끼던 대륙·한반도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관과 역사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향촌(鄕村)이라 불리는 봉건적 지방 제도와 중앙 집권적 체제가 혼합된 향사분봉제(鄕士分封制)가 실시되었으며, 사탕수수 및 장뇌 등의 특산물을 바탕으로 한 상품 경제의 촉진과 도시화의 진행이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무역항을 이용하는 서양 상선들을 통제 및 완화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동요를 억제하고 양학(洋學)이라 불리는 유럽의 기술·학문·문화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면서 근대화의 충돌에 대응했다.

문호 개방과 근대화 개혁

팽호해전(澎湖海戰, 1842)에서 패배한 직후, 자국의 전근대적 행태를 비난하고 서구 열강에 맞서 부국강병의 기치를 세우려는 시도로서 화신양구운동(花神洋具運動, 1843)이 추진되었다. 이름 그대로 '화향의 넋 혹은 정신(花神)을 바탕으로 서양의 것을 갖춘다(洋具)'는 의미였는데, 이는 당시 화향 내 핵심 권력기구인 선정국(宣政局)의 실권자들이었던 경장파(更張派)가 주장한 온건적 근대화였다.[4]

화신양구운동을 통해 화향 내부에서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목표로 일련의 개혁안이 추진되었다. 서양의 기술 및 교류와 재정 정책을 단일화하기 위해 개혁 기구인 내각통상아문(內閣通商衙門)과 신식 군사 기술을 확보하고자 양포총국(洋砲總局)이 설치되었다. 또한 주요 도시에는 군수 공장인 서무기기창(西務機器廠)을 두어 근대식 포탄과 화약을 개발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명주(鳴州)에는 조선청(造船廳)이 설립되어 양선(洋船)을 건조하였다.

신식 공장들이 세워지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철강 및 석탄 확보를 위해 전국 곳곳에 광산들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대북주(台北州)에 기륭(基隆) 탄광, 묵주(墨州)에 인애(仁愛) 탄광 등이 이 당시에 개발된 광산들이었다. 또, 이들 공장들의 운영을 위해 서양 기술 서적들이 대거 유입되었으며, 중앙 정부 주도로 동문학원(同文學院)을 설립하여 영어, 프랑스어 등의 외국어 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면에서 정부는 열강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방향으로 영국과 프랑스 등지로 유학생들을 파견하였고, 기존 과거제(科擧) 아래에서 기술자들을 선발하는 성무시(成務試)와 개혁 인재들을 등용하는 양과(洋科)를 배치하였다. 군사면에서는 성륭수사학당(成隆水師學堂, 1843)을 세운 뒤 열강으로부터 군사 고문을 초빙하여 유능한 지휘관들을 양성코자 했고, 봉건적 질서에 위치했던 향촌 사회를 관리하고자 '향사관제조관(鄕士管制條款)'을 발표하여 사병 제도를 혁파하였다. 산업/경제 측면에서는 양잠업(養蠶業)이 진흥하여 양광회사(洋鑛會社, 1844) 등 근대 농림 기업들이 등장했다.

잇따른 효란과 안정화

태평천국 운동 개입

제국 선포와 제헌 운동

제국주의화와 침략 전쟁

군국주의와 폭주, 그리고 몰락

각주

  1. 혹은 민월 군국주의(閩越軍國主義), 화향 제국주의(花鄕帝國主義)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장녕 조약(長寧條約, 1842) 이후 서양 열강의 직접 다녀온 유학생 및 외교 사절 출신의 인사들이 조직한 정치 개혁 단체이며, 다수의 소속원이 개화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1870년대에는 입헌 정치에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제헌운동(制憲運動, 1872)을 주도하기도 했다.
  3. 향촌 사회를 주도하던 지방 사족들의 의용군 및 사병 조직들을 혁파한 후, 1860년부터 황실을 호위하는 시위영(侍衛營)과 태평천국 운동을 위해 조직된 북화영(北花營)이 초기 근대적 군대의 근간을 이루었다.
  4. 이 시기에 훼손되었던 지방 통제가 강화되고,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일시적으로 사회 체제가 회복되었기에 당시 황제의 연호를 따서 '성륭중흥(成隆中興)'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