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제1혁명 (서태평양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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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 제1혁명은 1932년 3월 1일부터 1934년 3월 1일[1]까지 진행된 만주의 공화주의 혁명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화혁명으로, 만주인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정부를 등장시켜 10년 후 한국 혁명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만주의 중원 '회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만주에서의 정착을 선언함으로써 동아시아사의 고질적인 패턴이었던 북방민족의 중원 침공, 남하를 종식시킨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제1혁명의 종료가 1934년 3월 1일인것은 화북 포기를 통해 만주 국가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음이 국제연맹 가입을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단

청의 만주 경영

최후의 만주 왕조인 청나라가 1636년 산해관을 넘어 화북에 입성한 이래, 만주 방위는 청나라의 영원한 고민거리이자 화두였다. 배후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청과 대등한 황제국이자 군사동맹 관계이지 몽골이나 요나라와 같이 정복, 복속시킨 상대가 아니었고, 한국이 화북 침공을 지원한 것은 여진족의 금나라 사례를 참고하여 만주인들의 화북 입성이 만주 방면 국경 방위에는 오히려 이득이 된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전의 조선이야 요동을 제대로 정복, 영위할만한 국력이 없어 국경 일대에서의 부락 토벌 정도로 만족했지만, 조선과 이어를 통합하고 칭제에 이른 한국의 국력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는 1628년의 전쟁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한국의 요동 침공은 과거 몽골의 연 지방 침공으로 만주와 중원이 차단된 채 말라죽어간 남금의 공포가 재현되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은 당초 청의 입관을 지원하면서 요동 할양까지도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직 15년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한국 조정 내에서 요동 개척과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요동의 무인지대화로 입장을 선회했다. 물론 입관에 성공한 청은 성경장군부를 개설하고 만주, 몽골, 거란, 니칸[2], 발해인 총 100만을 요동과 만주 전역에 잔류시키면서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결국 1644~1646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한청간 전쟁을 치르기에 이르렀으나, 직후 1652년부터 오호츠크해 일대에 진출한 러시아와 청 사이의 무력분쟁이 발발하면서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청의 입장에서는 만주가 남으로 한국, 북으로 러시아의 양면 공격을 받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한러간 동맹이 체결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야 했다. 결국 청은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활동과 한-만 교역에 상당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한국의 불만을 달래고 대러전쟁에서 한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그 결과 한-만 교역으로 충분한 이익을 누린 한국이 청의 만주 경영을 지지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상당한 숫자의 한국인들이 만주로 유입되어 발해인과 함께 만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흠정헌법대강과 만주민권운동

화북 상실과 하르빈 봉기

만주전쟁과 2차 민권운동

전개

고종 즉위와 쟁탈화

2.12 쿠데타

하르빈 시민 봉기와 고종의 합류

하르빈 시가전

'반란의 진압'과 퇴위 조서 발표

결과

만주 제1공화국 수립

국제연맹의 만주공화국 승인

영향

만주 현대사의 시작

한국 3월 혁명

  1. 만주 제1공화국의 국제연맹 가입으로 제1혁명이 완수된 것으로 간주
  2. 만주에 거주하는 화북계 주민을 이르는 말. 원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을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