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만주 제1혁명은 1932년 3월 1일부터 1934년 3월 1일[1]까지 진행된 만주의 공화주의 혁명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성공한 공화혁명으로, 만주인 역사에서 최초의 공화정부를 등장시켜 10년 후 한국 혁명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만주의 중원 '회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만주에서의 정착을 선언함으로써 동아시아사의 고질적인 패턴이었던 북방민족의 중원 침공, 남하를 종식시킨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제1혁명의 종료가 1934년 3월 1일인것은 화북 포기를 통해 만주 국가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음이 국제연맹 가입을 통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단

청의 만주 경영

최후의 퉁구스계 왕조인 청나라가 1636년 산해관을 넘어 회북에 입성한 이래, 만주 방위는 청나라의 영원한 고민거리이자 화두였다. 배후의 한국은 어디까지나 청과 대등한 황제국이자 군사동맹 관계이지 몽골이나 후요와 같이 정복, 복속시킨 상대가 아니었고, 한국이 회북 침공을 지원한 것은 후요가 멸망하고 발해인 유민들이 쏟아져들어오는 상황에서 머리맡에 만주인이라는 시한폭탄을 이고 사느니 이들을 차라리 장성 너머로 보내버리자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전의 조선이야 요동을 제대로 정복, 영위할만한 국력이 없어 국경 일대에서의 부락 토벌 정도로 만족했지만, 조선과 이어를 통합하고 칭제에 이른 한국의 국력은 수틀리면 언제든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이는 1628년의 전쟁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었다.

후요는 발해인들의 국가였고, 자연히 만주 인구에서 발해인과 조선인의 비중이 상당했다. 입관 당시 만주지역 추정인구 700만명 중 발해인과 조선인 200만명, 만주인 150만명, 후룬 등 비만주 여진인 140만명, 니칸인[2] 130만명, 거란인과 몽골인이 70만명 수준이었다.[3] 발해인들의 요동 개척과 경영의 수혜를 받아 여진계도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지만 정주민으로 요동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발해인과 니칸인, 그리고 친요 여진계를 압도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후요 성종 이여송의 사후 발생한 후계 분쟁이 아니었으면 요금전쟁의 성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요와 조선(진)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기는 했으나 적어도 동족의식은 있었으므로 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요동 침공이 과거 몽골의 연 지방 침공으로 만주와 중원이 차단된 채 말라죽어간 남금의 공포를 재현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입관 직후 청은 회북 통치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와 만주 방위에 필요한 만주인 인구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계속해야 했다. 고심 끝에 청이 내놓은 결론은 만주에서 만주인의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유지하며 회북에서는 발해인, 요동니칸인, 몽골인 등을 최대한 '만주화'시켜 친위세력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전제로도 만주인의 필요 인구를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비만주 여진인을 최대한 만주인에 편입시키려 했으나 그러고도 최후까지 복속되지 않은 수완부 등은 서북 변경 수비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한 조치로 만주 지역의 인구는 17세기 후반에는 200만명 이하로 무려 1/4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후요인들이 개척한 요동의 농업인프라는 황폐해졌다.

한국은 당초 청의 입관을 지원하면서 요동 할양까지도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직 15년 전쟁의 후유증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한국 조정 내에서 요동 개척과 경영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요동의 무인지대화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러나 청이 200만명 가량의 인구를 요동을 포함한 만주지역에 잔류시키는 반면 한국이 연계를 시도할만한 발해계는 대거 회북으로 이주시키자 결국 1644~1646년 사이 두 차례에 걸쳐 한청간 전쟁이 발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봉합된 것은 직후 1652년부터 오호츠크해 일대에 진출한 러시아와 청 사이의 무력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만주가 남으로 한국, 북으로 러시아의 양면 공격을 받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한러간 동맹이 체결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든 이를 저지해야 했다. 결국 청은 만주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활동과 한-만 교역에 상당한 혜택을 부여하면서 한국의 불만을 달래고 대러전쟁에서 한국의 지원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했다. 이는 만주에 풍부한 철광석과 석탄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누린 한국이 청의 만주 경영을 묵인하는 효과를 거두었으나, 반대로 상당한 숫자의 한국인들이 만주로 유입되어[4] 잔류 발해인과 함께 만주 경제를 좌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에 입관 이후 방치된 농업 인프라를 노린 니칸인들의 유입도 장성 북부와 요동반도 등 다방면으로 진행되었다.

만주 방위를 위해 인구와 농업생산력을 확보해야 하는 청 조정은 한국인 - 발해인을 포함하는 - 과 니칸인들의 만주 유입에 일관된 정책을 취할수가 없었다. 다행히 주류 만주인들이나 일부 여진인은 이미 후요 시기부터 수렵경제에서 농업 중심으로 전환에 성공하여 한국인 인구의 증가를 그럭저럭 따라잡을 수 있었으나, 상당수의, 특히 농사에 익숙하지 않았던 동요하 이북지역의 여진 부족들은 이에 편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한국인과 니칸인들에게 토지와 경작권을 침탈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170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인들은 숭가리강을 따라 하르빈 일대까지 진출하여 벼 재배에 성공하였을 정도로 침투의 범위는 겉잡을 수 없었다.

한국인들의 침투에 당황한 청조는 만주 주민들의 강력한 만주화 정책을 추진했다. 건륭 31년(1766)년부터 관동, 즉 산해관 동부 만주 지방의 모든 공문서는 만주문만을 사용하도록 하고 한문의 사용을 금하였으며, 건륭 33년(1768년)에는 관동 호적령이 공포되어 관동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이 만주식 성과 이름을 등록하도록 강제하였다.[5] 그러나 그 반동으로 상당수의 한인들과 니칸인들은 호구등록을 거부하거나 아예 만주를 떠나 몽골 혹은 누르칸(現 연해주 지방) 등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반발했고, 청조는 호구를 등록하지 않거나 만주식 성명으로 개정하지 않은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한국 역시 자국민들의 만주 유출을 반기지 않았기에 이러한 조치에 별 반응이 없었고, 이에 힘입어 1815년에 이르면 관동에서 만주식 성명을 등록한 인구는 약 800만명으로 입관 이전의 추정인구를 뛰어넘는 성황을 이루었다.

문제는 청의 만주 통치는 군현제에 의한 체계적인 행정체제가 아닌 각 장군부에 의한 사실상 군정에 가까운 체제였다는 것이다. 후요 시기 군현제가 실시되었던 요동 지역은 요동장군의 지배 하에 각 군사지역마다 별도의 전담 행정관이 배치되어 군현제와 비슷한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길림장군 및 흑룡강장군부 지역은 각 부대가 그대로 지역을 통치하였다. 청조는 강희제 이후 각종 제도의 화화(華化) 속에서도 만주의 한화만은 극도로 경계하여 중원 및 한국과 구별되는 이른바 '만주 고유'의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내는데 집착하였다. 이는 만주인들 입장에서 중원과 별도의 지원책과 우대책이 시행되는 이득도 있었지만, 만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정주민의 통치체계를 거부하는 상황은 행정의 비효율과 그에 따른 정책 시행의 난맥상을 불러왔다. 행정과 치안의 공백을 틈탄 마적과 수적의 발호, 상거래에서의 사기 등 각종 무법·탈법행위가 횡행했고, 19세기 들어 러시아와의 국경충돌이 빈번해지면서 만주인들은 과거의 우대와 지원이 아닌 관내 귀족들의 장원 경영과 군비 지원이라는 명목 하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1810년대 이후 만주인들은 이러한 상황의 해결을 북경 중앙조정에 청원하려 하였으나 청조는 1822년 통관조칙을 통해 만주 방위를 이유로 오히려 만주인들의 관내 진입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만주인들이 만주인 국가인 청이 아니라 적대적 이웃인 한국을 통해 물자와 정보를 습득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만주조정의 수립과 이중통치구조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58년 아이군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 이북 영토의 관리권이 러시아에 넘어갔으며, 2년 후인 1860년 북경 조약을 통해 사하리얀강이 러청간 국경으로 확정되었다. 다급해진 청조는 만주 인구의 증가를 위해 1860년부터 관동 호적령을 철폐하여 만주식 성명 없이도 호구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동안 대러 방위라는 명목으로 숱한 희생을 감내해왔던 만주의 민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1864년 묵던에서 한국인과 니칸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폭동이 벌어진 데 이어[6] 1870년대 초까지 만주 전역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빈발했다. 이 와중에 한국은 자신들이 약 200년간 청의 우방으로써 만주의 경제를 지탱하는 한편 수차례의 출병으로 만주 방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였으나 청조가 러시아에 사하리얀강 이북 및 우수리 지방을 러시아에 넘겨버리는 행태를 배신행위로 여겼고 이는 한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 전격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베이징 조약으로 주강 하구의 향산과 뇌주반도, 주산군도를 뜯어냈던 한국은 이어 한국계 주민 및 기업 재산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수차례 출병하여 친한민병대와 함께 포수, 부르가투, 칭니와, 콰이다무 등 남만주의 주요 도시를 장악하였다.[7]

청조는 한계가 명확해진 기존 만주 통치 방식을 개편하려 하였고, 여기에 한국이 끼어들었다. 한국은 근 10년에 걸친 만주 내전으로 자국민과 기업들이 입은 피해와 만주 방위를 위해 치른 비용을 청조가 보상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편전쟁 이후 각지의 반란과 분리독립에 시달리고 있던 청조는 이 요구를 수용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청조의 입장에서는 발상지지라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미개척지에 양면전선의 위험을 안고 있는 만주보다 풍요로운 중원에서의 정권 유지에 집착했고, 결국 1874년, 전 진수흑룡강등처장군 아이신교로 이샨의 장남 아이신교로 자이아[8]를 만주국왕으로 봉하여 관동의 통치를 일임하였다. 이는 왕조의 발상지지를 도마뱀 꼬리처럼 잘라내어 사실상 한국 자본에 배상금으로 넘겨준 격이라 많은 만주인들의 공분을 샀으나, 그나마 새로운 만주조정이 한국의 협조를 이끌어내어 통치조직을 정비하고 1878년부터 만주 로현제를 실시하는 등 행정과 치안을 회복하면서 만주는 차차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의 과중한 군사비 지출로 말미암은 고질적인 재정난과 조세부담은 계속되었고, 한국 자본은 한국 정부를 등에 업고 만주 전역에서 이권 침탈을 가속화하였으며, 청조는 번국인 만주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조공관계를 강요하며 부담을 가중시켰다. 중앙조정은 만주에 대해 별 다른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지만 만주는 꼬박꼬박 조정의 재정을 채워줘야 했다.[9] 특히 청 조정이 러시아와 가까운 몽골의 방위 문제에는 중앙조정 차원에서 대응하면서도 '집토끼'인 만주 방위는 만주 현지인들에게 떠넘기는 상황은 만주인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여기에 만주의 통치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교육받은 행정인력을 만주에서 충당할 수 없어 대부분 관내에서 데려와야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니칸인 혹은 화화(華化)된 만주인들로 현지 만주인들의 언어, 문화 등을 무시하고 관내의 언어와 문화를 강요했다. 이미 청조의 강요로 반강제적으로 만주화되었던 상당수의 한국계와 니칸계 만주인들은 이들의 이러한 행태에 극렬히 반발하였고,[10] 만주 지식인들은 만주어, 만주문화의 보존과 발전을 주장하며 만주교육운동을 벌였다. 그나마 공선왕 자이아 이래 만주왕실이 스스로 만주어를 쓰고 나름대로 만주인민들의 교육과 복리에 신경을 쓰면서 왕실에 대한 만주인들의 여론은 호의적으로 변했으나, 정작 만주국왕 역시 청조의 번왕이라는 신분상 권한이 상당히 제약되어 있었고 만주 조정이 북경 중앙조정에서 파견된 인력들과 관내 귀족들의 영지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이중적인 통치구조가 만주인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흠정헌법대강과 만주민권운동

1899년 의화단의 봉기로 시작된 북청사변은 1900년이 되자 만주에도 영향을 끼쳤다. 의화단은 기본적으로 화인들이 주도한 멸만흥화 운동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1900년 들어 부청멸양으로 구호가 바뀐 후에도 관동 지역에는 거의 유입되지 않았으나, 대신 멸만흥화 구호에 자극을 받은 만주인들이 곳곳에서 니칸계 주민과 관리들을 린치하거나 살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만주 조정은 신설 만주군을 투입해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만주에 주둔중이던 중앙의 팔기부대는 나름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대러국경 수비를 위해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만주 조정은 한국에 병력 파견을 요청하였고, 1900년 8월부터 한국군 10만여명이 만주 전역을 장악하였다.[11] 이유야 어찌되었건 번국 조정이 천조의 승인 없이 외국군을 들인 문제로 격분한 청조는 1902년 10월 한국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전격적으로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고, 만주 조정은 묵던성에서 농성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국왕 아이신교로 유거와 세자 훙투이가 모두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청조는 홧김(?)에 만주 왕실을 폐지하였으나 정작 만주를 직할통치할 계획은 없었고, 이에 만주 왕실의 폐지에도 만주 조정은 폐지되지 않고 남아있는 공위 상태가 도래했다. 이러한 권력공백 상태를 틈타 러시아는 기어이 숭가리강 이북지역에 진주하여 하르빈과 치치가르 등의 도시를 건설하였고, 한국은 압록-두만강 북안 9개 현을 점거하고 행정권을 행사하였다. 오랜 전란에 지친 만주인들은 1906년 청조가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자 만주 통치의 법제화를 기대하였으나, 1908년 반포된 흠정헌법대강은 장성 이남지역에만 적용되어 만주는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간 청조의 만주에 대한 푸대접에도 불구하고 발상지지이자 황실, 귀족들과 동족이라는 사실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만주인들은 청조가 만주를 사실상 외국, 그것도 식민지로 취급하는 사실에 분개하여 대대적인 민권운동을 벌였다.

사실 청조 치하에서 '만주인'에 대한 관념은 청조와 관내 만주인, 관동 만주인들 사이에 완전히 제각각이었고, 정확히는 관동에서도 정주민인 조선계, 니칸계 만주인들과 여진계 만주인들, 기인들이 또 달랐다. 원래 만주의 황족과 귀족들은 부족제 사회에서 출발했고 기인으로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언어와 이름을 사용한다 해도 어디까지나 복속민이지 동등한 입장의 동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인이 아닌 일반 농민으로 새롭게 유입된 조선계나 니칸계는 말 할 것도 없었다.[12] 청조가 이들을 만주인이라는 이름 아래 묶은 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만주에 남아있던 우디거, 우랑카이, 나나이 등의 제 부족으로부터 우위를 점하고 조선인이나 니칸인 등의 정주민들로부터 관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13] 반면 여몽전쟁 이후 고려-조선인이라는 단일한 국가 정체성의 경험이 상류층부터 하층민까지 깊게 남아있던 조선계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만주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스스로를 황족과 동족인 만주인이 된 것으로 여겼고, 이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북방민족과 스스로를 구분했던 니칸인들 역시 만주화를 만주 정착을 위해 겪었던 고난, 통과의례로 평가하였기 때문에 이후 관외 출신 관리들의 화화(華化) 강요에 만주 원주민들보다도 격렬하게 반발했다. 물론 그 외의 원주민계 만주인들도 상당수는 건주에 무력으로 통합된 처지였고, 청조가 만주의 무수히 많은 문제들을 그저 발상지지 타령이나 하면서 묻고 넘어가려 드는데 고개를 끄덕거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똑같이 '만주인'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관내 만주인과 관동 만주인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관내에서의 만주인은 팔기를 기반으로 하는 지배계급 그 자체인 반면, 관동 만주인은 조금 더 근현대의 민족적 개념(그것도 혈통보다 문화에 기반한)에 가까웠다. 말하자면 관동 만주인들, 특히 건주와의 투쟁경험이 없거나 희박한 조선계, 니칸계는 거의 짝사랑에 가깝게 청조에 동족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또 그것을 기대한 반면, 청조를 위시한 관내 만주인들은 만주 지역의 영위에 큰 문제가 없는 한 딱히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숫적으로 우위에 있는 제화인(諸華人)들을 위무하며 정권을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한 관점에서 황권을 스스로 제약해가며 흠정헌법대강을 내놓았는데 굳이 만주에서까지 황권과 만주 귀족들의 구시대적 특권을 내려놓을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사정이 나았던 팔기 소속의 관동인들 역시 그나마 출세할 수 있었던 만주 내부에서조차 중앙조정의 관리들과 충돌하면서 오히려 만주 지식인의 지위를 꿰차고 만주민권운동을 주도하는 판이었다.

사실 만주의 열악한 교육여건 상 이런 민권운동을 만주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주인들은 어디까지나 청조가 자신들을 자국민으로 인정한다는 상징으로써 민권운동의 주요 요구, 즉 헌법, 선거, 의회의 시행과 설립에 찬성하는 것이었으므로, 만일 청조가 여기에서 어느정도 만주인들에 대한 유화책을 시도했다면 민권운동은 큰 반향을 얻기 전에 흐지부지되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조는 1910년 아이신교로 유거의 차남 훙루이를 공위 상태였던 만주국왕위에 앉히는 것 외에 별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심지어 1914년 훙루이가 만주에서 자체적으로 기본법 제정과 의회 설립을 추진하자 이를 반역으로 몰아 팔기를 동원하여 훙루이를 비롯한 왕실 일가를 도륙하고 만주조정까지 폐지하여 만주에 군정체제를 수립하였다.

관내 상실과 하르빈 봉기

만주 왕실과 조정이 폐지된 직후인 1915년, 흑령호 사건으로 한국이 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만주전쟁과 2차 민권운동

전개

고종 즉위와 쟁탈화

2.12 쿠데타

하르빈 시민 봉기와 고종의 합류

하르빈 시가전

'반란의 진압'과 퇴위 조서 발표

결과

만주 제1공화국 수립

국제연맹의 만주공화국 승인

영향

만주 현대사의 시작

한국 3월 혁명

  1. 만주 제1공화국의 국제연맹 가입으로 제1혁명이 완수된 것으로 간주
  2. 만주에 거주하는 화북계 주민을 이르는 말. 원래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을 이르는 말이다.
  3. 후요 인구는 400만명 수준으로 발해-조선인이 200만명이며 화인(니칸인) 100만명, 여진인 60만명 등이었다. 이 당시에는 흥안령 일대의 키탄부를 몽골인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 1660년~1760년의 100년간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은 약 60만명으로 추산된다.
  5.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 이후 호구를 등록한 조선인과 니칸인들은 대부분 본국에서도 성씨가 없던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이후 일본과 비슷하게 지명을 따거나 거주지역의 특징을 따서 이런저런 만주식 성을 만들었는데, 만주의 부족적 특성에 기인한 무쿤-하라 방식의 성씨와도 달랐을뿐더러 복수의 씨족이 동일한 성씨를 가지는 경우도 생겨났다. 화식 성씨가 있는 이들은 보통 성씨 뒤에 '기야'(家)를 붙였다.
  6. '한국계 만주인'과 '니칸계 만주인'도 만주인으로써 이 학살에 대거 가담하였다.
  7. 그나마 청조와의 교섭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청간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외무부의 만류로 묵던 점령은 면했다. 대신 구도 리요안과 철광산지인 안산이 모두 한국군 혹은 친한민병대에 점거당했다.
  8. 강희제의 14황자인 순근군왕 윤티의 5대손이다. 그가 만주국왕으로 낙점된 것은 아버지를 따라 관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고, 조상인 윤티가 옹정제의 동복제로 황실의 적통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샨이 아이군 조약의 청측 대표로 만주에서 반감이 드높았기 때문에 청조에 대한 불만을 떠넘기려는 의도도 있었다.
  9.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는 정통의 변을 계기로 중원이 분열되어 막대한 물산을 독점하는 천자국이 사라지면서 무역제도로써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졌고, 이후 동아시아의 교역은 민간이 주도하는 각종 형태의 사무역 중심이었다. 18세기 초 강희제의 청이 강남 원정에 성공하고 중원 천자국의 자리를 대체하면서 한때 한국과 일본도 청에 재조공을 고려할 정도로 조공무역이 각광을 받던 시기도 있었으나 18세기 후반 들어 청이 빈발하는 자연재해와 내란, 외침에 시달리면서 조공은 다시금 번국들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었다.
  10. 니칸인들의 화화 강요에 오히려 니칸계 만주인들이 반발한 점은 킬트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사례와도 종종 비교된다.
  11. 북경 공략에 투입된 육수군 3만명은 별도.
  12.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15년 전쟁으로 유입된 야마토여진 출신자들을 더 높게 쳤고 이들은 만주 팔기 귀족으로 편입되어 입관도 함께했다. 야마토부를 여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족 공동체로 인정했기 때문.
  13. 특히 이 조치는 화식 성씨를 중시하는 한국이나 니칸의 중류층들이 만주에 터 잡고 살면서 지역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