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Vietnam Wa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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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1955년 11월 1일 - 1981년 9월 30일 / (9466일) | ||||||||||||||||
장소 |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남중국해, 태국만 | ||||||||||||||||
결과 | 북베트남, 베트콩,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패배 | ||||||||||||||||
영향 | 미국의 인도차이나 전역 승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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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Vietnam War) 또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Second Indochina War)은 1955년 11월 1일부터 1981년 9월 30일 하노이의 함락까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북베트남은 소련, 중국과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지원했으며, 남베트남은 미국과 반공산권 국가의 지원을 받았다. 이 전쟁은 냉전 시기 최초로 벌어진 대리 전쟁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은 26년 간 진행되었으며, 미국은 1973년에 잠시 철수했다가 1978년 다시 개입하였다. 또한 이 전쟁으로 인해 라오스 내전과 캄보디아 내전이 격화되었으며, 1981년 세 나라 모두가 자유 국가가 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났다.[2]
이 전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과 베트남 좌익 혁명운동 사이에 벌어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기인했다. 1954년 프랑스군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한 후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도맡았다. 북베트남의 지휘 아래 남베트남 공동전선인 베트콩은 남쪽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북베트남은 또한 1958년 라오스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라오스를 침공하여 남베트남에의 침투를 위한 호치민 트레일을 건설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59년 천 명 미만의 주둔 규모를 1964년 23,000명으로 확대했다.
1964년 8월 통킨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과 충돌했다. 이에 미국 의회는 통킨만 결의안을 의결해,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베트남에 미군 주둔을 늘릴 수 있게 하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다. 존슨은 처음으로 전투 부대 파견을 명령했으며, 주둔 병력 규모를 184,000명으로 확대했다. 미국은 북위 17도 선을 넘어 계속 진격했으며, 넓어진 전선을 감당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계속해서 파견했다. 미국과 베트남 공화국군은 공중 우세와 압도적 화력을 바탕으로 북베트남의 전선을 초토화하며 전진했다. 또 미국은 대규모 전략폭격을 통해 북베트남 후방의 군사 시설들을 무력화 시켰다.
1968년 진행된 테트 공세는 전쟁에 대한 미국 내 지지를 축소시켰다. 테트 공세는 실패로 끝났지만, 사람들은 멸망이 눈 앞인 북베트남이 대규모 게릴라 작전을 진행하는 것에 공포감을 느꼈다. 미국은 1964년 라오스, 1969년 캄보디아의 북베트남 보급로에 직접적인 폭격을 시작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취임한 후 베트남화 정책이 실시되었는데, 이는 승리가 코앞인 미군을 단계적으로 본토로 철수 시키는 계획이었다. 군 장성들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승리라고 닉슨에게 간언했지만, 닉슨은 더 이상의 미군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 1972년 초 미군 대부분은 베트남 전역에서 철수했다. 1973년 1월 파리 휴전 협정을 통해 미군은 전부 철수했다. 하지만 휴전은 금세 깨졌고,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통제하던 풀리를 급습하며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은 생각보다 잘 버텼으며, 특히 크메르 공화국과 라오스 전역까지 진출해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군사적 역량이 쌓인 상황이었다. 1975년 4월 폴리를 상실했지만 남베트남은 아직도 미국의 압도적인 물자 지원을 받으면서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1976년 전황이 나아지지 않는 상태에서 내부 결속력을 다지려는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나, 크메르 루주 정권 등 반군 세력이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대학살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반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은 당시 미국에서 인권외교를 강조하는 대선 후보 지미 카터에게 베트남전 재개입이라는 명분을 쥐어주었다. 카터는 선거운동 내내 도덕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냈으며, 당시 미국은 닉슨에 대한 실망감과 카터에 대한 희망으로 다시 한 번 민주당을 선택했다. 결국 1978년 카터는 1973년 완전 철수한 미군을 다시 파병할 것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큰 논쟁을 낳았지만 민주당 다수인 의회에서는 별 다른 저항 없이 통과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