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록의 천하관

리반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4월 14일 (일) 09:5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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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록의 천하관은 중국의 화이관(華夷觀)을 중심으로 한 책봉·조공 관계의 반발에서 시작된 질서 변동의 과정이었다. 일반적으로 영록(英鹿)은 중원을 차지한 국가들과의 실속 관계를 중시하였고, 고대 사회에서 선진 문물을 갖추고 있던 중국 문화의 적극적인 수용을 위해 스스로 조공하는 경우도 많았다. 허나 중원 국가들의 잇따른 몰락과 재구축의 과정 자체를 '무분별한 혼란'으로 판단한 지식인 계층 사회에서는 다원적인 국제 관계의 과정 외에 자국 내에 변방 이민족 혹은 사회를 통해 독자적인 천하관을 내세우고자 했고, 그것이 지금의 천하관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견수사와 견당사

6세기 말, 중원 사회가 수나라(水國)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시점일 당시, 에이슈 지방(英州地方)에서는 하나아루 하누센(壹乙天孫, 567~630)의 치세가 중기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당시 하나야루 하누센백제(百濟)를 통해 유입된 불교를 중앙집권제를 통한 왕권 강화에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왕실 일가의 불교 귀의 및 포교 과정에서 귀족층과의 갈등으로 류타바나국의 난(ルュタパナ國 エ 亂, 586)같은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나야루 하누센은 여러차례 혼란상을 극복하고 칸토지루(カント寺), 만노지루(マンノ寺) 등의 불교 사원들을 건립하여 만에루 시대(滿開時代)의 융성을 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중흥 과정에서 하나아루 하누센수나라의 사신을 파견하여 직접 조공을 바침으로서 중원 국가들과의 국제 관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이를 이용하는데 혈안이었다. 그는 견수사 일행을 통해 유입된 율령 제도를 통해 '2성 6관제'와 선거제(先擧制, 과거제의 전신)를 비롯한 중국 문물들을 대거 수용하게 되었고, 한반도를 통한 간접 교류에서 중국과의 직접 교류를 꾀함으로서 그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후 수나라의 뒤를 이어 당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자, 하나하루 하누센의 장남이자 왕위의 적법한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던 히치노코에 하누마리(筆ノ声天下)가 대권을 장악하고 629년의 당나라에 입조하고자 견당사를 파견했다. 이때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의 방문한 기나사비(道士)[1] 안노에(アンノエ)[2]가 여러 불교 서적과 도교 서적을 구법해 오게되어 민간 신앙과의 융화가 진행되었다.

각주

  1. キナサビ, 당시에는 도교 수행자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종교계에서 힘을 쓰는 이들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의미 확대가 일어났다.
  2. 지카호(ジカホ, 영록어의 고대 문자 표기)로는 안난병(案鸞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