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지움) |
(→김나지움) |
||
74번째 줄: | 74번째 줄: | ||
==학창 시절== | ==학창 시절== | ||
===김나지움=== | ===김나지움=== | ||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를 조기 졸업하고 4학년 담당 선생님이었던 [[요하나 클라이펠]]의 추천으로 [[바이에른]] 전역에서 유명했던 [[뉘른베르크 시립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는 그 김나지움의 조기 졸업 시험을 통과한 첫 사람이었다. 그가 김나지움에 다닌지 7년째 되는 해인 [[1976년]]의 [[6월]], 김나지움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소비에트 연방군]]을 필두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서독]] 침공이 시작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작전|브라운슈바이크]]라고 명명된 군사 작전에 의해 시작 된 전쟁은 그와 그의 가정을 흔들어 놓았다. 굳센 애국자였던 그의 집안은 곧바로 군인으로서 적에 대항하여 저항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프]]라는 도시에서 [[바이에른]]으로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다 전사했다. 크라우스 [[선임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독일인의 노래|국가]]를 부르며 가족사진을 주먹에 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하네스의 어머니인 레나 엘스너는 [[에를랑겐]]의 [[의무소]]에서 복무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형이었던 하소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뮌헨]]으로 피난가던 중 괴한의 총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요하네스는 그의 형이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의 형제와 곁에 있었다. 뮌헨에 도착해서는 곧장 방공 대피소로 들어갔지만 운 없게도 그 도시에 가해진 마지막 [[폭격]]에 그 대피소는 불에 휩싸였다. 그는 연기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두 동생을 데리고 방공호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의 막내 남동생은 몸이 약해서 항상 [[호흡보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여동생은 양쪽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주|국가]]는 [[국가공훈자]]의 |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를 조기 졸업하고 4학년 담당 선생님이었던 [[요하나 클라이펠]]의 추천으로 [[바이에른]] 전역에서 유명했던 [[뉘른베르크 시립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는 그 김나지움의 조기 졸업 시험을 통과한 첫 사람이었다. 그가 김나지움에 다닌지 7년째 되는 해인 [[1976년]]의 [[6월]], 김나지움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소비에트 연방군]]을 필두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서독]] 침공이 시작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 작전|브라운슈바이크]]라고 명명된 군사 작전에 의해 시작 된 전쟁은 그와 그의 가정을 흔들어 놓았다. 굳센 애국자였던 그의 집안은 곧바로 군인으로서 적에 대항하여 저항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프]]라는 도시에서 [[바이에른]]으로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다 전사했다. 크라우스 [[선임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독일인의 노래|국가]]를 부르며 가족사진을 주먹에 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하네스의 어머니인 레나 엘스너는 [[에를랑겐]]의 [[의무소]]에서 복무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형이었던 하소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뮌헨]]으로 피난가던 중 괴한의 총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요하네스는 그의 형이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의 형제와 곁에 있었다. 뮌헨에 도착해서는 곧장 방공 대피소로 들어갔지만 운 없게도 그 도시에 가해진 마지막 [[폭격]]에 그 대피소는 불에 휩싸였다. 그는 연기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두 동생을 데리고 방공호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의 막내 남동생은 몸이 약해서 항상 [[호흡보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여동생은 양쪽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주|국가]]는 [[국가공훈자]]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을 치료하는데 비용을 지원했지만 요하네스의 형제들은 얼마 안 돼서 그의 부모를 따랐다. 그는 전후 처리가 끝난 뒤, 예정대로 뮌헨 시청에서 [[초등교육]]의 수료을 승인받았다. | ||
===대학·대학원=== | ===대학·대학원=== |
2018년 12월 24일 (월) 17:21 판
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Ernst | 프로젝트: Project 1988 | 모집: 사용자토론 | 세계관: 크리크 & 빌레
요하네스 레오폴트 볼프람 '미하엘' 폰 슈타우펜베르크 Johannes Leopold Wolfram 'Michael' von Stauffenberg | |
출생일 | 1960년 11월 20일 |
---|---|
출생지 | 서독일 바이에른 주 슈타른베르크 |
사망일 | 2048년 4월 2일 (87세) |
사망지 | 바이에른공화국 뮌헨 주 뮌헨 |
국적 | 서독일 우폴베니아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공화국 |
별명 | 신동(Wunderkind) |
종교 | 기독교 |
가문 | 폰 슈타우펜베르크(von Stauffenberg) |
정당 | 불완전존속당 (Uvolben) |
부모 | 크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부) 레나 엘스너(모) |
배우자 | 예시카 회르비거(1992-2001) |
자녀 | 헤르만 폰 슈타우펜베르크 |
학력 | 지휘지도교도단 과정 수료 1987(26~27) 육군기계화학교 졸업 1985(24)~1987(26) 바이에른육군사관학교 졸업 1983(22)~1985(24) 뉘른베르크 육군부사관교육센터 수료 1982(21~22) 뮌헨군사대학원 졸업 1980(19)~1982(21) 뮌헨군사대학교 졸업 1977(16)~1980(19) 뉘른베르크시립김나지움 졸업 1969(8)~1976(15) |
복무 | 우폴베니아 독일연방공화국 |
복무 기간 | 1987년 12월 2일 ~ 1999년 12월 2일, 2004년 8월 2일 ~ 2010년 6월 5일 |
최종 계급 | 원수(Feldmarschall) |
근무 | 우폴베니아 국방군
|
지휘 | |
주요 참전 | 제3차 세계 대전
|
서훈 내역 | |
생애와 유년 시절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1960년 11월 20일에 바이에른주의 슈타른베르크 외곽에서 독일 연방군 중령으로 복무하고 있었던 크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1932년 ~ 1976년)과 그의 아내이자 독일 연방군 지원의무병 출신이었던 레나 엘스너(1929년 ~ 1975년) 사이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유년 시절 동안 슈타른베르크에서 유치원 과정을 마친 이후 그의 선생이었던 요하나 안나 헤이케의 추천으로 뉘른베르크로 이주하였다. 그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에 입학하였고 그룬트슐레에서 항상 수석이었으며 각종 교내 경시에서 손위의 학생들을 제치고 최고상을 수여받았다. 이에 3학년을 거치지 않고 2학년에서 4학년으로 월반했다. 그는 또래보다 한 살 일찍 그룬트슐레를 졸업했다. 그가 졸업할 때까지 그의 가정은 항상 화목했다.
학창 시절
김나지움
요하네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프리드리히 헤겔 그룬트슐레를 조기 졸업하고 4학년 담당 선생님이었던 요하나 클라이펠의 추천으로 바이에른 전역에서 유명했던 뉘른베르크 시립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는 그 김나지움의 조기 졸업 시험을 통과한 첫 사람이었다. 그가 김나지움에 다닌지 7년째 되는 해인 1976년의 6월, 김나지움 졸업을 한 해 앞두고 소비에트 연방군을 필두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서독 침공이 시작되었다. 브라운슈바이크라고 명명된 군사 작전에 의해 시작 된 전쟁은 그와 그의 가정을 흔들어 놓았다. 굳센 애국자였던 그의 집안은 곧바로 군인으로서 적에 대항하여 저항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프라는 도시에서 바이에른으로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다 전사했다. 크라우스 선임원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국가를 부르며 가족사진을 주먹에 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요하네스의 어머니인 레나 엘스너는 에를랑겐의 의무소에서 복무하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형이었던 하소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동생들을 데리고 뮌헨으로 피난가던 중 괴한의 총격에 치명상을 입었다. 요하네스는 그의 형이 눈을 감는 순간에도 그의 형제와 곁에 있었다. 뮌헨에 도착해서는 곧장 방공 대피소로 들어갔지만 운 없게도 그 도시에 가해진 마지막 폭격에 그 대피소는 불에 휩싸였다. 그는 연기를 마시고 의식을 잃은 두 동생을 데리고 방공호를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의 막내 남동생은 몸이 약해서 항상 호흡보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었고 여동생은 양쪽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고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국가는 국가공훈자의 자녀들이었던 그들을 치료하는데 비용을 지원했지만 요하네스의 형제들은 얼마 안 돼서 그의 부모를 따랐다. 그는 전후 처리가 끝난 뒤, 예정대로 뮌헨 시청에서 초등교육의 수료을 승인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