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군주당 (영어: Liberty Monarchist Party of Saculechia, 自由君主黨, LMP)은 사클레치아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군주주의, 강성 국민주의 성향의 정당이었다. 상징색은 핑크, 정식으로는 자유군주 핑크이다.

중앙이세계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되어 있으며 선관위에서는 이 당을 보수 5, 즉 우익, 극우로 분류된다. IY 200년 4월에 친귀족 성향의 자유귀족당, 전체주의, 제국주의 성향이 강한 제국당, 대안 우파 성향인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여 통합군주당이 되면서 소멸되었다.

IY 116년 2월 사클레치아 왕국을 지도하던 헨리 4세가 끝내 귀족들과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2월 혁명으로 폐위되고, 이를 주도한 세력들이 군주당에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이 중 전제군주제를 주장하는 율리우스가 세력과 국가주의 성향의 친엠페로우 세력이 등장했으나 전당대회를 통해 율리우스 카이저 1세가 당선됨에 따라, 117년 4월 자유군주당을 출범시킨다.

120년 4월 제12대 의회선거에서 35석으로 선전하였으나 다수당인 자유당을 막지 못했으며 124년 4월 율리우스 카이저 1세 사후 율리우스 2세가 취임하였으나 일명 필리노이의 난이라는 반군주당 운동이 터지면서 백성의 지지를 잃었고 농노들과 일부 평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당이 백성들의 지지를 크게 얻어 130년 7월 제13대 의회선거에서 13석으로 추락하면서 소규모 정당이 된다. 그러나 전당대회와 계파 갈등 해결을 주도하면서 140년 12월 제14대 의회선거에서는 연립 다수당이 되었으나 이 선거를 계기로 율리우스파 급진파인 로버트 작센이 선출되면서 다시 율리우스파 급진파들이 당권을 잡게 되었으며 141년 6월 율리우스 4세가 사클레치아의 황제로 즉위하여 독재 정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제1차 유로파 전쟁 이후 제15대 의회선거에서는 80석으로 제1당이 되었으며 이는 제16·17대를 제외한 제19대 의회선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제16대 의회선거에서 카이포스의 행보로 인하여 대부분의 양 파벌이 카이포스의 퇴진을 빌미로 탈당을 주도하면서 대규모 분당 사태를 겪었고 166년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이 30석을 얻어 제4당으로 추락하였다. 이후 제18대 의회선거부터 다수당이 되었다가 엠페로우파 의원 35명이 율리우스파의 독자 행보에 반발하여 탈당하였고 임페로이 사클레치아를 결성하였다. 그 후 195년 5월 초대 사클레치아 지방선거에서 1,100석을 흭득하였으며 198년에는 자유귀족당, 제국당과 선거연합인 미래군주연합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결국 200년 3월 자유귀족당과 제국당 뿐만 아니라 일부 엠페로우파가 탈당하여 결성한 임페로이 사클레치아와 통합하게 된다.

역사

사클레치아 2월 혁명

앵글로색슨계와 사클레치아계 사이에서 태어난 사클레치아 왕국의 왕인 헨리 2세는 IY 100년 3월 간접선거를 통해 38세의 나이로 취임하면서 그 동안의 국정 운영 방식이 아닌 자본가, 평민, 여성, 외국인, 노예, 군사지도자 등 각 대표를 통한 국정 운영으로 나라에 대한 기틀을 다졌고, IY(이세계년) 109년 11월에는 신생 정당인 자유당과 손잡고 함께 연립 정부를 차리게 된다. 하지만 귀족들과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사클레치아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헨리 2세가 망쳤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어 110년 3월 두 번째 간접선거에서 헨리 2세가 재선을 하게 되었으나 곧바로 경제 침체가 일어났다. 그래서 헨리 2세는 새로운 경제 계획인 헨리 계획을 발표하는데,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과 유사하다. 당연히 대부분의 대표는 찬성표를 던졌고 이에 대한 경제 안정화를 시작하게 된다. 한편, 평범한 그리스계 농민이었던 율리우스 이메타리우스가 살고 있는 북부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흉년이 일어났는데, 율리우스가 가지고 있던 가축이 모두 굶어죽자 농민으로서의 삶을 그만두고 자신이 그동안 모은 여행 자금으로 수도인 일리오스로 떠난다. 그 후 율리우스는 일리오스에 와서 그의 형제였던 올리베르를 만났고, 올리베르는 자본가, 농노, 평민 등을 대변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해보자는 제의를 한다. 율리우스는 이에 수락하였고 이렇게 해서 신흥 조직인 을 만들게 된다. 율리우스는 이 때부터 어느 자유주의 학자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올리베르는 헨리 2세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다. 115년 3월 다시 만난 두 형제는, 자유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우리는 전통을 파괴시키는 헨리 2세로부터 사클레치아의 전통을 지키고 자본가들과 함께 자유주의를 퍼뜨릴 것이다!"라는 공보를 써 일리오스 전역에 퍼뜨렸다. 그러나 헌병군에게 걸려 반역죄로 체포되는 일도 빈번했었다. 그러던 115년 5월 자본가들이 두 형제의 집에 찾아와 함께 헨리 2세를 몰아내자는 동맹을 제안했고 그 결과 의 회원 수는 300명으로 늘어나 여기에 군주주의자, 중도주의자, 보수주의자, 전통주의자, 일부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하는 자유시민단을 조직한다. 한편 농노들은 영주들의 가혹한 행위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서 자유시민단은 더 많은 자본가는 물론, 국수주의자, 국민주의자, 귀족들과 합류하여 헨리 2세의 폐위를 요구했다. 115년 11월 헌병군의 대대적인 시위 진압으로 회원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본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원래 목적이 헨리 2세의 폐위가 아닌 사클레치아 왕국의 체제를 바꾸자는 것으로 태세전환했으며, 116년 2월, 마침내 300만명이 무기를 들고 일리오스 궁전에서 혁명을 일으켰으니, 바로 사클레치아 2월 혁명이다. 이로 인하여 헨리 2세는 참수형으로 처형당했고, 각 국정 대표들도 세르도피아 왕국, 엘레프 공국 등으로 탈출했다. 한편 헨리 2세가 국왕이 되기 전 입당했던 자유당 측은 반발하였고 이메타리우스 형제를 반역자라고 주장하였다.

자유군주당의 탄생

이메타리우스 형제는 향후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해 율리우스는 "자유군주제"를 주장했고, 올리베르는 "절대왕정"을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의견 때문에 자유시민단은 결국 분열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나 이 둘이 일반 군주제를 지향하는 군주당이라는 정당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자유시민단 회원들도 형제들을 따르겠다며 군주당에 가입하게 된다. 한편 군주당의 지도자인 밀로스 욜라키치는 저 불순세력들에 의해 군주당이 큰 위기에 빠졌다며 두 형제와 그 지지자들을 내쫒으라고 했으나 상황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밀로스와 그 간부들은 쫒겨났고, 끝내 당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둘은 자유시민단을 흡수하면서 곧바로 자유군주당을 탄생시킨다. 올리베르는 "황제"라는 뜻의 엠페로우라는 이름으로 개명했고, 율리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저 1세라는 이름으로 임시 국왕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117년 5월 율리우스가 이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올리베르는 지지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세력들을 모아 엠페로우 이클립스를 조직하게 되었으며 율리우스 세력과 경쟁 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120년 4월 12대 총선에서, 전체 의석인 100석 중에 35석을 흭득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55석+10석 (무소속)을 얻게 되면서 자유군주당은 제2당이 되었다. 120년 8월에는 율리우스가 자동으로 국왕이 되면서 탈당 처리되었으며 율리우스의 동생인 율리우시아 이메타리우스가 최고지도자가 된다.

필리노이의 난과 13대 총선 참패

120년 8월 율리우스 1세는 국정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헨리 2세가 추진해온 헨리 계획을 폐기하고 신경제계획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신경제계획이란 계획 경제가 아닌 유럽/미국식 시장 경제, 자본화를 추진하여 사클레치아의 경제를 안정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자유당은 이에 대해 "과도한 자본화는 신분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라며 비판했으며 당내에서도 갑론을박이 일어나기도 했다.

121년 6월 인도네시아계 사클레치아 백성이었던 필리노이가 이 당에 입당하였고, 율리우스파를 따르기 시작했다. 필리노이는 부지도자를 맡게 되었고 중도파 정치인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재무부 장관을 맡게 된다.

그러나 123년 11월 율리우스 1세는 오크리아강에 댐을 건설하겠다며 예산 89만 보루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자 필리노이는 댐 건설에 들어가는 과도한 예산은 국고를 낭비하는 짓이라고 반대했다. 분노한 율리우스 1세는 필리노이를 재무부 장관에서 내쫒았고 동시에 모든 직위에서 제명을 내리면서 필리노이에게 입당 금지 명령을 내렸다. 필리노이는 결국 무소속인 상태가 되었으며 필리노이는 해방당을 조직한다. 이후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내각에 실망한 백성들이 이 당에 점점 들어오게 되었고 124년 1월에는 당원 수가 10만을 넘어 중소정당이 되었으며 준군사조직인 "해방조직"을 결성한다.

124년 2월, 자유군주당은 위기를 맞는다. 중도파들은 댐 건설을 즉각 중단하라는 논평을 발표했고 이에 중단하지 않을 시 탈당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엠페로우파는 필리노이 측에 가담한 중도파들을 일부 배제시켰다. 한편 해방당은 자유당과 굳건한 동맹을 맺으며 자유군주당과 율리우스 1세를 몰아내자는 의미로 정당연합까지 가게 된다. 한편 율리우스 1세는 건강이 쇠약해지며 국정 지지도까지 떨어지자 결국 율리우스 1세는 조기 퇴임을 결정하였고 그의 동생도 당대표직에서 사퇴하였다. 124년 4월 율리우스 케로베스가 국왕이 되었고 동시에 카이저 2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당의 최고지도자가 되었으나, 율리우스파 내 중도파와 반율리우스파 온건파의 갈등이 절정에 달한다. 124년 5월 새벽, 필리노이 장군을 중심으로 무려 3만 명의 백성들과 해방조직원들이 일리오스 시내를 점거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일리오스를 지키고 있던 헌병들은 이들의 진압에 나섰으나 강력한 해방조직으로는 역부족이었고 당사에서는 중도파와 온건파 정치인들이 점거를 강행하기도 했다. 한편 간부들은 율리우스 2세에게 다른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강경 진압을 요구하자 율리우스 2세는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을 색출해내어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무고한 백성들을 시위 참여자 즉 반역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는 일이 많아졌고 오히려 시위대의 수가 많아졌다. 심지어 헌병의 수가 시위대에 비해 적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방조직이 자유당과 손을 잡고 시위를 이어나가자 더 이상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가 없었던 율리우스 2세는 결국 스스로 물러난다. 자유당의 지지도는 이 시점부터 70%를 넘었고 한스 케르노치가 임시 국왕이 되었다.

율리우스 2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상태였으며 자유군주당은 존폐 위기에 몰렸다. 그러던 중, 율리우스 1세가 백혈병으로 죽게 된다. 율리우스 1세 사망 이후인 126년 5월 한스의 지지도는 50%를 넘어섰고 자유당의 지지율의 상승세도 점점 가파른 상태였으나 자유군주당은 북쪽 마을의 귀족,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아 원내 진입 5%를 넘으면서 9%를 기록했다.

129년 6월 한스는 자유당에 입당했고 동시에 최초로 국왕이 옷에 특정 정당 심볼을 달고 나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윌리엄스 1세를 계기로 과거 정당에서는 독립성을 가진 국왕도 정당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율리우스파가 끝내 힘을 잃기 시작하자 엠페로우파는 잠시동안 당권을 잡고 운영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30년 3월 자유군주당의 당원인 페페르치니 베뢰스티 (엠페로우파)가 자유당 내부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제명되자 엠페로우파가 조금씩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지지도도 7%를 기록하면서 원내 진입률 5% 이하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했고, 당 쇄신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서야 당 쇄신을 시작했다며 당내 비판이 이어졌으며, 결국 13대 총선에서는 13석을 기록하면서 대참패를 당했으며 결국 엠페로우파는 이 과정에서 두 파벌로 쪼개진다. 초국가주의와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과격파와 국민주의를 주장하는 온건파로 분리되었는데 서로가 선거 결과에 책임지라고 주장했고 일부는 몸싸움까지 벌이기도 했다. 한편 엠페로우파의 창시자 올리베르는 율리우스 1세의 사망, 엠페로우파의 분열과 처참하게 패배한 자유군주당의 상황을 보고, 비상회의에서 "우리 당은 이제 끝났을 것이다. 오늘로써 나는 더 이상 정치와 자유군주당에 참여하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평범한 농민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밝혀 탈당 및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율리우스 1·2세의 사임, 필리노이의 난, 엠페로우파 분열로 인하여 자유군주당은 정당 창당 13년만에 해산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 내 혼란 극복, 14대 총선 약진

130년 11월 전당대회를 열고,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는 다시 경쟁 세력이 되었다. 엠페로우파에 유리 소크토라바, 율리우스파에 율리우스 컬리지 주니어, 중도파에 앙리 존슨이 출마하였다. 컬리지는 율리우스파 중에서 가장 중도적인 편에 속하며 소크토라바는 엠페로우파 중 급진파, 존슨은 어떤 파벌에 속하지 않는 중도파에 속한다. 전당대회 결과 새 최고지도자에 율리우스 컬리지 주니어가 선출되었다. 존슨은 2위, 소크토라바는 3위를 기록했으며 특히 엠페로우파의 온건파 대부분이 컬리지를 선호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율리우스 카이저 3세로 당 내 최고지도자가 된 컬리지는 당 내 혼란을 잠재울지 주목된다.

일단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의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었고, 그 결과 양 파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기 시작했다. 131년 6월 자유당의 한스 케르노치가 국왕 자리를 같은 당의 윌리엄스 1세로 넘겨주게 되었으나 군주당 지도부는 한스의 부정부패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31년 8월에는 한스가 대법원 판결 결과 무죄로 판결나자 역풍을 맞게 되었다.

133년 5월 자유당이 신생정당인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려 하자, 자유군주당은 어떻게든 반대를 외치면서 자유당-미래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을 방해하려고 했다. 만약 자유당이 미래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할 경우 55석인 자유당은 미래당 7석을 합친 62석이 되며 개헌선 (60석)을 넘게 된다. 그러던 중 윌리엄스 1세의 내각 중 일부가 각종 사건에 휘말리면서 지지도가 40%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 때를 노린 자유군주당은 미래당을 구색정당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미래당 대표 타치바나 겟코는 반발하면서 자유군주당을 비판했으나, 나중에 군주당 당원들이 미래당을 장악하면서 이제는 겟코 치하의 미래당 역시 생명이 끝나게 되었다. 겟코는 군주당을 "무능한 정당"이라고 비판하면서 구 미래당 당원들과 함께 탈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래당은 자유군주당의 구색정당이 되었으며 이름도 "개발당"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190년 8월 명칭을 미래당으로 환원하였고 191년 5월 원외 우익정당인 신화당과 합당하여 미래신화당의 전신이 된다. 한편 구 미래당 세력들은 반군주당 성향의 발전당을 창당한다.

136년 5월 윌리엄스 1세가 독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자유당은 이 사건의 배후에 자유군주당이 있다고 주장했고 자유군주당은 이를 부인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14대 총선에서 이어진다. 한편 율리우스 카이저 3세를 맡은 쿨리지는 슬그머니 왕좌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급기야 전제정치를 실시한다. 각 장관들이 반발하자 쿨리지는 이들을 물갈이시키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쿨리지의 행보와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였으며 일부 군소정당들도 동참하여 자유당은 반군주당 연합이라는 선거연합을 구성하게 된다. 137년 4월 자유군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어 원내지도자에 중도파 율리우스 네막시스, 부지도자에 온건파 율리우스 마르키스를 선출했으며, 9월에는 신생 극우정당인 파시오당을 흡수합병했다. 138년 6월에는 쿨리지가 이번 선거가 자신의 당과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140년 7월 14대 총선에서는 39석을 얻어 자유당 (20석)을 넘게 되었고 개발당도 11석을 얻어 50석을 기록하면서 처음으로 제1당을 차지한다. 쿨리지는 "이번 선거에 대해 동감하며 하늘에 계시는 주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사클레치아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고 밝혔다. 그리고 자유군주당이 윌리엄스 1세의 독살 사건의 배후가 아님을 증명해준 선거였다.

그리고 140년 9월 중도파와 온건 율리우스파 의원들이 선거인단 100인을 통해 실시되는 간선제로는 선거에 한계가 있다며 백성들이 투표할 수 있도록 직선제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140년 10월 자유당 대표 빌헬름 폰 에른스트와의 회동을 끝으로 찬성 85인, 반대 3인, 기권 22인으로 정족수인 60석 과반을 넘기게 되면서, 이렇게 되면 건국 114년만에 간선제가 폐지되고 직선제를 실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율리우스 카이저 4세의 집권으로 인해 1년도 안되어 폐지되었고 다시 간선제가 실시되었다.

율리우스 4세의 독재와 당의 극우화

14대 총선 이후 전제정치로 정권을 잡고 있던 율리우스가 중도파인 율리우스 3세와 군주당의 당권을 쥐고 있던 율리우스파 중도파들은 힘을 잃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율리우스가 급진세력은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엠페로우파는 온건파 대다수가 율리우스파로 전향하였고 과격파와 소수 온건파만 남았으며 이 구도는 계속 이어지다가 통합군주당부터 구도가 달라지게 된다. 140년 10월 급진파와 중도파, 엠페로우파 중도세력들이 11월에 전당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고, 각 파벌들은 후보 경선을 준비하게 된다. 11월 전당대회에서 율리우스가 급진파인 율리우스 알버트 작센이 중도파인 로버트 헤이치와 맞붙게 됐는데, 나머지 후보들은 전부 탈락하거나 결선 후보들을 지지하였고, 당내에서도 양 후보간의 지지 선호도가 팽팽한 차이를 보였다 (50.1% vs 49.8%).

전당대회 결과 알버트가 최고지도자로 선출되었고, 141년 3월에는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4세가 된 알버트는 전제정치를 이어나갔는데, 141년 4월 알버트는 모든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징수제와 새로 들어온 자본가, 귀족들에게 10만 보루를 국가적으로 지급하는 국가지원제도를 실시하였다. 또, 율리우스가 중도파와 자유당이 합의를 통해 이루어낸 직선제를 당연히 노동자, 농민들은 반발했고, 곳곳에서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것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 사클레치아 노동조합이었는데, 당시에는 10명에 불과했던 소규모 노동조합이었다. 이후 노동자들의 탄압이 이어지자 수많은 공업노동자들이 대개 합류하면서 중소노조로 성장했다. 141년 6월 율리우스 4세는 "국가대개혁"을 발표하여 사실상 독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으며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노조와 반정부 세력에 대항하는 자경단을 대거 조직하게 된다. 자경단들은 이들의 주권은 율리우스 정권에 있으며 사회 질서 안정과 사클레치아의 발전을 추구하며 동시에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했다. 142년 5월에는 이들이 조직한 자경단들을 모아 자유십자단을 조직하였고 군사화된다. 사클레치아군도 신식 군대로 바꾸고 군비를 증강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당시 어나더어스의 세계 군사력은 2위에 올라서기도 했다. 또 자유군주당은 이때부터 극우화가 시작된다.

한편 사클레치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린치아 왕국, 프랑키아 왕국, 와루샤 공국은 율리우스 4세의 행보에 반발하여 대응을 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은 곧 유로파는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제1차 유로파 전쟁 기간

쾨니히스에스테 사건 이후 벌어진 제1차 유로파 전쟁 기간 동안에는 침공에 대비하여 지하당사를 만들어 이곳에서 정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율리우스 4세는 여성들도 사클레치아의 조국 전쟁에 참가하라고 호소했고 일부 노동자들도 전쟁 승리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며 율리우스 4세 편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사클레치아 노동조합원들은 일리오스에 반전 운동을 펼쳤으며 율리우스 4세의 퇴진을 촉구했다. 전쟁에 관심이 없었던 일부 시민들도 이들의 설득을 받아 반정부 세력에 합류하였고 급기야 율리우스 1세부터 금지된 공산당도 다시금 등장하였다. 율리우스 4세는 이들을 반역자라고 주장하여 자유십자단을 동원해 진압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이 조직한 율리우스 4세의 행보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저항단을 반국가단체로 지정하였으며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144년 6월 어나더어스의 세계 군사력이 각각 1, 3위인 로스카노 제국이클리우스 왕국, 이클리우스 왕국의 동맹국인 이클루시아 왕국이 참전하면서 사클레치아의 전세가 불리해졌고 사클레치아의 반전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일부 성직자들은 율리우스 4세와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여 분신하기도 했다. 144년 11월 사클레치아군은 수도 일리오스의 반경 59km까지 후퇴하였으며 퇴진 여론까지 커지자 율리우스 4세는 끝내 사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145년 1월 유로파 연합군은 일리오스를 점령하자 자유군주당 지도부들은 145년 3월 쿠르챠, 도모르치, 카르파치아, 롬베로를 포기하고 300만 보루를 배상, 케레치아를 독립국으로 인정, 20년간 전쟁 참전/선언을 금지하는 일리오스 조약을 맺었고 그 해 5월 공포된다.

전후 처리 및 사클레치아 재건 운동

제1차 유로파 전쟁으로 국민 41%가 사망하고 그 중 29.5%가 전쟁에 의해서 사망, 10.3%가 반전 운동, 저항군, 1.2%가 자유십자단이었다. 국토는 60%가 파괴되고 도시는 89%가 파괴되었으며 폭격에 의한 피해는 97%에 육박하였다. 국민의회도 폭격으로 인해 파괴되었고 당사 역시 타격을 입었다. 사클레치아 왕궁은 폭격으로 인해 약 70%가 파괴되었다. 자유군주당 지도부는 전쟁 이후 전원 사퇴하였고 율리우스파 중도파인 율리우스 카이포스가 전당대회 없이 바로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곧바로 국왕이 되었다. 그래서 카이포스는 사클레치아 국왕 중에서 유일하게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국왕이라 불린다. 카이포스는 사클레치아의 재건을 위해 앞장서겠다며 전국에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재건 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재건 운동은 149년 5월이 되어서야 대부분 완료되었으며 자유군주당은 15대 총선을 앞두고 전폭적인 지지 운동을 이어나갔다. 심지어 전쟁을 주도한 율리우스 4세와 율리우스파 급진파 일부를 제명시키고, 전쟁에 대한 반성을 통해 타국과 협력을 추진하였다. 또, 간선제를 폐지하고 직선제를 실시하였다.[1]심지어 율리우스 4세가 만든 대조국헌법을 대부분 개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행 헌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150년 9월 치러진 15대 총선에서는 80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다. 백성들은 자유군주당을 율리우스 4세의 출당에 반발한 율리우스파 급진파 정치인들이 엠페로우파와 손을 잡고 반카이포스 연대를 만들어 카이포스에게 사퇴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카이포스는 이들을 당을 분열시키는 종자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결국 율리우스파 간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심지어 151년 4월 첫 보궐선거에서는 친카이포스파인 말리코 에보니가 반카이포스파 에르빈 폰 루터의 지역구인 루스메타구에서 당선되는 등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151년 7월에는 자유당 의원 13명이 발의한 징수세 인하 법안[2]이 친카이포스파 의원들이 다수 찬성하면서 의결정족수 60명[3]을 넘겨 의결되자 결국 갈등은 정점에 달한다. 반카이포스파들은 카이포스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당원간의 충돌도 빈번히 일어났다. 카이포스는 이들을 영구 제명하기로 결정하면서 일단락되긴 했으나 영구 제명에 반발한 반카이포스파는 카이포스파와 카이포스를 제명시키기 위해 일부 무소속 의원들과 함께 혁명당을 결성한다. 152년 8월 카이포스의 지지도는 점점 떨어졌고 동시에 군주당 내 중도층이 자유당과 혁명당에 분산되면서 동반 상승하자 자유군주당 지도부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예상을 딛고 자유당과의 연정을 추진하기로 결정한다. 그 후 자유당과 수차례 접촉하여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자유당은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156년 1월 자유당에서 좌파 성향의 크리스 반 루게스테른이 당대표에서 선출되자 자유군주당을 경계해야 하는 의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군주당과의 대연정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면서 자유군주당을 비판하였다. 또 크리스는 "사클레치아는 자유군주당이 주장하는 전제군주제가 아닌, 입헌군주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입헌군주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카이포스는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면 타국의 민주정과 유사하기 때문에 일반군주제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반대했으며 혁명당은 사클레치아의 군주제만이 국가를 살릴 수 있다며 전제군주제를 지지하였다.

분당과 카이포스의 사퇴

157년 3월 엠페로우파의 급진파 의원인 에케로스 디오니소스가 카이포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친카이포스파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카이포스를 암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카이포스가 기자회견에서 디오니소스라는 사람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명하여 디오니소스는 논란을 피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디오니소스는 제명되었고 입당 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일부 엠페로우파 의원들이 디오니소스를 다시 복당시키려는 시위를 벌였고 당 내 잡음이 생기게 된다. 카이포스는 지금이야말로 당을 지키지 못하면 위험하다며 각 파벌과의 회동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엠페로우파 급진파는 디오니소스의 복당부터가 먼저라며 반대하였고 율리우스파 급진파는 일부 찬성하였기 때문에 회동은 어려워졌고, 결국 무산된다.

159년 7월에는 보수당, 개발당과 선거연합을 결성하고 16대 총선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160년 3월에 치러진 16대 총선에서는 91석 (군주당 69+보수 21+개발 1)을 차지하여 연립 여당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앨리스 소피아베른 의원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헌병들과 수색대가 동원하였으며 확인한 결과 사망하였으며 카이포스는 이 사건의 배후를 당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하였다.

혁명당은 공산당이 배후라고 주장하나 공산당은 이미 율리우스 4세 때 대부분이 해체된 상태였다. 물론 당 내 엠페로우파는 반발했고 5년 안에 배후를 정확하게 밝히지 않으면 탈당을 하겠다고 밝혀 분열을 예고하였다. 혁명당도 이에 동참하였고, 율리우스파 일부 역시 동참하면서 사실상 제2차 반카이포스 연대를 형성한다. 제2차 반카이포스 연대의 등장에 카이포스 내각은 이들과 선을 그었고 혁명당을 반역정당으로 지정하여 해산 검토까지 진행할려고 했었다.

그러던 163년 6월 혁명당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는 음모론이 제기되자 압수수색을 강행하였으며 확인 결과 쿠데타 미수와 관련된 문건들이 발견되면서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였다. 혁명당은 "우리들이 만든 무고한 정당을 불법 정당이라고 하는 카이포스 정권은 도대체 어떤 정부인가"라고 비판했으며 반카이포스 연대는 점점 막강해지기 시작했다.

165년 3월 보수당과 군주당의 회동을 통해 정당연합인 보수연립을 결성하면서 보수 진영에서 유리한 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생겼으며 향후 선거에 따라 압승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65년 7월 혁명당 내 엠페로우파 세력이 보수당을 비난하자 보수당은 자유군주당과 함께 이들과 대립하겠다고 선언하여 보수 진영을 두 갈래로 찢어지게 되었다.

165년 11월 자유군주당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엠페로우파 중립파였던 율리우스 에르도안이 카이포스의 행보에 실망하여 탈당을 선언한 이후 엠페로우파와 율리우스파 세력들이 줄줄이 탈당하였으며 165년 12월에는 47명의 반카이포스 의원들이 탈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에 이어 제3당이 되었으며 탈당한 세력들은 각자의 정당을 만들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율리우스파 급진파, 엠페로우파 급진파들은 각각 국가당애국당을, 친귀족 성향의 의원들은 귀족당을, 일부 중도파는 정의개발당을, 소수 계파는 백성의지당을, 혁명당에 동참한 반카이포스 세력들은 구색정당인 혁명군주당을 각각 창당하면서 반카이포스 진영은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40석 (군주 22+보수 18)이 되며 범카이포스 진영은 완전히 몰락하였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이 것에 대한 책임으로 카이포스는 최고지도자와 국왕직에서 은퇴하였고 동시에 지도부도 총사퇴를 하면서 원내지도자인 유클리우스 율리시아가 최고지도자 권한대행을 맡았다.

제4당으로 추락

17대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이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타 정당에 흡수되는 일이 많아졌고 자유군주당 역시 총선을 앞두고 각 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하여 의석 수가 점차 감소하였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회 내 공석은 60석이 되며 (나머지 40석은 군주 19+보수 13+자유 3+애국 1+무소속 4) 사실상 '미니 총선'이라는 보궐선거가 된다. 166년 3월 사클레치아 선거관리위원회는 166년 보궐선거를 5월로 결정하자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펼친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군주당이 자유당에 30% 뒤쳐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다른 지역구의 역시 모두 자유당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보수 텃밭이던 일로키구에서는 자유당 후보가 40%를 넘겨 군주당 후보를 앞서는 등 군주당은 이미 참패나 다름 없었다.

성향

자유군주당은 전제군주제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율리우스파는 자유보수주의와 사회보수주의를, 율리우스파보다 파시오 성향이 강한 엠페로우파는 국가주의, 신자유주의를 지향한다. 다만 양측 모두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지만 율리우스파는 유럽식 시장 경제를 국가의 경제 체제로 내세우자는 반면 엠페로우파는 사클레치아만의 시장 경제를 주장한다. 그 중 극소수는 시장 경제가 아닌 계획 경제를 주장하는 중도 세력이 존재한다. 다만 과거 대부분의 중도파들은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편이었다. 기본적으로 자본가, 성직자, 귀족, 영주들의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일부 길드도 이에 대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세계 가톨릭교회를 내세우는 당이기 때문에 이를 믿는 지지 세력도 대부분 존재한다. 농촌, 중소 도시, 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하는 자유당과는 달리, 자유군주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지한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강경 스탠스를 취하며 동성애를 추방시키거나 동성애 시민은 아예 백성이 아닌 반역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우스 6세 정권 초기 동성애를 국내에서 추방시키는 정책을 폈는데 사클레치아의 동성애 비율은 4%에서 0.1%로 줄어드는 결과를 보이게 되었다.

이들은 사클레치아의 주변국에 많이 분포하는 엘프인들을 싫어하는 것을 넘어 경멸하며 이들마저도 반역자들이라고 주장한다. 엠페로우파의 경우 오크족들은 소수의 인간보다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오크 우월주의를 주장하고 있으나, 율리우스파는 오크족과 인간들의 평등을 추구한다며 오크와 인간간의 평등주의를 주장한다.

공화주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율리우스파는 자국의 소수 공화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나 다름이 없다며 소수 공화주의자들의 척결을 주장하지만 엠페로우파는 공화주의를 아예 사회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중 자본가경제협의회, 사클레치아 경제인연합, 캐피탈리스트 유니온 등의 친자본가 길드 단체들과 기독교신앙회, 신성자유단, 하나님의 축복단 등 이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파생된 신흥 종교 교단들도 이 당을 지지하고 있다.

계파

자유군주당의 계파로는 율리우스파와 엠페로우파로 나뉜다. 그 중 율리우스파는 충성파, 신파, 개혁파, 급진파, 변혁동맹, 사회정의혁명단 등이 존재하며 엠페로우파는 전진 사클레치아, 자유의 아침, 국가혁명연합, 사클레치아 애국동맹 등이 존재한다. 극소수로는 중도주의/중립파적인 스탠스를 띄며 구 율리우스파 중도파와 온건파들이다.

과거에는 율리우스파의 파벌 중 급진파, 중도파, 온건파 등 다양했으나 중도/온건파는 인도네시아 출신 중도파 정치인인 필리노이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벌인 필리노이의 난으로 인해 중도파와 온건파가 비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후 의원총회에서 중도파 정치인들을 당 지도부에 유입시겨 사실상 당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중도파와 온건파는 율리우스 4세 체제부터 당권을 빼앗겼으나 전후 처리에서 당권을 다시 탈환하였으며 16대 의회선거부터 카이포스가 집권하면서 양 파벌의 실망으로 탈당을 겪다가 자신 역시 은퇴함에 따라 결국 대부분이 쪼그라들고 사실상 사라졌으며 통합군주당부터는 대거 탈당하여 중도정치연합에 들어간다. 충성파는 초기에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신생 충성파, 구 급진파 세력들이 다수 들어오면서 주류 세력이 되었다.

각주

  1. 이후 192년부터는 각 후보자들이 선거운동을 진행하고, 선거 결과에서는 다수당의 대표가 국왕이 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으며 의원내각제와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다.
  2. 5,000 보루 → 1,000 보루
  3. 국민회의의 관리자들은 정족수는 100명으로 50:50 (지역구:비례대표)로 유지하되 의결정족수는 60명으로 낮추자는 논의가 이어졌으나 최고지도자인 카이포스가 정족수를 100석 (지역구)로, 의결정족수를 60명으로 낮추는 안이 의장, 부의장이 찬성함에 따라 정족수 방식이 달라졌으며 197년부터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50:50으로 정족수 방식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