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멕시코 내전

Utumno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8월 2일 (수) 16:42 판
제2차 멕시코 내전
Second Mexican Civil War
Segunda Guerra Civil Mexicana
날짜
1994년 1월 1일 ~ 2002년 11월 4일
장소
멕시코 전역과 과테말라 북부
원인
페소 위기, 치아파스 반란 격화
결과
멕시코 연방정부 해체, 남미 정세 혼미, 과테말라 내전 연장
영향
전후 조직 범죄 급증,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 전면화, 멕시코 전역 황폐화, 미주 대륙 내 진영간 분쟁 격화
교전 세력
멕시코 합중국
미합중국
과테말라
EZLN
EPR
FARC
MCP
유카탄 공화국(1998~2000)
시날로아 카르텔
걸프 카르텔
후아레스 카르텔
로스 카바예로스 템플라리오스
지원국
캐나다
콜롬비아
칠레
이스라엘
호주
쿠바
베네수엘라
URNG
FMLN
ELN
중화인민공화국(1996~2000)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1997~1999)
MS-13
지휘관
에르네스토 세디요†(1994~1996)
에밀리오 추아페트(1996~2000)
빈센트 폭스(2000~)
부사령관 마르코스†
사령관 라모나
사령관 사파타
에드먼도 레예스
캡틴 에밀리아노
엘 마요
엘 차포
나초 코로넬†
엘 차피토
병력
xx명 xx명 xx명
피해 규모
(피해규모) (피해규모2) (피해규모3)

개요

제2차 멕시코 내전(스페인어:Segunda Guerra Civil Mexicana)은 궁극적으로는 멕시코 정부 및 친정부 세력과 치아파스 반군을 포함한 멕시코 내 좌익 세력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의 멕시코 정부로부터 분리되고자 한 치아파스 반란 세력과 다른 국내외 좌익 게릴라, 그리고 마약 카르텔이 포함된 비대칭 분쟁이었다.

멕시코 정부의 위기는 1994년, 페소 위기 및 1994년 EZLN의 멕시코시티 폭탄테러와 그 직후의 멕시코 정부군이 EZLN 수뇌부를 암살한 것에서부터 촉발된 후 전면적인 내전 형태의 무장 충돌로 확전되었다. 치아파스의 반란을 시작으로 같은 해 결성된 EPR이 벌인 전쟁은 미국의 참전과 베네수엘라, 쿠바의 직접적인 개입 이후 대리전으로 비화되었다.

멕시코군과 멕시코 연방정부, 그리고 미국 및 과테말라로 알려진 동맹국은 멕시코 정국의 안정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반면 멕시코 정부 전복 및 적화를 목표로 베네수엘라, 쿠바, 중국 등의 지원을 받고 있는 좌익 야권 세력과 대규모 게릴라 군벌의 연합 그룹이, 또 다른 진영은 처음 멕시코 정부에 의해 용역되었으나 게릴라 군벌화된 다수의 카르텔 조직들이다.

참전 세력 거의 대부분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치아파스 반란세력(EZLN)과 내전이 고조되며 유카탄 반도의 마야인들이 19세기 유카탄 공화국의 후신으로서 건국한 유카탄 공화국이 설립되는 등 분리주의가 난립하며 전쟁의 향방은 극히 혼란스러워졌다. 내전은 1996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2000년 이후 잠정적으로 모든 교전 및 폭력행위는 중단 및 축소되었다.

미국과 과테말라 같은 많은 인근 국가들이 내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멕시코 정부를 지원했다. 쿠바와 중국, 북한, 그리고 FMLN과 ELN, URNG 등 남미 게릴라들은 멕시코 내전의 좌익 반란군에게 군사 부문의 지원을 보였으며, 베네수엘라는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투입해 멕시코 내 정부군에 대한 공습 및 광범위한 파병으로 멕시코의 신생 MCP 정권을 후원했다.

미국과 과테말라는 멕시코 정국이 파탄적인 상황에 이르렀을때, 자국 내에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여 멕시코 정부 및 친정부 군대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왔으며 미국은 1996년 멕시코 정부의 요청으로 치아파스 지역에 미 해병대 일부를 파병하였으나 1997년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발생한 멕시코계 좌익 반란의 동조자들에 의한 폭동과 테러리즘으로 1997년 이후 직접 개입을 택했다.

미국은 1996년부터 치아파스 반군과, 1997년 이후부터는 EPR 등의 좌익 반란세력 등과 싸워왔으며, 멕시코 내 반정부 세력들을 억제하기 위해 여러번의 대규모 지상 교전 끝에 멕시코 내 북서부 지역들을 점령하고 있다. 동시에 2001년 이후부터는 멕시코 정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화 된데다, 카르텔 및 남은 좌익 반군에게조차 밀리자 빈센트 폭스의 멕시코 자유정부로 대체하였다.

1996년과 1999년 사이에 멕시코에서만 발생하기 시작한 전투가 과테말라로도 확산되었다. 멕시코 정부군에게 밀려난 사파티스타나 몇몇 EPR 파벌들이 URNG의 호의, 그리고 지원들을 바탕으로 아예 과테말라 국경 너머에서로 교전이 이동, 확대되면서 과테말라군과도 직접 교전을 벌였다. 이는 남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과테말라는 기존에는 멕시코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나, 대규모 난민들이 북쪽 대신 남쪽으로 도망쳐와 냉전 종식 직후 혼란스러웠던 과테말라 국내의 상황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난민 수용의 억제와 국경에서의 산발적인 분쟁들, 무엇보다 국내 좌익 게릴라였던 URNG가 무장해제를 이행한지 고작 2년 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민감하게 대응했다.

실제로도 다수의 URNG는 유엔의 감시 하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정부에 대한 무력 행위를 포기하고 무장해제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군사 자산들을 대거 멕시코 남부의 사파티스타 반군에게 넘겨주고, 옛 URNG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한 URNG 내의 호전적인 성향의 파벌들이 멕시코로 직접 이동해 EPR과 EZLN을 지원했다.

또한, 내전에 대해 불개입을 선언한 콜롬비아는 자국 내 게릴라가 멕시코 반정부 세력을 돕기 위해 베네수엘라에 의해 용병처럼 투입되고, 나아가 2000년 이후부터 베네수엘라가 직접적으로 멕시코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규모 군사 원조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콜롬비아 군을 파병하고, 국경에서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양 군이 대치했다.

이 전쟁으로 약 200,000여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며 멕시코 내전은 20세기 냉전 종식 직후 냉전 당시부터 이어지던 이념간의 충돌로 인해 벌어진 마지막 제1진영과 제2진영 양측의 대리전이자, 동시에 최초의 냉전 이후 이념 전쟁이었다. 이런 경향은 21세기 들어 대부분 해체되거나 정당조직으로 변화한 옛 좌익 게릴라들이 멕시코 내전을 위해 결집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멕시코 내전 동안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심지어 동북아시아와 북아메리카에서 위태롭게 존재하던 수 많은 해산되거나, 해산중인 많은 무장 좌익 세력들, 또는 그들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이들이 멕시코 반정부 세력에 개인 단위부터 조직 전체가 가담했다. 이들 대다수는 전쟁이 끝난 뒤 멕시코 정부에게 그들의 신변에 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구 멕시코 합중국이 아닌 신생 멕시코 정부는 이러한 반란이 재차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거의 대부분의 이념형 전쟁범죄를 엄단하려했으나, 이들 대부분의 국적이 외국인인 이상 극형에 처하는 것은 내전 이후 신뢰를 잃은 멕시코 정부로서는 우려되는 일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내전이 끝난 2002년 이후부터 그들의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러나 송환된 이들 대부분은 마치 이슬람 지하디스트들 처럼 다시 본국에서 재무장하거나 유사 조직을 지원하는 등, 냉전 종식 이후에도 좌익 게릴라들의 뿌리가 완전히 일소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멕시코 내전 이후 북남미는 베네수엘라와 쿠바, 또 룰라 정권의 브라질이 포함된 반미 진영과 미국을 위시로 한 친미 진영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한편 내전 이후 터키의 시리아 침공과 이라크-쿠르드 전쟁 이후 레반트 내에서 전반적인 혼란과 국내적인 갈등이 발생하면서 취약해진 레반트 지역에서 알 카에다와 지하디스트가 본격적으로 레반트 내에서 궐기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무장 행위가 절정에 이르렀을때 국외의 지하디스트와의 연계가 문제되며 이 시절 멕시코 반란에 가담했던 국외의 동조세력과의 연계가 다시금 조명받았다.

분쟁은 수백만 명의 멕시코인들이 미국, 캐나다, 과테말라, 벨리즈, 엘살바도르와 같은 이웃 국가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멕시코 내전 당시와 그 뒤로 상당한 난민들이 발생했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멕시코 난민들에 대해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미 서해안 및 남부 등의 히스패닉 거주지역에서 발생한 폭동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우려해 제한적으로 받았다.

반대로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는 그러한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 시기보다 조금 더 미국으로의 이주를 완화하였으나, 9.11 전쟁 이후 불거진 안보 문제로 다시금 축소되었다. 이러한 멕시코 난민들의 대대적인 미국 이주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초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은 남쪽의 이웃국가보단 미국으로의 이동을 택했다.

텍사스에서만 수십만명의 난민들이 축적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내전 이후 훗날 멕시코 국가 전반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한 거대 마약 카르텔들에게 동조하면서 난민 중 절반 이상이 카르텔의 공범이자 미국으로의 운반책, 공급책으로 변했다. 이들은 2002년 이후 시작된 마약과의 전쟁이 전면화되자 대부분이 미국을 떠나기 위해 노력했다.

전쟁 동안 여러번의 평화를 이행하기 위한 시도가 벌어졌다. 1996년 치아파스 반란이 멕시코군의 강경대응으로 촉발되면서 미 해병대의 파병과 주둔 이후 미 정부의 중재 하에 치아파스 측과 멕시코 정부 사이의 협상이 그 해 11월 뉴욕에서 있었지만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후 치아파스 반란은 그대로 벌어졌고, 멕시코군을 상대로 교전이 시작되었다.

미 공군이 공습을 개시하면서 협상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0년 6월, 유엔이 직접 주도적으로 나서 제네바에서 양측의 휴전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베네수엘라의 개입, 그리고 신생 MCP 정권의 탄생이 겹치며 결렬됬다. 이후 2002년 캐나다의 중재 하 뉴욕에서 MCP 반란의 중지를 골자로 한 종전 선언이 성사되었다.

같은 해 멕시코 내에서 자체적으로 EZLN과의 교전 중단에 대한 협상을 타진했다. 11월 4일, 치아파스와 유카탄 지역의 특수 자치를 허용하는 해당 협상은 선언 즉시부터 효력이 발생했다. 이때 대부분의 EZLN 및 특히나 쿠바의 지원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유카탄 지역의 반란군은 대부분 협상 결과에 따라 투항했다.

하지만 그들 중 EZLN의 일부 파벌의 잔당들은 EPR에 합류하거나 오지로 숨어들어 투쟁을 계속했다. 이들은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과 활동 영역이 겹치는 이웃한 카르텔에게 흡수되었고, 대부분은 몇년 후의 마약과의 전쟁 동안 미국에 의해 토벌되었고 마약과의 전쟁 이후 소탕되어 2000년대 초반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배경

페소 위기

1994년, 멕시코의 카를로스 정부는 OECD에 가입함으로서 국내 금융 시장을 개방했으며 NAFTA에 가입한 후 이전에 비해 보다 투자자들에게 높은 신용과 또 다른 투자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멕시코 정부는 더 많은 외국인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미국 채권보다 더 높은 수익률을 가졌던 자국 채권 상품을 적극적으로 발행했다.

미국의 많은 단기자본이 멕시코로 넘어가는 등, 당시 멕시코 경제는 금융 부문으로부터의 성장으로 장차 미래가 유망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으나 치아파스 주에서 EZLN의 반란이 일어나고 대통령 후보인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암살당하는 등, 멕시코 내의 정치 불안은 잠시나마 성장세를 띄던 멕시코 금융 경제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겼다.

외국인 투자자들과 멕시코 국내의 부는 자국의 혼란으로 인해 만성적인 정치 불안으로부터 야기된 멕시코 자산에 대한 높은 위험 리스크가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사태 수습을 위해 공채를 무리하게 발행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페소와 달러간의 페그를 유지했고, 페소화 가치는 그 가치가 30% 씩 과대평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고금리 정책에 대처하기 위하여, 또 당장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멕시코 중앙은행은 1994년 12월 페소화 평가 절하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자본 이탈을 억제하기 위해 멕시코 중앙은행은 금리를 인상했지만 이는 멕시코의 마지막 남은 성장 동력을 저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평가 절하된 페소로 달러를 구매할 수 없게 되자 멕시코 경제는 국가부도에 직면했다. 이때의 멕시코 경제는 약 52%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로인해 발생한 심각한 경기 침체인 "페소 위기"는 멕시코 국내의 불안을 더욱 가속화 했다. 특히 1994년 대선 국면 당시 자파티스타 내 일부 용공분자들에 의한 테러 공격 이후로 상황은 더욱 악화됬다.


뱀의 심장 작전(Operation Heart of the Serpent)

1994년, 멕시코 시티에서 자파티스타의 열성적인 용공분자들이 모여 폭탄테러를 감행했다. 멕시코 시티의 다운타운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탄 테러로 2명이 사망했으며 47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이는 자파티스타의 일부 통제되지 않은 강경 반정부 노선의 자파티스타 내 그룹이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이를 치아파스 주의 분리주의자들이 벌인 도발로 판단했다. 멕시코 군대는 대선 국면을 앞두고 집권 중인 PRI가 느끼는 정치적인 압박에 의해 평소보다 더욱 예민했고, 특히 이런 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는 그만한 보복 작전이 수반되어야 했다고 판단했다. 당시 군 수뇌부는 보복 작전을 수립했다.

뱀의 심장 작전으로 불리우는 자파티스타 수뇌부에 대한 암살 작전은 순조롭게 준비되어갔다. 오히려 과테말라의 비공식적인 협조와 미 CIA의 직접적인 지원, 미국이 제공하는 각종 정찰 자산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멕시코 정부는 EZLN의 조직 구조와 명령-지휘 체계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는데 성공한다.

폭탄 테러가 발생한지 5개월만에 이루워진 보복 작전은 치아파스에서 멕시코군의 공격헬기가 포착된 치아파스 내 EZLN 반란 세력들의 지휘부를 매우 효과적으로 타격했고, 부사령관 마르코스로 대중에 알려진 EZLN의 수괴를 포함한 EZLN 조직의 상부 구조에 위치한 다수의 지휘 그룹을 사살함으로서 작전은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런 멕시코 군대의 암살에 더욱이 분노한 EZLN은 이전의 수세적이고 보다 온건적인 방향의 지휘부가 멕시코군에 의해 몰살당한 뒤, 그들의 후신으로서 새로이 조직을 장악한 강경파들은 멕시코 정부에 대한 또 다른 보복을 위하여 이전보다 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선회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나선다.

EZLN은 콜롬비아 FARC과 과테말라 URNG의 간접적인 지원을 통해 빠르게 무장 투쟁에 필요한 만큼의 재원과 군사적 자산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당해에 베네수엘라의 떠오르는 권력인 남아메리카 사회주의 세력의 또 다른 거성, 휴고 차베스의 원조는 EZLN의 적극적인 무력 투쟁 노선에 박차를 가한다.


가시화된 내전

집권당인 PRI의 부정부패와 무능, 그리고 페소 위기로부터 이어진 경제적 침체에 반발하기 시작한 멕시코 국민들은 서서히 좌파 성항의 단체들 및 당(PRD)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하고, 집권 기반이 부실한 세디요 대통령과, 정부는 이번 위기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흡한 대처로 경제 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이전 카를로스 대통령 시절부터 쌓여온 멕시코의 필연적이며 또한 지울 수 없는 문제인 정부의 높은 부패율은 멕시코 경제의 또 다른 암적인 존재였으며, 치아파스에서 봉기한 EZLN과, 지역 원주민 반군과 이를 진압하고자 하는 정부군의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장기적인 소모전을 예상한 반군은 더욱 오랫동안 무장투쟁에 나섰다.

1994년 8월부터 11월까지, 치아파스 주 전역에서 확산되는 무장 투쟁과 반란, 폭동 등의 상황이 이전처럼 단순히 지역 원주민들이 일으킨 저강도 분쟁, 즉 평소의 폭동이 아님을 확인한 세디요 대통령은 오히려 이를 기밀에 부쳤다. 치아파스 주 전역이 반란에 휩싸였다는 사실이 외부, 특히 미국으로 유출될 경우 그때의 여파는 멕시코 정부가 통제할 수 없었다.

당시 세디요 정권의 입장에서 겨우 몇일 전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낮은 정권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더욱 잦아진 외국의 무력 개입과 군사력 투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심지어, 폭동이 벌어지는 동안 클린턴 행정부는 아예 영변 핵시설을 기습적으로 공습함으로서 자칫 잘못하면 전인류적 핵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이 오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확전이 벌어져 세계 제3차 대전으로 이어지는 대신, 한반도에서 양측 군대의 국지적인 제한전이 벌어지는데서 그쳤으나, 세디요 대통령에게 있어 멕시코 내전이 미국에게 확실히 보여진다면 이는 반드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야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당시 에르네스토 세디요 대통령 정권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한 에밀리오 추아페트는 세디요 대통령이 치아파스 주에서 통제할 수 없는 규모의 반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보고받자 세디요 대통령은 특히 미국에게 유출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며 미국이 개입할 시 멕시코는 지옥도가 된다, 고 이를 우려했다며 이를 회고했다.


전개

멕시코 정국의 혼미

1995년, 이때 미국은 수백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멕시코 정부에게 지원하지만 아직까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벌어진 반란이 사실상 내전에 준할 만큼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일부 치아파스 주 출신 이민자들이나, 그곳을 작년에 거주하거나 체류한 일부 외국인 및 자국인에 의한 소문만이 돌 뿐, 확인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반란은 지속적으로 규모를 키워갔으며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멕시코군 내 병사들이 진압 명령에 불응하고 외려 자파티스타 반군에 가담하는 등의 문제가 속출했다. 이 사실은 1995년 3월, 치아파스 주에 파견됬던 의료봉사단이 고국으로 돌아가며 그간 치아파스 주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터넷에 개제하며 상황이 급변한다.

사진에는 자파티스타 군대가 반란을 획책하였으며, 실제로 이행됬다는 여러 명확한 정황 증거가 포착되었고, 비슷한 시기 CIA는 멕시코 내 반란 사실을 포착해 정부에 보고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를 보고받고는 국 남부에서 멕시코 이주민 및 치카노와 같이, 내전이 벌어질 시 미국 내에도 이 여파를 불러올 수 있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것을 우려하는 보고가 이어진다.

텍사스, 뉴멕시코, 유타, 캘리포니아 등을 포함한 몇몇 주에서 치카노 공동체에 의한 여러 폭력적인 운동이 자파티스타의 반란과 유사한 시점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미국은 멕시코 반란에 대해 예의주시하기 시작한다. 1995년 6월이 되서야 멕시코 정부는 공식적으로 미국에게 치아파스 주에서 반란이 발생했음을 전한다.

당시 미국 남부와 서해안에서 발생하는 잦은 히스패닉계에 의한 폭동 범죄를 자파티스타와 연계되었음으로 판별하면서 미 정부는 자파티스타를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 그룹으로 분류하게 된다. 물론 자파티스타는 미국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자파티스타와 무관하다 밝히며 멕시코 정부와의 투쟁을 지속한다.

자파티스타 반란은 치아파스 주 전반과 주요 도시에 걸쳐 크게 확산되었고, 폭동과 기습적인 게릴라 전술에 의해 궁지에 몰린 멕시코 군, 경은 상황이 통제되지 않음을 보고하고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확인, 또는 잠정적으로 예상되는 남부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간 통신을 완전히 차단할 것을 선언한다.

한편 상황이 또 다른 국면에 맞이한 것은 멕시코 남부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지는 폭동에 의해서였다. 다수의 멕시코 남서부 지역의 농민들이 멕시코의 경기 침체 상황에 대한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고, 치아파스 반란 이후로 극도로 예민해진 멕시코 정부는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게레로 지역에서 농민들이 산탄총을 비롯한 기타 엽총으로 무장한 채 길거리로 나와 시위를 위해 이동하는 긴 행렬을 형성했고, 이는 당시 게레로 주의 경관들에게는 반란에 가담하기 위한, 또는 이미 반란에 가담한 무장 세력의 반란 활동으로 포착되었다. 경찰들은 중무장한 상태로 이들의 이동을 즉시 제지하였다.

그러나 이때 게레로 주의 성난 농민들은 군경의 지시에 불응, 되려 자신들이 들고 나온 엽총과 산탄총을 겨누며 위협하였고, 당시 치아파스 반란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했던 현장의 경찰 병력들이 대응 사격을 개시하면서 다수의 농민들이 사망하는 아구아스 블랑카스 사건, 또는 게레로 6.11 사건이 신호탄이 되어 구 게릴라 잔당과 극좌파 골수 좌익분자들이 결집, EPR을 결성한다.

2만명 이나 넘는 단체로 성장한 EZLN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온 "의로운 젊은이(juventud justa)"로 불리던 사실상의 마지막 좌익 의용부대의 대대적인 참전과 베네수엘라 및 쿠바의 원조를 받은 무기로 멕시코 정부군과 얼추 동동하게 싸운다. 이때 이 지원을 적극 받아들인 파벌들이 훗날 MCP로 발전하게 된다.

신생 MCP의 창설에 후신이 된 자파티스타 내 용공주의자들은 성공을 거듭하며 더욱 심리적으로 고무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치아파스에 "갇혀있으며" 동시에 외부의 인민혁명군(EPR)과 더욱 협력하여 본래 자신들이 치아파스 주로 온 목적인 멕시코의 적화를 위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들은 냉전 이후 몰락한 좌익 이념의 또 다른 확장을 꾀했다. 이를 위해 중국과 접촉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점차 중남미에서 온 지원까지 합세하면서 치아파스 주 내에서 한정적으로 분리를 꾀하던 본래의 자파티스타 수뇌부를 서서히 압도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EPR의 게릴라 활동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었다.

주로 빈곤한 멕시코 남부 주들에서 정부군과 교전, 동시에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지원을 등에 업기 시작하자 오히려 정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멕시코 서해안 전역에 점조직 형태로 퍼지기 시작하면서 당시 멕시코 국내 상황은 파탄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본격적인 내전에 돌입한다.

멕시코 지도층의 부패는 군경의 부패로 이어진지 오래였다. 고착화된 상황에 신물이 난 일반 병사들은 대거 탈영해 좌파 게릴라들에게 투향하던가, 무기를 팔며 내통했다. 이들은 개인 단위에서 때로는 부대 단위로 멕시코군에서 이탈했따. 서서히 정부군의 전투력은 최전방의 교전 부대들에 한하여 심각할 만큼 저하되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폭동과 시위가 계속되고, 멕시코 정부는 이들을 진압하는 것을 돕기 위해, 몇몇 카르텔들에게 "하청"과 같이 정부의 사주를 통해 반란을 진압하였는데, 문제는 이들 중 절대다수는 내전이 지속되며 자체세력화 되기 시작, 점차 기존의 게릴라들을 흡수하거나 압도하며 아예 독립적인 군벌로 변해갔다.

멕시코군이 7월 동안 전선이 크게 뒤로 밀리며 이런 거대화된 마약 카르텔들은 훗날 미국과 멕시코 정부가 멕시코 국내에서 벌인 비대칭 분쟁인 멕시코 마약 전쟁으로 이어진다. 부패와 빈곤 사이에 카르텔들이 때로는 지역 정부랑 유착하며, 어느 지역에서는 정부랑 교전하면서 서서히 하층민들 사이에서 세를 불리기 시작한다.

상황이 악화되며 최전방의 멕시코 군대는 일단 철수 후 몇번의 포격과 공습으로 당장의 반군들을 화력으로 제압해 잠시나마 전선을 유지하며 퇴각하고 강제소개령을 내려 대응했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반란을 제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일반 시민들의 상당한 반발로 이어졌다. 무책임하게 상황을 방치하는 중앙 정부에 대한 신용은 점차 낮아졌다.

반대로 내전 상황에서도 지역 사회를 유지시키고자 무어라도 하는 현지 카르텔에 대한 신용만은 높아지며, 동시에 또 일반 서민 사회가 점차 카르텔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이 당시 멕시코 북부의 주요 정, 재계 인사들이 미국으로 대거 떠나면서 멕시코의 상황은 점차 내전에 거의 근접하게 된다.

치아파스에서 EPR과 EZLN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꽤나 큰 게릴라 단체들로 성장한 두 단체는 서서히 정부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오히려 FARC의 구성원들이 베네수엘라의 지원을 받은 대량의 군수물자를 통해 멕시코군을 서서히 압도한다. 한편 FMLN과 ELN 등의 남미 단체들 또한 정당 조직으로서 개편되는 와중에 무장 투쟁의 지속을 원하던 이들은 멕시코로 이동했다.

야곱의 사다리 작전(Operation Jacob's Ladder)

궁지에 몰린 멕시코 정부군은 1995년 10월 4일,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미사일과, 특수전 전력을 통해서 이미 반란 지역을 다수 점령하고 북상을 준비중인 반군을 향해 참수작전인 야곱의 사다리 작전(Operation Jacob's Ladder)만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나마 EZLN에 남아있던 전선의 확대에 반대하던 이들마저 이때의 참수작전에 의해 대부분 사망한다.

이로서 EZLN의 극단화는 사실상 막을 길이 사라졌다. 이때의 일 이후로 '사령관 사파타'가 등장하며, EZLN은 강경한 좌익 무장단체로 다시 거듭나며 사실상 이후로는 완전히 강경 일변도로 이어진다. 같은 해 12월, 치아파스 주 대부분에서 정부군이 패퇴하며, 정부군은 더 많은 전력을 치아파스 주로 투입한다.

국면의 전환은 멕시코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더 이상 오악사카로 향하는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정부군이 오악사카를 무인지대로 설정하고 퇴각을 결심하면서 게레로와 치아파스 두 지역이 연결되고, 남부 방면의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멕시코 군대가 전방으로 투입되면서 벌어졌다.

대부분의 군대가 남부로 향하는 동안, 멕시코 북부 유전은 EPR의 대담하고도 야심찬 공격에 노출되었을때 멕시코 내전의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된다. EPR은 12월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다수의 미국인 사업가들을 표적으로 납치하거나 암살을 벌였으며, 수 많은 북부 유전지대와 가스관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이러한 시도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 마이크 맥커리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국가 및 사회 공동체의 공통된 안보에 위협을 주는 행위라며 강하게 경고했다. 또,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번에도 다시 한번 더 멕시코에서 벌어진 정국의 혼란이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면 초당적인 강력 대응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마침 빌 클린턴에게는 다음 대통령 선거가 1년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빌 클린턴 행정부는 당시 미국인 유권자들로부터 더 많은 정치적인 호의를 얻어내기 위할 목적으로, 영변 핵공습 이후로도 또 한번의 또 다른 군사작전을 벌이려 했다. 미국 네이비씰이 직접 멕시코 게레로 주로 투입되었다.


미국의 참전과 세디요의 암살

상황이 쉽게 진정되지 않자 게레로 주에 있는 EPR의 지휘 가옥을 네이비씰을 통해 타격하여 다수의 EPR 가담자들을 사살하고 그들의 중요 현장 지휘관들을 사살하면서 서해안 EPR의 몇몇 통신 기지나 지휘 가옥들을 위장에도 불구하고 찾아내 연이어 공격함으로서 잠시나마 EPR의 진군을 주춤시키는데 성공한다.

미국은 이 이후로도 자파티스타나 EPR 등이 미국을 상대로 한 테러 공격을 멈추지 않고 지속하는데에 대해 더욱 강력한 분노를 얻었고, 멕시코 정부와 함께 자파티스타의 치아파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약 8,000여명 규모 이상의 미 해병대를 멕시코로 파견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공동 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 되자 EPR을 위시로 한 멕시코 내 좌익 반란 집단은 베네수엘라를 통해 중국과 북한과 접촉했다. 북한은 그 이전부터 쿠바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경우 본격적으로 내전이 개시된 1996년부터 사실상 EPR과 그 후신 세력, 그리고 PRD 등이 결합한 신생 MCP를 정부로 인정할 가능성을 약속하고 비공개적 군사 원조를 실행했다.

정부군의 패전과 좌익 반군의 여러 승전보들, 무엇보다 당시 부패한 정부와 혼란스러운 국내 상황, 심각한 경기 침체에 지치고 분노한 민중은 3월 24일부터 3월 30일, 일명 세마나 산타라 불리는 휴일 기간때 멕시코 시티에서 가두행진, 시위를 벌였다. 연이은 패전 이후 극도로 예민해져있던 군부 내 강경파는 대통령을 압박, 군이 직접 시위를 진압한다.

이 당시 3,000여명의 군경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분노한 민중들과 군경의 대대적인 충돌로 3월 31일 부터 4월 6일까지 수도인 멕시코 시티는 일대가 혼란에 빠지며 멕시코 시티 전역이 폭동에 휩쓸렸다는 사실이 미국에까지 보고된다. 한편 멕시코 남부의 반란세력들은 과테말라 국경까지 치닫기 시작한다.

4월 후반부터 5월 동안 반란군은 북진을 포기하고 대신 쿠바의 군사 원조와 중국이 배후에서 벌이는 지원을 통해 각종 중화기를 지원받으며 이전보다 더욱 빠르게 정부군의 고가치 자산을 무력화, 파괴시킨다. 다다음 6월 동안 수도 멕시코 시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미 정부는 멕시코 시티에 유사시 군 투입을 고려한다.

미국이 멕시코로 파병한 미 해병대의 첫번째 대열이 멕시코 국내에서 남부를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멕시코 북부와 접하고 있는 국경 부근에 남부 주들의 방위군과 경찰 병력을 크게 증가시킨다. 이 무렵 대규모 난민 대열이 형성되면서 미 남부의 난민에 대한 억제력 행사는 점차 강해진다.

6월 22일, 세디요 대통령이 암살당한다. 평소 극좌적 성향을 가졌었던 경호원이 세디요 대통령을 총으로 살해하고 자신은 다른 경호원에 의해 사살당하면서 멕시코 정국은 다시 한번 일대가 정치적 혼란에 빠진다. 내무장관인 추파에트 장관이 임시 대통령 대리로 정무를 수행하는 동안, PRI 당 내에선 대통령 대리 선출을 둔 내부 갈등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된다.

이때부터 멕시코 전역에서는 폭동, 방화, 그리고 시위가 지속되며 이미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한 지역이 속출하였고, 정부군은 반란에 동조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짐에 따라 군에 적대적인 반정부 세력들이 점령한 지역을 배제하고, 또는 공격을 염두에 둔 새로운 방어선을 다시 재설정해야했다.

CIA의 멕시코 내 대전략을 본격적으로 수정,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군의 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판단과 그에 따른 결론으로 더 많은 미 "육군"이 미 해병대를 대체해 약 1만여명 규모의 미 육군이 지상에 투입될 것이 검토되었으며, 이는 실행에 옮겨졌다. 당시 미군 내 일부 장성 및 미 국방성의 주요 관계자들은 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미국의 본격적인 대 멕시코 군사 개입이 남미 전체에서 더 많은 반미 기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우려였다. 미 육군은 남미 정글이 과거의 베트남전처럼 부진한 성적을 낸 채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베트남전과는 달리 미국은 먼 아시아 지역이 아닌 바로 남쪽의 멕시코에서 벌이는 작전에 그렇게까지 많은 유예기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북폭을 위해서 너무 많은 정치적 논의와 공방이 오간 것에 대한 반성으로 미국은 조기에 공습을 가했다. 초기 며칠 동안 레이저 유도 폭탄과 순항미사일 수십발이 게레로 주와 치아파스 주에 발사되었고, 미 육군 레인저와 해병대는 사파티스타가 우위를 점한 치아파스 지역에서조차 상당한 승전보를 올리며 연승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EPR을 비롯한 반군은 미군의 본격 개입이 시작되면서 기존 동안 약간의 공세를 포함한 작전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고,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들을 수비하는 것 조차 벅차했다. 8월 동안 미군은 게레로 주의 주도, 칠판싱고를 점령한 EPR을 주도에서 몰아내고 게레로 주의 절반 이상을 되찾아 정상화 시켰다.

9월 7일, 6개월 전에 있었던 시위를 재현하기 위한 소규모 시위가 멕시코 시티에서 발생한다. 시위는 빠르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때 군경의 잔혹할 만큼 몰아세운 탓에 여론상 불리했고, 설상가상 미성년 시위 참여자 다수가 시위 중 죽거나 중상을 입은 것에 대해 국민적인 분노가 팽배해지는 역효과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상군이 최전선에서 반군으로부터 다시 정부의 영향력을 회복시키는 동안, 멕시코 시티에서 대규모 폭동이 다시금 일어나며, 의회와 정부는 수도인 멕시코 시티에서 철수하여 과달라하라 시로 대피했다. 사실상의 수도 천도를 결정한 만큼 멕시코 정부군은 과달라하라 시로의 철수가 결정된 후부터 크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무질서한 군중들이 9월 9일, 의사당을 점거하고, 이들의 몇몇 지도자들은 의사당에서 '혁명 선언서'를 낭독했다. 철수한 일부 정부군 병력을 이용해 멕시코 시티 재점령을 시도하였으나 다수의 군중들이 진입을 막아 실패했으나, 하루 뒤, 군경이 이들을 도로 진압하면서 멕시코 시티의 점령 상황 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멕시코 시티 혁명 선언서의 여파는 실로 굉장했고, 멕시코 전역에서 암약해 있던 좌익 단체들과 함께하는 군중에 의하여 곧곧에서 '혁명'이 선언되었다. PRD는 여기에서 둘로 분열되며, 분열된 강경파는 이러한 '혁명'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하며 "해방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남부 주들에서 관공서의 파괴, 악탈, 그리고 공무원들의 린치가 계속되며, 주둔해있던 일부 부대들도 총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며, 치아파스, 게레로, 그리고 오악사카 이 세 주에서, 멕시코 정부의 통제는 완전히 사라진다. 미 육군 레인저와 미 해병대는 이제는 탈영한 멕시코 정부군과도 교전해야 했다.

중부와 북부에서의 여러 좌파 점조직들의 봉기가 일어나고, 일부 지역은 아예 점거당하는 상황 속에서 멕시코 정부는 현 상황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좌익 민병대들이 결집되고, EZLN 및 EPR의 대대적인 공세가 결정된다. 10월 공세로 불린 멕시코 반군의 대규모 공세는 12월까지 약 2개월간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공습을 통하여 공세를 돈좌시켰고, 미군에 의해 그나마 남아있던 멕시코 정부의 충성파 군대는 빠르게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베라 크루즈 주로 반란세력들이 북상하였고, 머지않아 유카탄 주의 마야인들까지 반란에 가담했다. 마야인들은 1940년대 이후 50년간 멕시코 정부에 대한 투쟁을 멈췄다.

그러나 아직까지 마지막 유카탄 지역의 혁명가들이 남아있던 시점에서 벌어진 이러한 반란은, 다시금 고무된 마야인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마야 해방구"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유카탄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쿠바의 막대한 군사 원조까지 겹치면서 멕시코만 지역은 순식간에 정부군의 또 다른 전선으로 확대되었다.

과테말라 분쟁

한편 미국의 지속적인 군사 개입이 이어지는 동안 과테말라 국경수비대는 점차 국경을 넘으려하는 멕시코 반군 세력과 교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이지기 시작했으며, 아예 이에 동조하는 과테말라 내 옛 게릴라들이 오히려 가담해버려 함께 국경 내 상황을 악화시킴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정권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과테말라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당시 대통령인 라미로 데 레온이 비교적 온건했던 좌익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시킨 것에 대한 공로는 인정됬지만, 파키스탄이 알 카에다의 생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자양분이 되었듯, 과테말라 또한 혁명의 후방기지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했다.

라미로 데 레온 대통령은 공식 성명을 통하여 과테말라 내에서의 동요와 멕시코 내전으로 인해 겨우 종식시킨 과테말라의 평화가 다시금 전쟁으로 물드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정작 구 과테말라 게릴라들은 오히려 그러한 성명 이후 그가 "정치적 배반"을 택했다고 보았으며 비겁자란 비난이 잇따르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후 선거에서 알바로 아르주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과테말라 신민당은 적극적으로 멕시코 내전에 의해 과테말라 북부 국경으로 향하는 모든 반군 세력을 격퇴할 것을 명령했다. 1996년 초반부터 과테말라는 본격적으로 사태에 공격적으로 나서면서 치아파스를 포함한 많은 남부 주에서 남하하려는 좌익 반군들을 공격했다.

1996년 11월에는 미국과 과테말라간의 장관급 외무 인사간의 회동이 있었으며, 양측은 비공개된 회의를 통하여 멕시코 내전으로 인해 양국에게 미칠 영향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엘살바도르 또한 머지않아 국내의 구 게릴라들이 휴고 차베즈의 부상 이후 본격적으로 멕시코 상황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알바로 아르주 대통령은 과테말라의 정보당국에 의해 URNG가 정당조직으로 개편되는 와중에도 몇몇 이들이 멕시코 내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하였고, 이에 대해 "URNG가 과테말라의 평화를 배신했다."는 선언을 통해 과테말라 또한 자유를 위협하고, 다시금 내전의 위기로 몰아가는 위험세력을 격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URNG와 과테말라 내 야권 좌익 세력들은 결집하여 과테말라가 미국의 괴뢰국이냐는 원론적인 비판을 포함해, 또 다시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시켰음에도 반복할 것이냐며 위협적인 반론으로 대처했으나, 과테말라 정부는 멕시코 내전에 국내 좌익 집단이 간섭하는 순간 내전의 위험은 불가피하다는 뜻만을 밝혔다.

한편 CIA는 과테말라 정부에게 유사시 과테말라 내부의 옛 좌익 게릴라들이 또 다시 정부 상대로 궐기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건을 전달했다. 이것을 통해 과테말라 측의 경계도는 더욱 높아졌으며 멕시코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반란 행렬에 대한 경고 차원에서의 포격이 시작됬다. 그러나 여기에 자파티스타가 박격포로 대응사격을 벌이며 과테말라 또한 군사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멕시코 반란에 본격적으로 미국 외의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과테말라 국내에선 주저하는 여론이 있었으나, 점차 도가 넘는 멕시코 내 좌익 반군 세력에 의한 과테말라를 향하여 오는 공격을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국 또한 국경수비대와 몇몇 좌익 반란군의 하위 점조직간의 교전이 벌어지는 등 전쟁의 여파는 멕시코 국외로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개입

결과

주요 교전 세력

또 다른 이야기:마약과의 전쟁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