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편집 요약 없음 |
||
56번째 줄: | 56번째 줄: | ||
==배경== | ==배경== | ||
세르비아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발칸 민족주의 봉기를 촉진하던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붕괴를 촉진하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인사는 세르비아를 확실히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독오 동맹|동맹]]국 독일 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백지 수표”를 약속한다. | |||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준전시 관계에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7월 위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발칸에 표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세르비아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발칸반도 내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발칸 동맹]]과 발칸으로 게르만의 확장을 막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에게 암암리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역시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의 국가에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발칸 동맹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도르보자]]와 [[마케도니아]]의 수복과 [[에게 해]]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전쟁에 휘말린다면 언제든지 독오 동맹의 약속을 받고 참전할 작정이었다. | |||
==전쟁 과정== | ==전쟁 과정== | ||
==결과 및 영향== | ==결과 및 영향== |
2020년 3월 9일 (월) 14:56 판
제3차 발칸 전쟁 | |||||||
---|---|---|---|---|---|---|---|
발칸 전쟁의 일부 | |||||||
파일: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불가리아.png 제3차 발칸 전쟁으로 확장한 불가리아의 영토 | |||||||
| |||||||
교전국 | |||||||
독오 동맹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
발칸 동맹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 ||||||
지휘관 | |||||||
독오 동맹 지휘관 |
발칸 동맹 지휘관 |
삼국 동맹 | 1882년 |
---|---|
러불 동맹 | 1894년 |
제1차 대양함대법 | 1898년 |
제2차 대양함대법 | 1900년 |
영불 협상 | 1904년 |
러일 전쟁 | 1904년 - 1906년 |
제1차 모로코 위기 | 1905년 - 1906년 |
제3차 대양함대법 | 1906년 |
영러 협상 | 1907년 |
제4차 대양함대법 | 1908년 |
보스니아 위기 | 1908년 - 1909년 |
제2차 모로코 위기 | 1911년 |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 1911년 - 1912년 |
제5차 대양함대법 | 1912년 |
제1차 발칸 전쟁 | 1912년 - 1913년 |
제2차 발칸 전쟁 | 1913년 |
사라예보 사건 | 1914년 6월 |
7월 위기 | 1914년 7월 |
제3차 발칸 전쟁 | 1914년 - 1915년 |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 1915년 - 1917년 |
제6차 대양함대법 | 1916년 |
러시아 혁명 | 1917년 |
적백 내전 | 1917년 - 1922년 |
제7차 대양함대법 | 1922년 |
방공 협정 | 1923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 1923년 - 1925년 |
러시아 내전 | 1924년 - 1926년 |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 1925년 |
제4차 발칸 전쟁 | 1926년 - 1927년 |
제8차 대양함대법 | 1928년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1930년 - 1931년 |
세계대공황 | 1931년 - 1939년 |
런던 해군 군축 조약 | 1931년 |
만주 사변 | 1932년 |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 |
제2차 러불 협상 | |
제2차 영러 협상 | 1935년 |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 1936년 - 1937년 |
스페인 내전 | 1937년 - 1939년 |
루거우차오 사건 | 1937년 |
룩셈부르크 위기 | 1938년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 1939년 |
할힌골 전투 | |
독-일 조약 | |
9월 폴란드 위기 | |
제1차 세계 대전 | |
제3차 발칸 전쟁(Third Balkan Wars)은 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발칸 반도에서의 세 번째 전쟁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슬라브 민족주의 조직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자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하며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발칸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민족주의를 퍼뜨리던 세르비아의 관계는 이전부터 굉장히 악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절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는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분할 점령되었으며 몬테네그로는 괴뢰국으로 전락했고 그리스와 루마니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불가리아에게 얻어낸 영토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배경
세르비아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발칸 민족주의 봉기를 촉진하던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붕괴를 촉진하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인사는 세르비아를 확실히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 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백지 수표”를 약속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준전시 관계에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7월 위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발칸에 표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세르비아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발칸반도 내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발칸 동맹과 발칸으로 게르만의 확장을 막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에게 암암리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역시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의 국가에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발칸 동맹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도르보자와 마케도니아의 수복과 에게 해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전쟁에 휘말린다면 언제든지 독오 동맹의 약속을 받고 참전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