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발칸 전쟁 (1914): 두 판 사이의 차이

72번째 줄: 72번째 줄:
===몬테네그로 우회===
===몬테네그로 우회===
===도브루자 전선===
===도브루자 전선===
===남부 전선===


==결과 및 영향==
==결과 및 영향==

2020년 3월 9일 (월) 18:18 판

제3차 발칸 전쟁
발칸 전쟁의 일부
파일: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불가리아.png
제3차 발칸 전쟁으로 확장한 불가리아의 영토
날짜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
장소발칸 반도
결과

발칸 동맹국의 패배

  • 빈 조약의 체결
  • 세르비아의 분할 점령
  • 루마니아의 도브루자 상실
  • 몬테네그로의 괴뢰화
  • 그리스 왕국의 영토 일부 상실
교전국
독오 동맹
독일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발칸 동맹
세르비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지휘관

독오 동맹 지휘관
독일 제국 빌헬름 2세
독일 제국 에리히 폰 팔켄하인
독일 제국 헬무트 폰 몰트케
독일 제국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프란츠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아르츠 폰 스트라우센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불가리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불가리아 왕국 니콜라 제코프
불가리아 왕국 게오르기 토도로프
불가리아 왕국 블라디미르 바초프
불가리아 왕국 스테판 토셰프

불가리아 왕국 클리멘트 보야드지예프

발칸 동맹 지휘관
세르비아 왕국 페타르 1세
세르비아 왕국 라도미르 푸트니크
세르비아 왕국 지보인 미시치
몬테네그로 왕국 니콜라 1세
몬테네그로 왕국 얀코 부코티치
몬테네그로 왕국 크르스토 포포비치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드 1세
루마니아 왕국 콘스탄틴 프레잔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가는 길
삼국 동맹 1882년
러불 동맹 1894년
제1차 대양함대법 1898년
제2차 대양함대법 1900년
영불 협상 1904년
러일 전쟁 1904년 - 1906년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년 - 1906년
제3차 대양함대법 1906년
영러 협상 1907년
제4차 대양함대법 1908년
보스니아 위기 1908년 - 1909년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년 - 1912년
제5차 대양함대법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1912년 -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 1913년
사라예보 사건 1914년 6월
7월 위기 1914년 7월
제3차 발칸 전쟁 1914년 - 1915년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1915년 - 1917년
제6차 대양함대법 1916년
러시아 혁명 1917년
적백 내전 1917년 - 1922년
제7차 대양함대법 1922년
방공 협정 192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1923년 - 1925년
러시아 내전 1924년 - 1926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1925년
제4차 발칸 전쟁 1926년 - 1927년
제8차 대양함대법 1928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1930년 - 1931년
세계대공황 1931년 - 1939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1931년
만주 사변 1932년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제2차 러불 협상  
제2차 영러 협상 1935년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1936년 - 1937년
스페인 내전 1937년 - 1939년
루거우차오 사건 1937년
룩셈부르크 위기 1938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1939년
할힌골 전투  
독-일 조약  
9월 폴란드 위기  
제1차 세계 대전  
v  d  e  h


제3차 발칸 전쟁(Third Balkan Wars)은 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발칸 반도에서의 세 번째 전쟁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슬라브 민족주의 조직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자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하며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발칸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민족주의를 퍼뜨리던 세르비아의 관계는 이전부터 굉장히 악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절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는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분할 점령되었으며 몬테네그로괴뢰국으로 전락했고 그리스루마니아제2차 발칸 전쟁으로 불가리아에게 얻어낸 영토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배경

세르비아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발칸 민족주의 봉기를 촉진하던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붕괴를 촉진하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인사는 세르비아를 확실히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 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백지 수표”를 약속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준전시 관계에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7월 위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발칸에 표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세르비아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발칸반도 내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발칸 동맹과 발칸으로 게르만의 확장을 막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에게 암암리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역시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의 국가에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발칸 동맹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도브루자마케도니아의 수복과 에게 해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전쟁에 휘말린다면 언제든지 독오 동맹의 약속을 받고 참전할 작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동맹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전쟁에 개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평화 협정에 관여하여 그리스, 알바니아의 독립은 보장해야 한다고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쟁 과정

사라예보 사건을 명목으로 발칸 반도의 과격한 민족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받아들이지 못할 4개의 조항을 들어 최후통첩을 보내었다. 세르비아는 결국 3항까지 허용했으나 4항을 거절하며 1914년 7월 28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의 교섭을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다음 날에 급히 테살로시키에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의 주재무관과 발칸반도 사태에 대응을 촉구했다. 그 결과 몬테네그로그리스8월 1일에 세르비아에 가담했고 8월 3일부터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그리스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보호를 약속받은 불가리아가 8월 7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가담했다.

루마니아 당국은 8월 7일까지도 참전 의사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8월 20일부터 불가리아가 도브루자 국경으로 병력을 증강시키자 도브루자 방어와 트란실바니아에 거주중인 루마니아인의 해방을 위한 참전 의사를 내비쳤으며 8월 30일 끝내 루마니아 마저 세르비아 측에 서서 참전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오그라드 공방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러시아 제국이 참전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몬테네그로 우회

도브루자 전선

남부 전선

결과 및 영향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전역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에 점령되고 부큐레슈티가 함낙되자 발칸 동맹은 패전을 인정했다. 발칸 동맹의 패전으로 1915년 1월 10일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인 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1월 19일에 체결된 빈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루마니아로 부터 도브루자를, 그리스와 세르비아로부터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얻어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북부 지방을 합병하고 몬테네그로를 괴뢰화하였다. 그리스와 루마니아는 승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의 독립을 보장했으며, 바르다르강(악시오스강) 이남으로 불가리아 영토에 비무장 지대를 10년동안 지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서 그리스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국과 프랑스가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대가로 불가리아는 옛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범슬라브주의와 발칸 민족주의는 크게 수축했으며 불가리아가 삼국 동맹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독일-오스만 관계 개선의 교두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