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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여전히 러시아의 움직월 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에 따라 세르비아와 [[갈리치아]] 두 전선 중 한 곳으로 전개될 'B제대'를 세르비아 전선으로 배치할 것을 이른 시기에 결정했다. [[B제대]]의 [[발칸 집단군]]에 합류하기 위해 열차계획부는 이 가정에 따라 시간표를 준비했다. [[8월 1일]], 콘라트는 B제대의 세르비아 공격 참여를 허용했으며 그들의 임무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주축에서 세르비아군을 멀리 유인해내는 '[[양동 작전]]'이었다. | ||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군 수준을 심각하게 평가를 절하했지만 그들이 이전 전쟁에서 보여준 잔혹하고 야만적인 면과는 별개로 충분한 수의 [[기관총]]과 [[대포]]와 같은 현대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훌륭한 [[징병]] 수단으로 소년부터 노인까지 대부분의 남성을 높은 비율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40만 명을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이는 [[제6군]], [[5군]], [[2군]]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의 B제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 |||
===몬테네그로 우회=== | ===몬테네그로 우회=== |
2020년 3월 10일 (화) 11:18 판
제3차 발칸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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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전쟁의 일부 | |||||||
파일: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불가리아.png 제3차 발칸 전쟁으로 확장한 불가리아의 영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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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독오 동맹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왕국 |
발칸 동맹 세르비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 | ||||||
지휘관 | |||||||
독오 동맹 지휘관 |
발칸 동맹 지휘관 |
삼국 동맹 | 18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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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불 동맹 | 1894년 |
제1차 대양함대법 | 1898년 |
제2차 대양함대법 | 1900년 |
영불 협상 | 1904년 |
러일 전쟁 | 1904년 - 1906년 |
제1차 모로코 위기 | 1905년 - 1906년 |
제3차 대양함대법 | 1906년 |
영러 협상 | 1907년 |
제4차 대양함대법 | 1908년 |
보스니아 위기 | 1908년 - 1909년 |
제2차 모로코 위기 | 1911년 |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 1911년 - 1912년 |
제5차 대양함대법 | 1912년 |
제1차 발칸 전쟁 | 1912년 - 1913년 |
제2차 발칸 전쟁 | 1913년 |
사라예보 사건 | 1914년 6월 |
7월 위기 | 1914년 7월 |
제3차 발칸 전쟁 | 1914년 - 1915년 |
제1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 1915년 - 1917년 |
제6차 대양함대법 | 1916년 |
러시아 혁명 | 1917년 |
적백 내전 | 1917년 - 1922년 |
제7차 대양함대법 | 1922년 |
방공 협정 | 1923년 |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전 | 1923년 - 1925년 |
러시아 내전 | 1924년 - 1926년 |
독일계 오스트리아 병합 | 1925년 |
제4차 발칸 전쟁 | 1926년 - 1927년 |
제8차 대양함대법 | 1928년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 1930년 - 1931년 |
세계대공황 | 1931년 - 1939년 |
런던 해군 군축 조약 | 1931년 |
만주 사변 | 1932년 |
베를린 해군 군축 조약 | |
제2차 러불 협상 | |
제2차 영러 협상 | 1935년 |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 | 1936년 - 1937년 |
스페인 내전 | 1937년 - 1939년 |
루거우차오 사건 | 1937년 |
룩셈부르크 위기 | 1938년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 1939년 |
할힌골 전투 | |
독-일 조약 | |
9월 폴란드 위기 | |
제1차 세계 대전 | |
제3차 발칸 전쟁(Third Balkan Wars)은 1914년 7월 28일 ~ 1915년 1월 19일에 사라예보 사건을 도화선으로 일어난 발칸 반도에서의 세 번째 전쟁이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슬라브 민족주의 조직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 당하자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하며 시작되었다. 이전부터 발칸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와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발칸 민족주의를 퍼뜨리던 세르비아의 관계는 이전부터 굉장히 악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세르비아가 이를 거절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세르비아는 이 전쟁으로 불가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분할 점령되었으며 몬테네그로는 괴뢰국으로 전락했고 그리스와 루마니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불가리아에게 얻어낸 영토를 반환하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배경
세르비아에서 청년 보스니아 소속의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발칸 민족주의 봉기를 촉진하던 세르비아를 배후로 지목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체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붕괴를 촉진하고 있었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는 이미 좋지 않았다.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인사는 세르비아를 확실히할 필요가 있다고 결단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서 동맹국 독일 제국의 협조를 요청했고 빌헬름 2세는 “백지 수표”를 약속한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준전시 관계에 러시아 제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7월 위기에 이르러서 러시아는 발칸에 표면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세르비아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했다. 발칸반도 내에서 민족주의를 주창하던 발칸 동맹과 발칸으로 게르만의 확장을 막으려는 영국이나 프랑스는 그들에게 암암리에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역시나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불가리아는 제2차 발칸 전쟁으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의 국가에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발칸 동맹과의 관계는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고 도브루자와 마케도니아의 수복과 에게 해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세르비아가 전쟁에 휘말린다면 언제든지 독오 동맹의 약속을 받고 참전할 작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한 상황에서도 최대한 동맹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전쟁에 개입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평화 협정에 관여하여 그리스, 알바니아의 독립은 보장해야 한다고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
전쟁 과정
사라예보 사건을 명목으로 발칸 반도의 과격한 민족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받아들이지 못할 4개의 조항을 들어 최후통첩을 보내었다. 세르비아는 결국 3항까지 허용했으나 4항을 거절하며 1914년 7월 28일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불가리아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와의 교섭을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다음 날에 급히 테살로시키에서 영국과 프랑스, 그리스의 주재무관과 발칸반도 사태에 대응을 촉구했다. 그 결과 몬테네그로와 그리스가 8월 1일에 세르비아에 가담했고 8월 3일부터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그리스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보호를 약속받은 불가리아가 8월 7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가담했다.
루마니아 당국은 8월 7일까지도 참전 의사가 불분명했다. 그러나 8월 20일부터 불가리아가 도브루자 국경으로 병력을 증강시키자 도브루자 방어와 트란실바니아에 거주중인 루마니아인의 해방을 위한 참전 의사를 내비쳤으며 8월 30일 끝내 루마니아 마저 세르비아 측에 서서 참전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오그라드 공방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여전히 러시아의 움직월 임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군사적 움직임에 따라 세르비아와 갈리치아 두 전선 중 한 곳으로 전개될 'B제대'를 세르비아 전선으로 배치할 것을 이른 시기에 결정했다. B제대의 발칸 집단군에 합류하기 위해 열차계획부는 이 가정에 따라 시간표를 준비했다. 8월 1일, 콘라트는 B제대의 세르비아 공격 참여를 허용했으며 그들의 임무는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주축에서 세르비아군을 멀리 유인해내는 '양동 작전'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의 군 수준을 심각하게 평가를 절하했지만 그들이 이전 전쟁에서 보여준 잔혹하고 야만적인 면과는 별개로 충분한 수의 기관총과 대포와 같은 현대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훌륭한 징병 수단으로 소년부터 노인까지 대부분의 남성을 높은 비율로 이용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 40만 명을 전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이는 제6군, 5군, 2군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의 B제대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몬테네그로 우회
도브루자 전선
남부 전선
결과 및 영향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전역이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불가리아군에 점령되고 부큐레슈티가 함낙되자 발칸 동맹은 패전을 인정했다. 발칸 동맹의 패전으로 1915년 1월 10일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인 빈에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다. 1월 19일에 체결된 빈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루마니아로 부터 도브루자를, 그리스와 세르비아로부터 마케도니아 지방 대부분을 얻어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 북부 지방을 합병하고 몬테네그로를 괴뢰화하였다. 그리스와 루마니아는 승전국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의 독립을 보장했으며, 바르다르강(악시오스강) 이남으로 불가리아 영토에 비무장 지대를 10년동안 지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으며 이로 인해서 그리스의 의사와 상관없이 영국과 프랑스가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대가로 불가리아는 옛 영토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전쟁으로 범슬라브주의와 발칸 민족주의는 크게 수축했으며 불가리아가 삼국 동맹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를 장악하는 것에 성공했으며, 독일-오스만 관계 개선의 교두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