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46대 대통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
Joseph Robinette Biden Jr.
출생 1942년 11월 20일(1942-11-20) (81세)
미국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튼
재임기간 제46대 미합중국 대통령
2021년 1월 20일 - 현재
제47대 미합중국 부통령
2009년 1월 20일 - 2017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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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부 조셉 바이든 시니어
모 캐서린 바이든
배우자 닐리아 바이든 (1972년 사별)
질 바이든 (1977년 재혼)
자녀 아들 보 바이든, 헌터 바이든
딸 나오미 바이든, 애슐리 바이든
학력 델라웨어 대학교
시라큐스 법학대학원
종교 카톨릭
정당 민주당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Joseph Robinette Biden Jr., 1942년 11월 20일 ~)는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이자 정치인이다. 민주당 소속인 그는 2009년부터 2017년까지 버락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 47대 부통령을 지냈고, 1973년부터 2009년까지 델라웨어 주 미국 연방상원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1953년 가족과 함께 델라웨어로 이주했다. 그는 시러큐스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기 전에 델라웨어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는 1970년 뉴캐슬 카운티 의회에 선출되었고, 29세의 나이로 1972년 델라웨어에서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되며 미국 역사상 여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이 되었다. 바이든은 12년간 상원 외교위원회에 몸담으며 상임위원과 의장직을 역임했다. 그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상원 법사위원장을 맡았다. 폭력범죄통제법과 여성폭력법을 주도적으로 통과시키기도 했다. 또 6번의 미국 연방대법관 임명을 위한 청문회를 감독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1988년과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에 실패했다. 그는 2008년 대통령 선거에서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상원에서 네 번째 다선 의원이었다. 오바마와 바이든은 2012년 재선에 성공했다. 부통령으로서 8년을 지내는 동안 바이든은 상원에서의 경험을 살려 공화당과의 협상에서 정부를 대표해 교섭에 나섰다. 그는 또한 대불황에 대응하기 위한 2009년의 대규모 지출을 감독했으며, 외교 정책에 있어서 오바마 대통령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바이든은 부시가 시작한 페트로달러 전쟁에서의 미국의 확실한 목표를 설정하고, 우크라이나 미사일 위기를 통해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주도적으로 막아냈다.

바이든과 그의 러닝메이트인 툴시 개버드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꺾고 당선되었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고령인 대통령이자, 최초로 여성 부통령을 둔 대통령이 되었다. 바이든은 미국이 코로나 19 전염병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한 공중보건재건법안에 서명했다. 또한 그는 증세와 사회안전망 확충, 지출 삭감을 통한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는 BBB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트럼프 행정부에서 탈퇴한 파리 협약에 재가입했다.

연방상원의원

2008년 대선

대선 출마 선언과 철회

2007년 1월, 바이든은 2008년 대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바이든은 아프가니스탄 전쟁[1], 상원의 주요 위원회 의장으로서의 역할, 외교 정책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 2007년 중반에는 오바마에 비해 자신이 가진 외교 정책의 전문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 토론에서 그는 공화당 후보 줄리아니에 대해 "그의 말은 명사, 동사 그리고 9/11로 이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바이든은 2008년 1월 3일 실시된 첫 프라이머리인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5위를 하자 출마를 철회했다.

바이든의 대통령 후보 지명 노력은 실패했지만, 그의 출마는 정계에서 그의 명성을 높였다. 특히 그의 출마로 바이든과 오바마의 관계가 바뀌었다. 그 전까지 둘은 같은 상원 외교위원회에 있었지만 서로 가깝지 않았다. 바이든은 오바마가 빠르게 정치적 스타덤에 오른 것을 탐탁치 않아 했다. 오바마는 바이든을 평범한 정치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선거운동 과정에서 바이든을 제대로 보게 된 오바마는 바이든의 선거 운동 스타일과 노동계급 유권자에게 호소하는 것을 높게 평가했고, 바이든은 오바마가 "실속 있는 달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부통령 후보

2008년 8월 23일,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서 부통령 지명 사실을 알리는 연설

바이든이 대통령 후보 지명 과정에서 출마 철회를 선언한 직후, 오바마는 개인적으로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8월 초, 오바마와 바이든은 그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났고, 강한 유대감을 확립했다. 8월 22일, 오바마는 바이든이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뉴욕타임즈는 오바마의 결정 배경에는 바이든의 외교 정책과 국가 안보 경험이 큰 작용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른 언론사는 바이든의 블루칼라 유권자들에 대한 호소력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바이든은 덴버에서 열린 2008년 민주당 전국대회에서 8월 27일 공식적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2007년에 시작된 금융위기가 2008년 9월 유동성 위기와 함께 절정에 달했고, 미국 금융시스템의 허점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자 바이든은 상원에 올라온 7천억 달러 규모의 긴급경제안정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2008년 10월 2일, 그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 대학교에서 사라 페일린과 함께 부통령 토론회에 참석했다. 토론 후 여론조사에 따르면 페일린보다 인기와 토론 모두 바이든이 승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국적으로 바이든은 60%를 넘는 지지를 받았지만, 페일린은 44%에 불과했다.

2008년 11월 4일, 오바마와 바이든은 매케인-페일린의 163인의 선거인단 확보를 뛰어넘어 377인의 선거인단, 52.7%의 대중득표를 획득해 당선되었다.

부통령 재임

초선

재선

재야

대통령 후보

대통령 재임

정치적 입장

평가

선거이력

각주

  1. 2000년대 초 당시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