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문서:프리슬란드

프리-판크라티온

신대륙 북부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34000년으로 추정된다.

구대륙 동부인 오플란 북부로부터 빙하기로 인해 낮아진 해수면으로 건너온 북방인이 프리슬란드 최초의 인간이다. 북방인은 수렵과 채집 중심으로 생활하며, 뗀석기를 사용하는 구석기 수준의 기술을 갖췄다. 북방인들은 대륙 북부와 서부를 시작으로 신대륙 각지로 퍼져나갔다. -20000년 전부터는 신대륙에 자생하는 일부 동식물을 가축화/작물화하면서 농업과 목축을 시작했고, 강을 중심으로 원시적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4000년 부터는 헤스페로스벨트 북부로부터 해로를 통해 해양인이 유입되었다. 해양인은 석기시대였던 신대륙 북부 원주민인 북방인과 달리,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 제련 기술을 갖춘 상태였다. 해양인은 금속기를 활용해 북방인을 정복하거나, 북방인과 동화하면서 신대륙 동부를 중심으로 사회를 형성했다. 금속기 기술을 갖춘 해양인과 그에 동화된 북방인은 서부로 유입되었고, 금속기 도입이 늦었던 서부의 북방인들은 대부분 해양인 출신들에게 복속당하고 만다.

해양인들이 지배층, 북방인들이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계급사회가 신대륙 북부 각지에 형성되었으며, 대륙 중부에는 해양인들에게 땅을 뺏기거나, 농경지에 부적합한 곳에 이주하게 된 북방인들이 유목민족화되었다.

신대륙 북부에 문명이 자리잡은 것은 -1000년 부터였다. 당시 프리슬란드 문명권은 크게 동부의 도시국가, 서부의 왕조, 중부 대평원의 유목부족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동부는 좁은 의미의 동부인 동북부와 해안과 맞닿은 동남부로 나뉜다.

동부 도시국가들은 공통적으로 토지를 보유한 시민과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나뉘었다. 농민은 시민의 토지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고, 시민은 보유한 토지를 기반삼아 농민을 지배하는 지주였다. 시민들은 서로를 견제했고, 다른 시민을 압도하는 대지주의 출현을 경계했다. 그 결과 시민들 사이에서는 토론과 투표로 의사를 결정하는 공화정이 주류 체제로 자리잡았다.

동부 여러 지역에서 이러한 도시국가가 난립했고, -800년 부터 세워진 판크라티온도 그 중 하나였다.

고대 판크라티온

과두정

판크라티온은 본래 자신만의 땅을 가지려는 개척자, 도시를 떠난 농민, 도망노예, 떠돌이 유랑민, 몰락시민 등이 모여사는 정착지였다. 판크라티온 지역은 크게 3개의 언덕과 중앙 구릉으로 구성된 지형이었다. 거주민들은 맹수의 침입과 노예사냥꾼, 다른 도시의 침략 같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3개의 언덕에 망루를 세우고, 언덕 사이를 성벽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언덕 안쪽 구릉지에 거주지를 건설해 도시를 형성했다.

판크라티온은 다른 도시국가들처럼 시민들의 투표와 토론으로 주요 안건을 결정했다. 그러나 판크라티온은 시민의 선정 기준이 다른 도시들과 차이가 있었다. 다른 도시국가들에선 토지 보유자가 시민의 자격이었던 것과 달리, 판크라티온에선 판크라티온의 주민이냐 아니냐가 시민의 선정 기준이었다. 토지가 없음에도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판크라티온의 이점이었다. 이는 다수의 피지배층들에게 매력적이었고, 판크라티온으로의 이주가 잦아졌다.

비록 지식과 능력의 차이로 인해 판크라티온에서도 몰락 시민들이 지배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토지를 통해 세습되는 다른 도시국가의 시민계급과 달리,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은 순전히 선거를 통해 결정되었다. 따라서 선거에 떨어지면 더 이상 지배층으로서 기능할 수 없었고, 출신에 상관 없이 판크라티온 시민이라면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치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통치자는 항상 다수로 구성되었다.

인구 확장과 다른 도시와의 외교 등 통치자의 업무가 세분화 되면서 경제, 산업, 재정, 법률, 군사, 외교, 행정, 학문을 다루는 8명의 전문가와 4명의 선출자, 그리고 전문가와 선출자의 의견을 조율하는 대표자로 구성된 13인의 의회에 기반한 과두정이 판크라티온의 통치 체제로 결성되었다.

판크라티온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통해 빠른 속도로 인구를 늘렸고, 그 인구를 분산시키고자 영토를 확장했다. 판크라티온을 중심으로 개척 도시를 건설하고, 다른 도시를 무력으로 복속시키면서 해당 도시의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되 농민을 해방시켰다. -2세기 즘에 들어설 때면 판크라티온은 여러 개척 도시와 동맹시를 보유한 영토국가로 거듭났다.

시민과 농민을 가리지 않는 수평적인 통치구조는 판크라티온의 유입 인구를 늘리는데 효율적이었으나, 그만큼 자국의 노동력과 인재 유출을 우려하는 다른 도시국가들의 견제 대상이 되었다. 특히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만연했다. 판크라티온에서도 토지는 재력의 상징이었고, 인구 부양과 생산력 확대를 위해서라도 토지가 필요했다. 다른 도시국가들도 토지가 중요 자원인 만큼, 판크라티온의 영토확장을 경계했다.

-185년, 말루스와 라쿠스를 주축으로 한 신대륙 동북부의 프록터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프록터스 동맹은 판크라티온에 동맹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으나, 판크라티온은 이를 거부했다.

-164년, 프록터스 동맹과 판크라티온의 도시전쟁이 발발했다. 프록터스 동맹은 판크라티온에 의해 노동력을 유출당한 도시국가들이 많았고, 이 기회에 판크라티온을 제압해 노동력 유출을 방지함과 동시에 영토를 확장하고자 했다. 4년간의 전쟁 결과, 판크라티온이 승리했다. 프록터스 동맹은 와해되었고, 그 곳의 농민들은 '해방'되어 판크라티온의 시민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프록터스 동맹의 지배층에게도 판크라티온의 시민으로 합류할 선택권을 제공했다. 그들은 선택을 거부하면 세금과 보조 병력 제공을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다.


귀족정

프록터스 동맹의 복속으로 도시국가 지배층들이 판크라티온 사회에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자치를 통해 세력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고, 판크라티온이라는 단일 체제를 통해 다른 도시의 지배층과 긴밀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판크라티온의 인구와 영토가 확장되면서, 이를 총괄할 수 있는 지배 수단이 필요했다.

구 지배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적 분야의 전문가들과 행정관료직에 진출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농업을 위해 교육과 정치에 참여할 시간/자원이 부족했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재력을 갖출 뿐 아니라, 인맥과 교육을 통한 학력까지 갖춘 구 지배층은 관직에 오르기 유리했다.

건국력 원년에 이르러서, 판크라티온은 귀족과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재력과 교육, 인맥을 갖춘 귀족은 판크라티온의 지배층으로써 군림했고,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들은 지배층의 경제적&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비록 장군을 비롯한 소수의 지휘관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판크라티온의 병력 대부분은 일반 시민들이었기에 귀족은 시민을 어느정도 존중했다.

정치체제 역시 과두정에 기반한 공화정을 채택했다. 판크라티온의 정치 체제는 귀족들에게 선거권/피선거권이 주어진 원로원과 그들에 의해 임명되는 12명의 위원과 집정관, 그리고 원로원의 결정에 거부권과 이의권을 가진 민회, 법률과 무력의 집행을 담당하는 법관이 공존하는 귀족정으로 체계화되었다.

건국력 원년기 신대륙 동부는 북동부의 판크라티온과 북남부의 마리아네스 해양왕조로 양분되었다. 토지에 근간한 영토국가였던 판크라티온과 달리, 마리아네스는 해안 습지와 바다, 신대륙 남부와의 교역 등 해양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쌓은 국가였다. 바다민족으로 불리는 말레나인이 주축인 마리아네스는 초창기만 해도 판크라티온과 교역 중심의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의 확장을 경계했고, 추후 판크라티온이 마리아네스의 경쟁자로 성장할 것을 우려했다. 해양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경쟁자들을 복속시켰던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 역시 복속시키고자 했고, 판크라티온 역시 마리아네스의 해양 세력을 자신들이 차지하고자했다.

45년부터 195년에 이르는 150년의 기간동안 54년에서 60년, 169년에서 174년, 190년에서 195년에 이르는 총 3차례의 테메르 전쟁과 그 사이에 벌어진 대리전과 경제전쟁, 체제경쟁은 판크라티온이 겪은 최대의 충돌이었다. 마리아네스는 판크라티온과 경제적, 군사적으로 동등했으며, 해군력을 활용한 기동전으로 판크라티온의 동부 해안을 유린했다. 그러나 토지에 기반한 농업국가였기에 인구와 생산력 면에서 유리한 판크라티온은 지구전으로 마리아네스를 압도해나갔다. 해군력 역시 지속적인 경험 축적으로 3차 테메르 전쟁 시점에서는 마리아네스와의 해전에서 승리했으며, 마리아네스의 무역로를 장악해 경제적으로 고사시켰다.

판크라티온은 200년에 들어서 신대륙 동부를 통일했다. 그러나 방대한 영토와 분배 주도권을 갖춘 귀족층에게 부가 집중되기 시작했고, 귀족층은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개척과 정복을 통해 시민에게도 출세의 희망을 주고자 서부로의 원정을 펼쳤다.

농사와 병력, 물자 수송에 유리한 강과 호수를 중심으로 신대륙 서부로의 개척이 판크라티온에서 이뤄졌다. 판크라티온 시민들은 귀족과의 격차를 매꿀 수 있는 법은 서부로 진출해 개척&개간으로 토지를 얻고, 자원을 개발하는 것 뿐이었다. 그 결과, 판크라티온인들은 대평원에까지 진출했다. 이때 대평원에는 유목민들의 정복 왕조가 형성되었다.

총 200여년에 걸친 서부 개척은 대평원에 판크라티온의 문명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대평원의 유목민족과 판크라티온의 충돌을 자아냈다. 판크라티온의 유목민족들은 수오족, 힌족, 아켈렌족, 코우치족, 감람족 등이 있었다. 5갈래의 야만인이라는 뜻의 '펜타길로스'라 불린 이 유목민족들은 판크라티온 개척민들을 약탈, 복속시키면서 판크라티온과 갈등을 빚었다.

판크라티온 지배층은 시민들의 개척을 장려하면서 개척민들이 진출한 영역의 원주민과 충돌이 빚어질 시,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단을 파견해 복소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대평원의 원주민인 유목민족들 중 오직 펜타길로스로 언급된 5개 부족만이 살아남았고, 그들은 각각 통일 왕조를 구성할 때 마다 판크라티온을 침략했다.

309년, 유목군주 테오-네-키칸은 수오, 힌, 아켈렌, 코우치, 감람족을 모두 규합하는데 성공했다. 판크라티온의 문명과 위세를 잘 알고 있던 테오-네-키칸은 이를 자신의 부족인 힌 부족에 적용했다. 아켈렌 부족 다음으로 판크라티온 문명을 받아들인 힌 부족은 테오-네-키칸의 지도하에 다른 부족들을 복속했다. 유목민 특유의 기동성에 판크라티온의 문명이 더해진 힌 부족은 다른 부족들을 압도했고, 판크라티온 역시 다른 부족들의 관심을 돌리고자 테오-네-키칸을 지원했다.

320년, 모든 부족을 통일한 테오-네-키칸은 판크라티온을 침략했다. 당시 판크라티온은 사회적 불만 해소와 출세 수단을 서부 개척에 의존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테오-네-키칸에 의해 서부로의 진출이 막히면서 귀족과 원로원은 사회적 불만에 직면했다.

귀족들 사이에서조차 기득권을 양보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기우스 그라이스에 의해 나오고, 330년에 그가 집정관에 임명되면서 이를 실천에 옮기려다 암살당했다. 그러나 테오-네-키칸과의 전쟁에서 이는 악수로 작용했다. 그라이스를 암살한 귀족층은 주도권 경쟁으로 내분에 빠지면서, 테오-네-키칸은 판크라티온의 정치적 공백을 틈타 수도 판크라티온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333년, 판크라티온의 수도 군단장이었던 율 제시우스는 분열된 귀족층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쿠데타를 일으켰다. 율 제시우스는 원로원을 장악하자마자 원로원의 모든 결정권을 집정관인 자신에게 위임하고, 전문가와 대표자는 집정관의 보좌진으로 전락시켰다. 그 후 지휘체계를 단일화해 수도 판크라티온에서 테오-네-키칸을 몰아낼 회전을 준비했다.

테오-네-키칸을 비롯한 유목민족들과의 전투 경험이 많았던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이 직속 부대를 비롯한 소수 정예 기병 중심의 기동전으로 수도까지 진격했으며, 이 과정에서 후방이 노출되었다는 걸 간파했다. 테오-네-키칸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수도에서의 회전을 유도하고, 그 사이에 테오-네-키칸의 후방을 차단해 보급과 지원을 봉쇄하는 전략을 짰다.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을 도발한 뒤, 수도로 진격하도록 유도했다. 성벽에서 농성전을 벌이며 돌파구가 생기면 그 곳에 화력을 집중하는 식으로 지구전과 소모전을 벌인 제시우스는 테오-네-키칸이 그에 휘말려 보급과 병력 보충이 안되는 걸 눈치채자, 그의 부대를 포위 섬멸했다. 그 후, 제시우스는 후방을 안정화한 다음 유목민족들을 각개격파했다. 속전속결을 상정했던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구심점인 테오-네-키칸의 전략이 실패하면서 주도면밀하고 압도적인 물량과 생산력에 기반한 제시우스의 전략을 감당할 수 없었다.

335년, 제시우스는 5대 유목민족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제시우스는 판크라티온으로 개선한 다음, 집정관으로써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전쟁영웅으로써 명성과 능력을 모두 갖춘 제시우스가 종신 집정관으로 군림할 것을 우려한 원로원이 제시우스를 암살하면서, 그의 후계자였던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이 집정관에 올랐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원로원에 동조하는 척 했다. 그러나 제시우스가 원로원에 암살당했음을 시민들에게 폭로했고, 더 나아가 원로원을 구성하는 귀족층의 부정과 독점을 비난하며 선동했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선동한 시민과 제시우스로부터 물려받은 군권을 토대로 친위 쿠데타를 벌였다. 그 결과 원로원은 유명무실해졌고, 1인 독재정인 참주정이 자리잡았다.


참주정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원로원을 숙청한 뒤, 자신을 참주(True Lord)로 선언했다. '참된 군주'라는 뜻의 참주는 판크라티온의 유일한 세습직이되었고, 원로원은 참주를 보좌하고, 민회와 의견을 조율하는 기관으로 조정되었다.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참주정의 근간을 마련했다.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와 이를 보조/지원하는 체계적인 관료제, 그리고 세부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자치를 보장하는 형태로 체제를 구축했다. 참주 아래에서 모두가 균등한 전제 체제를 통해 귀족과 시민의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참주직이 부족의 족장과 대표 직을 겸하는 식으로 대평원의 유목민들을 판크라티온 체제에 편입시켰다.

가스네티우스 이아곤은 생전 동안 판크라티온의 내정을 안정화하는데 집중했다. 유목민족과 판크라티온의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병폐를 개선하면서 도로와 수도망을 판크라티온 전역에 구축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의 정책 중 결정적인 것은 공공복지 제도였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삶이란 생존과 생활이며, 이 두가지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참주의 의무임을 주장했다. 가스네티우스 아이곤은 판크라티온 시민들에게 곡식과 소금, 소량의 야채와 고기, 생선을 배급하는 기본 배급제를 실시하고, 오락을 위해 문화산업을 장려했다. 이 2가지 정책을 통해 판크라티온 시민들은 참주정 체제에 만족하면서 수백년간 참주정이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했다.

마그나 판크라티온으로 대표되는 판크라티온의 전성기는 500년 가까이 이어졌다. 거대한 신대륙의 영토를 바탕으로 거둬지는 생산력은 재건된 자영농과 상업망을 통해 고루 분배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남부의 나왈라를 비롯한 이민족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남부에 장벽을 건설하고, 유목민족들을 기병으로 편입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마그나 판크라티온이 500년간 지속되면서, 전제군주제에 기반한 참주정의 권력은 집중되었다. 시민들 역시 공공배급과 문화 오락을 통해 체제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면서, 판크라티온 사회는 점점 경직되었다.

854년, 판크라티온의 암군 헤세누스가 참주로 즉위했다.

판크라티온 분단기

신성 판크라티온

참주령 판크라티온

식민지 시대

프리슬란드 결성전쟁

프리슬란드 자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