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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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7월 12일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에서 소집되었다.<ref>공화당이 몇 주 전에 전당대회를 진행한 경기장이었다.</ref> 공화당은 당시 1946년 중간 선거에서 양원과 주지사의 과반수를 장악했고, 여론 조사의 대부분은 트루먼이 듀이를 때로는 두 자릿수 격차로 쫓아가는 모양새를 보여왔기 때문에, 전당대회의 열기는 낮았다. 게다가 일부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이 헨리 A. 왈레스의 진보당으로 이탈하기도 했고, 당 지도부는 왈레스가 민주당의 표를 충분히 잠식해 북부와 중서부의 선거인단을 공화당에 내줄 것을 우려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남부 지역을 확고히 통제하고 있었고, 남부 민주당 내의 노동조합과 흑인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민주당은 또 한번 분열하게 된다. 1947년 남부 보수주의자들은 트루먼이 노동조합 통제법을 가결 시켜 줄 것을 기대했으나,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런 기대는 사라졌고, 남부의 목소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제3자를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정책이나 스스로가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ref>이 때문에 트루먼은 1947년 7월,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경선에서 맥아더에게 패배할 경우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제안은 아이젠하워가 거절했다.</ref>
여론조사에서 약세를 보이는 결과가 계속해서 발표되자 몇몇 민주당 지도부는 트루먼을 버리고 더 인기 있는 후보자를 지명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아이젠하워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는 것을 희망했다. 7월 10일 아이젠하워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했고, 거절 이후 윌리엄 O. 더글라스 대법관을 후보로 내세우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글라스가 대통령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반 트루먼 지도부와 대의원들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트루먼을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 민주당 대회 ====
1947년의 시민권 문제에 대한 트루먼의 입장은 너무 모호했기 때문에 주권에 대한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북부와 서부의 유권자를 실망 시켰음에도, 남부의 보수주의 유권자들을 달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트루먼의 주권 제안에 대해 각자 수정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전 텍사스 주지사 무디는 주 권리의 현상 유지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한편 위스콘신 하원의원 비밀러는 트루먼의 제안보다 더 확실하고 노골적인 강력한 시민권법을 제안했다.
트루먼과 각료들은 어떤 대안이라도 남부 대의원의 항의와 반발에 부딪힐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시민권이 중요한 도덕적 원칙이라고 믿었고 궁극적으로 온건한 방식으로 시민권 문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651.5 대 582.5로 통과한 비밀러 제안을 지지하고 방어했다. 이런 행동은 많은 대도시 당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시민권 제안이 도시의 증가하는 흑인인구가 민주당에 투표할 유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민권 제안의 통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와 남부 대의원의 집단 탈당을 불러왔다. 남아있던 남부 대의원들은 트루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7명의 민주당 대의원들이 트루먼을 민주당 후보로 뽑았고, 러셀은 남부로부터 266표 만을 얻는 데 그쳤다. 트루먼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켄터키 주의 앨번 W. 바클리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이 지명은 전당대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트루먼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인용문|바클리 상원의원과 나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해 여러분과 공화당 모두가 좋아하게 만들겠습니다....우리는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에 대해서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 공화당 후보 지명 ===
=== 공화당 후보 지명 ===

2022년 9월 23일 (금) 14:43 판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4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트루먼 339인 (63.6%)
(30.2%) 161인 듀이
1944년 11월 7일
1944 대선
1948년 11월 2일
1948 대선
1952년 11월 4일
1952 대선
투표율 56.9%
투표자 60,221,831표
선거일시 1948년 11월 2일 5시 ~ 3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부통령
앨번 W. 바클리
공화당
대통령
토마스 E. 듀이
부통령
얼 워런
선거인단
339 161인
전국득표
56.9%
34,287,674표
38.4%
23,146,692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민주당
해리 S. 트루먼 | 앨번 W. 바클리

1948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48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48년 11월 2일 실시된 41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이다.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나온 선거로, 민주당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공화당 후보 토마스 E. 듀이 주지사를 상대로 승리했다.

트루먼은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서거한 이후 1945년 4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전당대회에서 그를 떨어트리려는 많은 난관을 돌파한 트루먼은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민주당 전당대회의 결과에 반발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가 탈당해 창당한 주권민주당은 몇몇 남부 주에서의 민주당의 지지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주권민주당의 목표는 선거에서 선거인단의 과반수 확보하는 후보가 없도록 하여 최종적으로 대통령 지명 권한을 하원으로 넘기는 것이었다.[1] 또한 트루먼은 헨리 A. 왈레스 전 부통령이 창당한 진보당의 공격도 받았다. 공화당 동부 자유주의 파벌의 지도자였던 듀이는 194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로버트 A. 태프트 상원의원과 다른 후보를 물리치고 후보로 지명되었다.[2]

트루먼의 열정적인 선거운동은 남부 백인들과 노동조합, 카톨릭 및 유대인 유권자들로 구성된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 기반에 안정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또한 중서부의 농장주들에게서 놀라울 정도로 좋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거기에 새로 연방에 가입한 사우스코리아에서 트루먼은 압도적인 지지를 누리고 있었다. 듀이는 위험이 낮은 선거운동을 지향했으며, 트루먼을 직접 비판하는 것을 피했다. 민주당의 분열과 트루먼의 낮은 지지율로 인해 트루먼은 양자대결에서 사실상 패배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사실상 모든 예측은 듀이가 당선될 것을 예상했다.[3][4]

이런 부정적인 예측들에 트루먼은 대선에서 보란 듯이 듀이의 161인을 두 배 이상 뛰어넘는 339인을 확보해 선거에서 승리했다. 트루먼은 듀이가 얻은 총 득표 38.4%와 큰 격차인 56.9%의 선택을 받았고, 제3후보들은 각 3% 미만의 득표율을 보였다.[5] 트루먼의 깜짝 승리는 민주당의 5연속 대선 승리였으며, 1880년 대선 이후 가장 긴 연승 기록으로 남았다. 1948년 의회 선거에서 동시에 승리를 거둔 민주당은 1946년 패배했던 양원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따라서 트루먼의 선거는 민주당의 다수당으로써의 지위를 확인 시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1951년 수정헌법 제22조가 발효되기 전의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6] 이 선거는 민주당이 뉴욕,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없이 승리한 마지막 선거이자, 메릴랜드 없이 승리한 유일한 선거이다. 또한 이 선거는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딥사우스 주 없이 민주당이 승리한 첫 번째 선거였으며, 1836년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없이 승리한 첫 선거였다.

후보

민주당 후보 지명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48년 민주당 지명 후보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앨번 W. 바클리
Alben W. Barkley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3대
미합중국 대통령
(1945–1953)
미국 상원의원(켄터키)
(1927–1949)

1948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7월 12일 필라델피아 컨벤션 센터에서 소집되었다.[7] 공화당은 당시 1946년 중간 선거에서 양원과 주지사의 과반수를 장악했고, 여론 조사의 대부분은 트루먼이 듀이를 때로는 두 자릿수 격차로 쫓아가는 모양새를 보여왔기 때문에, 전당대회의 열기는 낮았다. 게다가 일부 자유주의 성향 의원들이 헨리 A. 왈레스의 진보당으로 이탈하기도 했고, 당 지도부는 왈레스가 민주당의 표를 충분히 잠식해 북부와 중서부의 선거인단을 공화당에 내줄 것을 우려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남부 지역을 확고히 통제하고 있었고, 남부 민주당 내의 노동조합과 흑인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민주당은 또 한번 분열하게 된다. 1947년 남부 보수주의자들은 트루먼이 노동조합 통제법을 가결 시켜 줄 것을 기대했으나,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런 기대는 사라졌고, 남부의 목소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제3자를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 확신했다. 트루먼은 자신의 정책이나 스스로가 인기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8]

여론조사에서 약세를 보이는 결과가 계속해서 발표되자 몇몇 민주당 지도부는 트루먼을 버리고 더 인기 있는 후보자를 지명하기 위해 물밑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아이젠하워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영입하는 것을 희망했다. 7월 10일 아이젠하워는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절했고, 거절 이후 윌리엄 O. 더글라스 대법관을 후보로 내세우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글라스가 대통령직에 관심이 없음을 밝히며 이러한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결국 반 트루먼 지도부와 대의원들은 구심점을 잃고 다시 트루먼을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민주당 대회

1947년의 시민권 문제에 대한 트루먼의 입장은 너무 모호했기 때문에 주권에 대한 전면적이고 급진적인 개혁을 원하는 북부와 서부의 유권자를 실망 시켰음에도, 남부의 보수주의 유권자들을 달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은 트루먼의 주권 제안에 대해 각자 수정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로 결정했다. 전 텍사스 주지사 무디는 주 권리의 현상 유지를 골자로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한편 위스콘신 하원의원 비밀러는 트루먼의 제안보다 더 확실하고 노골적인 강력한 시민권법을 제안했다.

트루먼과 각료들은 어떤 대안이라도 남부 대의원의 항의와 반발에 부딪힐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트루먼은 시민권이 중요한 도덕적 원칙이라고 믿었고 궁극적으로 온건한 방식으로 시민권 문제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래서 대통령은 651.5 대 582.5로 통과한 비밀러 제안을 지지하고 방어했다. 이런 행동은 많은 대도시 당원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시민권 제안이 도시의 증가하는 흑인인구가 민주당에 투표할 유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민권 제안의 통과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스트롬 서먼드와 남부 대의원의 집단 탈당을 불러왔다. 남아있던 남부 대의원들은 트루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조지아 출신의 리처드 러셀 주니어 상원의원을 민주당 후보로 지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47명의 민주당 대의원들이 트루먼을 민주당 후보로 뽑았고, 러셀은 남부로부터 266표 만을 얻는 데 그쳤다. 트루먼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켄터키 주의 앨번 W. 바클리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이 지명은 전당대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트루먼의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바클리 상원의원과 나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해 여러분과 공화당 모두가 좋아하게 만들겠습니다....우리는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에 대해서 그들이 틀렸고, 우리가 옳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공화당 후보 지명

선거

가을의 선거운동

결과

각주

  1. 결국 대통령이야 트루먼이나 듀이 둘 중 하나가 되겠지만, 하원에서 승리하려면 자신들의 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2. 당시 전당대회에서는 처음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
  3. 특히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에도 불구하고 트루먼이 패배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우스코리아의 55명의 선거인단으로는 만회하기 힘든 수준으로 동남부와 중서부에서의 지지가 부실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4. 당시 예측에서 듀이의 확정적 우세로 판단된 캘리포니아(28), 일리노이(24), 오하이오(23) 세 곳만 합쳐도 사우스코리아(55)를 넘긴 상황이었다.
  5. 서몬드는 결국 남부의 4개 주를 차지하는데 성공하긴 했다.
  6. 수정헌법 제22조는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서 재임할 수 있는 최대 횟수를 2회로 제한하였다.
  7. 공화당이 몇 주 전에 전당대회를 진행한 경기장이었다.
  8. 이 때문에 트루먼은 1947년 7월, 아이젠하워에게 공화당 경선에서 맥아더에게 패배할 경우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제안은 아이젠하워가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