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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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의 45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196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의 45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현직 [[민주당 (51주)|민주당]] 대통령인 [[린든 B. 존슨]]이 [[공화당 (51주)|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63.3%의 득표율로 존슨은 1820년 대선 이후 모든 후보가 받은 득표율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받았다.
 
존슨은 1963년 11월 22일 취임하며 암살당한 전임자인 케네디 행정부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앨라배마의 조지 왈레스 주지사를 경선에서 가볍게 이기고 지명되었다. 또한 존슨은 전당대회에서 미네소타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공화당은 경선에서 애리조나의 강경보수파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선택해, 뉴욕의 자유파 넬슨 록펠러와 펜실베이니아의 윌리엄 스크랜턴 주지사를 탈락시켰다.
 
존슨은 민권법 통과를 주도했고, [[위대한 사회]]로 알려진 일련의 빈곤퇴치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골드워터는 감세, 작은 정부 철학을 지지했으며, 1957년과 1960년의 민권법 운동을 지지했지만, 남부에서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64년에 와서는 개인의 자유와 주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골드워터를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규정하는 시도를 성공했으며, 성공의 가장 큰 지분은 TV 광고 "데이지"였다. 공화당은 온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고, 록펠러와 다른 온건파 지도자들은 골드워터를 도와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존슨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모든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선두를 달렸다.
 
존슨은 45개 주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DC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는 홈스테이트와 딥 사우스의 다섯 주를 휩쓸었고, 대부분은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이 백인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버몬트에서 승리한 1992년 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메인에서 승리한 1912년 이후 최초의 선거였다. 반대로 이것은 공화당이 조지아를 확보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이것은 민주당 후보가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알래스카를 확보한 유일한 선거였다. 따라서 이 선거는 중서부 지역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아이오와와 오리건은 198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일리노이, 몬태나, 네바다, 뉴햄프셔, 뉴저지, 뉴멕시코, 버몬트는 1992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으며, 인디애나와 버지니아는 200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또한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민주당은 지금까지 선거인단을 400명 이상 확보한 적이 없다.
 
존슨의 압도적 승리는 많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1964년 미국 선거|패배]]와 경향을 같이했다. 이후 제89대 의회는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과 투표권법 등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4년의 선거는 골드워터의 실패로 현대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국 정치에 있어서 장기적인 재편성의 시작을 알렸다. 공화당으로의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승리 때 절정에 달했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
{{본문|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
케네디 대통령은 1964년 재선을 위한 선거 운동의 첫 번째 기간인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다. 지지자들은 지도력있는 대통령의 상실로 충격을 받고 슬퍼했으며, 야당 후보나 의원들은 살해당한 정치인의 정책에 반대하기 어려운 입장에 취했다.
애도 기간 동안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의원들과 후보들에게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주요 후보자들은 1964년 1월까지 따로 선거 운동이나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야 1차 선거운동 기간이 재개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케네디의 암살이 국가를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 후보 ==
==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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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군 ====
==== 후보군 ====
존슨 대통령 이외의 유일한 후보는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였던 조지 왈레스 였는데, 그는 여러 북부 프라이머리에 출마했지만 그의 입후보는 북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저 주권(州權) 철학을 홍보한다고 느껴졌을 뿐이었다. 왈레스는 남부 대의원의 지지를 기대하면서도 민주당 후보 지명을 놓고 존슨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존슨은 프라이머리에서 이미 1,106,999표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전당대회에서 미시시피 자유민주당은 미시시피 공식 대의원들이 백인만이 입후보할 수 있는 제도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민주당 대의원의 수를 할당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자유파 지도자들은 미시시피 자유민주당과 미시시피 민주당의 두 정당에 각각 대의원을 분할하는 것을 지지했다. 존손은 미시시피 민주당 대의원들은 어차피 골드워터에 투표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유민주당의 요구를 들어주면 남부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휴버트 험프리, 월터 로이터, 로이 윌킨스, 마틴 루터 킹, 바야드 러스틴을 포함한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자유민주당이 두 명의 대의원을 가지고, 미시시피 민주당은 민주당의 결과를 따라야하며, 앞으로 민주당 전당대회는 차별적 여론조사에 의한 대의원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서 온 많은 백인 대의원들이 서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전당대회를 떠났다. 결국 존슨은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잃었다.
존슨은 로버트 F. 케네디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그의 전당대회 출마를 경계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 자리를 요구하려 했다. 존슨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자 마자 자신의 내각 구성원 중 누구도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다. 또한 존슨은 1964년 전당대회에서 예정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순서를 지명이 이미 끝난 다음 날로 변경하여,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이 경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케네디는 존슨의 내각을 떠나 뉴욕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고 당선되었다. 존슨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민권운동가였던 미네소타 출신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 공화당 ===
=== 공화당 ===

2022년 9월 30일 (금) 14:46 판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존슨 493인 (91.3%)
(13.0%) 47인 골드워터
1960년 11월 8일
1960 대선
1964년 11월 3일
1964 대선
1968년 11월 5일
1968 대선
투표율 62.0%
투표자 82,420,944표
선거일시 1964년 11월 3일 5시 ~ 4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공화당
대통령
배리 골드워터
부통령
윌리엄 E. 밀러
선거인단
493 47인
전국득표
63.3%
52,137,928표
35.9%
29,559,905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민주당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196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의 45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현직 민주당 대통령인 린든 B. 존슨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63.3%의 득표율로 존슨은 1820년 대선 이후 모든 후보가 받은 득표율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받았다.

존슨은 1963년 11월 22일 취임하며 암살당한 전임자인 케네디 행정부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앨라배마의 조지 왈레스 주지사를 경선에서 가볍게 이기고 지명되었다. 또한 존슨은 전당대회에서 미네소타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공화당은 경선에서 애리조나의 강경보수파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선택해, 뉴욕의 자유파 넬슨 록펠러와 펜실베이니아의 윌리엄 스크랜턴 주지사를 탈락시켰다.

존슨은 민권법 통과를 주도했고, 위대한 사회로 알려진 일련의 빈곤퇴치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골드워터는 감세, 작은 정부 철학을 지지했으며, 1957년과 1960년의 민권법 운동을 지지했지만, 남부에서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64년에 와서는 개인의 자유와 주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골드워터를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규정하는 시도를 성공했으며, 성공의 가장 큰 지분은 TV 광고 "데이지"였다. 공화당은 온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고, 록펠러와 다른 온건파 지도자들은 골드워터를 도와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존슨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모든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선두를 달렸다.

존슨은 45개 주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DC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는 홈스테이트와 딥 사우스의 다섯 주를 휩쓸었고, 대부분은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이 백인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버몬트에서 승리한 1992년 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메인에서 승리한 1912년 이후 최초의 선거였다. 반대로 이것은 공화당이 조지아를 확보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이것은 민주당 후보가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알래스카를 확보한 유일한 선거였다. 따라서 이 선거는 중서부 지역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아이오와와 오리건은 198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일리노이, 몬태나, 네바다, 뉴햄프셔, 뉴저지, 뉴멕시코, 버몬트는 1992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으며, 인디애나와 버지니아는 200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또한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민주당은 지금까지 선거인단을 400명 이상 확보한 적이 없다.

존슨의 압도적 승리는 많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패배와 경향을 같이했다. 이후 제89대 의회는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과 투표권법 등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4년의 선거는 골드워터의 실패로 현대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국 정치에 있어서 장기적인 재편성의 시작을 알렸다. 공화당으로의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승리 때 절정에 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케네디 대통령은 1964년 재선을 위한 선거 운동의 첫 번째 기간인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다. 지지자들은 지도력있는 대통령의 상실로 충격을 받고 슬퍼했으며, 야당 후보나 의원들은 살해당한 정치인의 정책에 반대하기 어려운 입장에 취했다.

애도 기간 동안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의원들과 후보들에게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주요 후보자들은 1964년 1월까지 따로 선거 운동이나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야 1차 선거운동 기간이 재개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케네디의 암살이 국가를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후보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64년 민주당 지명 후보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휴버트 험프리
Hubert Humphrey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6대
미합중국 부통령
(1963–1969)
미국 상원의원(미네소타)
(1949–1964, 1971-1978)

후보군

존슨 대통령 이외의 유일한 후보는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였던 조지 왈레스 였는데, 그는 여러 북부 프라이머리에 출마했지만 그의 입후보는 북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저 주권(州權) 철학을 홍보한다고 느껴졌을 뿐이었다. 왈레스는 남부 대의원의 지지를 기대하면서도 민주당 후보 지명을 놓고 존슨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존슨은 프라이머리에서 이미 1,106,999표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전당대회에서 미시시피 자유민주당은 미시시피 공식 대의원들이 백인만이 입후보할 수 있는 제도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민주당 대의원의 수를 할당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자유파 지도자들은 미시시피 자유민주당과 미시시피 민주당의 두 정당에 각각 대의원을 분할하는 것을 지지했다. 존손은 미시시피 민주당 대의원들은 어차피 골드워터에 투표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유민주당의 요구를 들어주면 남부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휴버트 험프리, 월터 로이터, 로이 윌킨스, 마틴 루터 킹, 바야드 러스틴을 포함한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자유민주당이 두 명의 대의원을 가지고, 미시시피 민주당은 민주당의 결과를 따라야하며, 앞으로 민주당 전당대회는 차별적 여론조사에 의한 대의원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서 온 많은 백인 대의원들이 서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전당대회를 떠났다. 결국 존슨은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잃었다.

존슨은 로버트 F. 케네디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그의 전당대회 출마를 경계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 자리를 요구하려 했다. 존슨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자 마자 자신의 내각 구성원 중 누구도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다. 또한 존슨은 1964년 전당대회에서 예정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순서를 지명이 이미 끝난 다음 날로 변경하여,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이 경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케네디는 존슨의 내각을 떠나 뉴욕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고 당선되었다. 존슨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민권운동가였던 미네소타 출신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64년 공화당 지명 후보
배리 골드워터
Barry Goldwater
윌리엄 E. 밀러
William E. Miller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미국 상원의원(애리조나)
(1953–1965, 1969-1987)
미국 하원의원(뉴욕)
(1951–1965)

후보군

프라이머리

전당대회

선거 과정

선거 운동

광고 및 슬로건

결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