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닉슨 207인 (38.5%)
(61.5%) 330인 케네디
1956년 11월 6일
1956 대선
1960년 11월 8일
1960 대선
1964년 11월 3일
1964 대선
투표율 62.3%
투표자 80,595,543표
선거일시 1960년 11월 8일 5시 ~ 9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
대통령
리처드 닉슨
부통령
헨리 캐벗 로지
민주당
대통령
존 F. 케네디
부통령
린든 B. 존슨
선거인단
207인 330
전국득표
46.3%
37,304,207표
52.8%
42,548,125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민주당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1960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0년 11월 8일 실시된 미국의 44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경쟁이 치열한 선거였으며, 민주당 상원의원 존 F. 케네디 후보가 현직 부통령인 공화당 리처드 닉슨을 물리친 선거였다. 이것은 51개 주가 참여한 첫 번째 선거이자, 워싱턴 D.C.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은 마지막 선거였다. 또한 수정헌법 22조에 의해 정해진 임기 제한 때문에 3선에 도전할 수 없게 된 첫 선거였다. 이것은 또한 주요 대통령, 부통령 후보 4명 중 3명이 후일 결국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장 최근의 선거이다.[1]

닉슨은 인기 있는 현직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지목되기 위한 공화당 경선에서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다. 매사수체츠 주의 신인 상원의원인 케네디는 1960년 웨스트버지니아 민주당 프라이머리에서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에 크게 이기는 성과를 거두며 민주당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결국 전당대회의 1차 투표에서 상원 다수대표인 린든 B. 존슨을 꺾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며, 존슨에게 러닝메이트를 제안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이 높았기 때문에 냉전 관련한 주제가 선거 국면을 지배했다.

케네디는 330 대 207로 선거인단에서 승리했으며, 국민투표에서 6.5%p의 큰 격차로 선택받았다.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의 약속되지 않은 선거인들은 처음에는 케네디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을 공표하였지만, 막상 선거인단 투표가 시작되자 모두 케네디를 선택했다. 케네디는 1957년과 58년의 경제 불황으로부터 어느정도 반사이익을 얻었고, 공화당원들보다 2000만 명 더 많이 등록된 민주당원 수에서 오는 이점을 누렸다. 더욱이, 최초로 카톨릭을 믿는 케네디가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에 대한 카톨릭 신자들의 열정적인 투표 경향은 개신교 신자들의 닉슨 투표를 거의 상쇄시켰다. 이 때문에 닉슨의 이점은 아이젠하워의 인기와 지난 8년간의 경제적 성장에 기반하고 있었다. 케니디의 선거운동은 스윙스테이트를 집중 공략하는 등, 사우스코리아를 제외한 50개 주 모두에서 선거운동을 진행한 닉슨의 선거운동보다 효율적이었다. 케네디는 자신의 젊음을 강조했고, 닉슨은 자신의 경험을 부각시켰다. 케네디는 남부에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존슨에게 의존했고, TV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또한 부족한 선거운동 기간 중 후보 신분으로 사우스코리아를 방문해 소련과 맞닿은 국경을 둘러보기도 하는 등 국민투표에서도 확실히 앞서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케네디의 득표 수는 닉슨과 5백 만 표 이상 차이나며 큰 표차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 선거는 어느 후보도 한 주 내의 모든 카운티에서 승리하지 못한 가장 최근의 선거이다.[2] 또한 민주당이 위스콘신에서 패배하고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가장 마지막 선거이다. 또한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대선에 패배한 상황에서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켄터키, 테네시, 플로리다, 버지니아, 아이다호에서 승리한 첫 선거이다.

후보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60년 공화당 지명 후보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헨리 캐벗 로지
Henry Cabot Lodge, Jr.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6대
미합중국 부통령
(1953–1961)
주유엔미국대사
(1953–1960)

1951년 수정헌법 22조가 비준되면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1952년과 1956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1959년, 리처드 닉슨 부통령은 공화당 온건파에서 자유주의 진영 지도자인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의 강력한 견제를 받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록펠러는 전국 순회에서 공화당원의 대다수가 닉슨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후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록펠러의 불출마 선언 이후 닉슨은 공화당 후보 지명에 있어서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았다.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대의원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지명되었으며, 애리조나 출신의 보수주의자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이 10표를 받는 것이 전부였다. 지명된 닉슨은 한 세기 전 사람인 존 C. 브레킨리지 이후 첫 대통령에 출마한 부통령이었다. 닉슨은 전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었던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 주유엔미국대사를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닉슨이 로지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외교 정책이 이미 증명되었으며, 닉슨 자신이 국내 정책보다 외교 정책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상징적인 표시였기 때문이다. 닉슨은 록펠러에게도 부통령 후보를 제안하였지만, 록펠러는 부통령이 되려는 생각이 없었다.[3]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60년 민주당 지명 후보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미국 상원의원(매사추세츠)
(1953–1960)
미국 상원의원(텍사스)
(1949–1961)

후보군

1960년 민주당의 주요 대선주자는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인 존 F. 케네디, 캘리포니아 주지사 주 F. 브라운, 미주리 주 상원의원 스튜어트 시밍턴, 텍사스 주 상원의원 린든 B. 존슨,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전 민주당 후보, 오리건 주 상원의원 웨인 모스,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등이 있었다. 시밍턴, 스티븐슨, 존슨은 모두 민주당 프라이머리에서의 선거운동을 거부했다.

케네디는 처음에는 일부 민주당 원로들이한[4] 대통령이 되기에는 너무 젊다는 조언을 따르려 했다. 원로들은 케네디가 다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자의 러닝메이트가 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공개적으로 조언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이 것이 대중이 케네디의 대선 출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전략임을 깨달았고, TV에 나와 "나는 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 나는 대통령에 출마하고 있다."고 밝혔다.

케네디가 가진 로마 카톨릭이라는 종교는 프라이머리 내내 지적 받았다. 케네디는 위스콘신 프라이머리에서 휴버트 험프리 미네소타 상원의원과 경합을 벌였고, 그를 패배시켰다. 케네디의 자매, 형제, 아내 재클린은 종교 때문에 벌어진 격차를 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험프리는 "체인점과 경쟁하는 소상공인 같다"고 불평했다. 하지만 정치전문가들은 케네디의 승리가 "카톨릭"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험프리는 이를 받아들여 강경한 개신교 주인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프라이머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 최초의 민주당 프라이머리 TV 토론회가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열렸다. 케네디는 이곳에서도 험프리를 앞질렀고, 험프리는 선거 자금이 부족해 케네디의 잘 조직된 선거본부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느껴 사퇴했다. 웨스트버지니아 프라이머리는 카톨릭 신자인 케네디도 개신교 국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스티븐슨은 여전히 당 내의 자유주의자들에게 지지받았지만,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패배한 2번이나 패장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지도부가 신선한 후보를 찾게끔 만들었다. 프라이머리가 끝난 후, 케네디는 전국을 돌면서 사우스코리아를 포함한 주 대표단과 민주당 지도부와 소통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개최됐을 때, 케네디는 독보적 1위였지만, 지명되기 위해 필요한 대의원 수에는 모자라는 것으로 여겨졌다.

전당대회

1960년 민주당 전당대회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렸다. 전당대회가 열리기 일주일 전, 케네디는 상원 다수대표인 린든 B. 존슨과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후보였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이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를 발표하면서 두 명의 강력한 도전자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존슨이나 스티븐슨은 로버트 F. 케네디가 이끄는 유능하고 효율적인 케네디 선거본부의 전략을 넘어서지 못했다. 존슨은 케네디가 수락한 텍사스-매사추세츠 대표단 합동회의 전에 TV토론을 제안했다. TV토론 방영 이후 대부분은 케네디가 토론에서 승리했다고 판단했고, 존슨은 남부 이외에서 대의원 지지를 확보할 수 없었다. 스티븐슨이 전당대회 개최 일주일 전 까지 공개적으로 입후보 하지 못한 것은 그를 지지했던 많은 민주당 자유주의자들이 이미 케네디에게 투표하기로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스티븐슨은 엘레노어 루즈벨트 전 영부인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당대회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결국 케네디는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통령 후보 지명 직후, 케네디는 존슨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케네디는 존슨을 지지했던 남부 민주당원들의 지지 없이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1960년 7월 14일 오전 10시 15분에 로스앤젤레스 빌트모어 호텔에서 존슨에게 부통령 후보 지명을 제안했다.[5][6]

선거

선거 공약

선거운동 기간 동안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 공화당 행정부 아래의 냉전에서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소련에 뒤쳐졌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을 다시 움직이게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8년 NASA를 설립했지만, 케네디는 공화당이 우주 경쟁에서 소련을 따라잡을 생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새로운 민주당 행정부는 미국의 국가 안보와 국제 지위를 고려해서 라도 우주 분야에서의 성취를 반드시 이뤄내겠다고 공약했다. 닉슨은 자신이 승리한다면 아이젠하워가 1950년대에 이룩한 "평화와 번영"을 계속해서 유지하겠다고 공약했다. 닉슨은 또 소련과의 냉전에 참여하기에 케네디는 너무 어리고 경험 없다며 공격했다.[7]

케네디는 선거 기간 동안 자신의 젊음이 미국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케네디는 자신의 젊음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계속해서 외쳤는데, "노련한 개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 중 하나 였다. 케네디는 또한 프랜시스 시나트라나 헨리 폰다, 해리 벨라폰테 등 유명인의 지지를 받는 후보였다. 닉슨은 자신의 정치적 경험이 대통령직을 맡을 자격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자신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주요 사건

케네디와 닉슨은 캠페인 기간 내내 크고 열정적인 군중을 끌어들였다. 1960년 8월, 대부분의 여론조사는 닉슨이 케네디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서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많은 정치 전문가들은 닉슨을 근소하지만 승리에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닉슨은 가을 캠페인 내내 불운에 시달렸다. 지난 8월 닉슨에 대해 오랫동안 시큰둥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TV기자회견에서 찰스 모어 타임 기자가 자신이 오랫동안 행정부 내에서 핵심 역할이었으며, 많은 자문을 했었다는 닉슨의 주장의 진위를 물었을 때, "일주일을 주면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후일 단지 기자와 농담을 주고받은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발언은 케네디보다 더 능숙한 전문 정치인이었다는 닉슨의 주장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닉슨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특히 이 발언은 닉슨의 유능한 전문가 이미지에 큰 타격이었기 때문에, 민주당은 아이젠하워의 기자회견 장면을 TV광고로 내내 송출하기도 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사우스코리아를 제외한 본토 50개 주에서[8][9]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8월, 닉슨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유세를 하던 중 자동차 문에 무릎을 다치면서 역효과를 낳았다. 무릎이 감염된 닉슨은 2주 간 선거운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가 월터 리드 병원을 떠날 때, 닉슨은 50주를 모두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없거나, 선거인단 수가 적은 주, 확실히 이길 것이 정해져 있는 주 등 선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주를 방문하며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 닉슨은 50개 주를 전부 방문하기 위해 선거운동 전 주말을 단 3명의 선거인단을 가진 알래스카에서 보냈지만, 케네디는 뉴저지, 오하이오, 미시간, 펜실베이니아와 같은 인구가 많은 주에서 선거운동을 벌였다.[10][11]

1960년 10월 조지아 라그랑주 카운티에서 유세 중인 케네디

닉슨은 8월 26일 조지아 애틀란타를 방문해 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애틀란타에서 퍼레이드를 했고, 15만 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닉슨은 애틀란타에서의 연설에서 "한 세기 동안 조지아 주에서 선거 운동을 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없었다"고 민주당을 저격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바로 캠페인 일정을 조정하여 조지아에 깜짝 방문하였다. 그는 조지아의 캠페인에서 콜럼버스, 웜 스프링스, 라그랑주 등의 도시를 방문했으며, 특히 웜 스프링스를 방문했을 때 주방위군은 케네디를 엄청난 인파로부터 지키기 위해 힘써야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주방위군의 보호에도 소아마비에 걸린 사람들과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또한 케네디는 조지아 전역의 작은 카운티를 방문하여 주에서 약 10만 명의 사람들을 보았다. 케네디는 웜 스프링스의 재활 시설에서도 연설했는데, 그 시설은 FDR이 시간을 보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웜 스프링스 재활 시설에서 케네디는 지지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루즈벨트를 언급했다. 그는 루즈벨트를 존경했다면서, 농부, 노동자, 마을, 대도시, 빈곤층, 병자를 위한 정책을 추진한 것을 칭찬했다. 그는 루즈벨트가 "미국을 움직이게 하는 힘과 진보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케네디는 건강과 관련한 자신의 6가지 정책을 설명했다. 많은 공화당원들은 그의 정책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웜 스프링스의 많은 주민들은 케네디를 지지했으며, 여성들은 케니디와 존슨이라고 쓰인 모자를 쓰고 "케네디를 위한 더글러스 카운티"라고 쓰여있는 팻말을 들기도 했다. 케네디의 방문 당시 웜 스프링스 시장이었던 조 오 버트는 "그는 2마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악수했고, 항상 웃고 있었다"고 말했다.

로버트 F. 케네디가 존슨의 지명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슨을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선택한 것은 선거 승리의 핵심임이 입증되었다. 존슨은 케네디를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으며,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케네디를 좋아하지 않던 몇몇 남부 주들, 특히 존슨의 고향 텍사스 주에서 케네디가 선두를 달릴 수 있도록 돕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존슨은 막판 계획 변경으로 조지아에서 12분간 담대한 연설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편, 닉슨의 러닝메이트인 로지 대사는 무기력한 캠페인을 벌였고, 닉슨에게 불리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 중 하나는 닉슨이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내각에 기용할 것이라는 말을 닉슨의 동의 없이 말한 것이다. 닉슨은 로지에게 분노했고, 닉슨은 로지에게 유권자의 다수인 백인이 아니라 소수 인종에 관심을 가지는 로지를 크게 질책했다.

토론

존 F. 케네디 상원의원과 리처드 닉슨 부통령이 첫 대선 토론회에서 만난 모습.

닉슨이 근소하지만 리드하던 선거 운동 기간의 핵심적인 변화는 4번의 후보자 토론회가 기점이었다. 케네디와 닉슨은 최초로 대통령 선거에서 토론을 진행했다. 또한 이 과정이 TV로 생중계되어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닉슨은 첫 번째 토론이 시작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선거 유세를 다녔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TV에서 창백하며 아프고, 말랐고, 피곤해 보였다. 토론 중에 그의 눈은 한 곳을 집중하지 못했으며, 여러 순간에 얼굴에 맺힌 땀방울이 포착되었다. 또 닉슨은 첫 TV토론을 위한 메이크업을 거부했고, 그 결과 그의 팔자주름은 당시 흑백TV에서 두드러지게 보였다. 또한 토론회장에 색칠된 페인트가 마르면서 토론장이 어두워 보였고, 이 색이 닉슨의 양복 색과 비슷해지면서 키가 작아 보이기도 했다. 닉슨의 1차 TV토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가 TV 토론이 중계된 직후 전화를 걸어 어디 아프냐고 물어봤다는 것이 증명한다. 대조적으로 케네디는 미리 긴 휴식을 취하며 토론을 준비했다. 따라서 케네디는 조금 그을린 것처럼 보였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토론 과정이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TV토론은 약 72백만 명이 시청하였다.

TV토론을 본 사람들은 케네디의 압승이라고 평가했다. 케네디는 8월과 9월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닉슨과 비슷한 수준의 지지를 받았었지만, 토론의 방영 이후 약간이지만 일관되게 선두를 유지했다. 나머지 3번의 토론에서 닉슨은 잃어버린 체중을 되찾았고, TV를 위한 메이크업을 했으며, 처음 토론할 때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1차 토론보다 남은 세 토론을 시청한 사람은 최대 2천만 명 줄어들었다. 당시 정치 고관심층은 1차 토론을 시청하고 케네디가 승리했다고 느꼈고, 2차, 3차 토론도 마찬가지였으며, 4차 토론에서만 케네디와 닉슨이 무승부라고 평가했다.

3차 TV토론은 토론 중계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주목받았다. 사상 처음으로 분할 화면 기술을 사용하여 지도에서 반대편에 있는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아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송출 할 수 있었다. 닉슨은 로스앤젤레스에 있었고, 케네디는 뉴욕에 있었다. 두 사람은 토론회 세트가 비슷했기 때문에 마치 같은 방에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받았다.

쟁점

케네디의 선거운동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는 그의 로마 카톨릭이라는 신앙으로 인해 개신교인들에게 만연한 회의론이었다. 일부 개신교인들, 특히 남부 침례교인들과 루터교인들은 백악관에 카톨릭 신자가 있으면 교황이 국제 정세에 과도한 개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종교 문제는 미국에서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케네디는 신문 신문 편집자들 앞에서 연설을 진행했는데, 그는 외교 정책에서의 종교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비판했다.

케네디는 자신의 종교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일부 개신교인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1960년 9월 12일 휴스턴 관료협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카톨릭 대통령 후보가 아닙니다. 나는 또한 카톨릭 신자이기 전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입니다. 나는 공적인 문제에 있어서 나의 종교를 대변하지 않으며, 종교 역시 나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케네디는 또한 미국인의 4분의 1은 카톨릭을 믿고 있는데, 카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2등 시민으로 강등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케네디는 최초로 선출된 카톨릭 대통령이었으며, 또 다른 카톨릭 대통령은 60년이 지나 당선된 조 바이든이었다.

케네디 캠프는 민권 운동의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조지아에서 앉아있는 동안 체포되는 장면을 주요 유세에서 이용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킹 목사를 사면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였다. 닉슨은 이 이상 자신이 할 일은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케네디는 킹을 감옥에서 석방시키기 위해 지역 정치당국에 전화를 걸었고 킹의 아버지와 아내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그 결과 킹의 아버지는 케네디를 지지했고, 그는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마틴 루터 킹의 체포에 관해 조지아 주지사에게 보낸 편지는 케네디가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표를 얻는데 도움되었다.

하지만 선거 정국을 지배한 문제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긴장 고조였다. 1957년에 소련은 지구 궤도를 도는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지도층은 미국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에 뒤쳐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정권은 1960년 소련의 동맹국이 되었고, 서방에서는 공산주의에 의한 체제 전복에 대한 두려움이 심화되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민 절반 이상이 소련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케네디는 미국과 소련 사이의 미사일 격차를 강조함으로써 냉전 긴장 고조 상황을 이용했다. 그는 공화당 하에서 소련이 핵 미사일 개발 수에서 큰 이점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이 미사일 개발에서 미국보다 앞서 있을 가능성에 대한 초당적인 의회 조사를 제안했다. 또한 10월 18일 연설에서 몇몇 고위 미군 장교들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방비 지출 내역을 오랫동안 비판했다고 언급했다.

두 후보 모두 1950년대의 경제 성장과 번영을 더욱 강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번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쟁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닉슨이 아이젠하워의 인기[12]를 더 잘 활용하지 못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하에서 번영한 경제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선거운동을 펼쳤다며 비판했다. 선거운동이 2주가 남은 시점에서 대부분의 여론조사와 정치전문가들은 케네디의 승리를 예측했다. 그러나 선거운동에 크게 관여하지 않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선거 10일 전부터 닉슨을 위한 유세를 활발히 도왔다. 아이젠하워의 지원은 닉슨에게 절실히 필요한 반등 계기를 주었다. 닉슨은 또한 대만이 보유한 해협의 작은 두 섬인 퀘모이와 마쓰가 미국-대만 안보조약의 밖에 있다고 말한 케네디를 비판했다. 닉슨은 이 섬들이 조약에 포함되었다고 주장했고, 케네디가 공산주의 침략에 약점을 보인다고 비난했다. 퀘모이와 마쓰 문제, 그리고 아이젠하워의 적극적인 유세에 힘입어 닉슨은 추진력을 얻기 시작했고, 선거 당일까지 여론조사는 케네디의 3%p 수준의 리드로 좁혀졌다.

결과

선거는 1960년 11월 8일 실시되었다. 닉슨은 로스앤젤레스의 앰배서더 호텔에 있는 자신의 스위트룸에서 선거 개표를 지켜보았고, 케네디는 매사추세츠 주 하이애니스 포트에 있는 케네디 컴파운드에서 개표를 주시하였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시카고와 같은 북동부 및 중서부 대도시에서 개표 초반 표가 쏟아지면서 케네디는 국민투표와 선거인단 확보에서 큰 선두를 차지했으며 승리로 가까워졌다. 그러나 중서부의 시골과 교외 지역, 록키 마운틴 주 및 태평양 연안 주에서 개표된 표가 들어오면서 닉슨은 케네디와의 격차를 꾸준히 좁히기 시작했다.

자정 이전에 뉴욕타임즈는 "케네디 대통령 당선"이라는 제목으로 인쇄를 시작했다. 하지만 개표가 진행되면서 점점 격차가 좁혀지자 타임즈의 편집장은 "중서부의 표를 다 합쳐도 케네디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했고, 시카고 트리뷴이 12년 전 토마스 E. 듀이가 트루먼을 패배시켰다고 오보한 것과 같은 실수를 피하길 바랬다. 하지만 사우스코리아의 개표분이 본토로 전달되며 케네디와 닉슨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닉슨은 새벽 3시쯤 연설을 통해 케네디에게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명예로운 패배를 선언했다. 케네디는 41곳의 가장 큰 도시 중 29곳에서 승리했다. 선거가 얼마나 치열했는 지에 대한 기록은 닉슨의 고향인 캘리포니아에서 볼 수 있다. 케네디는 모든 개표가 완료되었을 때 37,000표 앞서있었지만, 부재자 투표함이 개표되자 닉슨에게 36,000표 뒤쳐졌다.

선거인단에서 케네디는 닉슨의 207인에 비해 315인을 확보하며 크게 앞섰다. 다만 미시시피 출신의 8명, 앨라배마 출신 6명, 오클라호마 출신 1명 등 15명의 민주당 선거인이 선거 결과 발표 후 케네디에게 투표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선언과 달리 막상 선거인단 투표가 시작되자 이들은 전부 케네디에 투표했다. 케네디는 12개 주를 3%p차 이내로 닉슨에 간신히 승리했으며, 닉슨은 비슷한 좁은 격차로 6개 주에서 승리했다. 케네디는 존슨의 도움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텍사스, 앨라배마, 미시시피 등 남부 대부분의 주에서 승리했다.

뉴욕타임즈는 11월 말에 선거 결과를 요약하면서, 케네디가 "카톨릭 신앙으로 잃은 표"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을 발표했다. 1956년과 1960년에 투표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결과, 미시간 대학 연구팀은 닉슨이 1956년 선거에서 아이젠하워에 투표한 공화당 유권자들의 표를 28% 잃은 것을 보고했다. 반면 케네디는 스티븐슨에게 투표한 유권자에 15%만 잃었다. 즉, 민주당은 1956년의 지지자들을 유지하는 데에 더 성공적이었다.

케네디는 자신 앞에 놓인 도전을 보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들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거 결과

선거 결과
대통령 후보 정당 홈스테이트 득표 선거인단
득표수 득표율
리처드 닉슨 공화당 캘리포니아 37,304,207 46.29% 207
존 F. 케네디 민주당 매사추세츠 42,548,125 52.79% 330
에릭 하스 사회주의노동당 뉴욕 247,522 0.31% 0
러더포드 L. 데커 금주당 미주리 76,203 0.09% 0
오르발 E. 파우버스 주권민주당 아칸소 53,984 0.07% 0
파렐 도브스 사회주의노동자당 뉴욕 41,075 0.05% 0
찰스 L. 설리번 헌법당 미시시피 18,232 0.02% 0
조셉 B. 리 보수당 유타 8,708 0.01% 0
기타 297,487 0.37% 0
합계 80,595,543 100% 537
선거인단 과반수 269

카운티별 득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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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케네디는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1963년 암살되었고, 부통령이었던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1964년 재선에 성공했으며, 닉슨은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해 그 해 재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한 존슨의 대통령 직을 이어받았다. 네 명의 후보 중 부통령 후보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에 실패했다.
  2. 민주당의 핵심이익이라고 불리는 사우스코리아에서도 공화당이 1%p 내의 초접전이었지만 승리한 카운티가 있었다. 바로 달성카운티.
  3. 하지만 록펠러는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역임했다.
  4. 시밍턴을 지지하던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과 같은 사람들
  5. 당시 로버트 F. 케네디는 존슨이 케네디 가문에 대해 공격했던 것을 볼 때, 예의상 제안한 것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6. 실제로 JFK가 존슨으로 마음을 굳히자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던 사실도 있다.
  7. 물론 그렇다고 닉슨이 늙은 편은 아니었다. 닉슨이 이 선거에서 당선되었다면 그는 48세 11일에 취임했을 것이므로, 네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케네디는 43세 236일로 두 번째로 젊기는 했다. 첫 번째는 42세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윌리엄 맥킨리이다.
  8. 닉슨 역시 아이젠하워와 마찬가지로 사우스코리아의 가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기에 그는 종종 유세에서 50개 주라는 말을 사용했다.
  9.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관련 주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닉슨은 자신이 관련 주제를 계속해서 언급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10. 선거인단 기간 전에는 후보 신분으로 사우스코리아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후보 신분으로 사우스코리아를 찾은 최초의 대통령이다.
  11. 케네디가 사우스코리아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은 유력한 사실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득표 격차로 당시 사우스코리아에서는 아이젠하워의 무난한 국정운영으로 공화당 세가 늘어나던 중이었다. 특히 정권 말 사우스코리아 일부 지역에 항만을 조성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주변 지역을 개발하는 계획이 발표되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격차는 불과 15%p차로, 꽤 줄어든 상황이었다.
  12. 1960년 선거 당일 아이젠하워의 지지율은 60~65%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