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75년 제5대 성화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로 이즈노카미 카즈타카 정부가 출범하자 이듬해인 1976년 무라야마현에서 군사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그 직후의 시민군을 카즈타카 정부가 친위대를 이용해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카즈타카 정부는 무라야마현에 대해 봉쇄령을 선포했으며 봉쇄령이 해제되는 9월 12일까지 무려 무라야마현에서 친위대와의 전투를 벌인 시민군을 포함하여 민간인 23,983명이 사망하고 42,893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시 SHK, KBC 같은 주류언론에서는 '우익의 폭동으로 인한 정당한 진압'으로 보도했으며 세간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이즈노카미 카즈타카 대통령이 서거하고 2000년에 와서야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와 당시 친위대의 작전명령서[1] 공개 덕분에 이 사건이 민간인 학살로 규정되면서 이노카미 코자부로 대통령이 피해자들과 유가족 앞에서 직접 사죄했으며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이때 이 사건의 명칭이 '8.2 반란사태'에서 '1976년 피의 대학살'로 바뀌었고 민간에서는 알게모르게 혼용되어 사용되어오다가 2007년이 되서야 '1976년 피의 대학살'이라는 명칭으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현재까지도 고령층에서는 폭동으로 여기는 측면이 강하고 히츠지다 카즈오 당시 친위대 지도자[2], 효즈 후우타 (兵頭 風詩) 친위대 최상급집단지휘관[3]을 비롯한 주동자들의 처벌은 일정수준 이루어졌으나 무엇보다도 민간인을 직접 무자비하게 학살한 하마미치 신스케(浜道\ 進佐) 당시 친위대 대령, 후카와 리쿠토 (府川 龍空翔) 당시 친위대 소령, 토쿠시게 효지로 (徳重 豹二郎) 친위대 대위를 비롯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주범들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때 수많은 여성들이 성폭행 당했는데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약 20,000명의 여성이 친위대에 의해 강간당했다.

여담

  • 하마미치 신스케(浜道\ 進佐) 당시 친위대 대령, 후카와 리쿠토 (府川 龍空翔) 당시 친위대 소령, 토쿠시게 효지로 (徳重 豹二郎) 친위대 대위는 누가 가장 민간인을 많이, 잔인하게 죽이는지, 다시말해 민간인 학살을 가지고 경쟁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모두 당연히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아야했지만, 재판부에서는 증거불충분 운운했다. 그 결과 민간인 학살을 현장에서 지휘한 죄만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그마저도 2006년 가석방되어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죄를 늬우치지 않은채 자신을 애국자로 자칭하며 살고있다.
  • 히츠지다 카즈오(未田 一乙) 당시 친위대 지도자, 효즈 후우타 (兵頭 風詩) 친위대 최상급집단지휘관은 사건이 끝나고 성화국에서 두번째로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인 '황금 대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2003년 가석방된 후 각각 2007년과 2015년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 그 외 학살에 가담했던 친위대 간부들은 학살한 민간인의 수에 따라 2계급에서 무려 5계급까지 특진을 했으며 일부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수여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들은 훈장서훈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지만 "국가내란 또는 대통령 명령이 정하는 그에 준하는 죄를 범한 자가 아니면 훈장서훈을 취소하지 아니한다."라는 상훈법 조항에 막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 2015년 8월 5일, 군 문서를 조사한 결과 친위대가 실탄 600만발 가량을 비롯해 TNT 9000kg, 권총탄 8천발 가량 등을 소모했고, 전차 등을 무라야마현에 투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물론 학살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대표적으로 작전이 참여했던 소노라 아키토(薗浦 存斗) 소령은 작전에 대해 "민간인을 해칠 수 없다"라고 항의했으며 봉쇄가 이루어지기전 꽤 많은 수의 민간인들을 무라야마현 밖으로 탈출시킨 것이 드러나면서 이등병으로 강등됨과 동시에 불명예 전역했고 이케에 스즈루(池江 志鶴) 중위와 우라사와 카타시(浦澤 堅) 중사는 지역 밖으로 탈출하는 민간인을 돕고 무라야마현의 민간인을 보호했으나 적발되어 1976년 8월 29일 총살되었다. 그 밖에도 보고서에 따르면 33명의 친위대 군인들이 민간인을 돕다가 강등과 동시에 총살되었다. 이들은 사건이 끝나고도 훨씬 지난 2017년에야 본래의 계급으로 돌아왔으며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각주

  1. 당시 작전명이 '청소(清掃)작전'이었다.
  2. "무라야마현을 청소하라. 더 이상 반동분자들을 남겨두지 마라. 남녀노소 가리지않고 청소하라. 이제 무라야마현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라는 망언을 했으며 작전을 승인했고 학살을 지휘했다.
  3. 작전계획을 설계했으며 학살을 건의했다. 또한 언론에 거짓정보를 흘려 폭동으로 보도하게끔 만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