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육군 쿠데타 모의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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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988년 중국 남서 정무위원회 운남성에서 터진 폭동을 시작으로 [[아시아 혁명]]이 시작됐으며, 전 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직면한 일본은 1989년 12월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여 공영권을 해체하게 되며, 냉전에서 패배하였다.([[대동아공영권 붕괴]])
그러다가 1988년 중국 남서 정무위원회 운남성에서 터진 폭동을 시작으로 [[아시아 혁명]]이 시작됐으며, 전 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직면한 일본은 1989년 12월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여 공영권을 해체하게 되며, 냉전에서 패배하였다.([[대동아공영권 붕괴]])


이에 1990년 [[가네무라 슌에이]]에 의해 [[대정익찬회]]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가네무라 내각, 이후에 이어진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 의해 미국과 [[아카기 조약]]의 재정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며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당시 일본 국내외에서 이러한 행보는 지지를 받았으나,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도 있었다.
이에 1990년 [[가네무라 슌에이]]에 의해 [[대정익찬회]]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가네무라 내각, 이후에 이어진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 의해 미국과 [[아카기 조약]]의 재정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며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당시 일본 국내외에서 이러한 행보는 지지를 받았으나,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도 있었다. 바로 군국주의 및 극단주의, 국가개조론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모리 쓰토무]] 소장을 위시한 육군 일각이었다.


== 계획 ==
== 계획 ==

2024년 5월 6일 (월) 19:56 판

Destiny634, 2024 - | CC-0


1996年陸軍グデタ計画事件
1996년 육군 쿠데타 계획 사건

개요

멱라수는 넘쳐흐르고

무산의 구름은 어지러이 나는데

혼탁한 세상에 우리 일어나

의분에 불타 피가 끓는다
쿠데타 세력의 문건에서 발견된 결의문. 2.26 사건 당시 황도파의 노래 청년일본의 노래의 첫 구절로, 이들이 황도파를 추종했음을 알수 있다.

1996년 5월 18일 적발된, 일본에서 당시 오부치 게이조 내각을 무너뜨리고 군사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모리 쓰토무(森務) 소장의 주도로 계획된 쿠데타 음모. 매우 구체적인 문건과 미국 침공 구상 등 거대한 계획으로 인해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들은 1996년 10월 거사해 내각총리대신 관저, 제국의회 의사당 등을 장악해 도쿄를 통제하고, 결정적으로 헤이세이 천황을 확보해 윤허를 얻고 문민 각료들과 정치인들을 모두 체포함으로서 쿠데타를 성공시킬 작정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는 헌법을 이른바 "유신 제국헌법"으로 개정하고, 내각총리대신을 호국경으로 바꾸어 모리 쓰토무 자신이 앉아 자이바츠와 케이레츠를 숙청해 생산시설을 국유화, 전국의 생산시설을 전시상태로 만들어 일본을 전쟁국가로 개조, 중국을 침공한다. 또 즉시 일미조약을 파기한 뒤 상항을 통해 미국과의 2차 전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여차하면 핵까지 사용하는 안도 포함되었다. 세계 제2의 국가가 광기의 세력에게 넘어가 그야말로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었던 쿠데타 사건.

보면 알겠지만, 계획안이 2.26 사건에서 황도파가 하려 했던 것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들은 황도파와 기타 잇키를 추종했으며, 일본이 타락한 것은 2.26 혁명이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상세

1960년대 말 호국군 전쟁을 겪고 1978년 2차 오일쇼크부터 서서히 시작된 일본의 추락은 80년대에 들어 가시화되었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경제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도 하에 버블경제(1981-1986)를 맞이하며 외관상 가장 번영해 보였으나, 실상 그 내부는 썩어 있었다.

호국군전쟁 이래 대동아공영권에서 일본의 수탈과 주권침해, 압제는 더욱 그 강도를 더했다. 그러면서도 공영권 국가들을 경제적으로나마 부유하게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자이바츠가 만들어낸 경제적 생산은 오로지 일본에 집중되었고, 대부분의 공영권 국가들은 빈국으로 살아야만 했다. 다나카가 집권한 뒤 공영권의 반발을 무마해보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그러다가 1988년 중국 남서 정무위원회 운남성에서 터진 폭동을 시작으로 아시아 혁명이 시작됐으며, 전 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직면한 일본은 1989년 12월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여 공영권을 해체하게 되며, 냉전에서 패배하였다.(대동아공영권 붕괴)

이에 1990년 가네무라 슌에이에 의해 대정익찬회가 해체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가네무라 내각, 이후에 이어진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 의해 미국과 아카기 조약의 재정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가며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나섰다. 당시 일본 국내외에서 이러한 행보는 지지를 받았으나,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세력도 있었다. 바로 군국주의 및 극단주의, 국가개조론의 성향을 가지고 있던 모리 쓰토무 소장을 위시한 육군 일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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