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M 유커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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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를 기병의 현대화로 구상한 [[헤르만 쾨지커니저]]의 의향에 따라 [[제52 흉갑기병연대 '황립 돌격차량연대' (게파르토)|제52 흉갑기병연대]]가 첫 실전 운용을 맡을 예정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병 병과의 미온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설계가 1656년 7월 종료되었음에도 [[제52 흉갑기병연대 '황립 돌격차량연대' (게파르토)|제53 흉갑기병연대]]가 첫 양산인도분을 수령한 시점음 1657년 9월 경이었다.
유커쇠의 첫 실전날은 1657년 9월 24일이었다. [[제52 흉갑기병연대 '황립 돌격차량연대' (게파르토)|제52 흉갑기병연대]]는 [[폴크스주]] 북부 숲에 주둔한 [[키르수스]] 보병을 대상으로 첫 작전기동을 실시하게 되었다. 본래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는 양측 모두 확정을 원치 않는 제한적인 국경분쟁의 양상을 띄었기에 중장비의 투입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유커쇠 투입 불과 몇 주 전 [[키르수스]]가 이러한 암묵적 합의를 깨고 구형 전선 자주포를 투입함으로써 [[게파르토 제국]] 또한 그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유커쇠의 첫 투입은 게파르토 장교단에게 인상적인 경험을 남겼다. 유커쇠의 55M 2.5qb 기관포는 열세에 몰려 투입된 전선자주포의 빈약한 보일러 철판을 찢어버렸고, 내부 탄약고의 유폭과 함께 ―유커쇠를 엄호하던 병력의 기록에 따르면― "불꽃놀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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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8일 (일) 00:57 판

 
57M 경돌격차량 유커쇠
57M Kleinsturmwagen Eucause  · 57M Eucause
종류 경돌격차량
형식명 57M Kleinsturmwagen Eucause
개발국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개발사 야고트 유한회사
체스터-볼프만 총기 주식회사
슈라프트 조병창
제작사 야고트 유한회사 ( 차체 )
슈라프트 조병창 ( 포탑 )
배치 1657년
역사
개발년도 1655년 ~ 1556년
생산기간 1657년 ~
사용국가 게파르토 게파르토 제국
사용전쟁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
생산량 260량
일반 제원
승무원 2명
길이 3.68 m
높이 1.94 m
2.14 m
중량 1.9 t
공격력
주무장 55M 25 qb (25 mm) 자동포 1문
주포개발사 체스터-볼프만 총기 주식회사
사용 포탄 25×108 qb ( 약 31×137 mm )
부무장 56M 6.3 qb (7.92 mm) 자동총 1정
기동력
엔진 야고트 수랭식 4기통 엔진 23hp
마력 23마력
서스펜션 토션 바
야지 속도 41 km/h ( 노상 )
36 km/h ( 야지 )
항속 거리 165 km
변속 전진 5단, 후진 1단
도하 사실상 불가
방어력
장갑 6~15 mm
장갑 방식 리벳접합, 전기용접

57M 경돌격차량 유커쇠(게파르토어: 57ㅔㅁ ㅋㅡㄹㅏㅣㄴㅅㅠㅌㅜㄹㅡㅁㅂㅏㄱㅔㄴ ㅠㅋㅓㅅㅚ 57엠 클라인슈투름바겐 유커쇠, 게파르토 키르수스어: 57M Kleinsturmwagen Eucause)는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 이후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가 설계·개발한 게파르토 제국의 '초소형 돌격차량(전차)'이다. 1655년 2월부터 시작된 설계는 1656년 7월 완성되었고, 이후 1657년 9월, 제52 흉갑기병연대에 최초 양산인도분이 배치되었다.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에 투입되어 비교적으로 빈약한 화력과 적은 숫자의 1658년식 전차를 사용하는 키르수스 황립육군을 상대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게파르토 제국이 처한 환경에 따른 미약한 생산량으로 인해 제52 흉갑기병연대를 포함한 일부 연대에만 배치되었고, 그마저도 생산 공장 환경에 따라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다.

1 개발

키르수스-그란치프 전쟁에서 게파르토 제국에세르 지방만을 얻은 채 고립을 맞이했다. 키르수스는 전쟁 도중 개발된 전선자주포(키르수스어: Frontpanzerartillerie 프론트판처아르틸레리)를 개량해 전차(키르수스어: Panzerkampfwagen 판처캄프바겐) 사업을 추진했으며, 게파르토 제국 또한 기갑병기 사업에 손을 댄다. 게파르토 제국 기갑차량 권위자인 헤르만 쾨지커니저 박사는 키르수스그란치프의 기갑교리가 게파르토 제국에 맞지 않다 판단, 1000년 간 포병을 바탕으로 영토 방위에 중점을 둔, 국제적으로 고립된 현시점의 게파르토 제국에 맞는 독자적인 교리를 발전시켰고, 유커쇠는 그에 맞게 개발되었다.

전차의 정의는 오늘날 다소 변형되었다. (중략) 전차란, 인간과 비슷한 전고로도 작아질 수 있으며, 소총탄, 기관총탄에 대한 방어를 제공하며, 무엇보다도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에 계산적 운용이 탁월한 차량을 이른다.

헤르만 쾨지커니저, 『전차에 주목하라 Achtung panzer』 중

헤르만 쾨지커니저슈탄다르테 사관학교의 강의교수인 본인의 위치를 살려 게파르토 제국에 맞게 정립한 '전차' 논의를 설파했고, 이는 게파르토 군사계의 뜨거운 감자로 발전했다. 헤르만 쾨지커니저의 기갑차량 설계방향은 '초소형 전차', '중장갑 전차', '자주포' 세 갈래로 나뉘어졌고, 이중 유커쇠는 '초소형 전차'의 설계방향으로 개발되었다. '초소형 전차' 기획은 '최소한의 무장', '최소한의 운용인력', '최소한의 방위력', '최소한의 크기'의 특성을 지닌 채 키르수스의 전차 혹은 전선자주포와도 제한적인 교전을 실시할 수 있음을 목표로 했다.

더 세부적인 조건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적 보병측 소총탄과 중기관총에 대한 방어가 가능할 것.
  • 2인, 많아도 3인 정도의 인원으로 운용 가능할 것.
  • 적측 보병과의 교전, 적측 소형 전차―당시 키르수스의 기갑체계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대보병용 전차 다수와 이를 보조하는 대전차용 전차를 소수 도입하는 체계로 구축되었는데, 그 중 대보병용 전차를 겨냥한 것으로 추측된다―와의 제한적인 교전을 상정할것.

해당 조건을 바탕으로 '초소형 전차' 설계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전선자주포의 주류를 차지하던 육중한 몸체와 대형 포탑, 다수의 운용인원은 최소한의 크기와 1인용 포탑, 2인의 운용인원으로 대체되었다. 이윽고 '초소형 전차'의 명칭은 다카리바고 3세에 의해 '돌격차량'(게파르토어: ㅅㅠㅌㅜㄹㅡㅁㅂㅏㄱㅔㄴ 슈투름바겐)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초기 개발 경합 결과 농업용 트랙터 설계 경험이 있던 '야고트'가 전체적인 형체 설계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른하이어제 트랙터가 원형 구조로 채택되었다. 또한 '체스터-볼프만 총기회사'이 기관총, '황제 폐하를 위한 슈라프트 병기제작국'가 화포류를 설계하였다. 포탑 생산의 경우 대구경 화기 생산이 익숙한 슈라프트 병기국이 맡았고, 특히 기관총은 당시 게파르토군 신형 기관총 도입 사업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같이 계획된 '중장갑 전차'와 '자주포' 사업이 게파르토 제국의 예산 부족으로 난항을 겪는 와중에도 '초소형 전차' 개발은 순항하였다.

2 실전

전차를 기병의 현대화로 구상한 헤르만 쾨지커니저의 의향에 따라 제52 흉갑기병연대가 첫 실전 운용을 맡을 예정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기병 병과의 미온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설계가 1656년 7월 종료되었음에도 제53 흉갑기병연대가 첫 양산인도분을 수령한 시점음 1657년 9월 경이었다.

유커쇠의 첫 실전날은 1657년 9월 24일이었다. 제52 흉갑기병연대폴크스주 북부 숲에 주둔한 키르수스 보병을 대상으로 첫 작전기동을 실시하게 되었다. 본래 게파르토-키르수스 국경전투는 양측 모두 확정을 원치 않는 제한적인 국경분쟁의 양상을 띄었기에 중장비의 투입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 유커쇠 투입 불과 몇 주 전 키르수스가 이러한 암묵적 합의를 깨고 구형 전선 자주포를 투입함으로써 게파르토 제국 또한 그에 맞출 필요가 있었다.

유커쇠의 첫 투입은 게파르토 장교단에게 인상적인 경험을 남겼다. 유커쇠의 55M 2.5qb 기관포는 열세에 몰려 투입된 전선자주포의 빈약한 보일러 철판을 찢어버렸고, 내부 탄약고의 유폭과 함께 ―유커쇠를 엄호하던 병력의 기록에 따르면― "불꽃놀이"를 일으켰다.

...도로변에서 우군이 보병대를 이용하여 접근하리라 판단한 채 수풀 속에 숨어있던 적군 보병대는 각 단차의 화력에 궤멸되었다. ... 적을 색적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적군의 놋쇠 뿔이 조금이라도 빛나면, 소대장차가 곧장 그 위치로 포탑을 돌렸다. 대개 그 직후에 수풀이 붉은 색으로 물들거나, 살점이 튀겼다. ... 우리는 본대로 복귀했고, 뒤이어 우릴 엄호한 아인종 연대들이 바닥을 기어다니거나 목숨을 구걸하는 항복자들을 수습해 산채로 불태웠다.

제52 흉갑기병연대 소속 ' 드너시 게자' 대위의 작전보고서 중
3 포병의 관할권 주장
4 도색체계
5 생산
5-1 기에르 공장 초기 생산분
5-2 체케데모어 공장 생산품
6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