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20군 (서태평양 연대기)

개요

강북20군은 문종 6년(1456년) 제4차 요동정벌로부터 시작해 성종 22년(1503년) 오경부 설치까지 근 50년간의 원정을 통해 조선이 확보한 압록·두만강 이북 영토이다. 크게 압록강 북서쪽, 요하 동쪽의 옛 요동도지휘사사 산하 13위 지역에 설치된 강서12군, 압록강 중상류 지역에 설치된 서북외(外)5군, 두만강 동안 지역에 설치된 동북외(外)3진등으로 구성되어 통칭 20군으로 불린다. 그러나 후술할 바와 같이 모든 행정구역이 군급이었던 것은 아니다.

혹은 강외20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조선 당대에는 '강북'이 더 많이 쓰였지만 근대 이후 국내 도시들의 성장으로 '강북'으로 지칭되는 대상이 늘어난 반면,[1] 오히려 '강외'라는 용법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면서[2] 양강 이북 영토를 지칭하는데는 '강외'의 빈도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따라서 이 문서도 '강외20군'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혹은 평안·함경도를 '내북도'(內北道), 요동도를 '외북도'(外北道)라 부르는 등의 용법도 사용되는 등 이들 영토를 지칭하는데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쓰였는데, 이는 강서와 외서북이 최종적으로 요동도라는 단일한 행정구역으로 재편된 데 반해, 동북방면 강외영토는 독립적인 광역행정구역이 되지 못하고 함경도가 확장되는 형식이었던데서 기인한다.

역사

내(內)4군·내(內)6진 개척

조선은 과거 고려 영토에서 이탈한 바 있었던 동북면 지역에서 발흥했기 때문에, 북진은 곧 왕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우는 사업이었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한 고려만큼이나 북방영토 개척에 적극적이었다. 비록 국력 문제로 제2차 요동정벌 도중에 칼끝을 돌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창하기는 했으나, 이성계와 정도전은 다시 제3차 요동정벌을 추진하기도 했다. 요동정벌을 앞장서서 추진한 정도전이 죽은 이후로는 서로에게 우호적인 영락제와 태종이 각각 집권하면서 요동 방면으로의 진출은 관심에서 멀어졌으나, 여진족에게 막강한 무력과 카리스마로 인정받아 '대추장'으로 군림했던 이성계의 사후 여진족의 변경 침탈이 점차 심해지면서 마침내 세종 대 압록-두만강 자연국경선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서북 4군·동북 6진 개척이 추진되었다. 이들 지역은 이후의 강북영토와 구분하여 통칭 '내4군'과 '내6진'으로 부른다.

강서12군

조선 초기까지는 '요동'으로 칭했으나, 정작 조선이 요동 진출에 본격적으로 나선 15세기 후반으로 가면 조선령만 따로 떼어내 '강서'로 칭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이는 조선이 군사적으로 충돌 가능성이 높은 후원은 물론이고, 명목상 요동의 종주권을 가진 남명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압록강 이서지역의 버려진 땅들을 부득이하게 위무할 뿐'이라는 명분으로 강서를 강조한 것이다. 이후 조선이 가리키는 '요동'은 엉뚱하게도 남은 요동도사의 영역, 즉 요하 이서지역(요서)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가, 강서영토를 상실한 한국이 건국된 이후로는 다시 원래대로 요하 이동지역을 의미하는 말로 환원되었다.

4군6진의 설치 자체는 세종 당대에 완수되었으나, 개척사업 초반인 1436년, 천보의 변 (서태평양 연대기)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발생했다. 북방개척의 경쟁자인 동시에 건주위 견제의 파트너이기도 했던 북명이 무너지면서, 명이 요동에 설치한 요동총병관은 명 본국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붕 떠버린 상태가 된 것이었다. 조선인과 발해인이 많았던 지역 특성상 일각에서는 조선 귀부를 주장하기도 했으나, 요동총병 조의(曹義)는 산해관과 압록강에 의지해 남명에 신종하며 자립을 택했고 조선 역시 국경 안정을 위해 이에 호응하며 일부 장수들이 조선에 귀부하려는 움직임도 거절할 정도였다.

이런 기조가 변화한 것은 문종대 들어서였다. 조선은 세종 말기 내내 요동을 극력 지원해왔으나, 건주위가 의주-요양 가도를 침범, 점거하여 교통이 끊어지고 요양성이 포위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문종은 직접 4만의 군사를 동원해 요양가도의 여진족을 섬멸하며 진군하는 제4차 요동정벌(서태평양 연대기)을 단행해야 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전시체제는 신종 2년(1467년) 정건주위로 이만주를 참살하고 건주본위를 조선이 영토로 흡수하여 서북4군이 서북7군으로 개편되는 1472년까지 지속되었고, 더 이상 강변방위를 요동에게만 맡길 수 없다고 인식한 조선은 1457년 요양 입성 후 조선과 인접한 장백산맥 이남의 정료좌위와 금주위를 넘겨받아 1458년 정료좌위 지역의 의주 대안에 진강군(鎭江郡)을 설치했다. 이후 1461년 정료좌위 소재지에 봉황군(鳳凰郡)을, 1462년 금주위 지역에 금성군(金城郡)을 설치함으로써 문종대 강서3군이 형성되었으며 본격적으로 '강서'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종(이홍위) 시기에는 주로 압록강 중상류의 건주3위에 대한 정벌과 영토화에 주력했으나, 1467년 건주위의 멸망과 1472년 건주3군의 설치가 완료되면서 조선은 다시금 요동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요동은 올량합의 지속적인 침공에 철령위가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었고, 마침 조상이 고려계였던 철령위지휘첨사 이춘미(李春美)는 조선에 귀부와 함께 원군을 청했다. 요동의 최전선이었던 철령위의 편입은 조선이 본격적으로 올량합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조정 내에서도 의론이 분분한 가운데, 신종은 결국 제3차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태조의 유지이자 요동 조선인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춘미의 귀부를 받아들여 철령위와 삼만위를 접수하고, 1478년 철령군(鐵嶺郡)과 개원군(開原郡)을 설치했다.

후원은 조선의 철령위 병합을 요동 전역에 대한 병탄 의지로 받아들여 강력하게 반발했고, 신종이 후사 없이 사망(1481년)한 직후 조카 잘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 후원의 타이시 에센이 요동을 전격 침공하면서 조원전쟁이 발발했다.(1482년) 그러나 후원의 침공은 요하 방어선에서 저지되었고, 요동 침공의 실패로 에센이 실각한 후 후원 조정이 지리한 내분에 휩싸이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요동 경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진행중이던 1482년 요양성에 요양부(遼陽府)를 설치했고, 1483년 복주위 자리에 복성군(復城郡)을, 1485년 심양위 영역에 심양군(深陽郡)을, 1486년 해주위 자리에 해성군(海城郡)을 설치했다. 이어 1491년 금성군 도서부를 떼어 장산현(長山縣)을, 요주목 동쪽을 떼어 요산현(遼山縣)을 설치하고, 1496년에는 요동도(遼佟道)가 설치되는 동시에 심양군 동쪽에 무천현(撫川縣)이, 진강군과 금성군의 일부를 떼어 장천현(庄川縣)이 독립하면서 강서 전역에 총 1부 7군 4현 체제가 완성되었다.

강서천리장성의 서쪽 구간인 개원-해성 구간(통칭 요하장성)은 조원전쟁 이후 1483년 수축에 착수해 1485년 완성했다.

서북외(外)5군

1467년, 신종은 거듭되는 건주위의 도발과 침공, 특히 의요가도와 내4군에 대한 위협을 원천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유응부, 성승, 어유소, 윤필상, 강순 등에게 병력 3만을 주어 건주위를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근거지인 파저강 유역을 비우고 달아나기를 반복했던 건주지휘 이만주는 이전과 달리 요동과 강계 양 방면에서 조여오는 조선군의 기습포위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허투아라에서 참살되었다. 과거와 달리 강북 영토의 확장을 결심한 조선은 건주위 평정과 함께 1467년 건주군(建州郡→1481년 혁성군赫城郡으로 개칭), 1471년 동강군(佟江郡), 1472년 여성군(麗城郡)의 3군을 설치했다. 이후 1499년 갑산 대안의 압록강 상류지역에 함경도 백산현(白山縣)을 설치하는 동시에 혁성군 남부 옛 우라산성 일대를 떼어 본성군(本城郡)을 설치하고, 동강군을 동주목(佟州牧)로 승격시켜 1부 3군 1현의 외5군 체제가 완성되었다.

강서천리장성의 동쪽 구간인 개원-임강진 구간(통칭 건주장성)은 1479년 공사를 시작해 1486년 완공되었다.

동북외(外)3진

이처럼 압록강 너머의 요동과 건주에 대해 무력정벌과 행정구역 설치가 지속되는 동안, 동북지방에서는 대체로 성저야인(城底野人)들의 협조 하에 대규모 무력충돌은 없이 안정적인 시기가 지속되었다. 특히 조선이 강서를 점유하면서 과거 조선 견제를 위해 강외 여진부족들을 후원해주던 명 요동도사나 요동과 긴밀하게 교류하던 건주위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자연히 여진 부족들은 생존을 위해 조선에 협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이 지속되는 서북전역으로 육진 지역에 대한 통제권이 약화, 재확립이 필요하다고 여긴 조선 조정은 보다 방어와 정착이 용이하여 육진의 자립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두만강 동안 훈춘과 야춘 지역의 개척을 추진하게 되었다.[3] 1494년 야춘 개척을 건의한 여자신을 이 지역에 파견, 1495년까지 해관진(海官鎭), 오동진(斡東鎭), 권하진(圈河鎭)의 3개 진을 설치하였다. 이 중 해관진은 1498년 책성부(柵城府)로 승격되었고, 1501년 권하진을 권하군(圈河郡)으로, 1503년 오동진을 오경부(斡慶府)로 승격하여 외3진 체제가 완성되었다. 북장성은 1494년 3진 건설과 함께 시작하여 1496년 완공했다.

영향

이렇게 반세기에 걸친 군사력 투사를 통해 확보한 강북 영토는 1세기에 걸쳐 '고토수복'을 이룬 조선인들의 자부심으로 남았지만, 동시에 영토 유지를 위한 막대한 부담을 야기했다. 무엇보다 두 강을 통해 여진 기병을 방어할 수 있었던 내4군 및 내6진과 달리, 이들 지역은 산줄기에 의지해 방어해야 했고, 조선은 중원 전토를 통일하여 부유했던 명과 같이 교역권 등으로 여진을 제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강북 영토의 방위를 위해 대규모 장성 축조 및 도로 건설이 수반되었다. 요하변 구간은 고구려, 명의 성곽들을 활용하여 빠르게 건설할 수 있었으나, 첩첩산중을 뚫고 자재와 인력을 수송해야 했던 건주장성의 건설은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그러고도 올량합을 위시한 여진의 위협은 계속되어, 성종과 의종 시기 내내 개원부의 포기 여부를 두고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고 결국 혜종5년(1524년)에 개원부를 폐지한데 이어 혜종9년(1528년)에는 철령군도 철령진으로 격하하고 심양도호부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그나마도 백산장성은 끝내 계획만 한 채 건설되지 못했고, 하성 연간에 재차 시도했으나 막 착수하려는 찰나에 15년 전쟁 (서태평양 연대기)이 터져버렸다.

조선인들은 조선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압북(鴨北)지방에서 벼농사를 지어보려 무수히 노력했으나 압록강 연안을 벗어나지 못했고, 강북에서의 농사는 쌀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보리나 그나마도 조선인들은 재배에 익숙하지 않은 밀에 의존할수밖에 없었다. 압북에서도 잘 자라는 호밀 재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발효빵 기술이 발달한 유럽에서도 사람 먹을 게 못된다고 천대받던 곡물이 쌀 지상주의자(...) 조선인들 입맛에 맞을 턱도 없었고, 발효를 포기하고 만들어볼만한 국수나 만두, 난 계열로 만들기엔 호밀은 난이도가 너무 높아 주로 동물 사료로 쓰였다. 강북 방위에 들어가는 비용은 양호(兩湖; 호서/충청도와 호남/전라도)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으로 충당해야 했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서해안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개간과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또한 서해안 조운로 최대의 난코스였던 안흥량을 우회하기 위해 굴포운하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이는 한대에 들어와 개통되어 한반도 제2의 섬인 태안도가 탄생했다. 반대편에서는 대동강의 지류인 재령강을 해주만이나 예성강까지 연결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쪽은 끝내 실패했다.

성종대 조선은 이렇게 확보한 북방영토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개혁이 잇따랐다.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의 건국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애민주의와 이에 기초한 소극재정 기조가 퇴조하고, 국방력 강화를 위한 세제 및 군제개혁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전분6등법이나 연분9등법 등 농민 부담을 경감해주기 위해 도입된 각종 제도들은 전분3등법과 연분3등법으로 대폭 손질되었고, 연분9등법 체제에서 하하년 4두였던 법정 최저부과선이 연분3등법에서는 9등법의 중하년에 근접한 9두로 껑충 뛰어오르는 등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4] 이로 인한 양민층의 불만이 가중되자 지배층의 고통분담을 통해 불만을 달래려는 조치로 관수관급제를 실시하여 집권층에 대한 토지분배를 원천 차단하고 균역법 시행으로 사족층에게도 군비부담을 명문화했으나, 이러한 조치들이 제대로 정착되기도 전에 성종이 사망하고 의종(이융)이 즉위하여 성종대 긴축상태에 들어간 왕실 재정을 무제한으로 확대하고 내수사직계제를 통해 조세제도를 교란시키면서 부담은 한층 가중되었다. 그 결과가 위에서 보듯 강서 최북단 거점인 개원과 철령의 폐군이었다.

그러나 개원과 철령이 폐군되는 상황에서도 강변을 중심으로 강북 인구는 차츰 증가하였다. 강내가 배수임산의 응달이었던 데 반해 강외는 배산임수의 양달이라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더 나았고, 북명의 붕괴로 조공무역 체제가 퇴조함에 따라 정책적으로 국내 자원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요주의 철광이나 무천의 탄광 등 토지가 없는 노동력을 흡수할만한 일자리들이 여럿 생겼기 때문이다. 강내에서도 운산 금광이나 단천 연광 등 조선반도 북부지방의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었고, 세문신대만 해도 삼남의 인구를 다소 강제적인 방법까지 동원해가며 북방으로 사민하느라 곯머리를 앓았지만, 하성대에 가면 오히려 왜적의 침입을 막아야 하는데 삼남의 정병이 너무 부족하다고 비변사에서 하소연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며 이는 15년 전쟁 초기 경상도 방면의 빠른 전선 붕괴에도 크게 일조했다. 이런 인구증가에 힘입어 1536년 진강군 동부를 관천현(寬川縣)으로, 1544년 요주부 남부를 안산부(鞍山府)로 분리하는 등 행정구역의 분화와 신설이 계속되었으나, 안산부 이후로 군현급 행정구역은 더 이상 신설되지 않았다. 강북에 대한 마지막 인구조사는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직후인 1585년 실시되었고, 20개 군현에 걸쳐 총 92만명으로 집계되었다.

내외북도의 활발한 자원개발 역시 북방 방위를 위한 재원 확보가 주된 목적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자원들은 무로마치 막부가 제 구실을 하던 14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주로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직접 거래되었으나,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의 내전이 심화되면서 주 거래처는 남명 및 큐슈지역을 중계해줄 수 있는 이어로 옮겨갔다. 이어 왕가는 조선, 정확히는 제주 탐라성주 가계였기 때문에 제주는 조선 본토와 이어를 연결하는 중계지로 상당한 영화를 누렸고, 이 때 구축된 상업 인프라와 제주인들의 국제 상업네트워크는 15년 전쟁 초기 삼도수군이 여수를 떠나 제주로 옮겨가고, 최종적으로 이어 평정에 나서게 되는 주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쓰시마에 비해 거리가 멀었던 제주 및 이어 사이를 원활하게 오가기 위해 조선 연안 환경에 적합했던 판옥선 일변도의 수운 환경에서 탈피하여 이어를 통해 주로 복선(福船) 계열 첨저선 건조기술을 도입했고, 을묘왜변 이후 여기에 기반한 원양전투선 개발에 열을 올려 이른바 원수선(遠守船) 혹은 수선(守船)이라 불린 대형 전투선이 등장했다. 등장 초기에는 제주 남방 해역에서 출몰하는 해적들을 막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15년 전쟁기에 이르면 이순신이 삼도수군을 이끌어 이어와 주호를 평정하고 조선반도 수복에 나서 최종적으로 한국을 건국할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 되었다.

상실

그러나 이렇게 조선의 변화를 이끈 강북영토의 상실은 매우 급작스러웠다. 1583~1584년 사이 니탕개, 아하이 장긴 등이 북방에서 연이어 일으킨 여러 여진족 반란을 진압한 하성주는 강북의 통제권 회복을 도모하며 1587년 대진제국(大辰帝國)을 선포하고, 남방에서의 왜침 경고에도 불구하고 해서여진에 대한 정벌을 추진하며 1590년에는 심양 이어를 단행했다.[5] 그러나 여허부 평정이 본궤도에 오를 시점이었던 1592년 음력 4월, 결국 예고되었던 일본의 침공으로 15년 전쟁 (서태평양 연대기)이 발발했고, 하성주와 강서군은 여허부 평정을 목전에 두고 급하게 철수해야 했다.[6]

하성주는 당초 일본의 침공을 보고받자 남도에서 막을 수 있으리라 호언장담했고, 실제로 조정의 판단도 당장은 남부에 병력이 부족하지만 황제가 거느린 강서의 기병만 내려오면 한성 방위는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성주는 이를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친위 전력이라 할 수 있는 강서군을 남도 전장에 파견하는 것도, 그렇다고 본인이 강서군과 함께 한성으로 복귀하는 것도 모두 거부하는 상식 밖의 행보를 보였다. 결국 1592년 5월 한성이 함락되자 하성주는 마지못해 강서남병사 조승훈에게 5천의 병력을 주어 강내로 파견하였으나, 이 강서군 선발대가 황주 전투에서 대패당하고 평양 함락이 초읽기에 들어가고, 강서군의 강내 출병 소식을 들은 여허부가 다시 개원을 공격해 함락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하성주는 남명 망명이라는 초유의 선택을 감행했다.

평양을 상실한 진 조정은 의주를 거쳐 1592년 7월 20일 심양에 들어왔으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황제가 모든 걸 내팽개치고 외국으로 도주해 텅 비어버린 심양행궁의 정전이었다. 강서군은 조정에 우선 지휘능력이 수준이하였던 신립을 도지휘사에서 해임해줄 것을 요구했고, 조정은 신립의 해임은 수용했으나 후임 도지휘사의 임명을 두고는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문제는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가, 태자도 책봉하지 않은 채로 도망쳐버린데다가, 적장자도 없는 상태에서 그나마 있는 서황자들까지 각 도로 분산시켜놓아 딱히 조정의 의견을 모아 즉위시킬 대안도 없었다.[7] 결국 강서군은 여허부의 침공과 북원의 위협을 구실로 무능한 조정 간신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미명 하에 1592년 8월 3일 이성량을 강서도지휘사로 재추대했고, 여기에 하성주의 이어 이후 가중되는 전비부담에 시달리던 강서인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하면서 조정 신료들은 강서군의 반란을 피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이후 1593년 5월 12일 이성량이 심양행궁에서 대요국(大遼國)을 선포하고 국왕으로 즉위하니 이것이 강서영토의 최후였다. 다만 함경도 소속이었던 백산현이나 외3진은 애초부터 강서군의 통제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란에도 여전히 진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이후 15년 전쟁을 종결하고 조선반도를 수복, 새 왕조를 개창한 대한제국 (서태평양 연대기)은 국초 조선을 노리고 남하하는 후요를 막아내며 압록강 국경선을 지켜냈으나, 강서영토를 회복하는데는 무관심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15년에 걸친 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되고 국력이 고갈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강서에 비해 농업생산성 측면에서든 상업거점으로든 훨씬 풍요로운 이어가 한국의 강역으로 흡수되었고, 한국을 건국한 주 세력이 진 삼도수군과 이어의 탐라계 후손들이었기 때문에 남방에서 축적한 부를 굳이 북방에서 소진하는 것을 꺼렸다. 대신 강서의 풍부한 자원과 조선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울타리로써의 역할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고, 이를 위해 건주여진이 건국한 후금을 후원하여 눈엣가시인 후요를 멸망시키고 이들의 입관을 도와 관외를 무인지대화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1. 특히 1881년 평도대교가 개통된 이후로 '강북'이라고 하면 보통 경강 북안의 평도 본도심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2. '강외'에서 외(外)를 판정하는 기준은 해당 지역의 주성(主城)이다. 즉 지역 관아 소재지를 기준으로 하여 강을 건너기 전까지가 강내(江內), 강을 건넌 지역이 강외(江外)이다. 전근대 동양의 방위표기는 지방의 좌우, 상하 역시 군주가 있는 수도를 기준으로 하였고, 이런 절대적이지 않은 지리 인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동과 표기에 정확성이 강조된 근대에 들어오면서 사장되어갔다.
  3. 목조 이안사가 정착했던 오동(斡東)을 확실한 조선 강역으로 편입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던 목적도 있었다.
  4. 이는 수령들이 매번 수확량을 하하로 보고하면서 조세수입이 바닥을 친 탓이 컸다. 신종대까지는 자신이 직접 보고 자란 조부 세종대에 확립된 9등법 체제를 어떻게든 끌고 가보려 했지만, 도저히 답이 안나오자 결국 세종의 증조손이었던 성종은 이걸 포기해버린 것.
  5. 천도는 아니었고, 종묘, 사직과 조정은 한성에 남겨둔 채 황제만 심양행궁으로 이어하는 형식이었다. 대신 심양부는 이른바 행도(行都)로 대우받아 개성 이후 조선의 두번째 유수부가 되었다. 이후 심양행궁은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심양으로 천도하며 개조 및 확장을 거쳐 묵던 황궁으로 쓰였다.
  6. 여허부 정벌은 원래 1591년 내로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문제는 하성주가 그 특유의 의심병 기질로 좀 전진했다 싶으면 작전에 제동을 걸어댄 데다가, 1591년에는 아예 강서도지휘사 이성량을 부패 혐의로 해임시키고 대부대 지휘역량은 떨어지는 신립으로 대체하면서 강서군의 통제 자체에도 애를 먹은 것이었다. 게다가 하성주는 말이 해서 친정이었지 정작 심양 이어 이후에는 그나마 영토 최전방이라 할 철령진까지도 가보지 않은 채 그저 심양에서만 모든 지시를 하달했다. 사실 하성주가 조정의 반대에도 굳이 심양 이어와 해서 친정을 결정한 데에는 이성량을 중심으로 하는 강서군의 군벌화를 막는 것도 있었지만, 이런 행보는 결과적으로 해서 친정도, 남부 방위도 모조리 실패해버리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7. 가장 인망이 높았던 광친왕 이흔은 개전 초기 남한강 방어선을 이끌었다가 패배한 후, 아버지 하성주에게 패전의 모든 책임을 전가당하며 황명으로 자진하고 말았으며, 직후 하성주는 인비 김씨의 아들 신친왕을 태자로 책봉한다는 조서를 내렸으나 조서를 받기도 전에 심양으로 향하는 피란길에서 병사해버렸다. 임친왕, 순친왕은 하성주의 명으로 강원도와 함경도 등으로 파견되었는데, 하도 행패가 심해서 조선인들이 참다참다 왜군에게 잡아 넘길 정도의 막장들이었고, 정친왕은 아예 건주 여진인들이 잡아서 죽인다고 쫓아다녀 전쟁 내내 피해다니다가 아예 강내로 도망쳐 왜군에게 의탁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