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선에서는 성균관의 청금복이 교복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청금복은 1411년(태종 11년) 6월에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 때의 청금복은 '청금난삼'을 의미했다. 세종 때는 '흑령+유건' 조합이었다고 하며, 성종 8년 경국대전에 '성균관 유생은 청금단령을 입는다'라고 명시되었다. 명종 때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으로 변경되었다가 선조 때에는 '벽색 옷'이라 하는데, 태종 때의 청금난삼으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에 빠진 성균관을 본 영조가 "가벼운 일에는 홍단령을, 공식 행사나 재례 때에는 청단령을 입고, 더욱 중요한 일에는 흑단령을 입도록 하라"고 재정비했다. 즉, 성균관 스캔들은 복식고증 오류라는 얘기다. 청금복은 중국 시경의 한 구절인 '靑靑子衿 悠悠我心(청청자금 유유아심)'에서 유래되었다.

칭제건원으로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인 교육제도 개편 정책의 일환으로 제국의 인가하에 등장한 새로운 고등교육기관들에서 서구식 복장의 교복이 등장하였다. 교복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854년(철종 5년) 설립된 조선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1]의 블레이저 교복을 들 수 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양재옥 부인은, 블레이저 상의에 자홍색 옷감으로 만든 치마를 지어 소녀들에게 단체복으로 입혔다. 그러다가 곧 검은 블레이저 자켓과 흰 와이셔츠, 검정 교복 치마로 이루어진 교복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 양식이 쭉 이어진다. 이 서구식 차림은 당대 새로이 등장한 계층인 '여학생' 및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이후 고등교육기관의 남학생들 또한 성차별 논란이 일어 여학생과 비슷한 상의에 검은 교복 바지로 이루어진 교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복은 약간의 변형을 거쳐 지금의 중·고등학교 교복으로 자리잡았다.

  1. 이화제대의 전신.